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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근의 고전환담古傳幻談

백제 개로왕傳

어차피 인생은 바둑 한판

  • 윤채근 단국대 교수

백제 개로왕傳

백제 의자왕이 일본 왕실에 선물했다고 알려진 한반도 고유의 재래식 바둑판의 복원품. [한성백제박물관 제공]

백제 의자왕이 일본 왕실에 선물했다고 알려진 한반도 고유의 재래식 바둑판의 복원품. [한성백제박물관 제공]

좌하변에 집을 짓고 수성전을 펼치던 도림은 외벽을 두껍게 쌓으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견고하게 진행되는 그의 행마엔 섣불리 중원으로 진출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바둑판 중앙에 함정을 파두고 현란하게 상대를 유인하던 개로왕은 점점 지쳐갔다. 대충 피아의 집 크기를 비교해본 왕이 부아가 치솟아 물었다. 

“이봐, 도림. 승패를 짓지 않을 셈인가? 거기 웅크리고만 있으면 지진 않겠지만 이길 수도 없을 텐데?” 

팔짱을 낀 도림이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요거이 고구려 바둑입네다.” 

상대를 노려본 왕이 한숨을 내쉰 뒤 마지막 묘수를 꺼내 들었다. 우상변에 가짜 집을 짓기 시작한 것이다. 비록 가짜지만 이를 불안히 여긴 도림이 덥석 싸움에 뛰어든다면 이를 되받아치며 중앙 집을 키울 것이요, 혹시 이를 기만책으로 의심해 좌하변에 스스로를 가둔다면 마음껏 진짜 집을 만들어 세 집 차로 이길 수 있었다. 상대가 집을 지키건 밖으로 나오건 우상변 전투의 승자는 왕이었다.



망하는 바둑

바둑판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도림이 흑돌을 집어 착수하려다 말고 왕에게 물었다. 

“대왕께선 바둑을 뭐라 생각하십네까?” 

어리둥절해진 개로왕이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인생 아닐까?” 

피식 웃음기를 띤 도림이 정색하고 말했다. 

“고거이 바로 백제 바둑이고 망하는 바둑이 아니갔습네까?” 

눈썹을 바르르 떤 개로왕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도림. 내 너와 두 해를 넘겨 바둑으로 겨뤘지만 신통하게도 이겨본 적이 없다. 항상 네가 반 집이나 한 집 차로 이겨왔지. 그게 너와 나의 타고난 운과 연마한 실력 차이다. 바둑에 고구려 바둑, 백제 바둑이 따로 있겠느냐? 운과 실력이야말로 인생의 진미일진대 어찌 그로써 운행되는 바둑이 백제만의 것이겠으며 또한 하필 망하기만 하겠느냐? 희언일랑 멈추고 빨리 다음 수를 두거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도림이 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말이 아입네다. 소승 얘길 함 찬찬히 들어보시갔습네까?” 

“어디 들어보자. 궁지에 몰려 시간 벌려는 수작은 아니겠지?” 

“뎐혀! 대왕께서 바둑을 인생이라 보시는 거, 고거이 실수라는 겁네다. 바둑이 어째서 인생입네까? 바둑은 놀이고 그저 내기 아니갔습네까? 고구려에선 기냥 기케 알고 재미나게 노는데, 백제 사람들은 너무 몰두해 패가망신까지 간다 이말입네다. 기러케 승패에 심하게 집착하니 또 필패한다 그말이디요.” 

갑자기 싸늘한 표정이 된 개로왕이 몸을 쭉 펴고 도림을 한참 응시했다. 문밖을 지키던 시종을 부른 왕이 박하 달인 물을 내오게 했다. 먼저 한 모금 입에 머금은 왕은 마치 바둑판 내려다보듯 도림의 얼굴을 훑어보다 천천히 입을 뗐다. 

“내가 네 녀석 정체를 모를 줄 아느냐?”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도림이 낮은 음성으로 되물었다. 

“알고 계셨습네까? 언제부터?” 

“네 놈이 우리 백제에 귀순할 때부터! 고구려왕이 어떤 자더냐? 백제를 못 먹어 안달 난 자 아니더냐? 승려들을 몰래 내려보내 우리 사정을 밀탐하고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 왜 여태 살려두신 겁네까?” 

“살려둔 게 아니다. 넌 벌써 죽은 몸이었다. 너 자신만 모르고 있었을 뿐.” 

“소승을 조롱하시려면 고딴 거이 맘껏 하시라요. 이미 생사를 초월한 몸, 무에가 두렵갔시요?”

“이 판에서 지면 넌 죽는다”

도미부인 상상도. [충남 보령시 제공]

도미부인 상상도. [충남 보령시 제공]

박하차를 다시 잔 가득 따라 꿀꺽꿀꺽 들이켠 왕이 호탕하게 웃고 나서 말했다. 

“두 해 전, 너와 첫 판을 둘 때 결심했다. 바둑으로 날 이기는 한 살려두기로. 그러니까 넌 생사를 오가며 목숨을 건 채 바둑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어디 대답해보거라. 이런 바둑이 인생이 아니고 그저 내기더냐?” 

침묵에 빠진 도림이 뭐라 대답하려다 멈추고 바둑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왕이 다시 물었다. 

“이 판에서 지면 넌 죽는다. 어디 살길이 보이느냐?” 

백돌과 흑돌 사이에서 살길을 찾으려 분투하던 도림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죽을 길만 보입네다. 고럼 소승 뒈지기 전에 뭐 하나만 묻갔시요.” 

“묻기 전에 이것부터 확실히 하자. 돌을 던진 거냐? 진 걸 인정한 거지?” 

흑돌을 쥐고 잠시 망설이던 도림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죽을 길만 있다고 했디 졌다고는 아직 아이 했습네다.” 

잔뜩 움켜쥔 손을 부르르 떨던 왕이 안석 뒤로 물러나 앉으며 말했다. 

“묻고 싶은 게 뭐냐?” 

“도미라고…혹 생각나십네까? 한 팔구 년 전 대왕과 큰 내기를 했다던데.” 

눈을 지그시 감은 왕이 한참 동안 좌정한 채 말이 없었다. 모기만 한 목소리로 다라니 주문을 외던 왕이 눈을 뜨며 대답했다. 

“생각 안 날 리 없지. 내게 쓰라린 패배를 안겼던 이곳 위례성민이다.” 

한강 남쪽에 자리 잡은 백제 수도 위례성은 편호(編戶)로 등록된 백성만 5만이 넘는 대읍이었다. 그 대처 여성들 가운데서도 미모로 명성이 자자했던 도미의 처 을쑥불이는 어느 날 저녁 난데없이 왕의 방문을 받았다. 왕은 시종과 무사들을 집 밖으로 물리더니 을쑥불이를 침대로 밀어붙이며 말했다. 

“도미하고 내기를 해 너를 땄다. 궁으로 데려갈 테니 어서 복종하지 못하겠느냐?” 

을쑥불이는 꾀를 내 목욕부터 하겠다며 방 밖으로 뛰쳐나왔다. 곧바로 옆집 노비에게 달려간 그녀가 애원하며 말했다. 

“왕이 날 겁탈하려 한다. 비록 지엄한 왕이라지만 나도 지아비가 있는 어엿한 성민이다. 도미가 궁궐에 불려가 모함에 빠진 듯한데 그이는 절대 지어미를 팔 사람이 아니다. 도와다오.” 

왕은 그날 밤 어둠 속에서 을쑥불이로 분장한 노비의 천침(薦枕)을 받았다. 이 순진한 기만행위는 아침이 되자마자 바로 발각 났고 진짜 을쑥불이를 자신 앞에 데려오게 한 왕이 희한한 말을 시작했다. 

“실은 난 가짜 왕이다. 너의 미모에 대해 전해 들으신 진짜 왕께서 도미를 불러 내기를 하셨다. 가짜 왕을 보내 부귀영화로 꾀었을 때 네가 넘어올지 안 넘어올지 시험하는 내기였다. 자고로 가난한 미녀는 부호에게 약한 법인데 넌 아니로구나. 왕께서 지셨다.”

지아비의 눈

서울시가 광나루한강공원에 ‘도미부인 설화’를 배경으로 조성한 테마 공간. [서울시 제공]

서울시가 광나루한강공원에 ‘도미부인 설화’를 배경으로 조성한 테마 공간. [서울시 제공]

을쑥불이는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가짜 왕이 궁으로 돌아가고 하루가 지나서도 남편 도미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다음 날 그녀는 궁에서 보낸 관인들 손에 이끌려 입궐해야만 했다. 그녀를 마주한 왕은 이렇게 말했다. 

“저번 내기에선 내가 졌다. 하지만 진짜 내기는 지금부터다. 자, 선택해봐라. 내게 몸을 허락하겠느냐, 아니면 네 지아비 두 눈을 포기하겠느냐? 몸만 준다면 너희 부부를 궁에서 살게 해줄 것이나 만약 거부한다면 넌 장님의 지어미가 될 것이다.”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던 을쑥불이가 대답했다. 

“제 몸을 가지신다는 건 첩 삼으시겠다는 뜻 아닌가요? 그렇다면 저희 부부를 궁에 함께 들이신다한들 그게 무슨 의미 있겠어요? 두 눈이 있어도 서로 못 보긴 매한가지 아니겠어요? 차라리 도미 눈을 포기하겠나이다. 저희 부부 나란히 소경이 돼 더불어 살고지고 할 것입니다.” 

을쑥불이를 노려보던 개로왕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한낱 평민 주제에 그깟 몸뚱이가 뭐라고 내게 거역하느냐? 그냥 한번 져주면 됐지 않으냐? 언제 널 첩 삼겠다고 했더냐? 너 정도의 첩은 궁에 넘치고도 넘친다. 네깟 게 뭐라고 감히 날 이기려드는 거냐?” 

격노한 왕은 도미를 감옥에서 끌어내 아내가 지켜보는 앞에서 두 눈을 멀게 만들었다. 피범벅이 된 도미를 뗏목에 실어 한강에 띄워 보낸 왕은 집요하게 을쑥불이의 몸을 원했다. 개로왕의 집념에 마침내 지친 듯 그녀가 힘없이 말했다. 

“오늘은 달거리 중이라 몸이 더럽습니다. 사흘 뒤 훈증하고 나서 몸을 바치겠나이다.” 

궁녀들의 침소로 옮겨진 을쑥불이는 그날로 줄행랑을 놓아 사라져버렸다. 왕은 위례성 곳곳을 이 잡듯이 뒤졌지만 그녀의 흔적은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게 벌써 팔구 년 전의 일이었다. 

박하차를 홀짝대던 도림이 은근한 목소리로 개로왕에게 물었다. 

“두 번째 내기는 원래 어떤 거였습네까?” 

음울한 표정의 왕이 대답했다. 

“을쑥불이가 날 다시 거절하면 도미의 최종 승리였다. 처음부터 그녈 가질 마음은 없었고 내기에서 이기면 둘 다 풀어줄 속셈이었다. 내 승벽을 건드린 게 잘못이었지. 일개 평민에게 모욕당한 왕을 귀족들이 얼마나 우습게 보겠느냐? 왕위를 넘보는 저 진씨나 해씨 세력에게 도미는 영웅이 될 게 뻔했다. 살려둘 수 없었다.” 

“애초 왜 내기를 시작하셨습네까?” 

“이길 줄 알았다.” 

“그탐 도미만 제거하시면 됐지 어찌 을쑥불이를 끝까지 소유하려드신 겁네까?” 

“전리품으로 갖고 싶었다. 백제 사내들이 다 탐내는 여자를 가질 수 있는 자가 바로 왕 아니겠느냐?” 

메마른 한숨을 내쉰 도림이 천천히 속삭였다. 

“놀이는 그저 놀이일 뿐입네다. 놀이나 내기에 인생을 거는 거, 고거이 바로 부처께서 말씀하신 잘못된 집착, 망집 아니갔습네까? 아직 소승의 말뜻 모르시갔디요?” 

“도대체 웬 횡설수설이냐?” 

“잠자코 들어보시라요. 그 을쑥불이라는 에미나이, 여태 고구려에 살아 있시요. 위례성에서 빠져나와서리 배 타고 한강을 뒤지다 무인도에서 숨이 붙어 있던 도미를 찾아냈답네다. 그칸 뒤에 고구려로 망명해 왔시요. 거지꼴로 살다 도미는 일찍 죽었다 들었습네다.” 

“그 얘길 왜 지금 하는 거냐?” 

빙그레 미소 지은 도림이 속삭였다. 

“이 한 판 끝내고 말씀드리면 안 되갔습네까?” 

개로왕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바둑판으로 시선을 옮겼다. 도림이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흑돌을 쥔 도림이 침착하게 백돌들이 별자리처럼 포진해 있는 중앙에 착점했다. 이상한 수였다. 공격도 수비도 아니었다. 왕이 자신의 우상변을 두껍게 쌓거나 도림의 좌하변에 밀고 들어가 상대 집을 갉아먹을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이 무의미한 수가 왕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독점하고 있던 중앙에 침범한 이 무례한 한 수가 몹시 거슬렸다. 왕은 흑돌 바로 좌하귀에 백돌을 붙여 방어를 시작했다.

불타는 위례성

서울 송파구 한성백제왕도길 몽촌토성 구간. [한국관광공사 제공]

서울 송파구 한성백제왕도길 몽촌토성 구간. [한국관광공사 제공]

참으로 어이없는 싸움이었다. 왕이 단단히 다져놨던 우세한 형세는 중앙의 혼전으로 일순간에 엉클어졌고 다 이겼던 바둑은 끝내기 상황으로 이어졌다. 우상변 왕의 집이 중앙에서 벌어진 접전의 회오리로 인해 찌그러지자 유일하게 단단했던 도림의 좌하변 집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도림의 반집승이었다. 

“네놈…속임수를 썼구나?” 

“대왕께서 모르셨을 뿐 소승은 늘 이런 수를 써왔습네다. 소승이 이긴 게 아니고 대왕께서 자멸하셨다는 걸 이제 아시갔디요?” 

개로왕은 도림을 노려보며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개운한 얼굴빛으로 변한 도림이 경쾌하게 말했다. 

“소승 이번에도 살았시요. 밤 깊으니 이만 가보갔습네다.” 

“내일 다시 두는 거지?” 

“내일? 내일이라. 그런 날이 오갔습네까?” 

얼떨떨한 표정을 한 개로왕이 일어서려는 도림을 향해 다시 말했다. 

“내일 반드시 설욕하겠다.” 

말없이 방을 벗어나려던 도림이 뒤돌아보며 속삭였다. 

“내일이 온다면 설욕하실 수 있갔디요. 그티만 그런 날은 아니 올 겁네다. 고구려 군사들이 발써 한강을 넘었시요. 백제 귀족들이 등 돌린 거이 여태 모르시는 겁네까, 아님 모른 척하시는 겁네까? 좌평 몇 빼면 대왕 편은 이제 하나도 없시요. 내래 그동안 든 정이 있어 마지막 한 판 둬주고 가는 줄이나 아시라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개로왕이 도림이 사라진 방문을 향해 조금씩 걸었다. 그제야 비로소 멀리서 울리는 말발굽 소리와 아우성이 희미하게 귓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침전 밖으로 나서 망루에 오르자 불타는 위례성 모습이 한가득 눈에 들어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왕의 등 뒤로 두 명의 고구려 장수가 다가왔다. 한 명이 개로왕을 꿇리고 다른 한 명은 칼을 들어 올려 왕을 참수하려 했다. 왕이 몸부림치자 붙잡고 있던 자가 말했다. 

“가만히 있어. 안 그럼 여러 번 쳐서리 더 아파. 그카고 우리 이름이나 알고 죽으라우. 난 백제군 출신 재증걸루. 지금은 고구려 장수가 됐어. 그리고 저 친구는 고이만년.” 

이번엔 칼을 쥔 장수가 씩 웃으며 말했다. 

“내래 고이만년이야. 백제 출신이지. 그리고 을쑥불이의 현재 지아비이기도 하고. 니 모가지를 가져다주기로 내 약조했지.”

※ 이 작품은 한성백제의 마지막 왕인 개로왕 최후의 날을 소설적으로 복원한 것이다. ‘삼국사기’의 ‘도미열전’을 주로 참고하되 고구려 장수왕이 파견한 스파이였던 승려 도림 이야기를 허구적으로 결합했다. 성품이 명민하고 외교적으론 탁월했으나 내정에 둔감했던 개로왕은 귀족층의 분열과 과도한 재정지출로 인한 민심 이반으로 몰락했다고 전한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




신동아 2019년 9월호

윤채근 단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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