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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늑장 항복이 한반도 분할 가져왔다

김학준이 다시 쓴 한반도 분단 원인③

  • 김학준 단국대 석좌교수

일제의 늑장 항복이 한반도 분할 가져왔다

  • 8월 15일로 우리 겨레는 분단 75주년을 맞이한다. 오늘날 남과 북을 통튼 7600만 겨레가 겪는 고통과 비극의 뿌리는 바로 이 분단이다. 분단이 있었기에 이산가족이 발생했고 전쟁이 뒤따랐으며 37개월을 끈 이 전쟁으로 국토는 유린되고 수많은 동포가 목숨을 잃거나 부상했고 다시 한 차례 큰 규모의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무엇보다 남과 북 사이에 적대감이 높아져 오늘날까지도 해소되지 않은 채 대결을 유지하고 있다. 최근에 와서는 ‘제2의 한국전’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마저 조성되고 있다. 그러면 이 분단은 도대체 어떤 배경에서 이뤄진 것일까.

논점10 : 일본은 왜 항복을 지연시키고 있었는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조인식.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 제공]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조인식.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 제공]

미국과 소련이 코리아로의 진공을 위한 군사작전을 논의할 정도로 전황은 일본에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고, 무엇보다 미국과 영국은 공동으로 일본에 항복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일본은 왜 항복하지 않고 있었나. 

이 중요한 시점에 일본은 소련과 미국을 상대로 종전과 평화를 위한 이른바 화평공작을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었다. 소련은 일본의 교섭에 냉담했다. 스탈린은 일본과의 전쟁에 들어가 승전국의 일원이 될 때 얻을 이익이 훨씬 클 것으로 예상했다. 미국은 잠시 일본 제의에 응함으로써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할 수 있는 일본 본토에서의 작전을 피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원폭을 쓰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으로 기울어졌다. 

여기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대목이 있다. 그것은 트루먼 대통령의 위촉을 받아 후버 전 공화당 대통령이 이끈 자문위원단의 건의였다. 그들은 코리아와 대만을 일본이 그대로 통치한다는 조건을 제시하면 일본이 종전에 합의할 것이라는 방안을 건의한 것이다. 트루먼은 이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 건의는 미국이 경우에 따라서는 코리아를 버릴 수 있음을 말해 주었다.

논점11 : 무엇이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냈을까.

트루먼 대통령의 결정에 따라, 미군은 일본 현지시각으로 1945년 8월 6일 아침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그런데도 일본이 항복 의사를 표시하지 않자 미군은 현지시간으로 8월 9일 오전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폭을 투하했다. 그때로부터 꼭 12시간이 지난 시점에 소련은 일본을 상대로 한 전쟁에 들어갔다. 더는 버티기 어려워졌다고 판단한 일본은 8월 15일 항복을 선언했다. 

그러면 무엇이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냈을까. 이 중요한 물음에 대해, 미국 정부는 당연히 미군의 원폭 투하를 내세웠고, 소련 정부는 소련군의 참전을 내세웠다. 학계의 의견도 양분돼 있다. 그러나 그때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가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한 때로부터 이틀 뒤이면서 소련이 선전포고를 하기 직전의 시점에 국왕에게 원폭 투하에 관한 상황을 보고하면서 이를 전기로 삼아 전쟁 종결을 결심하도록 건의했으며, 국왕이 이 건의를 받아들인 사실을 중시하는 경우, 원폭 투하가 항복을 이끌어냈다고 해석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논점12 : 일본의 늦어진 항복이 코리아의 분할을 가져왔다.

여기서 우리가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사실에 착안하게 된다. 그것은 일본이 평화공작에 매달려 항복을 늦췄기에 자국 국민에게 엄청난 손해를 끼쳤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분할을 가져왔다는 사실이다. 트루먼 대통령이 한때 기대했던 대로 일본이 적어도 8~9일 전에만 항복했어도 소련군의 한반도 진입을 막을 수 있었고, 그렇게 됐으면 한반도의 분할은 회피될 수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일제는 패망하면서도 우리 민족에게 또 한 차례의 엄청난 손해를 끼쳤다는 비난을 받을 만하다.

논점13 : 마침내 38도선에서의 분할 : 분할선을 더 올릴 수 없었을까.

일본의 항복이 임박했음을 확인한 미국 전쟁부는 8월 10일 저녁 한반도에서 미군과 소련이 각각 점령할 지역을 확정 지을 선을 마련했다. 구체적으로, 전쟁부 차관보 존 매클로이의 지시를 받아 딘 러스크 육군 대령과 찰스 본스틸 육군 대령은 함께 그 선으로 38도선을 제시했다. 이미 소련군이 북위 41도선까지 진공해 온 현실을 고려해, 적어도 수도 서울 그리고 제1항 부산과 제2항 인천을 미군의 점령지역 안에 포함시키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서 38도선을 채택한 것이다. 이 결정을 매클로이 차관보는 그대로 받아들였는데, 그의 지시로부터 수락까지 약 30분이 소요됐다. 

매클로이는 38도선 안을 국무부·전쟁부·해군부 조정위원회에 올렸으며, 이 위원회는 8월 12일 이 건의를 검토했다. 이 자리에 우리가 앞에서 살폈던 존 링컨 준장이 참석해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이에 따라 이 위원회는 이 안을 8월 14일 트루먼에게 보고했으며, 트루먼은 이튿날 스탈린에게 ‘통고’했다. 스탈린은 즉시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이로써 38도선에서의 분할이 결정됐다. 

여기서 우리는 분할에 서글픔을 느끼면서도 분할선의 상향 조정을 거론한 가드너 해군 소장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는 조정위원회의 토론 때 39도선을 제의했지만 링컨의 강력한 반론에 부딪혀 관철하지 못했다. 

미국인 선교사로 한반도의 지리를 깊이 연구한 섀넌 매큔 교수에 따르면, 38도선에서의 분할 결과로, 12개의 강과 75개 이상의 샛강이 잘렸고, 수많은 산이 갈렸으며, 181개의 작은 우마차길, 104개의 지방도로, 15개의 간선도로, 6개의 철로가 절단됐다. 이 분할선은 1953년 7월 27일 성립된 조선=한국정전협정의 결과 휴전선으로 바뀌었고,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신동아’는 ‘김학준이 다시 쓴 한반도 분단 원인’을 7월 30일, 31일, 8월 1일 오전 10시 총 3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이번 기사는 그 세 번째입니다.



신동아 2020년 8월호

김학준 단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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