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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 아카이브] ‘신동아’로 본 故 전옥주의 일생

1980년 ‘5‧18 가두방송’…1996년 6월호 최초 육성 고백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신동아 아카이브] ‘신동아’로 본 故 전옥주의 일생

  • ● 72세 일기로 2월 17일 별세
    ● “시민 여러분, 즉시 도청 앞으로 모여 계엄군에 대항해 싸웁시다!”
    ● “그해 5월 광주에서 내가 얻은 건 슬픔과 공포만은 아니었다”
2월 17일 향년 72세로 타계한 고 전옥주 씨. 
[뉴시스]

2월 17일 향년 72세로 타계한 고 전옥주 씨. [뉴시스]

2월 17일,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의 참여를 호소하는 가두방송의 주인공 전옥주(본명 전춘심‧72) 씨의 별세 소식이 전해졌다. ‘5‧18의 꽃’으로 불렸던 전 씨가 모진 세월을 뒤로한 채 자택 인근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는 소식에 많은 이들이 애도했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여사의 방송은 5월 광주의 절규였고, 저항의 깃발이었다”고 했고, 정세균 국무총리는 “우리 민주주의는 당신께 큰 빚을 졌다”고 했다. 

2007년 개봉한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배우 이요원이 맡은 ‘신애’ 역이 바로 전옥주 씨를 모델로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전옥주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는 누구이며, 1980년 5월 끓어오르는 광주 금남로에서 무슨 일을 했을까. 그로 인해 그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싸웁시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고 전옥주 씨가 계엄군과 시민들이 대치한 상황에서 가두방송을 하고 있다. 1980년 5월 19일부터 21일까지 차량에 탑승해 확성기로 방송을 하며 계엄군의 잔혹한 진압을 알리고 헌혈과 항쟁 동참을 촉구했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제공]

5·18민주화운동 당시 고 전옥주 씨가 계엄군과 시민들이 대치한 상황에서 가두방송을 하고 있다. 1980년 5월 19일부터 21일까지 차량에 탑승해 확성기로 방송을 하며 계엄군의 잔혹한 진압을 알리고 헌혈과 항쟁 동참을 촉구했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제공]

“시민 여러분, 저 잔악한 공수부대원들을 몰아낼 때까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싸웁시다.” 

“당신들도 우리 편입니다. 제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우리는 맨주먹입니다. 최루탄을 쏘지 마십시오.” 

“시민 여러분, 물러나선 안 됩니다. 최후의 한 사람까지 힘을 모아 우리 손으로 광주를 지켜냅시다.”



1980년 5월 19일 밤 민주화 열기로 달아오른 광주 금남로에서 성난 시민들 한가운데로 뛰어든 이는 서른한 살의 전 씨였다. 1949년 12월 전남 보성경찰서 사택에서 태어난 전 씨는 6세부터 무용을 시작해 원광대 체육학과에서 당시 고전무용이라고 부르던 한국무용을 전공한 뒤 무용 강사로 일하고 있었다. 

운명의 그날, 서울에서 일을 마치고 밤 9시쯤 송정리역에 도착했을 때 광주 입구 검문소 주변에는 “광주시 전체가 쑥밭이 되었고 들어가면 모두 죽는다”는 소문이 쫙 퍼져 있었다. 그럼에도 전 씨는 지나가는 트럭을 얻어 타고 시내로 들어갔고, 집 밖을 나서지 말라는 가족들의 만류를 뒤로 한 채 금남로로 향했다. 

밤 11시가 다 된 시간임에도 계엄군과 대치 중인 시위대를 만났고, 도와달라는 학생들의 요청에 전 씨는 동사무소의 스피커와 앰프를 실어 나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가두방송단에 합류했다. 어릴 적 창(唱)과 웅변을 배워 남달리 우렁차고 낭랑한 목소리를 가진 그가 얼떨결에 마이크를 잡은 것이 이후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전 씨는 장갑차를 앞세운 계엄군과 맨몸으로 맞서며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시민들 사이로 핸드마이크를 부여 쥔 채 시위를 주도했다.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 그 여자를 저격하라”

당시 광주에 투입된 11공수여단 소속 나모 씨가 쓴 수기 ‘내가 보낸 화려한 휴가’에는 전 씨의 목소리에 대한 언급이 있다. 

“그 여자의 목소리는 밤하늘의 시민들에게는 슬픔과 울분, 분노 등을 온 몸으로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목소리 또한 얼마나 고운지 처음에는 불에 탄 문화방송국의 아나운서가 화가 나서 선무방송을 하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너무나도 심금을 울리는 선무방송이었다. 그래서 우리 요원들도, 지휘관들도 그 여자를 저격해 살상하려고 집요하게 추적했으나 시위대에 둘러싸여서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전에는 저격할 수가 없었다.” 

앞장 서 시위 군중들을 이끌던 전 씨는 5월 27일 홀연 사라졌다. 그로부터 열흘 간 상상도 할 수 없는 고문과 공포가 이어졌다. 전 씨는 간첩으로 몰려 계엄군에 모진 고문을 당했고, 계엄 포고령 위반과 내란음모 등 죄목으로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에서 옥살이를 하다 1981년 4월 3일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간첩 누명도 억울한데…

사면됐다고 끝난 게 아니었다. 그는 ‘요시찰’ 인물이었다. 1986년까지 거주지에서 4km만 벗어나도 관할서에 신고해야 했고, 전화는 24시간 도청됐으며, 한 달에 한 번씩 자술서를 써야 했다. 이사를 가면 담당경찰이 와서 조서를 받아가 주위 사람들은 그를 사기 치고 도망 와 숨어사는 인물로 알고 회피하고 손가락질했다. 그사이 어머니는 외동딸의 소식에 충격을 받고 쓰러졌고 뇌종양을 앓다 1986년 결국 세상을 떠났다. 

고문 후유증으로 생긴 심신의 상처는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신경쇠약과 실어증에 걸려 한동안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전철을 타면 폐쇄공포증으로 극도의 압박감에 시달렸고, 결혼 후에도 잠자리에만 들면 그날의 악몽이 떠올라 몸서리를 치며 온 방을 네 발로 헤집으며 울부짖는 나날이 이어졌다.
 
간첩 누명만으로도 억울한데 출옥 후 동지였던 이들로부터 ‘정권의 프락치’ ‘전옥주는 가짜’라는 의혹을 받으며 또 다른 고통을 겪었다. 그나마 주위 사람들이 ‘5‧18의 꽃’ 전옥주를 인정하게 된 계기는 1988년 11월 18일 국회 청문회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에 출석해 증언을 한 뒤부터였다. 전 씨는 그날 증언을 마치고 돌아오던 날 동네 아주머니들이 막걸리와 떡을 장만해 주며 “그렇게 훌륭한 일을 했으면서 왜 감추고 살았느냐”고 자신을 붙들고 울었다고 전한다.


이대로 외치다 죽어도 좋다

전옥주 씨 수기가 실린 신동아 1996년 9월호 표지.
[박해윤 기자]

전옥주 씨 수기가 실린 신동아 1996년 9월호 표지. [박해윤 기자]

신동아 1996년 9월호에 전옥주 씨가 직접 구술한 ‘광주항쟁 가두방송의 여인, 전옥주의 충격 고백 수기’가 실렸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가두방송단은 무슨 일을 했는지, 진압군에게 체포된 후 열흘 동안 어떤 고문을 당했는지, 1988년 광주청문회 이후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전 씨가 직접 털어놓은 최초의 육성 고백인 까닭에 그의 삶을 소개할 때마다 자주 이 글이 인용된다. 

신동아는 1998년 5월호에서 다시 한 번 ‘광주 민주화운동 가두방송 두 여인 전옥주‧차명숙’을 세상 밖으로 끌어냈다. 전 씨와 함께 가두방송을 했던 차명숙 씨는 80년 이후 세상과 연락을 끊고 지냈다. 1996년 9월 신동아에 실린 전 씨의 수기를 보고 차 씨가 편집실로 연락을 했고 이후 2년의 침묵 끝에 차 씨가 입을 연 것이다. 당시 차 씨는 “누구든 그때 광주에 있었다면 나섰을 것”이라며 “언론이 입 다물고 있던 상황에서 광주를 살리기 위해선 누군가가 참혹한 그 상황들을 시민들에게 알려야 했다”고 했다. 하지만 광주민주화운동이 벌어진 지 18년이 지난 1998년 5월까지도 두 사람은 멀리서 소식만 들을 뿐 차마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과거의 아픔이 너무 컸던 탓일까. 

다음은 신동아 1996년 9월호에 실린 전 씨의 수기에서 당시 상황과 심경을 생생하게 증언한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어떤 이는 나를 가리켜 ‘5.‧18의 꽃’이라고 한다. ‘광주민주항쟁의 나팔수’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다. 실제로 16년 전(1980년) 오월, 우리 현대사를 뒤흔든 뜨거웠던 광주에서의 열흘 동안 나는 파도처럼 성난 군중들을 지휘하며 격려하고 통제한 시민부대의 구심, 가두방송의 주역이었다. 자유, 민주화, 폭압과 투쟁이 무언지 알 수 없었던 평범한 서른둘 처녀에게 오월 광주의 그 며칠간은 실로 감당키 버거운 체험이었다.” 

“가두방송 차량에서 내 옆에 탔던 청년이 유리를 뚫고 날아온 총탄에 맞아 그대로 피를 흘리며 숨져갈 때의 공포란…. 여차하면 나도 저 총알 한 방에 그대로 죽을 수 있다는 극심한 두려움은 오히려 마음을 대범하게 만들어주었다.…시민들의 피해 상황을 생생히 알리고 도청 앞 궐기를 외쳐야 한다는 목표만이 뇌리를 맴돌았다.” 

“열흘 동안의 광주항쟁 기간 중 절정을 이룬 20일 밤의 시위에서 성난 군중들의 대오를 지휘하며 내 머릿속에 꽉 찬 한 가지 생각은 이대로 외치다 죽어도 좋다는 것, 내 목숨 역시 몇 시간 전 내 손으로 리어카에 담아 옮긴 저 참혹한 몇 구의 시신들처럼 이미 아무렇지 않게 죽은 목숨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믿을 수 없는 폭력과 참상, 거대한 불의에 대한 맹렬한 적개심과 분노가 솟구쳐 나를 어떤 지점으로 끝없이 휘몰고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실상 당시 내 목소리는 목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 가슴 속으로부터 토해져 나오고 있었다. 외치다 죽어도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다. 도처에 잠복해 있는 무장계엄군 때문에 나는 차에서 내릴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입고 있는 청바지에 그대로 소변을 봐가며 동이 틀 때까지 방송을 했다.”


남파 간첩이라는 누명

‘광주항쟁 가두방송의 여인, 全玉珠의 충격고백수기’라는 제목의 신동아 지면. 전옥주 씨의 구술을 정리한 글이다. 
[박해윤 기자]

‘광주항쟁 가두방송의 여인, 全玉珠의 충격고백수기’라는 제목의 신동아 지면. 전옥주 씨의 구술을 정리한 글이다. [박해윤 기자]

“수사관은 내 옷을 다 벗긴 뒤 총 개머리판과 나무자로 음부를 마구잡이로 후비고 짓찧으면서 ‘그 나이 먹도록 네가 정말 처녀냐’ ‘몇 명이랑 자봤느냐’는 등 차마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폭언과 만행을 저질렀다. 사흘째부터 심한 통증과 함께 하혈이 시작됐지만 그는 싱글거리는 얼굴로 천인공노할 성고문을 멈추지 않았다.” 

“악몽 같은 고문과 협박, 폭언을 통해 그들이 듣고 싶어 한 것은 어이없게도 내가 간첩이라는 자백이었다. 이북 모란봉에서 2년간 교육을 받고 남파된 간첩. 이것이 그들이 내게 덧씌우기 위해 준비한 시나리오였다. 잠 안 재우기, 수치스러운 성고문, 가혹한 몽둥이찜질과 구타를 통해 그들은 내가 북에서 밀봉교육을 받고 남한사회를 교란할 목적으로 남파된 간첩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것을 강요했다.” 

“쇠파이프로 맞아 척추 뼈 두 개가 내려앉은 허리, 부러진 자국이 남은 오른팔, 송곳에 찔려 만신창이가 된 무릎을 비롯해 일 년이면 몇 달을 깁스로 간신히 지탱하는 다리, 궂은 날이면 마디마디 쑤시고 뒤틀리는 손과 발, 총 개머리판에 하도 맞아서인지 악몽처럼 따라다니는 뒷골의 통증, 골병으로 찌든 신장과 장기들….”


프락치, 배신자라는 손가락질

“5년 전 어렵게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돌아간 광주에서 나는 뜻하지 않은 차가운 냉대와 질시를 받아야 했다. 용기를 내어 만든 ‘5‧18여성동지회’는 정치적 야심으로 매도당했다. 민화위(민주화합범국민추진위원회, 1988년 1월 11일 노태우 대통령 당선자가 발족한 기구) 증언 당시 참석자들에게 지급된 20만 원의 교통비도 ‘노태우 돈은 받을 수 없다’며 뿌리친 나를 두고 ‘노 정권으로부터 3억 원을 받았다’느니, 프락치라느니, 배신자라느니 하는 당찮은 얘기까지 나돌았다. 심지어 ‘전옥주는 가짜’라는 얘기까지 퍼졌다. 잡혀간 사람들 사이에 어영부영 끼여 있다가 얼렁뚱땅 주역으로 부상했다는 것이었다.” 

“5‧18여성동지회를 만들게 된 건 광주를 빛나게 한 5월의 꽃이 여성이라는 평소의 믿음 때문이었다. 무서워서 누구도 쉽사리 그 거리에 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 ‘계엄군 아저씨들은 어느 나라 군대냐’며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던 단발머리 여학생에서부터 헌혈 행렬에 줄을 지어 모여 들던 황금동의 술집 아가씨들에 이르기까지 내가 본 광주의 여성들은 정말로 순수하고 용감했다. 총알이 빗발치는 와중에 김밥과 요구르트를 나눠주고 우리에게 주먹밥 하나라도 더 먹이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아주머니들. 부상자를 돌보고 주인 없는 시신을 수습하는 이들도 모두 부녀자들이었다. 발포가 시작된 뒤 사흘 내내 도청 주위를 헤집고 다니며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시신들을 수습해 옥양목을 떠다가 수의를 해 입히고, 향을 사 피워주던 술집 아가씨들. 어떻게 번 돈인데 그렇게 쓰기가 쉽겠는가.” 

“과거로 인해 피폐해지는 현실은 육신의 고통보다 견디기가 몇 십 배나 힘들었다. 프락치 시비는 그중에서도 가장 내 가슴을 저미는 것이다. ‘생명의 위협을 느낄 상황에서 왜 계엄군 쪽으로 몸을 피했는가, 혹시 정부 사람이 아닌가’ 하는 일부 언론의 보도와 그것에 편승한 옛 동지들의 흑색선전과 비방. 그것은 지긋지긋한 간첩 협의에 이미 골병이 들대로 든 내게 있어 참을 수 없는 또 하나의 고통을 안겨주었다.”

내가 만약 가두방송을 안 했더라면…

“광주 시민들께 말하고 싶다. 5‧18 당시의 나의 행동은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고 내가 자발적으로 뛰어든 내 선택이었다. 그 결단 속에서 내 모든 것을 잃었지만 결과가 어떠하든 그것으로 충분하다. 내 기억 속의 5‧18은 아픈 상처가 아니다. 정작 참을 수 없는 건 아물어가는 그 상처를 덧나게 하고 고통스런 생채기를 보태는 현실이다.” 

“해마다 5월이 오면 극심한 고문의 기억과 소용돌이치는 절규와 함성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잠을 이루지 못한다. 가두방송을 안 했더라면 시민들이 그렇게까지 많이 거리로 뛰쳐나오지 않았을 것이고, 그만큼 희생도 적었을지 모른다는 생각, 격앙된 감정으로 무고한 인명을 희생의 대열로 이끈 건 아닌가 하는 반성과 회오도 나를 수시로 괴롭힌다. ‘방송을 듣고는 거리로 나오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도저히 편한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말하는 이도 많았다. 그렇게 대문을 박차고 거리로 쏟아져 나온 이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이들이 거리에서 참혹한 죽음을 당했을까를 생각하면 온몸에 전율이 돋는다.” 

“오월 광주를 내 안에서부터 극복하는 일, 그것을 통해서만이 굴곡진 내 삶 또한 복원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남은 생의 행복 유무도 아마 거기에 달려 있을 것이다. 과거의 슬픔과 갈무리해 내기 위한 안간힘을 멈추어서는 안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으리라 생각한다.”

신동아 1996년 9월호에 수기가 소개되고 두 달 뒤 여성동아 11월호에 전옥주 씨 인터뷰가 실렸다. 이 인터뷰에서 전 씨는 악몽과 병마에 시달리는 삶 속에서도 그 상처를 보듬고 치유해준 남편에 대한 고마움과 가족의 소중함을 언급했다. 그리고 “그해 5월 광주에서 내가 얻은 건 슬픔과 공포만은 아니었다”고 술회했다. 

“온 몸과 마음으로 그날의 상처를 부여안은 채 가파른 삶을 이어가고 있을지라도 그 삶이 그래도 의미 있다고 느끼는 건 아직도 망월동에 묻혀 있는 수백 구의 시신과 그보다 더 많은, 채 발견되지 못한 죽음들에 비해 살아 있음으로 이 모든 것들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살아 있음으로 모든 것을 증명하려 했던 전옥주 씨의 투쟁은 2021년 2월 16일로 멈췄다. 고인은 가족장 이후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에 위치한 국립 5·18 민주묘지에 안장된다.



신동아 2021년 3월호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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