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호

곽재식의 괴물여지도

털북숭이 신선 : 강원도 통천, 고성, 화천 등

“산속 은거해 잣만 먹었더니 불사의 존재 돼” 〈어우야담〉

  • 곽재식 소설가

    gerecter@gmail.com

    입력2019-10-13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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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학이 눈부시게 발전한 현대에도 많은 사람이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불로장생’ 비법에 관심을 쏟는다. 영원히 늙지도, 죽지도 않는 게 가능할까. 그것은 과연 축복일까. 우리 옛이야기 속에 남아 있는 신비한 ‘신선’ 이야기를 모아봤다.
    [일러스트레이션·이강훈/ 워크룸프레스 제공]

    [일러스트레이션·이강훈/ 워크룸프레스 제공]

    13세기 무렵 유럽에서는 “방황하는 유대인(Wandering Jew, Le juif errant)” 이야기가 유행했다. 내용은 이렇다. 오래전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릴 때 그와 마주친 유대인이 한 명 있었다. 그는 예수에게 무례한 행동을 했다. 그 때문에 천국에서도 지옥에서도, 영원히 받아주지 않는 존재가 됐다. 이 사람은 지금까지도 죽지 못한 채 온 세상을 떠돌고 있다. 

    유럽에는 이외에도 영생불사를 ‘으스스한 저주’처럼 묘사하는 이야기가 여럿 전해진다. 사후 세계에 대한 생각이 확고했던 중세 유럽 사람들에게 영영 천국에 가지 못하는 것은 끔찍한 형벌로 여겨졌을지 모른다.

    신선을 꿈꾼 사람들

    [GettyImage]

    [GettyImage]

    반면 우리나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단군부터 1000년 넘게 살다가 산신으로 변했다는 전설의 주인공이다. 신라의 대표적인 작가 최치원도 말년에 지리산에 들어가 신선이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우리나라엔 이처럼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사람에 대한 구전이 적지 않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진나라 시황제, 한나라 무제 등 어마어마한 부와 권력을 가진 인물도 죽음을 피하고자 노력했다. 그들이 불로초를 구하거나 신선이 되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은 역사에 뚜렷이 기록돼 있다. 

    중국 도교에는 사람이 신선이 될 수 있는 여러 수법이 전해온다. 흔히 연단(煉丹)이라고 하는데, 온갖 약재를 넣고 특이한 방법으로 잘 가공하는 것을 일컫는다. 많은 사람이 깊은 수련을 거듭하면 육체를 버리고 세상의 원리를 초월하는 경지로 나아갈 수 있다고도 믿었다. 그런 부류의 방법을 뭉뚱그려 시해(尸解)라고 했다. 



    우리나라에도 한때 연단, 시해 등에 대한 기록이 제법 많았다. 그러나 조선 시대 이후 한반도에서 불로불사의 귀한 약을 제조했다는 기록이 드물어진다. 반면 벽곡(辟穀)에 대한 전설이 늘어난다. 

    벽곡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곡식을 끊는다는 뜻이다. 이 이야기의 가장 흔한 형태는 이렇다. 어떤 사람이 속세를 떠나 산에 살게 됐다. 그때부터 보통 사람들이 먹는 밥 같은 음식을 끊고 특정한 나무 열매나 나물 같은 것만 먹었다. 그렇게 계속 지내자 점차 자연과 하나가 됐고, 마침내 늙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되는 경지에 이르렀다. 조선 시대에는 주인공만 바뀔 뿐, 이런 형태의 이야기가 크게 유행했다. 임진왜란 당시 유명 의병장 곽재우가 벽곡 수법을 터득해 신선이 됐다는 전설이 전해질 정도다.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금도 깊은 산속에서 외따로 머물며 자연에서 얻은 재료만으로 살면 건강이 아주 좋아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제법 많다.

    두류산 괴물

    김홍도의 ‘늦은 밤 피리 부는 선인’. 조선시대 한반도에는 신선 이야기가 유행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홍도의 ‘늦은 밤 피리 부는 선인’. 조선시대 한반도에는 신선 이야기가 유행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옛이야기에는 벽곡이 사람 신체에 미치는 영향이 다양하게 묘사돼 있다. 벽곡을 터득해 어떤 경지를 넘어서면 온몸에 긴 털이 돋아난다는 내용이 특히 많다.
     
    조선 후기 작가 홍만종이 쓴 ‘순오지’를 보자. 두류산 깊은 곳에서 지내던 한 승려가 이상한 일을 겪는다. 이 승려가 부엌 아궁이에 피워둔 불이 자꾸 꺼지는 것이다. 무엇인가가 밤마다 아궁이를 자꾸 헤집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 승려, 급기야 아궁이 옆에 몰래 숨어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 이윽고 밤이 깊어지자, 뭔가 알 수 없는 존재가 공중에서 날 듯이 내려오는 게 보였다. 사람만 한 크기의 그것은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쬐었다. 승려가 자세히 보려고 다가가자, 다시 날 듯이 도망치고 말았다. 

    승려는 다음 날 아궁이 근처에 그물을 쳐 그것을 사로잡았다. 다가가 보니 얼굴, 눈, 팔다리가 모두 사람과 같으면서 온몸이 긴 털로 뒤덮인 존재였다. 승려는 이렇게 물었다. 

    “사람이요? 신선이요? 왜 여기에 있소?” 

    그것은 혀를 움직이며 뭐라고 말을 하는 듯했다. 하지만 새 우는 소리 같은 것만 날 뿐 알아들을 수 없었다. 며칠 후 승려가 놓아주자 그것은 다시 바람과 같이 날아가버렸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배경 두류산이 정확히 어느 지역에 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한반도에는 이 이름으로 불리던 산이 여럿 있다. 산이 깊다는 묘사를 보면 함경도 두류산이나, 지금의 지리산이 아닌가 싶다. 

    이 이야기는 여러 나라에서 전해오는 설인(雪人) 전설이나 미국의 빅풋(Bigfoot) 설화를 떠올리게 한다. 설인, 빅풋은 모두 앞 이야기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몸집이 크고 털이 났으며 주로 숲에 서식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차이점이 있다면 빅풋은 멸종 위기의 특이한 짐승이라는 해설과 자주 엮인다. 빅풋이 멸종되지 않고 살아남은 네안데르탈인의 후예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반면 털로 뒤덮인 조선 괴물은, 보통 사람이 벽곡의 경지에 도달한 결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역시 ‘순오지’에 실린 얘기다. 7세기경 중국 사람 장손성이 여산에서 사냥을 하다 온몸에 털이 난 여성을 만났다. 이 여성은 나무와 나무 사이를 날 듯이 이동하고 있었다. 그물을 쳐서 붙잡자 자신을 “진나라 시황의 궁녀였다”고 소개하면서, “초나라 항우가 진나라 궁궐로 쳐들어올 때 산속에 숨었다가 먹을 게 없어 솔잎을 씹어 먹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견디다 보니 죽지 않는 몸이 됐다는 것이다. 진나라는 서기 207년 멸망했다. 이 여성은 적어도 수 백 년간 살아왔다는 얘기가 된다. ‘순오지’ 저자 홍만종은 “조선 두류산에서 본 ‘이상한 것’과 이 진나라 궁녀 이야기가 비슷하지 않으냐”고 덧붙였다. 

    조선 시대 야담집 ‘증보 해동이적’에 있는 ‘안시객(安市客)’이라는 제목의 기록도 눈길을 끈다. 이 책은 ‘순오지’ 저자 홍만종이 쓴 ‘해동이적’을 황윤석이 보충해 펴낸 일종의 개정판이다. 

    안시객 이야기의 배경은 삼국시대 고구려와 당나라의 격전지 안시성으로 향하는 길이다. 묘향산 어디쯤이라고 한다. 조선 시대 한 사람이 그 주변을 거닐다가 깃털에 뒤덮인 이상한 사람을 만난다. 그는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따라왔던 당나라 병사였는데, 고구려가 전쟁에서 승리하자 죽을 위기를 피하려고 정신없이 도망쳐 산속으로 숨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산에 있는 것만 먹으며 버티다 보니 몸이 깃털로 뒤덮였고, 거의 1000년이 지난 그때까지 살아 있게 됐다고 한다. 이 또한 진나라 궁녀 이야기와 아주 유사하다.

    파란색 털로 뒤덮인 사람

    영화 ‘늑대소년’의 한장면.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늑대소년’의 한장면.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이런 전설은 조선 시대에 널리 퍼졌던 듯하다. 신선술에 관심이 많던 일부 사람 사이에만 돌던 이야기 수준에 머물지 않았던 것 같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이야기책 ‘어우야담’에도 털로 뒤덮인 모습으로 변한 사람 이야기가 꽤나 자세하게 나와 있다. 

    이 이야기의 목격자는 조순이라는 승려다. 조순은 젊은 시절 금강산에서 이리저리 떠돌다 우연히 시왕백천동(十王百川洞)이라는 곳에 이르게 된다. 그곳에 가니 이상하게도 바위틈마다 잣이 가득 쌓여 있었다. 무엇인가가 잣을 까먹은 흔적이 있어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니 축축한 땅에 사람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조순은 누가 그곳에 머물렀는지 궁금해 발자국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몇 리쯤 갔나 싶을 즈음, 그곳에서 사람 비슷한 존재를 만났다. 사람 같은 외모를 하고 있으나 몸 전체가 한 자(약 30cm) 정도 되는 길이의 파란색 털로 뒤덮인 존재였다. 그것은 처음에 당황한 듯 몸을 피하려고 우물쭈물했지만, 조순이 인사를 하고 말을 건네자 호남 지방 사투리로 대답을 해왔다. 

    “나는 본래 호남 사람으로 승려가 돼 이 산 깊이 들어왔습니다. 산속 잣나무에 열리는 잣을 먹으며 굶주림을 버텼습니다.” 

    그러다 보니 점차 체질이 변하는 듯했고, 마침내 온몸에 털이 돋아나 지금은 옷을 입지 않아도 따뜻한 몸으로 변했다고 했다. 나이는 이미 100세를 넘겼다고 설명했다. 조순은 그날 밤 그 사람과 함께 잠을 잤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는 간 곳을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조순 역시 말년에는 외딴곳에 혼자 흙집을 짓고 살았으며, 어느 날 사라져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 없었다는 게 이 이야기의 결말이다. 

    정말 온몸이 털로 뒤덮인,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지금도 깊은 산 속 어딘가에서 숨어 지내고 있을까? 사실 몸에 털이 많이 생기는 다모증(hypertrichosis)은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는 질병이다. 혈압약 부작용 등으로 후천적으로 생기기도 하고, 태어나면서부터 온몸에 털이 많은 사람도 있다.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이런 사람이 세상 시선을 피해 외따로 산속에서 살았다면 어떻게 될까. 때로는 ‘늑대인간’ 전설이, 또 때로는 ‘안시객’ 전설이 만들어졌을 수 있다. 

    털로 뒤덮인 사람은 늑대 같은 짐승에 가까워 보이지만, 의외로 그는 신선일지도 모른다. 겉모습이 좀 다르다고 해서 사악한 늑대인간이라고 대뜸 의심할 게 아니라, 무슨 사연으로 이 깊은 산속에서 혼자 지내게 됐는지 다가가 말을 걸어보는 게 어떨까.


    곽재식 | 1982년 부산 출생. 대학에서 양자공학, 대학원에서 화학과 기술정책을 공부했다. 2006년 단편소설 ‘토끼의 아리아’로 작가 생활을 시작했으며 소설집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 교양서 ‘로봇 공화국에서 살아남는 법’ ‘한국 괴물 백과’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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