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호

곽재식의 괴물여지도 | 조선 땅에 나타난 사자

산예 : 전국 각지

“크기는 개만 하고 온몸이 새파란 사자” 〈어우야담〉

  • 곽재식 소설가

    gerecter@gmail.com

    입력2020-03-13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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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과 물의 경계가 지금보다 훨씬 뚜렷하던 시절, 사람들은 평생 가볼 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다. 소문으로만 전해오는 외국의 신비한 풍토와 동·식물 이야기는 무수한 전설의 토대가 됐다.
    일러스트레이션·이강훈/ 워크룸프레스 제공

    일러스트레이션·이강훈/ 워크룸프레스 제공

    영국 작가 헨리 리가 19세기에 펴낸 책 ‘타타리의 식물 양(The Vegetable Lamb of Tartary)’에는 중세 유럽에서 널리 퍼진 전설 한 편이 실려 있다. 머나먼 나라에 가면 양이 열리는 기이한 식물이 있다는 내용이다. 과일이나 곡식 대신 털이 복슬복슬한 양이 열린다니, 얼마나 신비한가. 중세 유럽에서 이 생물은 동물과 식물 중간 성격을 가진 괴물로 여겨졌다고 한다. 

    현대 학자들은 왜 이런 전설이 유럽에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어느 정도 합의된 의견을 갖고 있다. 과거 유럽에서 옷을 만드는 가장 흔한 재료는 양털이었다. 그런데 아시아에는 목화솜에서 얻은 면으로 옷을 지어 입는 지역이 많았다. 무역을 통해 면직물을 접한 유럽 사람들은 ‘양털에 해당하는 것을 공급하는 식물’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것이다. 그것이 이리저리 퍼지는 과정에서 신비한 살이 더해져 ‘양이 열리는 식물’ 소문이 생겨났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렇게 외국의 독특한 풍습이나 동·식물 이야기가 신비화되면서 괴물 이야기로 재탄생하는 일은 세계 각지에서 흔하게 일어났다. 예를 들어 호랑이가 살지 않는 지역인 일본 사람들은 오랫동안 호랑이를 신비롭고 이국적인 동물로 여겼다. 삼국시대에 한반도를 다녀간 일본인이 호랑이를 만나 이상한 경험을 했다는 내용의 이야기가 지금도 남아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장수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가 조선 호랑이를 사냥한 이야기도 괴물 전설처럼 널리 퍼졌다. 한동안 일본 화가들은 ‘가토 기요마사의 호랑이 사냥’을 소재로 한 그림을 즐겨 그렸다. 나중에는 이것이 싸움에 능한 일본인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 됐다. 20세기 일본의 대외 침략 시기에 일본 화가들이 같은 소재의 그림을 또 다수 발표한 이유가 여기 있다.

    사막 건너 멀리멀리

    우리나라에서는 사자가 그렇게 신비화됐다. 사자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 사람이 실제로 보기 어려웠던 동물이다. 그러나 사자의 존재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고대부터 한반도에 전해진 상태였다. 많은 사람이 오랜 세월 사자를 상상했다. 그 과정에서 실제 모습이나 습성과 무척 다른 전설이 창조돼 퍼져나갔다. 



    사자에 대해 묘사한 옛글 중에는 신라 작가 최치원이 쓴 시 ‘산예(狻猊)’가 유명하다. ‘산예’는 사자를 일컫는 말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막을 멀리멀리 걸어걸어 만리 길을 왔구나 遠涉流沙萬里來 

    털가죽 옷은 다 해지고 먼지만 부옇게 덮였는데 毛衣破盡着塵埃 

    머리를 흔들고 꼬리를 치는 모습에는 인덕이 배어 있어 搖頭掉尾馴仁德 

    힘찬 기운 이 같은 것 백 가지 짐승의 재주 중에 또 있을까 雄氣寧同百獸才

    이 시는 ‘삼국사기’의 ‘악지(樂志)’ 부분에 실려 있다. 신라 음악에 대해 기록한 부분이다. 흔히 ‘향악잡영(鄕樂雜詠)’이라고 하는 다섯 수의 시 중 하나다. ‘산예’ 외에 다른 시는 각각 ‘금환(金丸)’ ‘월전(月顚)’ ‘대면(大面)’ ‘속독(束毒)’으로, 모두 신라 시대에 유행한 춤과 놀이 장면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산예’ 또한 사자를 표현한 춤, 즉 사자춤을 묘사한 게 분명하다. 실제 사자를 볼 기회가 거의 없던 당시 신라 사람들은 사자춤을 통해 사자라는 동물에 대한 생각을 만들어갔을 것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향악잡영’의 ‘향악’이 신라 고유 음악을 일컫는 말이라는 점이다. 낯선 땅 맹수인 사자를 표현한 춤을 최치원은 신라 고유의 춤으로 여겼다. 그렇다면 최치원이 살던 시대에 이미 사자와 그 동물을 춤으로 표현하는 것이 충분히 정착돼 있었다는 얘기다. 

    이 생각의 근거가 될 만한 자료도 있다. ‘삼국사기’에는 가야 음악가 우륵이 신라에 가서 여러 음악을 작곡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작곡한 노래 중에 ‘사자기(獅子伎)’라는 제목이 보인다. 직역하면 사자 재주라는 뜻이다. 춤꾼이 사자탈을 쓰고 재주를 부리는 사자춤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우륵의 활동 시기는 6세기 중엽으로, 9세기 후반 사람인 최치원보다 300년 정도 앞선다. 이 정도 시간이라면 사자춤이 신라화해 사회 저변에 깊이 스며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악귀를 막아주는 힘센 동물

    일본 악서 ‘신서고악도’에 실려 있는 ‘신라박’ 그림. 
신라박은 동물 가면을 쓰고 춤을 추는 신라의 놀이 문화를 일컫는다. 이 그림은 사자 가면이 붙은 의상에 두 사람이 들어가 일어선 모습이다. [한국전통연희사전 제공]

    일본 악서 ‘신서고악도’에 실려 있는 ‘신라박’ 그림. 신라박은 동물 가면을 쓰고 춤을 추는 신라의 놀이 문화를 일컫는다. 이 그림은 사자 가면이 붙은 의상에 두 사람이 들어가 일어선 모습이다. [한국전통연희사전 제공]

    우리나라의 사자춤 전통은 이후에도 꾸준히 이어져 오늘까지 내려오고 있다. ‘북청사자놀음’은 함경남도 북청 지역에서 유행한 사자춤 놀이를 일컫는다. ‘한국전통연희사전’에 실린 내용을 보면 ‘북청사자놀음’에서 사자는 마을의 이집 저집을 돌아다니며 복을 빌어준다. 이때 집안 이곳저곳에서 무엇인가를 먹는 시늉을 하는데 이것은 집안에 있는 악귀나 사악한 기운을 사자가 잡아먹는 것을 나타낸다. 사자는 부엌에서 조상신에게 절하기도 한다. 놀이 중에는 사자가 뭔가를 잘못 먹고 쓰러졌다가 의원이 주는 귀한 약을 먹고 다시 살아나는 장면도 나온다. 북청사자놀음이 유행한 지역에는 어린아이가 사자를 타면 건강해진다거나, 사자놀음 때 쓰는 사자탈의 털을 잘라 갖고 있으면 장수한다고 믿는 풍속도 있었다고 한다. 

    전국 각지에서 유행한 사자춤은 ‘북청사자놀음’ 외에도 더 있다. 경북 안동의 ‘하회별신굿놀이’에도 사자가 등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사자는 무대 주변의 잡스러운 것, 사악한 것을 정리해 쓸어버리는 구실을 한다. 

    이렇게 모아놓고 보면 한국인이 생각한 사자의 이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사막을 건너 먼 곳에서 오는 짐승, 음악에 맞춰 흥겹게 춤을 출 수 있는 짐승, 악귀 같은 사악한 것을 잡아먹는 강하고 정의로운 짐승이다. 사자 털을 갖고 있으면 장수한다고 생각했다거나, 사자를 탄 어린이가 건강해진다고 믿었다는 것을 보면, 사자가 사람으로부터 나쁜 기운을 쫓아내 병을 막아준다고도 상상했던 것 같다. 

    ‘산예’가 포함된 ‘향악잡영’의 시들은 흔히 중앙아시아 색채가 짙다고 평가 받는다. ‘산예’에서 사자가 사막을 걸어왔다는 대목을 봐도 그렇다. 한국인의 사자에 대한 생각에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외래문화로는 불교가 손꼽힌다. 

    지금은 사자라고 하면 아프리카사자를 가장 먼저 떠올리지만, 사실 인도 서부 지역에도 야생 사자가 있었다. 인도사자 내지는 아시아사자라고 하는 종류로 지금은 멸종 위기를 겪고 있다. 남은 수가 불과 300마리에서 400마리 정도로 추산된다. 큰 농장 한 군데에서 키우는 소의 마릿수보다도 적다. 그렇지만 과거에는 훨씬 더 많은 아시아사자가 매우 넓은 영역에 퍼져 살았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클레스가 사냥했다고 하는 ‘네메아의 사자’도 아시아사자와 가까운 종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인도 전역에서 사자를 흔히 접할 수 있었던 시대의 영향인지, 불경을 비롯한 인도불교 문헌에는 사자가 많이 나온다. 이들 문헌에서 사자는 모든 것을 지배하고 우두머리로 군림하는 고귀하고 강력한 지위의 상징으로 묘사된다. 비할 데 없는 최고 위엄을 표현하기도 한다. 석가모니의 언변을 사자의 포효에 빗대 ‘사자후(獅子吼)’라고 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불교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 옛사람들 마음속에는 이러한 사자 모습도 강하게 자리 잡은 듯하다. 신라 시대에 완성된 분황사 모전석탑 주변의 사자 석상은 고대 사자 조각상의 표준이라고 할 정도로 조각상의 요소를 잘 갖춘 모양이다. 불국사 다보탑의 사자 석상도 유명하다. 그런데 이런 조각상을 통해 사자 모습이 많이 퍼져 나간 영향인지, 옛사람들은 사자를 조각상 크기에 가까운 좀 작은 짐승으로 상상한 것 같다. 조선 중기에 편찬된 이야기 책 ‘어우야담’에는 사자에 관해 당시 돌고 있던 풍문이 수록돼 있다.

    집채만 한 호랑이

    경북 경주시 분황사 사자 석상. [김성남 기자]

    경북 경주시 분황사 사자 석상. [김성남 기자]

    이야기의 주인공은 함경도 지역, 조선 북쪽 국경의 요새를 지키는 장수다. 그가 주변을 수색하고자 끝없이 펼쳐져 있는 숲속으로 들어갔다가 갑자기 커다란 호랑이를 만났다. 큰 호랑이와 맞닥뜨렸으니 굉장히 놀라고 겁도 났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호랑이는 장수를 공격하기는커녕 관심도 두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미친 듯이 도망쳤다고 한다. 무언가에 쫓기는 듯 보였다. 창칼과 활로 무장한 사람을 압도할 만큼 무시무시하게 큰 호랑이가 대체 무엇에 겁을 먹고 그렇게 도망친 것일까. 장수는 그 정체를 곧 목격한다. 호랑이가 황급히 바위굴로 몸을 피한 뒤 이상한 짐승 하나가 뒤이어 나타난 것이다. 호랑이를 쫓아온 짐승은 크기가 개만 하고 몸 전체가 파란색이며 눈은 금방울 같았는데, 그 형상이 그림에서 본 사자와 비슷했다고 한다. 이 짐승은 호랑이를 찾지 못하자 두리번거리다가 사라졌다. 

    ‘어우야담’의 저자 유몽인은 이 이야기에 덧붙여 ‘사자는 하루에 3000리를 갈 수 있다’는 전설을 소개하면서 사자가 워낙 빨리, 멀리 다닐 수 있으니 먼 외국에서 우연히 조선 땅까지 들어온 것 아니겠느냐는 의견을 밝힌다. 

    이 이야기에서 사자는 개 크기에 비견될 만큼 작지만 호랑이를 벌벌 떨게 할 만큼의 위력을 가진 짐승으로 묘사된다. 색깔이나 크기 모두 실제 사자와는 판이하다. 오히려 고려 시대 만들어진 국보 60호 청자 사자형 뚜껑 향로에서 볼 수 있는, 작은 도자기 사자 모습과 닮은 듯 느껴진다.

    단양의 동굴사자

    혹시 오래전 사자가 한반도에 살았을 가능성은 없을까. 충북 단양의 유명 관광지인 도담삼봉에서 멀지 않은 곳에 금굴이라고 하는 작은 바위굴이 하나 있다. 선사시대 유적지로, 구석기시대부터 한반도에 문명이 시작된 청동기시대까지 오랜 기간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이 굴에서는 사람이 사냥해 동굴에 갖고 왔을 여러 동물 뼈도 같이 발견됐다. 그중에는 사슴, 멧돼지, 곰, 여우, 너구리처럼 지금도 한반도에 사는 동물 뼈가 있었다. 이외에 지금은 멸종돼 세상에서 볼 수 없는 동물 뼈도 여럿 같이 나왔다. 지금의 원숭이와 가까운 동물, 지금의 들소와 비슷한 동물 뼈 등이다. 한반도에 살았을 거라고 믿기 어려운 하이에나와 가까운 동물, 코뿔소와 유사한 동물 뼈도 발견됐다. 

    특히 인상적인 건 보통 동굴사자(Panthera spelaea)라고 하는, 오늘날의 사자와 비슷하고 호랑이를 닮기도 한 멸종 동물 뼈 또한 그 유적지에 있었다는 점이다. 동굴사자는 몸무게가 수백kg에 달할 만큼 크게 자랄 수 있었던 동물로 추정된다. 먼 옛날 동굴사자가 한반도의 깊고 깊은 산중에 살았다면 호랑이를 잡아먹을 만큼 무서운 존재였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기이한 동물 흔적이 여럿 발견된 단양 지역에 이국적인 동물에 대한 전시관이나 공원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우리 선조들은 특이한 동물 이야기를 종교의 일부로, 때로는 춤과 놀이 소재로 받아들였다. 우리가 현대 과학을 활용해 이런 이야기를 풀어본다면 잘 어울리는 일이 될 것이다.


    곽재식 | 1982년 부산 출생. 대학에서 양자공학, 대학원에서 화학과 기술정책을 공부했다. 2006년 단편소설 ‘토끼의 아리아’로 작가 생활을 시작했으며 소설집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 교양서 ‘로봇 공화국에서 살아남는 법’ ‘한국 괴물 백과’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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