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호

만신창이 된 애국가를 어찌할까

작사·작곡가 친일 논란…일본풍 가사 비판

  • 최창근 객원기자

    caesare21@hanmail.net

    입력2019-05-11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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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한국인에게는 설명이 더는 필요 없는 국가(國歌), 애국가 가사 일부다. 최근 이제까지 국가로 인식돼온 이 노래에 대한 논쟁이 거세게 일고 있다. 작사가, 작곡가가 친일 인사일 뿐 아니라 가사 내용에도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뉴시스]

    [뉴시스]

    우리나라 애국가 작곡가는 안익태, 작사가는 공식적으로 ‘미상’이다. 1955년 당시 국사편찬위원회는 ‘애국가작사자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작사가 규명 작업을 했다. 그러나 문헌 고증, 관련자 인터뷰 등 여러 노력에도 결실을 보지 못했다. 당시 작사가로 유력시된 인물은 윤치호(尹致昊·1865~1945)다. 그가 1907년 펴낸 노래집 ‘찬미가’에는 지금의 애국가와 거의 유사한 내용의 가사가 실려 있다. 서지학자 김연갑은 이 노래집과 ‘윤치호 작(作)’이라 서명된 ‘모필본(毛筆本) 애국가 가사지’ 등을 근거로 ‘윤치호 작사가설’을 주장한다. 

    반면 안창호(安昌浩·1878~1938)가 애국가 가사를 썼다고 보는 학설도 있다. 춘원 이광수가 쓴 책 ‘도산 안창호’ 제 6장의 다음 대목 등을 근거로 삼는다. 

    “(전략) 정청(政廳·상하이 임시정부 청사)은 매일 아침 사무 개시 전에 전원이 조회를 하야 국기를 게양하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하는 애국가를 합창하였다. 도산은 그 웅장한 음성으로 힘을 다하여 애국가를 불렀다. (중략) 원래 이 노래는 도산의 작(作)이어니와 이 노래가 널리 불려져서 애국가를 대신하게 되매 도산은 그것을 자기의 작(作)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다. 애국가는 선생님이 지으셨다는데 하고 물으면 도산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부인(否認)도 아니하였다.(하략)”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 애국가작사자조사위원회는 애국가 작사가 윤치호설을 두고 투표를 했다. 11(윤치호설 확정)대 2(윤치호설 미확정)로 윤치호설에 좀 더 힘이 실렸지만, 최종적으로 ‘작사자 미상’ 결론을 내렸다. 작사자를 입증할 직접 자료가 없었기 때문이다.

    윤치호 vs 안창호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는 ‘대한민국학술원통신’ 2018년 4월호에 게재한 ‘애국가 작사(作詞)는 누구의 작품인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과거의 논란을 소개하며 ‘안창호설’에 힘을 실었다. 신 교수에 따르면 애국가 2절 가사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는 안창호의 ‘한양가’ 제 1절과 내용이 유사하다. ‘남산 위에 송백(松柏)들은 사(四)시로 푸르다. 청정한 산림 새로 들리는 바람소리’라는 구절이다. 



    애국가 3절 가사 ‘가을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라는 부분은 도산의 다른 시 ‘은덕을 사모하며’의 3절을 연상케 한다는 게 신 교수 주장이다. 이 시구는 ‘가을 하늘 반공(半空) 중에 높이 빛난 명월(明月)인 듯’이라는 내용이다. 

    반면 김도훈 한국교원대 연구교수는 2018년 발간한 비교 논문 ‘애국가 작사가 관련 논쟁에 관한 검토’에서 ‘윤치호설’에 힘을 실어줬다. 1897년 영문판 ‘독립신문’ 기사에 애국가의 모태라 할 수 있는 ‘무궁화가’ 작사자 이름이 ‘T.H.Yun(윤치호의 영어 이름)’으로 적힌 것을 근거로 들었다. 

    ‘친일파의 대부’로 평가받는 윤치호가 애국가의 작사가로 확인되면 어떻게 될까. 그는 일본, 중국, 미국 등에서 유학한 지식인으로 독립협회장, 기독교청년회(YMCA) 지도자로 활동했다. 개혁·자강파의 중심인물로 꼽혔다. 그러나 1915년 전향을 선언한 뒤 노골적으로 친일 행각을 벌였다. 1941년 1월 국민정신총력연맹 이사, 1944년 5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1945년 2월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을 지냈다.

    남산이 목멱산 아니고 고야산?

    윤치호(왼쪽)와 안창호 그리고 애국가 악보. [뉴시스]

    윤치호(왼쪽)와 안창호 그리고 애국가 악보. [뉴시스]

    최근에는 애국가 작사가를 논외로 하고, 가사 자체를 문제 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교수는 “애국가 가사는 일본을 찬미하는 내용”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애국가’ 2절에 등장하는 ‘남산’은 서울 목멱산(남산)이 아니라 일본 교토(京都) 고야(高野)산이다. 일본에는 수도 도쿄의 남산 후지산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 남산으로 불리는 산이 여럿 존재한다. 그중 소나무로 유명한 남산이 고야산이라 게 강 교수 설명이다. 그는 “소나무는 한국이 아닌 일본을 대표하는 나무다. 그들은 소나무를 국수(國樹)로 여기고 일왕이나 귀족의 저택, 주요 사적지 등에 널리 심었다”고 밝혔다. 반면 한국에서는 ‘매란국죽(梅蘭菊竹)’ 4군자를 높이 쳤다. 

    강 교수는 애국가 2절 중 ‘철갑을 두른 듯’이라는 부분에 나오는 철갑 또한 일본 무사 사무라이의 상징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한국 전통 갑옷은 종이나 직물에 가죽을 덧대 만들었다. 반면 사무라이는 철로 만든 갑옷을 입었다”고 주장했다. 

    애국가 2절 중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라는 내용의 가사도 일본 사자성어 ‘풍상지기(風霜之氣·바람과 서리 같은 고난의 세월을 이겨내는 기상)’를 한국어로 옮긴 것에 불과하다는 표현이 강 교수 주장이다. 그는 “한국이나 중국 사자성어에는 풍상지기라는 표현이 없다”고 강조했다. 애국가 3절 ‘가을 하늘 공활한데’의 ‘공활(空豁·텅 비고 너르다)’ 또한 한국이나 중국에서는 사용하지 않은 일본식 상용한자라고 한다. 

    강 교수는 애국가 후렴구에 등장하는 ‘무궁화 삼천리’ 가사도 문제 삼았다. 구한말 이전의 문학작품에서 무궁화에 대한 내용은 찾아보기 어렵다. 다산 정약용이 무궁화에 대한 글을 쓰기는 했지만 ‘활기가 없어 빈 골짜기에 버려지리’라고 혹평했다. 강 교수는 ‘삼천리’라는 단어도 조선의 통치권이 미치던 영역 ‘사천리’를 일제가 의도적으로 천리 줄여 만든 것으로, 식민사관의 영향을 받은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안익태의 친일, 친나치 행각

    이처럼 애국가를 둘러싼 논란이 확산하면서 작곡가 안익태(安益泰·1906∼1965)의 친일 행적 또한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애국가 작곡가로 공인받은 안익태는 광복 후 대한민국 문화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사후에는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그가 일제에 협력한 사실이 속속 드러나며 논쟁을 일으켰다. 

    안익태는 1942년 9월 독일 베를린에서 개최된 만주국 건국 10주년 경축 음악회에서 ‘만주국환상곡’을 지휘했다. 1938년 ‘에텐라쿠(Etenlaku·월천악)’라는 일왕 찬양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는 이 두 사례를 주된 근거로 안익태를 친일 명단에 올렸다. 애국가 곡조가 일제의 침략전쟁을 예찬한 ‘만주국환상곡’과 유사해 문제라는 주장도 있다. 

    1월 출간한 책 ‘안익태 케이스: 국가 상징에 대한 한 연구’에서 안익태의 친일·친나치 행적을 집중 조명한 이해영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는 “애국가가 진짜 애국가가 되려면 최소한 만든 이가 애국적이어야 한다. ‘비애국적’ 애국가는 그 자체로 형용 모순”이라고 밝혔다. 강효백 교수도 “작사자, 작곡가가 친일행위를 했을 뿐 아니라 가사 내용까지 일본풍인 애국가를 폐기하고 진정한 국가를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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