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호

사바나

‘유시민 키즈’의 新유시민 독후감 “정치비평 은퇴 약속 지켰으면…”

  • 김우정 기자

    friend@donga.com

    입력2020-05-24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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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 작가’ 책 읽으며 자란 2030세대

    • ‘진보 지식인’이 진영논리 두둔하다니…

    • 2003년 ‘조개’에서 2018년 ‘축구’까지

    • 곡학아세 꾸짖던 옛 모습 그리워

    ‘사바나’는 ‘회를 꾸는 , 청년’의 약칭인 동아일보 출판국의 뉴스랩(News-Lab)으로, 청년의 삶을 주어(主語)로 삼은 이들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입니다. <편집자 주>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 [양회성 동아일보 기자]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 [양회성 동아일보 기자]

    “유시민 작가님의 책을 참 좋아해요. 지난해 낸 ‘유럽 도시기행 1’은 지금껏 읽은 기행문 중에 제일 재밌었습니다. 그런데 정치 뉴스란에서 유 작가님을 만나면 안타까울 때가 많아요.” 

    직장인 이모(31) 씨는 유시민(61)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팬입니다. 대학생 시절부터 유 이사장의 책을 즐겨 봤다고 합니다. 가장 좋아하는 책은 ‘어떻게 살 것인가’(2013·생각의 길, 초판 기준). 유 이사장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고 낸 첫 책입니다. 한때 작가가 꿈이었기에 ‘전업 작가’ 유 이사장을 동경했습니다. 사회참여와 문필 활동 모두 챙기는 모습을 롤 모델 삼았습니다. 그런 이씨는 최근 유 이사장의 행보를 보고 ‘어떻게 살 것인가’의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지난 10년간 정치는 내 직업이었다. 내 일이었다. 그런데 글쓰기와 달리 정치는 내게 일인 동시에 놀이일 수는 없었다. 정치활동의 일상적 과정이 내게 즐겁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치를 직업으로 삼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어떻게 살 것인가’ 186쪽)

    “정치 은퇴 진심이라 믿어”

    4월 10일 팟캐스트 ‘유시민의 알릴레오’에서 21대 총선 ‘범진보 180석’을 예측한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 [‘유시민의 알릴레오’ 공식 유튜브 채널]

    4월 10일 팟캐스트 ‘유시민의 알릴레오’에서 21대 총선 ‘범진보 180석’을 예측한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 [‘유시민의 알릴레오’ 공식 유튜브 채널]

    ‘정치인 유시민’도 지지했던 이씨는 이 구절에 드러난 유 이사장의 정치 은퇴 후일담이 진심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비평을 이유로 정치권에서 회자되는 그가 안타깝다고 합니다. 이씨의 말입니다. 



    “총선에서 여당이 몇 석을 얻을지 누가 정확히 알겠어요. 예측이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죠. 하지만 기왕 정치에서 은퇴했으니, 정치권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유 작가님이 약속대로 정치비평이 아닌 전업 작가로 활동했으면 합니다.” 

    유 이사장은 ‘노스트라다무스’ 반열에 등극했습니다. 4월 10일 팟캐스트 ‘유시민의 알릴레오’에서 “이번 총선에서 범진보 180석이 가능하다”는 취지로 말했습니다. 당시 유 이사장의 낙관론에 더불어민주당은 ‘역풍’을 우려해 곤혹스러움을 드러냈고, 야당은 여권의 ‘오만함’을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4월 15일 실시된 21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163석)·더불어시민당(17석)은 180석을 얻었습니다. 5월 13일 민주당에 시민당이 흡수·합당돼 의석수는 177석이 됐습니다(시민당에서 소수정당 출신 당선자 2명이 원 소속 당으로 복귀, 양정숙 당선자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제명). ‘예언’이 들어맞았지만 유 이사장은 정치비평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유 이사장은 정계 은퇴 후 작가를 자처해 왔습니다. 쓴 책도 많고 베스트셀러도 여럿입니다. 1984년 이른바 ‘서울대 프락치 사건’(대학생들이 민간인을 프락치로 오인해 폭행한 사건)에 연루된 유 이사장은 재판정에 제출한 ‘항소이유서’로 유명세를 치릅니다. 그는 ‘항소이유서’가 실린 ‘아침으로 가는 길’(1986·학민사)을 시작으로 지난해 ‘유럽도시기행 1’(2019·생각의길)까지 공저 포함 30여 권의 책을 썼습니다. ‘후불제 민주주의’(2009·돌베개), ‘국가란 무엇인가’(2011·돌베개), ‘나의 한국현대사’(2014·돌베개) 등 주요 저서는 각각 10만 부 이상 판매됐습니다.

    ‘유 작가’ 책과 함께한 2030세대

    [돌베개 제공]

    [돌베개 제공]

    유 이사장 저서의 특징은 역사나 경제, 법학 등 딱딱한 주제를 국내외의 다양한 사례로 쉽게 풀이해 준다는 것입니다. 덕분에 ‘밀레니얼 세대’, 즉 2030세대 중에는 ‘유 작가’의 팬이 적잖습니다. 

    최근 유 이사장은 그간 쓴 글에 위배되는 행보를 보이는 듯합니다. 지난해 이른바 ‘조국 정국’에서 보인 언동이 대표적입니다. 2030세대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의 입시부정·부정축재 의혹에 분노했습니다. 조 전 장관 일가의 행태가 2030세대가 중시하는 공정성의 가치를 위배했기 때문입니다. 유 이사장은 한국 사회의 차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지만 사회의 생산 체계에서 차지하는 지위, 부를 획득하는 방식, 생산된 부를 처분할 수 있는 권한은 같지 않다. 이런 차이를 이유로 법률을 다르게 적용하면 그것이 곧 실제적인 신분제도가 된다. (…) 대한민국에는 사실상 헌법이 금지한 특수계급 제도가 존재하는 셈이다.”(‘후불제 민주주의’ 128~129쪽) 

    그랬던 유 이사장은 대학생들이 조국 당시 장관의 사퇴를 요구하자 배후를 의심하고 나섭니다. 지난해 8월 29일 그가 한 라디오 방송에서 한 말입니다. 

    “자유한국당 패거리들의 손길이 어른어른하는…. 순수하게 집회하러 나온 대학생들이 많은지 자유한국당 관계자들이 많은지는….” 

    직장인 오모(34) 씨는 대학생 시절부터 유 이사장의 책을 즐겨 읽었습니다. 그가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에 참여한 것도 유 이사장 등 ‘좌파 논객’ 영향에 힘입은 바 컸습니다. 오씨는 “유 이사장이 집회에 나선 대학생들을 배후 운운하며 비난해 안타까웠다. 자신과 다른 주장을 펴는 집회·시위가 불순한 것은 아니다”라며 “여전히 현 여당을 지지하는 편이긴 하지만, 양심적 지식인이라 생각했던 유 이사장이 지나치게 정권을 감싸고도는 것은 문제라 본다”고 말했습니다. 

    유 이사장은 갑자기 진영논리를 옹호하기도 했습니다. 조 전 장관의 진퇴를 두고 여론이 분열돼 진영논리가 팽배한 때였습니다. 지난해 10월 1일 한 종편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해 “진영논리가 왜 나쁜가? 주권자인 시민에게 진영논리에 빠지지 말라고 하는 것은 멍청한 것”이라고 말했는데요.

    “책에선 교양인, 현실에선…”

    이후에도 “나 같은 사람은 보수정당에서 세종대왕님이 나오셔도 안 찍는다”(2월 21일 한 공중파 프로그램 출연 시 발언)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가 편향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쓴 글이 떠오릅니다. 

    “‘불관용’은 민주주의를 내부에서 파괴하는 폭탄과 같다. 불관용으로 무장한 보수는 극우가 된다. 히틀러를 보면 안다. 불관용으로 무장한 진보는 극좌가 된다. 스탈린을 보면 된다.”(‘후불제 민주주의’ 71쪽) 

    대학원생 권모(28) 씨는 “진보 지식인의 가치는 홍세화 씨의 말처럼 ‘톨레랑스’(tolerance·관용) 아닌가”라고 반문했습니다. 권씨는 2016년 말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외치며 촛불집회에 참여했습니다. 이듬해 나온 유 이사장의 ‘국가란 무엇인가’ 개정신판을 읽으며 국가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기도 했답니다. 권씨는 “유 이사장이 현 정부를 도우려면, 대다수 국민이 진영논리에 지쳐 있음을 명심해 균형 있는 시각에서 정부에 조언해야 한다”고 꼬집었습니다. 

    ‘조국 정국’ 전에도 유 이사장은 2030세대의 공분을 샀습니다. 2018년 12월 21일 한 강연에서 문재인 정부에 대한 20대 남성의 지지율이 낮아진 까닭을 이렇게 풀이했습니다. 

    “우리가 군대도 가야 되고, 여자들보다 특별히 받은 것도 없고 미혼인데. 자기 또래 집단에서 보면 여자들이 훨씬 유리하단 말이에요. 자기들은 축구도 봐야 하는데, 여자들은 축구도 안 보고. 자기들은 롤(LOL·온라인 게임)도 해야 되는데 여자들은 공부하니까.” 

    유 이사장의 발언에선 남녀를 모두 선입견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읽힙니다. 문 정부에 대한 20대 남성의 불만을 ‘축구와 게임’ 하느라 바빠 여성에 뒤처진 탓으로 돌립니다. 모든 여성이 공부를 잘하는 것도, 축구와 게임을 싫어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여성에게도 온당한 평가는 아닙니다. 

    대학생 김모(23) 씨는 책과 현실 속 유 이사장 사이에 괴리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김씨는 형에게 유 이사장의 책 ‘청춘의 독서’(2009·웅진지식하우스)를 선물 받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김씨는 “책을 통해 만난 유 이사장은 교양인이었다. 그런데 그가 최근 실제 세상에 던지는 말들은 그저 진보 ‘꼰대’의 훈계처럼 들린다”고 말했습니다.

    성폭력 문제가 ‘작은 일’?

    유 이사장의 ‘성인지 감수성’은 여러 차례 논란이 됐습니다. 2002년 개혁국민정당 당원 MT에서 한 남성 당원이 여성 당원을 차 안으로 끌고 가 강제로 입을 맞추는 등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당내 여성위원회에서 지도부의 미진한 조치를 문제 삼았습니다. 이에 당시 유시민 개혁국민정당 집행위원이 당 집행위원회 석상에서 ‘해일이 일고 있는데 조개 줍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유 이사장은 여성위원회 인터넷 게시판에 “개혁당 여성회의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며 “당이 먼저인지 여성이 먼저인지 모르겠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2002년 창당한 개혁국민정당은 당시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이던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는 ‘친노 정당’이었습니다. 이듬해 열린우리당이 창당하자 유 이사장은 개혁국민정당을 해산하고 열린우리당에 합류합니다. 유 이사장의 글이 또 떠오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종류의 신분제도에서 가장 큰 불이익을 받은 특수계급은 여성이었다. 심지어는 사회를 지배한 특수계급 안에서도 여자는 남자 아래에 있었다.”(‘후불제 민주주의’ 129쪽) 

    물론 2006년 보건복지부 장관 내정자로 국회 인사청문회에 선 유 이사장은 “그런(조개 관련) 발언을 그런 맥락에서 한 적이 없다”면서 이렇게 해명했습니다.
     
    “여러 일정을 제쳐두고 당내 작은 일로 회의 시간이 소모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해변에서 조개껍질 들고 놀고 있는 아이와 같다’고 말한 것이 왜곡돼 속상하다.” 

    유 이사장은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어용 지식인’을 자처하고 나섰습니다. 국어사전은 어용을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권력자나 권력기관에 영합하여 줏대 없이 행동하는 것을 낮잡아 이르는 표현”이라고 정의합니다. 

    오씨는 유 이사장의 ‘어용 지식인’ 발언이 농담이라고 믿었습니다. 그가 저서에서 한국의 진보·보수를 막론한 곡학아세를 강도 높게 비판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 유 이사장이 국회의원 시절 낸 ‘대한민국 개조론’(2007·돌베개)의 일부분입니다. 


    “왕의 기분을 달콤하게 만드는 아부만”

    “자칭 진보는 진보대로, 자칭 보수는 보수대로, 국민이 듣기 좋아할 말만 하면서 진실을 감추고 책임을 회피합니다. 제가 보기에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중도를 자처하는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책임의식은 실종되고 대중의 심리에 영합하는 감언이설이 판치고 있습니다. 국민에게서 권력을 위임받기 위해, 정치인과 지식인과 언론인들이 거대한 국민사기극을 벌이고 있습니다. 왕인 국민의 귀에 거슬리는 직언을 하는 사람은 드물고, 왕의 기분을 달콤하게 만드는 아부만 경쟁적으로 합니다.” (‘대한민국 개조론’ 121~122쪽) 

    그의 책을 읽고 자란 오씨의 말입니다. “유 이사장은 책을 통해 후배 세대에게 지적 자극을 주고 비판 의식을 길러줬다고 생각합니다. 곡학아세를 꾸짖던 그의 모습이 그립네요. 이제 자기 저작과 스스로의 삶 사이의 균열을 돌아봤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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