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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朴 “‘삼성 합병 건’은 지시 아니다” 깨알메모…“누구를 봐줄 생각 없었다”

[ 발굴특종 ] ‘마지막 비서관’ 천영식의 ‘대통령 박근혜 최후 140일’ (4부) 사투

  • 전 대통령비서실 홍보기획비서관·계명대 초빙교수 youngsikchun@gmail.com

[단독] 朴 “‘삼성 합병 건’은 지시 아니다” 깨알메모…“누구를 봐줄 생각 없었다”

  • ● 세월호 7시간 의혹 관련 박 대통령의 육성 회고
    ● “당일, 편도 붓고 목 아파 관저에서 가글 처방받아”
    ● “밀회, 굿, 성형…여성 아니면 그런 비하 받았을까”
    ● “새로운 가십거리 도배될 수도…” 관저 언론 공개 거절
    ● 朴 “밀회 보도 굉장히 서글펐다. 비애감 느껴”
    ● 참모들 “얼굴 주사는 커터 칼 테러 후유증(얼굴비대칭) 치료용인데…”
    ● 주사치료 관련 “어디 가서 병 얘기 하고 싶지 않다”
    ● “사생활만 5개월 보도되면 이상한 사람 되는 거죠”
    ● 朴 “유진룡, 이임인사 때 좋은 말…결국엔 뒤통수”
    ● “조윤선 구속에 충격…북한과 다를 게 뭡니까”
    ● 특검 조사 거부와 헌재 불출석 건의한 건 김평우 변호사
[단독] 朴 “‘삼성 합병 건’은 지시 아니다” 깨알메모…“누구를 봐줄 생각 없었다”
탄핵을 논하면서 ‘세월호’ 문제를 짚고 가지 않을 수 없다. 세월호 문제는 박근혜 대통령의 이미지를 깎아내리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유 여하를 떠나 결과적으로 청와대 대응이 미숙한 탓에 임기 내내 시달렸고, 탄핵에도 악재로 등장했다고 생각한다. 

2016~2017년 탄핵 국면 당시 시중에서는 ‘대통령이 탄핵된다면 세월호 때문일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만큼 대중의 정서에 악영향을 끼친 이슈였다. 이는 거꾸로 탄핵이라는 게 법률적 논리보다 국민 정서의 영향을 받는 ‘정치적 재판’일 수 있다는 점을 국민도 인식하고 있었음을 방증하는 사례이기도 했다. 

세월호는 참으로 비극적 사고였다. 원인을 밝혀 책임자를 처벌하고 사회 및 국가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희생자 및 피해자에 대한 추모와 배·보상, 치유 활동 등 진정 어린 수습 활동을 통해 국민 여론을 보듬는 노력도 필요하다. 그러나 세월호 사고가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질 것이란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이게 국회에서 탄핵 사유로 포함됐다.


“세월호 7시간은 정치 공세”

2014년 4월 16일 박근혜 대통령이 정부서울청사의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찾아 세월호 사고 상황에 대해 보고
받고 있다. [청와대 제공]

2014년 4월 16일 박근혜 대통령이 정부서울청사의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찾아 세월호 사고 상황에 대해 보고 받고 있다. [청와대 제공]

여론을 악화시킨 최대 쟁점은 세월호 당일 대통령의 행적이었다. 세월호 침몰 당일 대통령은 관저로 출근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고 해명했음에도, 대통령으로서의 성실의무 위반이라는 반격이 이어졌다. 당일 행적 의혹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 ‘세월호 7시간’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7시간 의혹에 대해서는 정치 공세라고 보고 일일이 대꾸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세월호 당일에 굿이나 시술을 했다는 터무니없는 마타도어가 난무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말에 대꾸하는 것 자체를 ‘수준 낮은 일’이라 치부했다. 그런 유언비어를 듣게 되면서 자존심도 많이 상했다. 그런데 마타도어가 근 3년간 이어졌다. 희한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만약 유언비어 형태가 아니었다면, 대통령이 좀 더 일찍 반응했을 것이다. 



대통령도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었다. 나는 대통령의 입을 통해 세월호 당일의 행적을 직접 들어야 하는 시점에 다다랐다고 생각했다. 대통령은 탄핵 국면의 어느 시점에 조용히 이렇게 회고했다. 

“가슴 아픈 일입니다. 꽃다운 나이의 수많은 학생이 희생됐습니다. 선박안전법이 통과 안 됐고 부패사슬을 통해 운행하면 안 되는 배가 방치된 것입니다. 세월호 당일이 수요일인데, 그날 몸 컨디션이 안 좋았습니다. 피곤해서 신 대위(간호장교)로부터 가글을 요청해 받았습니다. 목이 아파섭니다. 

공식 일정이 없었는데 오전에 신 대위가 왔고, 오후에 미용하는 정매주 자매가 왔습니다. 그날 아침에는 TV도 보지 않았습니다. 보고 서류 및 결재 서류가 쌓여 있었습니다. 성격상 그걸 놔둘 수 없습니다. TV 볼 만큼 한가하지 않습니다. TV는 주로 저녁 뉴스만 봅니다. 물론 그날은 구조될 때에는 봤습니다. 아침에 보고를 받고 신속한 구조를 지시했습니다. 안보실장이 구조됐다고 보고해서 안심하고 TV를 봤습니다. 안도했습니다.


“중대본 ‘구명조끼’ 발언은…”

시간이 지나 오보라고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중대본(당시 안전행정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을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경호실에 준비를 지시했습니다. 중대본 사정이나 경호 준비 등에 필요한 시간을 기다리다가 중대본으로 나갔습니다. 

중대본에서 ‘구명조끼’ 발언(박 대통령이 “구명조끼를 입었는데도 왜 구조를 하지 못하냐”고 한 말)한 것은, 서면 보고를 보면 구명조끼를 정원의 120%가량 보유하고 있다고 돼 있어, 처음에 ‘괜찮겠구나’ 한 기억이 나서 한 말입니다. 중대본 보고 자료에 있었습니다. 끝까지 찾아보라는 의미였습니다. 머리는 짧게 손질하고 갔습니다. 편도가 부어 있어 굉장히 안 좋은 날이었는데…나중에 (그 시간에) ‘밀회’ 등 보도가 나오면서 굉장히 서글펐습니다. 비애감을 느낍니다. 이게 제대로 된 나라인가 싶었습니다. 

그날 주사를 맞은 일 없습니다. 주사는 조 대위(간호장교)가 잘 놓습니다. 조 대위 이전에 주사아줌마를 통해 맞았습니다. 주사아줌마도 간호사 출신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게 대단한 주사가 아니라 그냥 병원에서 맞는 영양주사입니다. 피곤하고 힘들 때 의료진 처방을 받아 주사를 맞습니다. 대통령이 영양제 주사 맞는 것도 안 됩니까. 말 갖고 이상한 여자를 만들어놨습니다.” 

이게 대통령이 기억하는 당일의 행적이다. 대통령은 써놓은 글을 읽은 게 아니라 기억나는 대로 술술 얘기했다. 물론 일부는 사후에 확인 후 보완한 ‘팩트’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당일 행적을 거리낌없이 얘기할 수 있었다. 나는 진솔한 답변이라고 느꼈다. 비슷한 취지의 답변은 2017년 1월 1일 기자간담회에서도 일부 있었지만, 늦은 감이 있었다. 이미 두들겨 맞을 만큼 맞은 뒤였다. 

대통령은 세월호 7시간 의혹에 대해 다른 자리에서 “여성이 아니면 그런 비하를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3년에 걸친 마음고생을 그대로 표현한 말로 여겨졌다. 

세월호 사고는 국가적 비극이지만, ‘세월호 7시간’은 정치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정치적 프레임이다. 실제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야당 의원이 “7시간 동안 무엇을 했느냐”고 질문한 것이 ‘의혹의 시간’으로 둔갑해버렸다. 특히 ‘정윤회와의 만남’이라는 유언비어가 더해지면서 세월호 7시간이 관음증의 소재가 됐고, 이상한 방향으로 각인돼버린 것이다. 1차적으로는 이를 정치적으로 악용한 당시 야당 정치인들이 문제이지만, 청와대의 대응도 잘못됐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2014년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이 국회에서 대통령의 동선(動線)은 경호상의 이유로 공개할 수 없다는 취지에서 “구체적으로 밝힐 수 없다”고 답변한 것이 세월호 7시간 논란을 끌어가게 된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아차’ 했지만 이미 속수무책이었다. 김 실장은 청와대의 답변 매뉴얼에 따른, 정말 원칙적인 대답을 했지만, 7시간이 어떤 실체가 있는 것처럼 고착화되도록 방치한 결과를 낳았다. 경호상의 목적이라는 것도, 이미 지난 일인 만큼 유연하게 판단할 수 있었다. 필요하면 밝혀도 되는 일이었다. 이를 너무 경직되게 적용한 잘못이었다. 국민 해명이 우선이었다.


“미주알고주알 새 가십거리 도배될 수 있어”

2014년 4월 17일 박근혜 대통령이 진도 앞바다에 침몰한 여객선 ‘세월호’ 사고현장을 방문해 구조 대원들을 격려하고 있다. [뉴시스]

2014년 4월 17일 박근혜 대통령이 진도 앞바다에 침몰한 여객선 ‘세월호’ 사고현장을 방문해 구조 대원들을 격려하고 있다. [뉴시스]

세월호 7시간이라는 프레임은 끔찍한 사고로 인한 국민의 분노와 대통령이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는 상상을 결합시켰고, 이로 인해 박근혜 정부 몰락의 뇌관이 됐다. 국민의 분노가 괴소문과 결합할 때 예기치 않은 폭발력을 지닐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이기도 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 들어 예상치 못한 일이 또 벌어졌다. 세월호 7시간은 헌법재판소 판결에서도 결국 탄핵 사유에서 제외된 일이었는데, 2017년 10월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이 느닷없이 수사를 의뢰함에 따라 검찰이 세월호사고 당일을 분 단위로 따져 다시 조사하게 된 것이다. 세월호는 워낙 뜨거운 감자여서 여전히 박근혜 대통령의 해명을 믿지 못하는 정서가 국민 사이에 남아 있고, 문재인 정부는 그것을 파고들었던 셈이다. 하지만 검찰은 수사 결과 대통령의 행적에 대해 별다른 특이점을 찾지 못했다. 대통령이 설명한 것과 큰 틀에서 차이가 없다. 

검찰은 다만 최순실이 그날 오후 관저를 방문했다는 사실을 추가로 확인해 발표했다. 최순실 때문에 대처가 늦었다는 건가? 아니면 검찰 발표대로 최순실이 오기 전에는 아무것도 못했다는 건가? 최순실과 세월호 당일 대처가 미흡했다는 점 사이 연관성이 없는데, 여론에는 악재로 등장했다. 대통령의 이미지는 또 한 번 타격을 받았다. 대통령이 탄핵되고 구속됐는데도 세월호 문제는 여전히 대통령을 옭아매는 이슈로 남아 있는 셈이다. 

세월호 문제와 관련, 대중의 분노는 처음엔 ‘대통령이 업무를 하지 않고 개인적 일에 몰두했다’는 의혹에서 시작됐으나 마지막에는 ‘왜 출근을 하지 않고 관저에 있었느냐’는 쪽으로 미묘하게 달라지고 있었다. 7시간 밀회, 굿, 성형 등의 의혹은 국민의 분노를 들끓게 했지만 사실이 아닌 것으로 해명되면서 점차 가라앉았고, 결국 관저 칩거에 대한 부정적 인식만 남게 된 것이다. 사실 관저에 있지 않고 집무실에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청와대 관저 정문인 인수문. [박경모 동아일보 기자]

청와대 관저 정문인 인수문. [박경모 동아일보 기자]

청와대 관저 정문인 인수문.백악관에서도 미국 대통령은 행사가 있을 때 출근할 뿐 ,하루 종일 집무실에서 근무하지 않는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등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유독 박근혜 대통령은 관저 근무를 두고 집요하게 공격받았다. 

2016년 세월호 논란 당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관저 집무실을 이용했다는 건 출근하지 않았다는 뜻”이라고 트위터에 적으며 박근혜 대통령을 공격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도 대통령이 된 이후 관저를 업무 공간의 일환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게 정상이다. 

자유한국당은 2019년 1월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 후 601일을 분석한 결과 평일에 일정이 없는 날이 47일이었고 관저 일정은 총 25회 있었다고 공개했다. 문재인 대통령 관저 일정의 경우 업무현안보고가 10건, 일일현안보고가 9건, 정상통화 3건, 내각보고 2건 등이었다. 2018년 12월 12일의 경우 오전 9시 20분에 일일현안보고, 9시 55분 안보실 업무현안보고를 받는 등 관저 일정만 있었고 다른 일정은 없었다고 한다. 

이처럼 관저는 대통령의 정상적인 업무 공간 중 하나다. 이걸 공세의 근거로 이용한 사람들이 잘못이라고 본다. 대통령의 관저는 집무를 겸하도록 설계돼 있다. 결재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각종 서류도 잔뜩 쌓여 있다. 

더군다나 박근혜 대통령은 원래 관저에서 업무를 보는 스타일이다. 그러다보니 본관 집무실보다 관저에 서류가 더 많이 쌓이게 된다. 수석들의 경우 밤 10시, 혹은 밤 12시에도 대통령의 전화를 받는다. 밤에 서류를 보다가 수석들에게 전화하기 때문이다. 이는 국회의원 시절부터 오래된 습관이다. 가족이 없기 때문에 집에서 업무를 보는 데 익숙해졌다. 

나는 이참에 기자들을 관저에 초청해 이 같은 설명을 하자고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기자들은 관저를 본 경험이 없다. 관저가 잠자는 공간이라고 오해하고 있으니, 그게 아니라 업무 공간이라는 점을 대통령이 직접 관저를 보여주면서 설명하자는 것이었다. 다른 대통령들은 관저를 공개하기 힘들다. 왜냐면 가족들과 같이 살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혼자 기거하기에 공개하는 데 복잡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여성 대통령이라는 미묘한 특성을 간과한 것이다. 혼자 사는 여성 대통령이 본인의 사생활 공간을 공개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은 일부 빨래의 경우 관저 침실에서 말리기도 하는데, 이것은 여성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또 우호적이지 않던 당시 분위기는 선의를 왜곡할 수 있었다.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그건 또 다른 문제가 생길 것 같습니다. 미주알고주알 새로운 가십거리로 도배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가슴이 아팠다. 대통령의 관저는 단순하기 짝이 없다. 가족이 없으니 군더더기가 없다. 관저 현관 왼쪽 가장 안쪽에 대통령의 침실이 있고, 그 옆에 서재 겸 업무 공간이 있다. 방문 앞쪽에 비서가 대기하는 공간이 있고, 간이식사를 할 수 있는 조그만 테이블이 놓인 공간도 있다. 또 현관 바로 옆에 외부 손님을 접견하는 소파를 갖춘 단출한 접견실이 있다. 참모들이 가면 대통령을 만나는 곳이다. 현관 오른쪽에는 회의나 연회를 하는 대연회장이 있고, 안쪽에 주방시설이 있다. 뭐 대단한 게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세월호 핑계를 대고 관저를 확 공개하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 돼 안타까웠다. 그랬으면 세월호 의혹이 줄었을까, 아니면 대통령 예상대로 의혹이 증폭됐을까.


‘제4차 산업혁명’ 읽어

2016년 12월 9일 국회의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 박근혜 대통령은 직무정지 상태로 들어갔다. 청와대 참모들은 황교안 국무총리를 대통령 직무대행으로 해서 업무를 보게 됐다. 당장 청와대 참모들에게는 황 대행의 일정이 공유됐고, 필요한 업무도 보좌하도록 됐다. 황 대행은 12월 중에 국정 현안 관계 장관회의 등을 소집하고 민생 현안 점검에 최선을 다했다. 읍면동 복지허브센터 등이나 한미연합사 방문 등으로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행하는 행사는 청와대 예산에서 지원하도록 돼 있는 등 복잡한 업무도 많았다. 황 대행에게 주어진 가장 큰 임무는 경제와 안보였다. 황 대행은 당장 2017년 경제정책 방향을 결정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고, 이를 경제부총리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챙기는 등 국정 공백이 없도록 노력했다. 

황 대행은 특히 대통령 직무정지라는 엄중한 상황을 맞아 공직자들이 정부정책에 한 치의 공백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특별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당시 대통령 직무정지라는 상황을 겪어봤지만, 청와대 참모들로서는 모든 게 처음 겪는 일이었다. 참모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업무 복귀를 염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권한대행의 업무를 보좌해야 하는 이중상황을 이어가고 있었다. 청와대는 마치 오리배를 저어가듯 겉으로는 평온한데 발밑으로는 분주한 상황이었다. 

국회 탄핵소추 이후 헌법재판소 결정까지 약 90일의 시간이 걸렸다. 대통령은 처음에 차라리 국회 탄핵이 되고 나니 홀가분하다고 느낀 듯했다. 우선 하야(下野)를 해야 하느냐 여부에 대한 정신적 스트레스에서 벗어났다. 헌재의 결정을 기다리면 되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마음의 여유도 찾게 됐고, 때가 되면 대통령직을 잘 마무리하겠다는 의욕도 강했다. 

2017년으로 해가 바뀌자, 대통령은 클라우스 슈밥이 쓴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고 했다. 당시 시중에서도 인기가 높던 책이다. 4차 산업혁명은 개인적으로 무척 애정을 갖고 추진해오던 분야다.


“가십이 5개월 이상 지속되니…어휴!”

당시 대통령은 범죄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고, 반격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탄핵당할 만큼의 죄를 짓지는 않았다고 믿고 있었다. 법률적으로 잘 대응하면, 오해와 왜곡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대통령은 변호인들과 주로 접촉하면서 돌파를 모색했다. 탄핵 이후 대통령에게 영향을 크게 미친 3명의 변호사를 꼽자면, 최재경·유영하·김평우 변호사를 들 수 있다. 대통령은 최재경 전 민정수석을 신임했고, 2월 들어 판세가 불리하다고 느낀 다음에 김평우 변호사의 조언을 많이 들었다. 

대통령은 유영하 변호사에 대해서는 줄곧 편하게 여겼다. 선거 때부터 법률 보좌를 해온 데다 대통령의 가려운 구석을 선제적으로 긁어주는 데서 심리적 안정감을 느낀 것 같았다. 하지만 점차 대통령은 여론이 개선되지 않는데 대해 마음이 많이 상했다. 언론도 세월이 지나면 어느 정도 실체적 진실 추적에 나설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바뀌지 않았다. 언론에 대해 쉽게 생각한 결과였다. 

언론은 오히려 매몰비용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동안 대통령을 왜곡한 보도들이 아까워서라도 왜곡을 가속화하려는 분위기가 강했다. 대통령은 당시 사석에서 이런 넋두리를 쏟아냈다. 

“사생활만 5개월 보도되면 이상한 사람 되는 거지요. 정책은 온데간데없고 가십이 5개월 이상 지속되고 있어요. 어휴!” 

이상한 사생활 보도는 소리 없이 대통령에게 강한 내상을 입히고 있었다. 대응할 수 있는 것도 잘 되지 않았다. 탄핵 이전부터 ‘주사 논란’이 이어질 당시 참모들은 대통령에게 적극적 대응을 주문했다. 

“커터 칼 테러(2006년 5월 20일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서울 신촌 현대백화점 앞에서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 지원유세에 참가하던 도중 지충호에게 커터 칼로 얼굴을 피습당한 사건) 이후 얼굴 비대칭으로 고생하면서 후유증 치료 차원에서 주사를 맞았다는데 그런 말씀은 왜 하지 않으십니까?” 

대통령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 가서 병 얘기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분위기는 이어지고 있었다. 직무정지 기간에 대통령의 육체는 잠시나마 평안을 찾았는지 몰라도, 마음의 병은 깊어가고 있었다.


쑥부쟁이, 구절초, 둥굴레, 냉초…이름 줄줄

탄핵의 겨울은 춥고 스산했다. 다가올 미래를 알지 못한 채 12월 말은 폭풍전야처럼 고요했지만 2017년 새해로 넘어가면서 모두의 마음도 다시 바빠지기 시작했다. 

대통령은 새해 들어 본격적으로 상황 반전을 기대했다. 1월 1일 기자간담회도 그런 차원에서 이뤄졌다고 본다. 특히 대통령은 국회 탄핵소추 이전 마지막 3차 담화에서 기자회견을 약속해놓고 지키지 못한 데 대한 부담을 크게 갖고 있었다. 언젠가 한번은 기자회견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기자회견을 드러내놓고 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여전히 세상은 냉소적이었고, 대통령은 세상의 냉소에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직무정지 중이라 청와대의 지원 인력과 지원 방법을 찾는 데도 어려움이 많았다. 

기자회견을 해야 한다는 강박감과 현실적 한계를 절충해 1월 1일 기자들과 신년인사를 겸한 기자간담회가 깜짝 이벤트로 편성된 것으로 알고 있다. 간담회는 상춘재에서 열렸다. 박근혜 정부 들어 상춘재를 처음 사용한 날이다. 노무현 정부나 문재인 정부는 상춘재를 여러 번 사용했다. 

아름다운 자태의 한옥을 포함해 상춘재 주변은 한 폭의 그림같다. 대한민국의 가장 우아한 정원 중 하나일 것이다. 상춘재 주변으로는 산책 코스가 마련돼 있어 대통령도 산책을 하지만, 청와대 직원들도 점심시간을 이용해 산책을 할 수 있다. 조그만 계곡과 노송, 각종 나무와 야생화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공간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산책 코스에 있는 이름 없는 들꽃들을 좋아했다. 그 꽃들의 이름조차 다 알고 있었다. 벌개미취, 쑥부쟁이, 구절초, 둥굴레, 냉초 등 야생화들은 사시사철 돌아가며 꽃을 피우며 상춘재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 수선화와 붓꽃 등 실개천을 따라 피어나는 꽃도 많았다. 과거 은둔의 시절 야생화를 좋아했던 박근혜 대통령은 임기 초인 2013년 상춘재 주변의 야생화를 즐겨 찾았다. 그러나 2014년 이후에는 산책 횟수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점점 업무에 몰입해 들어간 탓이다. 상춘재의 한옥은 그런 야생화와 노송에 둘러싸인 곳이다. 문재인 정부는 취임하자마자 참모들과 테이크아웃용 커피를 들고 상춘재 정원을 거니는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한 바 있다.


누런 메모지에 연필로 깨알같이 쓴 메모

박근혜 대통령이 2017년 1월 1일 청와대 상춘재에서 출입기자단과 신년 인사를 겸한 티타임을 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박근혜 대통령이 2017년 1월 1일 청와대 상춘재에서 출입기자단과 신년 인사를 겸한 티타임을 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그런데 정작 박근혜 정부는 그런 상춘재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행사 때마다 상춘재 사용을 여러 번 건의했으나 번번이 성사되지 못했다. 박근혜 정부는 일하는 정부를 표방해왔는데, 상춘재가 너무 아름다워서 일하는 정부 이미지와 맞지 않는 한가한 인상을 주게 될 것을 우려한 게 아니냐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탄핵으로 직무정지가 되고서야 상춘재를 이용하게 된 것이다. 

직무정지 중인 대통령은 본관 집무실을 이용할 수 없다. 그래서 본관을 아예 가지 않는다. 다만 관저에서 머물며 주변을 산책할 수 있다. 상춘재는 산책 코스에 위치해 있어 개인 공간의 일부로 해석이 가능하다는 판단을 받아 상춘재에서 기자를 만나게 된 것으로 알고 있다. 

대통령은 상춘재에 대한 추억에 빠져들었다. 대통령은 그날 상춘재 앞 초대형 적송을 가리키며 “어릴 때 그네를 타고 놀던 곳”이라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직무정지 후 관저를 벗어난 첫 외출이었다. 얼마나 세상이 그리웠으면, 상춘재를 보고 어릴 적 동심을 떠올리게 됐을까 생각했다. 

상춘재 앞에는 목련나무가 심어져 있다. 당시 목련이 필 시기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목련의 꽃망울이 때 이르게 맺혀 있었다. 금세 꽃망울을 터뜨릴 듯 느껴졌다. 대통령은 결국 목련이 피기 전에 청와대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날 대통령은 목련꽃을 연상하듯 순백의 하얀 옷을 입고 나왔다. 

상춘재에서 기자들과 나눈 대화는 참모들이 준비해주지 않았다. 통상 기자회견이나 간담회가 있으면 참모들이 준비 자료를 만들어 대통령에게 전달한다. 그날은 그리 하지 않았다. 직무정지 중이어서 참모들이 대통령을 공식적으로 보필할 수 없었기도 했지만, 대통령이 원치 않았다. 도우려면 비공식적으로 대통령을 돕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대통령은 손수 메모지에 주요 이슈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서 기자간담회 때 얘기했다. 그날 간담회의 내용은 당시 대통령이 고민한 흔적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아직도 조그만 누런 메모지에 연필로 깨알같이 쓴 대통령의 메모를 기억하고 있다. 대통령이 보여줬기 때문이다. 

인상에 남는 답변으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대한 국민연금의 역할에 대해 대통령이 “당시 22개 증권사 중 21개가 합병에 찬성했다. 이는 정상적 정책 결정이지, 지시가 아니다”는 요지로 한 발언을 들 수 있다.언론들도 이 발언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이외에도 필요한 주장을 정확히 펼쳤다. 

한광옥 대통령비서실장을 비롯한 주요 참모들은 1월 1일이 마침 일요일이어서 편한 마음으로 행사에 많이들 참석했다. 공식 업무일이 아니어서 얼마든지 사적으로 대통령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이날 간담회 내용은 기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기자들은 모처럼 대통령을 만난 데다, 대통령이 거의 모든 질문을 받아 대답을 해준 데 대해 만족감을 표시했다. 왜 진작 이런 회견을 하지 않았느냐고 말하는 기자가 많았다. 

하지만 가까운 기자들의 반응과 달리 세상은 여전히 냉담했다. 대통령의 해명이 너무 늦었다는 게 주류였다. 검찰이나 관련자의 입으로 이미 전해진 내용을 대통령이 뒤늦게 확인해주는 것이어서, 대통령의 변명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강했다. 

무엇보다 언론마다 신년 여론조사를 하는데, 탄핵을 해야 한다는 탄핵 찬성 여론이 80% 안팎으로 나왔다. 탄핵 찬성 비율은 동아일보 78.1%, 조선일보 82%, 한겨레신문 80.2%였다.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인용할 것이란 전망도 세계일보는 77.3%, 서울신문 62% 등 전반적으로 높았다. 또 문재인과 반기문 양강 구도로 나타난 차기 대권주자 여론조사 결과를 일제히 발표하면서 대선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여론은 이미 대통령을 아웃사이더로 여기고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 2017년 신년 기자간담회 주요 발언

▲(모두발언) 기업인들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많아요. 왜냐하면 문화융성은 정부 공약이었어요. 민(民)과 관(官)이 함께 창의적 아이디어를 가지고 문화융성, 창조경제를 해보자는 게 정부 시책이었어요. 특히 창업할 때 어려운 처지에 있는 젊은이들이 많이 지원하면, 워낙 우리나라 문화적인 역량이나 소질이 뛰어나니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고, 한류도 더 힘을 받고, 정부시책도 민이 합쳐짐으로써 더 창의성으로 나갈 수 있고, 그러다 보면 국가 브랜드도 높아지고…공감을 해서 참여하고 동참을 해준 것인데 압수수색까지 받고 여러 어려움을 많이 겪는 것을 보면서 정말 제가 (기업인들에게) 굉장히 미안스럽고 마음이 편할 날이 없습니다.


“제 업무 공간이 관저”


▲(세월호) 제가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그날 저는 참사가 터진 것을 보고 받으면서 정상적으로 계속 체크를 하고 있었어요. 보고를 받아가면서. 그날은 마침 일정이 없어서 제 업무 공간이 관저였는데, 제가 가족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거기에는 결재할 수 있는 시스템도 다 되어 있고, 필요하면 손님도 만나고 또 접견을 할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위민관에서 일을 할 수도 있고, 본관에서 할 수도 있고, 또 그렇게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제가 그동안 밀렸던 보고서라든가 결정해야 될 것, 그러니까 제가 그런 것을 그런 날은 계속 챙겨요. 그래서 저녁때 되면 오히려 더 피곤해져요. 왜냐하면 저는 한번 몰두를 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 챙기다 보면 어느새 몇 시간 지나고, 저녁때가 되면 더욱 허리도 아프고, 어깨도 아프고 그럴 정도로 일을 챙기고, 토요일 일요일 휴일도 그렇게 보내는 때가 많은데, 그날은 마침 일정이 비었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하고 있었는데 세월호 보고가 와서 제가 재난 전문가는 아니지만 대통령 입장에서 ‘한 사람이라도 빨리빨리, 필요하면 특공대도 보내고, 모든 것을 동원해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구조하라’ 이렇게 지시해가면서 보고받으면서 하루 종일 보냈어요. 

그날 참 안타까웠던 일 중 하나가 ‘전원이 구조됐다’는 오보가 있었어요. 그래서 너무 기뻐서, 마음이 아주 안심이 되고, 이렇게 잘될 수가 있나, 너무 걱정을 했는데, 그러고 있었는데 또 조금 시간이 흐르니까 그게 오보였다 그래서 너무 놀랐어요. 내가 중대본에라도 빨리 가려고 그러니까 경호실에서는 경호하는 데 필수시간이 필요하다고 해서 제가 마음대로 움직이지를 못합니다. 또 중대본에도 무슨 사고가 있었는지, 하여튼 그쪽도 무슨 상황이 생겨서 곧바로 떠나지 못했어요. 준비가 다 됐다고 해서 그냥 달려갔는데…이번만큼은 허위가 완전히 거둬졌으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 완전히 엮은 것입니다. 누구를 봐줄 생각, 이것은 손톱만큼도 없었고 제 머릿속에 아예 없었어요. (헤지펀드인) 엘리엇하고 삼성 합병하는 문제는 당시에 국민들, 증권사 할 것 없이 많은 국민들의 관심사였잖아요. 헤지펀드의 공격을 삼성 같은 우리나라의 대표 기업이 공격받아서 이런 것(합병이) 무산된다든지, 이렇게 되면 굉장히 국가적으로, 경제적으로 큰 손해라는 생각으로 국민들도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었고요. 우리나라 증권사 20여 곳 한두 군데 빼고는 이것(합병)을 다 해줘야 된다 그런 분위기였어요. 대통령으로서 당연히 그런 큰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국민연금이 잘 대처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또 당연히 국민연금이나 이런 데에서는 챙기고 있었겠죠. 그것은 국가에 올바른 정책 판단이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고 여기를 도와주라 그렇게 지시한 적은 없어요.


“써서는 안 될 약 썼겠어요?”


▲(최순실 관계) 몇 십 년 된 그런 지인이다. 지인은 지인이지, 어떻게 하다 보니까 오랜 세월 아는 사람도 생길 수 있고, 그렇다고 지인이 모든 것을 다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잖아요. 

국정운영에 저의 철학과 소신을 갖고 쭉 일을 했고…복지나 안보, 외교, 경제 정책 이런 것이 주위에 참모라든가 그런 분들과 의논해서 하는 것이지만, 저 나름대로 더 정교하게 좋은 생각도 나고 좋은 아이디어도 얻게 되고 계속 외교, 안보 부분도 모든 것을 발전시켜왔어요. 지금은 어떤 틀을 갖췄다 생각을 하고 더 뿌리내리게 마지막 순간까지 열심히 해서 좋은 마무리를 해야지 이렇게 생각하다가 이런 일을 맞게 됐습니다. 

▲(주사 논란) 모든 사람이 자기의 사적 영역이 있지 않습니까. 어디가 아플 수도 있고, 여기저기 좋은 약이 있다고 하면 할 수도 있고, 그런 거를 일일이 다 대통령이 내가 여기가 아파서 이렇게 해가지고 이런 약을 먹었고, 뭐 그런 거를 다 까발려서 한다는 거는 너무나 민망하기 그지없고요. 누구나 사적 영역이 있고, 그거로 인해 국가에 손해를 입혔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느 나라든 대통령이 어떤 병을 앓았는가 하는 것을 일일이 리스트를 만들고, 그걸 어떻게 치료했는가 하는 리스트를 만들지는 않잖아요. 또 해외 순방 때는 시차 적응을 못하면서 일정이 굉장히 빡빡하기 때문에 나중에 굉장히 힘들 때가 있어요. 그러면 피곤하니까 피로를 회복할 수 있는 영양주사도 놔줄 수 있는 건데 그걸 큰 죄가 되는 것같이 한다면 대통령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뭐냐, 무슨 영양주사를 할 때에도 의사가 알아서 처방하는 것이지 뭐가 들어가는지 어떻게 환자가 알겠습니까. 그렇다고 써서는 안 될 약을 썼겠어요? 설마하니, 의료진에서 저는 이상한 약, 그런 건 썼다고 생각 안합니다.


뽀얀 먼지 쌓인 포도주

2016년 12월 9일 국회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뒤 박근혜 대통령(왼쪽)이 청와대에서 마지막 국무위원 간담회를 주재하기 위해 황교안 대통령권한대행과 회의실에 입장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16년 12월 9일 국회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뒤 박근혜 대통령(왼쪽)이 청와대에서 마지막 국무위원 간담회를 주재하기 위해 황교안 대통령권한대행과 회의실에 입장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노무현 대통령은 탄핵으로 직무정지 후 조심을 했다지만, 할 만한 행동은 다 했다. 노 대통령은 2004년 3월 12일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돼 직무정지가 된 후 곧바로 국무위원 간담회를 한 뒤 칩거에 들어갔다.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 가결 후 국무위원 간담회를 연 것도 그때의 전례에 따른 것이다. 당시 노무현 청와대는 직무정지 중인 대통령을 반공개적으로 도왔다. 윤태영 대변인 등 참모들이 대통령의 근황을 평상시처럼 기자들에게 설명해주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 다음 날 새벽 5시에 일어나 간단한 운동을 하고 권양숙 여사와 조찬을 하는 등 평소와 크게 다를 게 없이 움직였다는 보도가 참모들의 입을 통해 나왔다. 당시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의 위로 전화를 받고 “정말 미안하고 가슴이 아팠다”고 말한 것도 언론에 전해졌다. 직무정지 이후 동정이 평소처럼 청와대 관계자의 입을 통해 언론에 전달된 것이다. 참모들과 오찬을 함께 하며 탄핵 찬반 시위 상황과 폭설 피해 대책 등에 의견을 나눴다는 보도도 있었다. 

또 3월 14일에는 가족과 함께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을 올랐으며, 윤태영 대변인은 대통령이 ‘칼의 노래’와 ‘마거릿 대처’ 등의 책을 읽으며 재충전의 시간을 갖고 있다는 비공식 브리핑을 하기도 했다. 

4월 5일 식목일을 맞아 노무현 대통령은 김우식 대통령비서실장과 박봉흠 청와대 정책실장 등 비서진 150여 명과 함께 춘추관 뒤편 유실수 단지에서 묘목 550그루를 심는 행사를 치렀다. 4월 11일에는 기자들의 요청이라며 북악산 산행을 했고, 4월 15일에는 정동영 의장, 김근태 대표, 김혁규 경제특보 등 열린우리당 지도부를 만났다. 노무현 대통령의 행보는 거리낌이 없었다. 

반면 박근혜 대통령은 상당히 조심스러운 행보를 거듭했다. 참모들과 가끔 만나기는 했지만 자제했고, 외부인도 변호인 외에는 만나지 않았다. 가족도 없었으니 만남은 더욱 제한됐다. 정치인은 더더욱 만나지 않았다. 친구가 없으니 저녁을 같이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술 한잔하면서 스트레스를 풀 수도 있을 텐데, 대통령은 그런 것을 호사로 생각했다. 나중에 관저에 들어가니 행사용 포도주 등이 뽀얀 먼지 속에 그대로 쌓여 있었다. 대통령 동정에 관한 대변인 브리핑 등은 아예 없었다. 

대통령은 헌법재판소 판결 및 특별검사의 수사 대응에 주력했다. 대통령은 변호인을 거의 매일 만났지만, 결과적으로 난국 타개에 도움을 얻지 못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받았다. 당시 만나는 사람이 변호인에 국한되다 보니, 대통령이 너무 법률 논리에 빠져드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들게 했다. 실제 ‘법률적으로 승산이 있다고 하더라’ 등의 괴소문이 들릴 때마다 그런 조짐을 느끼고 있었다. 대통령이 직무정지 기간에 더 많이, 더 다양한 사람을 만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많이 갖고 있다.


“(조윤선 구속에) 마음이 아프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에 관여한 혐의로 구속된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2017년 1월 22일 특검 사무실에서 조사받기 위해 소환되고 있다(왼쪽). 다음 날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블랙리스트’ 의혹과 관련해 참고인 신분으로 조사를 받기 위해 특검 사무실에 출석하면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에 관여한 혐의로 구속된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2017년 1월 22일 특검 사무실에서 조사받기 위해 소환되고 있다(왼쪽). 다음 날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블랙리스트’ 의혹과 관련해 참고인 신분으로 조사를 받기 위해 특검 사무실에 출석하면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좋은 소식은 들리지 않는 가운데 특검이 본격 활동하면서 예기치 않게 블랙리스트 사건이 터져 나왔다. 이 사건으로 조윤선 문화체육부장관이 1월 22일 사표를 제출했다. 블랙리스트 사건은 대통령을 향한 여론에도 악재로 작용했다. 대통령을 더욱 궁지로 모는 사건이었다.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던 조윤선은 현직 장관 신분으로 처음이자 유일하게 구속된 케이스로 등장했다. 대통령은 “마음이 아프다”면서 크게 안타까워했다.
 
“조 장관이 뇌물을 먹은 것도 아닌데 구속된 것이 너무 충격적입니다.(조 장관 구속은 죄 없는 사람을 잡아가는) 북한과 다를 게 없습니다.” 

대통령은 사석에서 만난 참모들에게 이같이 격정적으로 불만을 쏟았다. 특히 블랙리스트 건은 최순실 사건과 상관없는 일이었다. 특검이 최순실 사건과 상관없는 정부 정책을 대상으로 수사를 해서 관련자를 구속한 첫 번째 사례다. 이런 식이라면 박근혜 정부의 모든 정책이 수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논리로 뻗어갈 수 있는 일이었다. 정책이 맞지 않는다고 구속하면 대한민국 정부의 연속성은 누가 담보할 수 있나. 정부가 이전 정부와 다른 정책을 펴려면 국민을 설득하고 관련 법과 절차에 맞게 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과거 정부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전 정부 공무원들을 일단 수사 의뢰해 구속시키려 하고 있었다. 보도에 따르면, 부처별 적폐청산위원회(적폐청산 TF)는 과거 정권의 잘못을 들춰내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이런 방식이라면, 대한민국 정부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전 정부에서 소신 업무를 했던 관료를 구속시키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과 조윤선 문체부 장관 등 거물급이 구속되면서 대중에게 또 다른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특검은 박근혜 정부의 문제점을 추가적으로 드러냈다는 점에서 기세등등했다.


“(유진룡에) 인간적 비애감 느껴”

블랙리스트 사건은 대통령이 임명한 장관과 일부 청와대 참모들이 의도적으로 증언하면서 증폭됐다고 알려져 있다. 안 그래도 사면초가로 몰린 대통령에게 여론의 압박이 추가된 셈이다. 

이와 관련해 당시 언론에 많이 노출된 전직 문체부 장관이 유진룡이었다. 특검이 블랙리스트 조사를 하면서 전면에 등장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 장관 출신임에도 유진룡은 1월 검찰조사를 통해 블랙리스트에 대해 대통령을 강하게 비난했다. 대통령은 유진룡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고, 이렇게 회고했다. 

“그 사람은 장관직을 맡을 때 소신을 갖고 열심히 기여하겠다고 그래서 장관을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실체를 알 수 없지만 소신이 안 맞는 일이라면, 장관 시절 장관직 유지를 위해 (소신에 안 맞는 일을) 했다는 말밖에 더 됩니까. 그때 못 하겠다는 말을 하고 그만둬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때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장관직을 계속하고 싶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장관 맡은 분이 저건 아니라고 봅니다. 장관직을 그만두고 이임 인사를 왔을 때 나에게 ‘문화융성의 훌륭한 일을 하셨다’고 좋은 얘기를 계속했어요. 결국 뒤통수친 것 아닌가요.” 

대통령은 “인간적 비애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난세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이 나타난다는 것을 실감하게 했다. 

대통령을 도와줄 탄핵 법률대리인단은 최고의 팀으로 결성되지 못했다. 박근혜정부 초대 총리인 정홍원 전 국무총리가 맡아줬다면 무게감이 달라졌을 것이다. 정 총리는 개인 사정으로 맡지 못했다. 박근혜 정부에는 판·검사 출신의 고위 관료가 많았지만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지지율 5%에다 국민의 미움을 받는 대통령을 위해 나서려면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구차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법조인들은 정치적 몸값을 높게 불렀다. 대통령이 직접 삼고초려해주면, 고려해보겠다는 의사를 피력하는 사람도 있었다. 흥정이었다. 대통령이 나서지 않았든, 본인들의 마음이 없었든 드림팀 구성은 실패했다. 대통령도 속이 상했다. 그래도 부장판사 혹은 부장검사 출신의 열정 있는 분들로 탄핵 법률대리인단이 꾸려졌다. 대부분 희생정신을 바탕으로 모인 분들이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당시와 비교해서 약체로 비쳤다. 문재인 대통령은 저서 ‘운명’에서 “대리인단을 구성했다. 지금 생각해도 당시 우리가 갖출 수 있는 최고의 진용”이라고 평가했다. 당시에는 문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찾아가 부탁했는데 단 한 명만 고사했다고 한다. 인권변호사였던 유현석, 한승헌 변호사 외에도 대법관 출신의 이용훈, 박시환 변호사 등이 모였다. 여기에 민변의 젊은 변호사들이 뒷받침했다(‘운명’ 295~296쪽). 

박근혜 대통령의 경우 그나마 헌재 재판관 출신의 이동흡 변호사가 가세해 줘 천군만마로 여겨졌다. 대법관 중에는 정기승 전 대법관이 나중에 합류해 큰 힘을 주었다. 대통령은 직무정지 중인 2016년 12월 29일 탄핵 법률대리인단 전원을 청와대로 불러 면담했다. 첫 번째 변호인 집단 접견이었다. 젊은 변호사들뿐 아니라 이동흡 변호사 등 원로 변호사 4~5명이 같이 들어왔다. 원로들은 개인 사정으로 변호인단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대통령은 의혹이 제기된 범죄혐의에 대해 필요한 설명을 하고 나서 심경을 밝혔다. 

“구차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이 짧은 한마디는 변호인들에게 강하게 박혔다. 새해 들어 그런 기조 속에서 변호인들의 헌법재판소 대응이 이뤄졌다. 그래도 1월엔 상황의 개선을 기대했으나, 헌재 대응에서 커다란 변화 조짐은 없었다. 유리하다는 정황은 없었다. 2월의 여론 사정은 더욱 좋지 않았다. 특검의 파상공세가 이어지면서 특검발(發) 악재가 계속 등장했다. 특검은 청와대를 압수수색한다면서 여론을 동원했고, 삼성 이재용 부회장에 대해서는 영장 재청구 끝에 기어이 구속영장을 받아냈다.


‘특검 도우미’ 장시호, ‘헌재 도우미’ 특검

[단독] 朴 “‘삼성 합병 건’은 지시 아니다” 깨알메모…“누구를 봐줄 생각 없었다”
불리한 정황은 특검이 대통령과 최순실의 통화 내역을 공개하면서 또 나타났다. 570번의 통화 내역 공개 여파는 컸다. 특검은 ‘경제공동체’ 논리를 들이대는 증거로 이용했다. ‘특검 도우미’ 장시호는 대통령과 최순실 관계의 시시콜콜한 내용을 진술하면서 여론에 악재를 추가했다. 헌재는 여론에 신경 쓰고 있었기 때문에 특검 수사는 헌재 결정에 불리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것이란 분석이 높았다. 특검은 ‘헌재 도우미’였던 셈이다. 지나고 보면, 검찰수사와 특검, 헌재는 마치 릴레이 경주를 이어가듯 각자의 구간에서 최선을 다해 대통령을 압박했고, 결과적으로 대통령에게 탄핵의 굴레를 씌우는 데 한 방향으로 움직인 것으로 이해된다. 

남은 건 전면적 법률 싸움뿐이었다. 대통령은 특검의 조사를 받는 것으로 모든 일정이 조율되고 있었다. 관련 준비도 그에 맞춰 진행됐다. 변호인과 특검은 조사를 위한 막바지 물밑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조사는 경내에서, 2월 20일 혹은 21일 받는 것으로 거의 합의돼가고 있었다. 

하지만 박영수 특검은 거칠었다. 블랙리스트로 고위공직자들을 엮은데 이어 경제공동체 논리 등을 통해 대통령을 압박했다. 주변 사람들을 엮어 넣으면서 대통령에게 항복을 요구하는 형국이었다. 대통령 조사도 일반 피의자처럼 녹음·녹화를 하겠다는 강경 입장도 밝혔다. 이는 언론에 유출돼 정치적으로 악용될 우려가 있었다. 

마지막 카드인 헌재 출석을 둘러싸고도 변호인단 내 찬반양론이 분출했다. 1월 말부터 헌재 출석 카드가 거론됐으나 2월 들어서도 최종 결정은 나지 않은 채 논쟁만 이어졌다. 찬성파는 여론을 되돌리기 위해 불가피한 최후 선택이라고 했다. 반대파는 여론을 되돌리지도 못하면서 위험부담이 크다는 논리를 폈다. 어음 들고 헌재에 갈 순 없다는 논리도 나왔다. 그만큼 위험하다는 얘기였다. 

그럼에도 대리인단 변호인 다수는 대통령이 헌재의 최후 변론에 출석해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헌재 재판관들의 자존심을 살려주어 유리한 결정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대통령의 헌재 출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검 조사 놓고 치열했던 변호인단

결론이 나지 않자 일단 대통령의 헌재 출석 여부를 안개 속으로 남겨두고, 필요할 경우 히든카드로 사용하자는 논의가 전개됐다. 대통령이 출석하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높을 때 역으로 헌재에 깜짝 출석한다는 논리도 나왔다. 헌재 출석 카드는 허를 찌른다는 장점 외에도 대통령이 당당하게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또 대통령이 직접 국민에게 설명한다는 차원에서도 긍정적이었다. 

헌재 출석 문제는 특검 조사 문제와 맞물려 돌아갔다. 특검이 공식적으로 수사를 종료한 것이 2017년 2월 28일이고, 헌재가 마지막 최종변론기일로 지정한 날은 이보다 하루 앞인 2월 27일이었다. 헌재와 특검이 사건 일정을 거의 비슷하게 끌고 갔다. 헌재 선고일이 3월 10일인데, 특검의 수사 결과 발표는 3월 6일이었다. 특검의 일정은 헌재 결정을 겨냥해서 조율된 것으로 보였다. 

당시 상황을 되돌려본다면, 대통령의 특검 조사가 진행됐으면 헌재 출석도 성사됐을 가능성이 컸다. 이 같은 팽팽한 상황에서 2월 중순 등장한 인물이 김평우 변호사다. ‘탄핵을 탄핵한다’는 책으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 대열에 오른 김 변호사는 탄핵 국면에서 가장 뜨거운 사람이었다. 

김 변호사는 대통령에게 굴욕적인 특검 조사를 받아들이지 말 것을 요청했다. 김 변호사는 나아가 특검이 위헌적이고, 대통령은 특검의 조사대상이 될 수 없으며, 특검에 피의자로 입건되면 헌재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특검 조사가 무산된 이유가 대통령 측에 있는지, 특검 측에 있는지 정확히 알기 어렵다. 그러나 여론에서는 대통령이 특검 조사를 거부한 것으로 인식돼 대통령의 마지막 자산을 까먹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약속을 지킨다는 신뢰의 이미지가 또 깨진 것이다. 

특검 조사가 진행되지 않으면서 헌재 출석도 불투명해졌다. 당초 헌재 출석에 무게가 실리다가 2월 25일을 기점으로 분위기가 급변했다. 대통령은 신문 없는 최후진술을 원했지만, 헌재는 대통령이 출석하면 신문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변호인은 그것을 ‘대통령 망신 주기’라고 생각했다. 김 변호사는 그즈음 대통령에게 헌재 불출석을 공식 건의했다. 헌재가 공평성을 잃었고, 국가원수로서 선례를 남기는 것이 좋지 않다는 논리를 폈다. 노무현 대통령도 출석하지 않았음을 상기시켰다.


“태극기가 대통령을 지켜줄 것”

특히 김 변호사는 태극기 집회의 동력을 헌재 재판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전투적 논리를 개발했다. 이를 통해 헌재 재판관을 압박하자는 것이다. 사석에선 “태극기가 대통령을 지켜줄 것이다”는 논리가 등장했다. 

기존 변호인들이 여론의 반전을 꾀하지 못하면서 김 변호사의 주장이 더 확산돼갔다. 정기승 전 대법관 등 원로들도 동조했다. 헌재에서 승산이 높지 않다는 생각을 가진 기존 변호인들 일부도 동조하는 흐름이 나타났다. 

그럼에도 김 변호사의 등장은 여론에 그다지 좋게 작용하지는 않았다. 당시 종합편성채널에 적극 출연해 대통령을 옹호하던 정치평론가 차명진 전 의원은 “여론이 부정적이며, 김평우 변호사에 대해서는 싸늘하다”고 나에게 말했다. 법정에서 예의를 지키지 않은 게 부각되면서 여론의 비판을 받았다. 김 변호사는 뜨거운 감자가 돼갔다. 

김 변호사는 꽉 막힌 헌재 변론에 신선한 물꼬를 틔우며 선전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판을 뒤엎는 역할을 하진 못했다. 김 변호사는 헌재 재판에 혜성처럼 등장해 그 시기를 쥐락펴락한 풍운아였다. 논리와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본다. 

헌재 대응은 누구의 잘못을 떠나 전체적으로 미숙했다는 인상을 남겼다. 이렇게 해서 2월 27일 역사적인 대통령의 헌재 최후변론은 변호인이 대신 낭독하게 됐다. 변호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헌재의 관문을 뚫지 못했다. 현직 대통령 초유의 탄핵 최종 선고를 맞았다. 

대통령 탄핵 재판은 과정에서 불공정 논란이 많았다. 헌재는 △3월 13일까지 선고돼야 한다는 박한철 헌재소장의 선고 시한 설정 △9인 재판관을 채우지 못한 8인 재판관의 선고 강행 △고영태 증인 채택 무산 등 편파적인 운영으로 많은 문제점을 노정했다. 특히나 소수의견을 없앤 8:0 전원일치 결정은 ‘정치판결’이라는 의혹까지 낳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저서 ‘운명’에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과 관련해 “누가 그들(헌법재판소)에게 그런 권한(대통령 탄핵)을 줬을까.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을 탄핵할 수 있는 권한의 정당성이 어디에 있을까. 국민이 그들을 헌법재판관으로 선출한 것도 아니다. 그들은 대한민국 최고의 재판관인가. 꼭 그런 것도 아니다…그들의 정치적 판단과 결정으로 국민들이 선출한 대통령을 축출할 수도 있다. 헌법과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장치로 작동될 수 있는 것이다”고 썼다(‘운명’ 302쪽). 

탄핵 시스템에 대해 아주 부정적인 견해를 보인 것이다. 물론 박근혜 대통령 탄핵 때는 입장을 바꿨다. 

그렇다면 뭔가 이상한 것이다. 어떤 때는 잘못됐다고 하다가, 어떤 때는 좋은 일이라고 한다면 정치인으로서 무원칙일 뿐 아니라 제도로서도 공정성을 유지하기 어렵다. 우리나라 탄핵 시스템은 국회의 ‘충동적’ 소추의결과 헌재의 정치적 결정이 언제든지 이뤄질 수 있는 구조임을 증명했다. 탄핵이 되더라도 미국처럼 총리가 그 대통령의 임기를 마치게 하는 방식으로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면 좀 더 신중해질 것이다. 지금의 제도는 탄핵이 너무 정치적으로, 그리고 너무 허술하게 이뤄지도록 방치하고 있다. 대중의 충동에 부합할지 몰라도 국가를 위해 바람직한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대통령에게 국회해산권을 주지 않은 채, 국회의 대통령 탄핵소추권을 인정한 유일한 국가이기도 하다. 

영국 일간 가디언의 서울특파원을 지낸 마이클 브린은 조선일보 칼럼에서 “개개인이 법에 따라야 하듯 민심도 법을 따라야 한다”면서 “한국에서는 관료, 정치인, 검사, 판사가 민심의 변덕스러운 요구를 이성적인 법과 국익에 앞세우고 있다”고 평가했다.(‘조선일보’ 2019년 3월 11일 칼럼)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

탄핵 정국을 겪으면서 많이 들은 얘기 중 하나는 대통령이 왜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지 않았느냐는 지적이었다. 수도 없이 많이 들었다. 2016년 11월 초 나에게 전화한 지인은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 마찬가지인데, 왜 말을 하지 않느냐. 무엇을 더 기다리느냐”고 힐난했다. 당시 최순실의 인사 개입 등 뉴스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데도 해명은 너무 부족했기 때문이다. 참모들은 틈날 때마다 대통령에게 기자회견 등의 언론 접촉을 건의했지만, 대부분 성사되지 않았다. 

2016년 11월에 세 차례의 담화가 있었지만, 앞서 얘기한 대로 사람들의 갈증을 채우기에는 미흡했다. 세 차례 가운데 한 번도 기자들과 질의응답이 없었다. 대통령은 기회가 되면 자세한 얘기를 하겠다고 약속해놓고도 지키지 못했다. 공이 헌재로 넘어간 2017년 들어 대통령은 두 번 언론에 등장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진정성에 의문을 두고 있었다. 

과거를 되짚어보면, 대통령이 언론 노출을 최소화하는 자세를 견지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대통령은 여러 번 언급한 대로 ‘광풍의 시대에 무슨 말을 한들 소용없다’는 생각이 강했다고 본다. 또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후회 없이 해봐야 하지 않았느냐”는 비판에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사태가 급속히 악화된 11월에는 최순실의 비리를 미처 알지 못했으므로 언론에 나서기 어려웠을 수 있다. 자세히 알지 못한 채 대응하는 건 사태를 악화시킬 수 있다. 

하지만 검찰 수사가 어느 정도 진행된 후인 2017년 1월에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지 않았을까. 헌법재판소가 여론 심리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필요한 승부수는 여론전이었다. 대통령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소극적 기조는 유지됐다.


탄핵 변호인단 매번 삐걱거린다는 느낌

박근혜 대통령의 변호인으로 선임된 유영하 변호사가 2016년 11월 15일 서울고등검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양회성 동아일보 기자]

박근혜 대통령의 변호인으로 선임된 유영하 변호사가 2016년 11월 15일 서울고등검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양회성 동아일보 기자]

대통령은 국회 탄핵소추 후 극단적 대립이 가라앉으면, 여론이 조금씩 개선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1월을 거치면 노무현 대통령 때처럼 동정 여론이 일 것이란 예상도 한 것 같다. 태극기 집회의 규모가 커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전체적인 동정 여론은 기대만큼 높아지지 않았다. 

이미 헌재 대응이 변호인의 수중으로 넘어간 상황에서 참모들이 끼어들 여지는 거의 없었다. 참모들은 대통령이 여론전에 좀 더 적극적이기를 바랐고, 그런 의사를 전달해봤지만, 대통령은 주요 결정을 놓고 변호인들과 상의하고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당시에도 여론전은 중요했다. 당시 변호를 책임졌던 문 대통령은 저서 ‘운명’에서 “나는 대리인단 간사로서 실무적 역할과 함께 홍보를 맡았다. 여론전도 중요했다. 언론을 담당하는 역할은 고역이었다. 헌재에 들어갈 때마다 포토라인에 서서 당일 재판에 임하는 우리의 입장이나 쟁점에 대한 설명을 해야 했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헌법재판이 정치적 성격을 갖지 않을 수 없으므로 전문가들의 여론에서도 우위에 서기 위해 법학자들과 법률가들의 탄핵 반대 의견을 이끌어내는 노력도 했다”고 전했다. 말 그대로 총체적 여론전을 펼친 것이다.(‘운명’ 297쪽) 

그에 비하면 박근혜 대통령 측의 여론전은 답답한 상황이었다. 손범규 변호사나 황성욱 변호사 등 일부가 담당했지만, 공식적인 언론 창구로서 여론전이라고 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탄핵 변호인단은 언론 접촉 문제로 여러 번 내부 갈등을 빚은 것으로 알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 골든타임에 대통령의 입을 꽁꽁 묶어버린 것이다. 당시 분위기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론전을 확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게 잘되지 않은 게 안타까울 뿐이다. 

대통령에게 여론전 없는 법정 싸움에 ‘기대’를 걸게 만든 것은 대통령을 만족시켰을지 모르지만, 주변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많은 사람은 법정싸움에서 승산이 낮으니 마지막 수단으로 언론 노출이나 헌재 출석카드를 고심한 것인 데 비해 법률적 승부수에 미련을 갖게 했기 때문이다. 

변호인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보다는 매번 삐걱거리고 있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이 때문에 전체 변호인의 헌신적인 노력이 빛을 발하지 못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럼에도 열악한 상황에서 당시 변호를 맡았던 모든 변호사는 대통령 개인이 아니라 국가를 위해서 일했다고 생각한다.




신동아 2019년 9월호

전 대통령비서실 홍보기획비서관·계명대 초빙교수 youngsikchu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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