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호

사바나 ; 회사, 알바 그리고 나

연령만 앞세운 ‘청년팔이’의 허상

‘청년문제’ 해결, 청년에게만 맡기는 게 책임회피다

  • 김선기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연구원·‘청년팔이 사회’ 저자

    fermata@goham20.com

    입력2019-08-03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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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바나’는 ‘회사, 알바 그리고 나’의 약칭인 동아일보 출판국의 컨버전스 뉴스랩(News-Lab)입니다. ‘사바나’ 기자들은 모두 밀레니얼 세대에 속합니다. 부쩍 오랫동안 ‘알바생’ ‘취준생’으로 살았습니다. 커보니 ‘취업이 바늘구멍’이 돼버린 경제 현실에 절망했고, ‘노력 안 한 탓’이라는 세상의 ‘충고’에 울기도 했습니다. 시행착오를 반복하다 운 좋게 기자가 됐습니다.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사바나’를 만들었습니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운데)가 6월 1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청년미래연석회의 발대식에서 모두 발언하고 있다. [뉴스1]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운데)가 6월 1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청년미래연석회의 발대식에서 모두 발언하고 있다. [뉴스1]

    내년 21대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 세대교체론이 ‘청년(에 의한) 정치’라는 이름으로 종종 등장하고 있다. 이 담론에는 여러 층위가 혼재돼 있다. ①과거와 달리 청년층(20~30대) 정치인이 주요한 선출/임명직에서 배제되는 상황에 대한 비판, ②청년 정치인이 없어 정치적으로 청년층을 대의할 통로가 열리지 않고 있다는 주장, ③586세대의 정치 독점이 심각하며 권력이 청년 정치인들에게도 분배돼야 한다는 주장 등이다. 

    나는 청년세대의 사회적 배제에 대한 비판(①)에는 거의 전적으로 동조한다. 20~30대인 청년 또한 다른 세대와 동일한 시민이다. 시민의 권리인 정치 참여와 피선거권 등에 있어 ‘아직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배제되는 것은 부당하다. 

    하지만 세대별 정치세력화론(②)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시민의 이해관계는 세대만을 기준으로 단순 구분되는 게 아니다. 계층이나 젠더, 지역, 가치관 등 다양한 기준에 따라 응집화가 일어난다. 연령대별로 비례해 대표자를 뽑자는 주장은 너무나도 단순하며 때로는 논리적 모순으로 가득하다. 겉으로는 이러한 주장이 청년을 위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외려 청년 혹은 사회에 해가 될 수 있는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

    50대 정치인은 50대를 대변하나

    청년기본법 제정을 위한 청년단체 연석회의 회원들이 2018년 11월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청년기본법 연내 국회 통과를 촉구하고 있다. [뉴스1]

    청년기본법 제정을 위한 청년단체 연석회의 회원들이 2018년 11월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청년기본법 연내 국회 통과를 촉구하고 있다. [뉴스1]

    2019년 현재의 담론이 과거에서 별달리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야말로 ‘청년 정치’론의 한계를 잘 보여준다. 8~9년 전 이미 ‘청년정치’론이 있었다. ‘88만원 세대’가 20대에게 ‘짱돌을 들고 바리케이드를 치라’고 조언한 자리의 연장선에서, ‘2030세대’라는 이름으로 정치권 세대교체론이 제기됐다. 2010년 말 ‘경향신문’은 올해의 인물로 ‘20대’를 선정하기도 했으며, ‘2030’이라는 이름이 붙은 각종 정치 행사와 프로그램이 개발됐다. 

    ‘청년과 소통하겠다’며 정치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청춘과의 토크 콘서트를 열었다. 19대 총선을 1년 앞둔 2011년 당시 민주통합당, 통합진보당 등은 청년 비례대표 후보를 뽑는 오디션을 개최했으며, 당시 새누리당은 비상대책위원으로 20대의 이준석을 임명했다. 청년당이라는 이름을 쓰는 정당이 등장하기도 했다. 19대 총선에서는 어쨌든 ‘청년비례’ 명목으로 30대 연령의 국회의원들이 탄생해 국회에 입성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8년 전과 비슷한 수준에서 ‘청년정치’론이 반복되고 있다. 이 프레임이 가진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지적은 이미 많다. ‘청년정치’ 1세대라고 볼 수 있는 정치인 김광진, 이준석, 장하나 등은 입을 모아 청년 문제의 해결을 ‘청년 정치인’이라고 명명된 사람들에게만 맡겨놓는 기성 정치권을 비판하고 있다.(‘한국일보’ 2019년 6월 24일자 ‘“청년정치 용어 자체가 굴레…청년만을 위해 일하는 게 아닌데”’) 

    아무도 50대 정치인이 50대를 대변해야 한다거나, 50대의 이슈를 왜 다루지 않느냐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젊은 정치인에게만 청년문제 해결과 청년과의 소통 책임을 맡겨두고, 젊은 정치인이 자신의 전문적인 관심 분야를 의제화하려 하면 ‘청년 이슈를 소홀히’ 하는 것처럼 몰아간다. 

    이러한 세대별 정치세력화론(②)은 정치권 내에서 세력이 크지 않은 젊은 정치인에게만 청년문제를 맡겨둔다. 이로써 사실상 청년문제 해결을 어렵게 하고, 동시에 젊은 정치인들이 ‘청년’이라는 연령 정체성을 넘어 자신만의 전문 영역을 갖춘 정치인으로 성장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약 요인이 된다. 

    단순 세대교체론(③)에도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 ‘청년정치’론이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첫 번째 목표가 다름 아닌 ‘청년을 위한 것’이라는 전제를 충족시켜야 한다. 더불어 세대교체 이후의 정치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에 대한 비전이 제시돼야 한다. 그러나 최근 세대교체론을 보면 ‘청년정치’의 비전보다는 ‘586세대 정치’에 대한 안티(anti)로서의 인식이 좀 더 강조되는 듯한 경향을 확인하게 된다.

    청년 팔아 부당한 이득 본다?

    더구나 세대교체 주장이 ‘586세대 정치’의 한계를 지적하는 또 다른 기성세대에 의해 언급되는 경우도 잦다. 세대교체론을 주장하는 주체가 다음 세대 정치를 기획하는 젊은 정치인이 아니라는 뜻이다. 즉, 세대교체론이 주요 정치 세력의 ‘독과점’을 비판하면서 대안임을 자처하는 또 다른 기성 정치 세력의 이익에 봉사할 우려가 크다. 

    20~30대 젊은 정치인 몇몇이 국회의원이 되고, 주요 보직에 자리 잡을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실질적인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자리를 맡게 됨으로써, 혹은 기존 세력과의 차별점을 보여주는 데 실패함으로써, ‘청년정치’라는 미개척지를 열지 못하고 기성 정치 세력의 수명 연장을 위해 쓰일 수 있다. 

    최근 출간된 내 단행본과 관련해 인상적인 댓글을 보았다. 결국 저자인 나도 ‘청년팔이 사회’라는 책을 써서 ‘청년’을 팔고 있는 것 아니냐는 ‘날카로운’ 비판. 애석하게도(?) 나는 그 비판으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 나 역시 ‘청년팔이’를 하는 일원이라는 사실을 이미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책의 4장에서 정치적 언어이자 정체성으로서의 ‘청년’ 개념을 가장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집단 중 하나가 역설적으로 ‘청년팔이’에 가장 심한 염증을 느끼는 ‘나’를 포함한 청년 활동가들이라는 점을 논한 바 있다. 더불어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청년’ 담론을 만들 수 있을지, 다른 말로는 ‘청년팔이’를 어떻게 더 윤리적으로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공유했다. ‘청년팔이’가 갈수록 중요해지는 사회적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지, ‘청년팔이’를 아예 하지 말자는 이야기를 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청년정책, 청년세대 담론 등과 관련한 내 주장에 관해 빈번한 또 하나의 오해는 이렇다. 내 글을 두고 ‘청년에 관한 이야기는 청년이 해야 한다’는 당사자주의를 주장한다고 읽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청년정책에서 ‘꼰대’의 이야기가 빠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젊은 사람들의 생각은 덜 성숙했다는 전제를 깔고 미숙하게 취급하는 것만큼이나, 청년문제는 청년들이 이야기해야 한다는 말로 문제 해결 책임을 청년들에게 손쉽게 전가하고 공동의 책임에서 회피하는 행동 또한 ‘꼰대스럽다’고 생각한다.

    텅 빈 기표

    나아가 나는 ‘청년팔이’ 그 자체에 반대하지도 않는다. 국내 세대 연구의 권위자인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청년팔이’를 “청년을 팔아서 부당한 이익을 보는 행위”로 정의한 바 있다. 그런데 나는 ‘청년’을 팔아서 단순히 정치적, 경제적 이득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청년들을 비롯한 시민의 삶을 나아지게 할 수 있다면 그러한 ‘청년팔이’에는 비판적으로 동조할 수 있다. 

    성찰 없이 내세우는 청년에 관한 많은 주장은 ‘청년문제’라고 불리는 현상들을 해결할 힘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청년의 삶을 더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내가 비판하는 대부분의 세대론은 세대를 연령 기준으로 분류하는 규정을 본질로 삼는다. 

    앞서 살펴본 세대별 정치세력화론(②)은 각 세대 이익은 당사자인 같은 세대만이 대의할 수 있다는 무리한 논리다. 단순 세대교체론(③)은 젊은 사람들이 정치에 진입하기만 하면 정치가 달라질 수 있다는 주장을 바탕에 둔다. 그러니 연령을 ‘청년’ 논의에서 절대적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나 고작 연령을 기준으로 한 구분만으로 도대체 무엇을, 어떤 가치를 이야기할 수 있는가? 입법 예정인 ‘청년기본법’안에서 ‘청년’은 만 19세에서 39세(혹은 34세)의 모든 인구를 지칭한다. 거기에는 재벌 3세나 건물 상속자, 생산직 노동자, 프레카리아트, NEET(Not in Employment, Education and Training·교육도 구직활동도 하지 않는)족도 다 포함돼 있다. 

    20대 초반에 결혼·출산을 통해 가족을 이룬 사람도, 비혼주의자도, 소위 ‘캥거루족’도 포괄된다. 박사과정 대학원생도, 중소기업에서 15년 근속한 근로자도 모두 30대 후반이고, 그렇다면 청년이다. 누구를 기준에 두느냐에 따라 ‘청년’은 그 의미가 완전히 갈리는 ‘텅 빈 기표’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많은 정치인이 ‘청년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쉽게 이야기한다. 이때 ‘청년을 위한 정치’는 도대체 무엇이고, 여기서 가리키는 ‘청년’의 실체가 도대체 누구인지 명확한 철학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정치인을 여태까지 우리 사회는 거의 만나지 못했다. 

    많은 정치인에게 ‘청년’은 그저 20대, 30대를 가리킨다. 그들은 우리 사회의 청년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다’ ‘아픔을 겪고 있다’는 매우 추상적이고 관성화된 말을 별 의미 없이 반복할 뿐이다. 기성세대 정치인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젊은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다. 

    연령만을 기준으로 ‘청년’이라는 집단을 분리하는 방식의 ‘청년팔이’는 여러가지 부작용을 유발한다. 청년의 구체적 삶에 주목하기보다는 청년이라는 집단의 평균적 이미지에 천착하게 됨으로써, 청년 내부에서 누구는 선택하고 누구는 배제하는 일이 발생한다. ‘청년’으로 이야기되는 많은 내용이 사실상 ‘청년 평균’이나 ‘청년 다수’와 같은 허상에 매달릴 때 ‘청년’으로 호명되는 젊은 시민 대다수는 청년 담론에서 자신의 자리를 발견하지 못한다.

    ‘청년’에 대한 전문성

    청년정책 체감도가 낮다고 할 때, 또 ‘청년’이라는 정치적 기획이 매번 실패했다고 할 때 그 근본적 원인은 연령 이외에는 이야기하는 점이 거의 없는 ‘청년’ 레토릭의 정체(停滯)에 있다. 

    ‘청년’을 연령으로만 규정하면 아무런 구체적인 의미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가치관을 정당화하기 위해 ‘청년팔이’를 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노력해야 한다. 애석하게도 지금까지의 많은 정치인은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다. 

    기성 정치인들은 자신도 20~30대를 거쳐왔기 때문에 ‘청년’을 더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젊은 정치인들도 ‘청년’에 어떤 구체적인 자기 비전을 담기 위한 노력에는 서툴렀다. 어느덧 10년여의 활동을 통해 ‘청년’ 문제에 관해 전문성을 축적해온 청년 활동가들이 있으나, 그들의 능력이 인정되지 않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처럼 ‘청년팔이’가 아직까지는 단 한 번도 레벨업을 한 적이 없기에 나는 이 정도는 확신할 수 있다. ‘청년’이 단순히 20~30대의 동의어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청년’에 대한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 이 정도 당위를 인정하는 태도 변화만으로도 ‘청년팔이’는 조금 더 윤리적인 차원으로, 조금 더 역량 있는 상태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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