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호

陣營에 착 붙으면 출셋길 열리는 ‘이 편한’ 세상

[봉달호 편의점 칼럼]진짜 ‘수구’는 누구인가… 운동권의 ‘까방권’ 유효기간

  • 봉달호 편의점주

    입력2021-07-27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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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 카페 사장에게 “너는 어느 쪽(진영)이냐?”

    • 린치, 해명, 반박 그리고 배후 캐기

    • X세대의 기이한 운동권 부채감과 자아도취

    • 공안기관 겁 안 내던 1990년대 학생운동

    • 객관적 ‘역사’가 된 신화적 세계관

    • “과거 걔들이 걔들”이라는 괴이한 논리

    • 기득권 세력의 돈키호테 증후군

    1993년 5월 29일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소속 대학생 5만여 명이 서울 안암동 고려대에서 출범식을 마친 뒤 서울 도심으로 진출해 가두시위를 벌였다. [동아DB]

    1993년 5월 29일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소속 대학생 5만여 명이 서울 안암동 고려대에서 출범식을 마친 뒤 서울 도심으로 진출해 가두시위를 벌였다. [동아DB]

    광주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자영업자 배훈천 씨가 어느 집회에 참석해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가 고초를 겪었다. 언론이 이를 보도하자 친여(親與) 성향 매체들이 광주 카페 사장의 ‘숨은 정체’를 운운하며 단순 자영업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이런 기사를 공유하자 전화와 인터넷을 통한 집단 린치가 시작됐다. 결국 배씨는 카페 영업용 전화를 끊어야 할 정도로 시달렸고 가족과 직원들이 불안에 떨었다고 한다. 우리 사회의 이런 풍경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 이제는 새삼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매일 몰려가 린치를 가하고, 해명하고, 반박하고, ‘저의’를 의심하고, 과거를 캐고, 배후와 배경을 살피고, 주변을 탐문하고, “너는 어느 쪽(진영)이냐?” 묻는다. 정치·사회적인 문제나 방송 연예계 사건은 그렇다 치자. 수사를 통해 법리와 증거를 다퉈야 할 형사사건이나 개인적인 송사에까지 그렇게 한다. 그것을 일종의 정의나 참여라 생각하는 것 같고, 거기에 네티즌 수사대라는 이름까지 붙여 행위를 정당화한다.

    그리하여 물론 진실이 드러나는 경우도 있지만 다수 여론에 굴복해 우선 사과부터 하는 경우도 있고, 엉뚱한 사람이 피해를 보거나, 때로는 억울함을 호소하다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마저 있다. 이것도 수년간 우리 주위에 되풀이돼 온 전형이다. 이러한 행위들로 인해 우리 사회가 얻는 이익이 클까, 손실이 클까? 설령 공동체의 이익이 훨씬 크고 개인의 손해는 극히 일부라 한들, 백번 양보해 그렇다 한들, 그것을 ‘감수해야 한다’는 태도는 과연 옳은 것일까? ‘1만 명의 공익 앞에 1명쯤이야’ 하는 이런 사고방식은 역사책 어딘가에서 확실히 들어본 카랑카랑한 목소리다.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역사는 늘 이렇게 배경만 달리해 반복되고 유전하는구나 하는 얕은 회의감마저 갖는다.

    전남대 운동권이라는 이유만으로…

    광주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자영업자 배훈천 씨(왼쪽)가 7월 2일 자신의 카페에서 정세균 전 국무총리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배씨는 한 집회에 참석해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가 고초를 겪었다. [뉴스1]

    광주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자영업자 배훈천 씨(왼쪽)가 7월 2일 자신의 카페에서 정세균 전 국무총리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배씨는 한 집회에 참석해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가 고초를 겪었다. [뉴스1]

    배훈천 씨의 연설에 대해 어느 인터넷 매체에 ‘공개 편지’라는 부제를 단 비판 칼럼이 실렸다. 광주 살레시오고 교사라고 자신을 밝힌 서부원 씨의 기고문으로, 제목은 ‘그땐 노무현 탓이라더니, 이젠 모든 게 문재인 탓’이었다. 배씨의 연설 내용에 나 역시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고, 서씨의 칼럼에도 고개를 끄덕인 대목이 있다.

    그런데 서씨의 칼럼 가운데 “전남대 출신 운동권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장님의 주장에 동의하진 못해도 인정할 순 있습니다”라는 대목에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배씨는 전남대를 졸업했고, 재학 시절 학생운동에 가담한 적이 있다고 자신을 밝힌 바 있다. 이에 서씨는 “전남대 출신 운동권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의 주장을 ‘(동의할 수 없어도) 인정할 수 있다’는 태도를 취한다. 이런 사고방식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글을 쓴 서씨조차 옹색했는지 “누군가는 얼토당토않다고 나무랄 테지만”이라고 단서를 달았지만, 사실 이런 사고관은 우리 사회 일각에 적지 않게 확산해 있다. 아니, 특정한 세대나 집단이 일부러 ‘확산시키려’ 노력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쪽이 적절할 것이다.



    과연 운동권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것을 일단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일까? 심지어 서씨는 “적어도 운동권이라면 ‘까방권(까임방지권)’을 인정합니다”라고까지 말한다. 학생운동을 하지 않았던 사람, 혹은 학생운동을 비판하거나 대척점에 섰던 사람은 운동권 출신을 비판할 자격이 없다는 말로도 들린다. 실제 서씨는 “(운동권 출신들이) 고단한 세상살이에 ‘초심’을 잃었다고 해도 감히 손가락질하진 못한다”면서 “정치권의 ‘86세대’ 운동권들이 기득권층으로 전락했다는 비난이 쏟아지지만, 군사독재정권의 후신인 수구세력들과 어찌 비교하겠습니까”라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나도 나쁘지만, 너는 더 나쁜 놈’식 논리라고 요약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비단 운동권 논쟁뿐 아니라, 이런 사고방식 역시 우리 사회에 적지 않게 만연해 있다.

    이미 다 지난 ‘혁명’을 붙잡고

    화제를 돌려, 남우세스럽지만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필자는 15년 정도 사회운동을 했다. 그중 7년은 북한 체제를 신봉하는 종북(從北) 운동권으로 살았고, 나머지 8년 정도는 북한민주화운동을 했다.

    가끔 원고 청탁을 받거나 언론 인터뷰를 할 때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출신”이라거나 “주사파 지하조직 출신”이라고 소개할 때 부끄럽기만 하다. 내가 총학생회장을 해봤자 1년이고, 지하조직 생활을 해봤자 5년 남짓이다. 물론 언론사에서는 칼럼이나 기사의 소구력을 높이기 위해 그렇게 하겠지만, 경력보다 내용으로 승부(?)할 수는 없는 것일까 자책감을 갖는다. 내용보다 역시 ‘어떤 사람인가’에 먼저 관심을 갖는 사회적 시선 때문이겠지만.

    가끔 이렇게 비판하는 말도 듣는다. “주체사상을 신봉하다가 전향해 ‘고작’ 선택한 것이 북한민주화운동이었어?” “북한을 민주화한다고? 그게 가능하기나 해?” 이렇게 비판하시는 말씀. 물론 거기에 대꾸하듯 일일이 답변할 생각은 없고, 각자의 생각이니 존중한다. 그런데 이것을 먼저 말씀드리자. 무언가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사회운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필요하고 절박한 일이어서 꼭 해야 한다면 하는 것이지, 가능하니까 하고, 불가능할 것 같으니까 지레 포기했다면, 우리 사회의 민주화도 과연 가능했을까? 1980년 5월 광주의 시민군이 어떤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끝까지 도청을 지켰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 하나 이것도 이야기하자. 남한을 민주화하겠다고 학생운동을 할 때, 기실 1990년대 학생운동은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 운동에 가까웠지만, 나는 그때 ‘목숨을 건다’는 두려움을 크게 느껴보지 않았다. 학생운동을 하다가 실종되거나 변사체로 발견된 사람도 있었고, 스스로 죽음으로 항거한 동료도 있었고, 수사기관에서 고문이나 가혹행위를 당한 선배도 일부 있었지만, 대체로 대학가는 ‘해방 천국’ 수준이었다. 이따금 교내 압수수색이 있었으나 대개 미리 알고 피신했고, 학생회실에는 시국사건 수배자들이 자연스럽게 드나들었고, 오히려 상주하며 숙식했다. 문건이나 대자보, 유인물도 거의 제약 없이 만들었다. ‘일부’ 학생들의 비난이 약간 두렵기는 했으나 감히(!) 운동권에 공개적으로 대적하는 학내 여론이 1990년대 중반까지는 없었고, 공안기관이나 정권은 전혀 무섭지도 않았다.

    공안기관에 체포되는 일은, 그리하여 운동 경력이 단절되거나 조직이 드러나 활동에 피해를 줄까 걱정했던 것이지, 생명에 위협을 느껴 두려워했던 것은 아니었다. 구치소나 교도소마저 1990년대에는 해방 천국이었다. 감옥에 갔다 출소한 선후배가 있어 ‘환영식’에 참석하면, 열악한 수형 환경에 엄청나게 고생한 이야기보다, 거기에서도 시국사범들끼리 옥중 투쟁을 하며 다양한 책을 읽고, 출소해 더 열심히 투쟁해야겠다고 각오를 단단히 다졌다는 통쾌한 무용담이 더 많았다. 심지어 군복무를 회피하기 위해 일부러 붙잡혀 실형을 살기도 했으니까(군대 문제를 정리한다는 뜻에서 그것을 ‘정리투쟁’이라 했다. 운동권 핵심은 감옥에 가거나 신분이 드러나면 안 되니까, 정리투쟁은 주로 중간급 운동권이 택하는 방식이었다).

    그 시절 우리가 정작 무서워한 대상은 공안기관이 아니라 ‘엄마 아빠’ 아니었을까. 부모의 반대를 제외하고 운동에 제약이나 걸림돌이란 별로 없었다. 1980년대 초반이라면 모르겠으되,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학생운동의 풍경은 솔직히 그랬다. 객관적 사정이 그러한데 “이 목숨 다 바쳐 투쟁하리라” 노래하면서 마치 내일 죽을 용사처럼 두 주먹 불끈 쥐고 매일 비장한 노래를 불렀으니(그것도 교내 잔디밭에서 막걸리 마시고 춤추면서), 돌아보면 우리 X세대는 좀 허장성세한 구석이 많았다. 이미 다 지난 ‘혁명’을 붙잡고.

    ‘목숨 걸어야’ 했던 북한민주화운동

    1987년 5월 11일 광주 전남대에서 ‘호남 학생연합건설준비위’ 발족식을 치른 5개대 학생대표들과 전남대생 700여 명이 교내 시위를 하고 있다. [동아DB]

    1987년 5월 11일 광주 전남대에서 ‘호남 학생연합건설준비위’ 발족식을 치른 5개대 학생대표들과 전남대생 700여 명이 교내 시위를 하고 있다. [동아DB]

    한편 북한민주화운동을 할 때는 시시각각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정말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긴장감으로 살았다. 북한민주화운동은 남한, 해외, 그리고 북한 내부에서의 운동으로 나뉘는데, 북한 내부로 들어갈 수는 없으니 역시 우리 남한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현장은 남한과 해외가 된다. 남한에서 하는 일은 북한의 열악한 인권 상황을 국내외에 알리면서 관심과 지원을 호소하는 일이고, 해외는 주로 중국에 운동가들을 파견하는 방식으로 활동이 이루어졌다. 중국에서 여러 위장 신분으로 생활하면서 탈북자들을 접촉해, 그들이 북한에 돌아가 비밀리에 민주화운동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돕거나,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북한 내부 민주화운동가들을 찾아 교류하는 일이었다.

    북한 내부 운동가들이야 말 그대로, 글자 획 하나 틀림없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자신뿐 아니라 일가친척 모두의 생명을 담보로 맡기는 일이다. 이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에 반해 남한은 가장 안전한 곳이지만, 여기서도 “죽여버리겠다”는 테러와 협박을 수시로 당했다.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은 북한 로열 패밀리의 비밀을 공개했다는 이유로 남한에서 대낮에 북한 공작원에게 권총 피살됐고, 내가 일했던 북한민주화운동 단체에 식칼과 피, 죽은 쥐가 들어 있는 상자가 배달되기도 했다. 북한민주화운동가를 독살하라는 명령을 받고 남파된 간첩이 체포된 일도 있었다. 남한 내 종북 단체의 숱한 비난과 협박은 말할 것도 없고.

    필자는 북한 내부 민주화운동 조직을 지원하는 목적으로 해외에 파견된 적은 없지만, 그렇게 중국에 파견된 운동가 여럿과는 친분을 갖고 있었다. 중국에서 그들의 활동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남한에서는 사소한 테러나 협박 수준이지만, 중국 변방에서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더라도 정말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들이 보안을 유지하거나 지하조직을 구축해 나가는 방식은 1970~80년대 우리나라 민주화운동 정도는 미안하게도 명함조차 내밀지 못할 수준이었다. 1990년대 학생운동이야, 다시 말하지만 그건 그냥 해방구였고.

    훈장처럼 내세워 우려먹고 또 우려먹다

    2019년 10월 12일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일대에서 열린 ‘제9차 사법 적폐 청산을 위한 검찰개혁 촛불 문화제’. [송은석 동아일보 기자]

    2019년 10월 12일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일대에서 열린 ‘제9차 사법 적폐 청산을 위한 검찰개혁 촛불 문화제’. [송은석 동아일보 기자]

    1980~90년대 우리나라 학생운동 일체를 부정하거나,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을 인격적으로 폄훼할 생각은 전혀 없다. 내가 쓴 글이 그렇게 오용될 때, 가끔 씁쓸한 감정을 갖기도 한다. 그런데 물론 책임은 필자에게 있지만, ‘지나친 운동권 우상화는 이젠 좀 그만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자꾸 거론하게 된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이야기하자면, “운동권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정할 순 있다”는 유의 사고방식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궁금하다. 이른바 그 ‘까임방지권’의 유효기간은 도대체 언제까지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그토록 증오했던 지난날 ‘반공 기득권 세력’의 태도와 과연 무엇이 다른지 묻는 것이다.
    나는 사회운동을 했으나 그것을 이유로 내가 어떤 ‘까방권’을 갖는다고 생각지 않는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그래봤자 기껏 15년이다. 쪼개서 이야기하면 7년, 8년이다. 인생이라는 기나긴 여정에서 7년이나 8년은 정말 눈 깜짝할 시간이다. 어디 내세울 만한 그런 시간이 아니다. 많은 것을 포기하고 스스로 희생하긴 했으나 내가 선택한 길이니 거기에 일말의 후회나 미련, 보상을 바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기껏 (정말 기껏) 2~3년, 혹은 4~5년 대학시절에 ‘잠깐’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평생 그것을 훈장처럼 내세워 우려먹고 또 우려먹으며 살고 있으니 가당찮고 가소로운 것이다.

    물론 그것은 그들의 일이니, 세상은 원래 편취자(騙取者)의 몫이라 생각하면서, 그렇게 살라고 내버려 둘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객관적 ‘역사’까지 바꾸려고 하는 점에 있다. 그 시대를 경험하지 않은 후대의 사고의 뿌리까지 바꾸려 시도한다. 지금 일부 10~20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혹은 30~40대 연령층까지도), 1980~90년대 운동권들이 숨도 쉬기 힘든 독재 치하에서, 끽 소리만 해도 잡혀가던 파쇼의 그늘 아래, 목숨 걸고 투쟁한 줄 안다. 일종의 신화적 세계관으로 그런 풍경을 그려나간다. 하지만 ‘응답하라 1988’ 같은 드라마에도 언뜻 보이듯, 그 시대에도 사람은 살았고, 생각은 다양했다.

    최루탄이 도로 위를 나뒹굴고 교내에 전투경찰이 몽둥이를 들고 난입하는 와중에도, 누군가는 돌을 던졌고 누군가는 도서관으로 갔다. 나는 ‘돌은 던진’ 동지들만 정의라고 생각지 않는다. 한때는 나도 그런 편협한 생각을 가진 적이 있지만, 세상을 살며 다양한 사람을 만나 보니 누구나 나름의 의식을 갖고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살았다는 당연한 진리를 깨닫는 중이다. 그러한 ‘개인’의 조각이 모이고 모여 세상을 이루고 역사를 만든 것이지 어느 특정한 집단만 역사를 만들었다 생각지 않는다. 학생운동 모두를 친북이나 종북, 혹은 좌익이라 매도할 수 없듯, 그 시대에 나름대로 ‘이건 아니야’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을 “군사독재정권의 후신인 수구세력”(살레시오고 서부원 교사의 표현)이라 생각지 않는다.

    이야기하자면 더욱 구체적인 논증과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1987년 6월 항쟁이 어디 학생운동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일인가(이건 사실 논증도 필요 없는 일이다). 그리고 1987년 이후 ‘민족’과 ‘계급’을 앞세운 학생운동은 우리 사회의 민주적인 발전에 과연 어떤 기여를 했는가. 기여도 했지만 해악도 있었고, 지금 우리 사회가 돌아가는 것을 보면 어쩌면 해악이 더 큰 측면마저 있다. 세상이 모두 그런 것 아닐까. 음이 있으면 양이 있고, 우리는 각각의 역할을 정당하게 평가하며 공화(共和)를 이루어나가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벌써 30년, 40년이 지난 일이다. 우리가 그토록 맞서 싸웠던 세력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제는 ‘우리’가 주류이자 주역인 시대가 됐다. 나는 그 무슨 “독재정권의 후신”들이 남아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독재의 그늘 아래 만들어진 성장과 번영의 꿀물을 가장 먼저 들이마시면서 자라나, 대학에 들어가서는 ‘반제반파쇼민중혁명’을 꿈꾸다, 지금은 그것을 민주화운동으로 자랑하는 사람들이 집권당 당수, 국회의원, 장관, 국무총리 그리고 대통령까지 됐다. 지금은 우리 사회의 어엿한 지배권력을 형성하고 있다. 그때의 ‘파쇼 괴뢰도당 놈들’은 여러 번 물갈이를 거듭해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과거에 걔들이 걔들”이라는 괴이한 논리는 도대체 언제까지 써먹으려는 것일까? 연좌제를 반대한다는 사람들이 이런 일엔 왜 자꾸 봉건적 ‘후신’이란 용어를 강조하는 것일까?

    흥미로운 점은 이쪽도 저쪽도 아닌 중간에 있었던 사람들이 이상한(?) 부채감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서부원 교사도 “집회에 참여해 팔뚝질하며 구호를 따라 외치는 게 전부”라고 자신의 과거를 회고한다. 겸손한 것은 좋으나, 누구나 시대적 상황에서 자기 나름의 최선을 다한 것이다. 거기에 어떠한 부채 의식을 가질 필요도 없다. 게다가 그런 부채감으로 특정한 세력을 비판하지 않거나 심지어 ‘까방권을 갖는다’고까지 생각하는 건, 꽤 위험한 발상이다.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건데, 대체 왜 그래야 하는가?

    “新색깔론은 너무 하지 않습니까”

    좀 역겨운 사람들은 여기에 편승하고 기생하는 사람들이다. 나름의 인생 역정이야 있을 것이고 쉬이 타인의 인생을 재단하고 싶지는 않지만, 기나긴 인생에 기껏 몇 년 정도의 경험이다. 게다가 이른바 학생운동 경력자 중에는 오히려 핵심 운동권이 아니었기 때문에 감옥에 간 사람도 있고, 학생운동 기간 내내 총학생회장님, 의장님, 위원장님 등으로 우대받는 환경에만 익숙하다 정치권으로 직행한 사람도 있다. 그 중간에 사회생활의 경험이란 일천하다. 그들은 지금도 의원님, 장관님, 총리님, 대표님으로 평생 꽃길을 걷는다.

    여기까지도 그러려니 하지만, 없는 경력 만들어서 ‘민주화 행세’ 하는 사람들을 보면 씁쓸한 미소를 짓게 된다. 시위대 꽁무니에서 보도블록을 깼든, 지하조직 핵심 지도자였든 모두가 소중한 경험과 역할을 한 것이지만, 운동권 경력을 과장되게 앞세우는 사람들을 보면 속으로 그냥 웃는다. 자기 출셋길 탐색하며 부지런히 눈 굴리다가 어느 진영에 착 달라붙으면 그다음 출셋길이 활짝 열리는 ‘이 편한’ 세상이 됐다.

    그래도 ‘그때 그 세상’보다는 지금 이 세상이 낫지 않으냐 우기면 할 말이 없다만, “이런 세상에 동의하지 않으면 배신자나 수구세력으로 매도하는 신(新)색깔론은 너무 하지 않습니까” 하는 일개 자영업자의 조그만 항변으로 갈음하련다. 자꾸 ‘왕년에 내가 말이야’를 들먹이는 사람이야말로 과연 ‘수구’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보면 필자도 필시 수구인데, ‘기득권 수구’만큼은 되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노력할 따름이다.

    역시 가장 큰 문제는 기득권을 누리고 있으면서 기득권이 없다고 생각하는, 심지어 자기들이 아직도 기득권에 맞서 싸우고 있다고 심각하게 착각하는, 그 대단한 돈키호테 증후군에 있지 않을까? 오늘도 조국 전 장관은 페이스북에 ‘죽창’을 올렸다.

    #운동권 #X세대 #민주화 #진영논리 #우상화 #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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