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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조 투입 100개 ‘소·부·장’ 국산화의 역설

“일본과 관계 회복되면 어쩌나?” “대기업에 국산 부품 강요할 법 있나”

  • 김유림 기자 mupmup@donga.com

3조 투입 100개 ‘소·부·장’ 국산화의 역설

  • ● 현장 수요, 기술력 등 꼼꼼한 검토가 우선
    ● 정밀화학 소재, 100% 국산화는 애초 불가능
    ● 국내 대기업 수요만으론 중소기업에 도리어 부담
    ● 관계 회복 후 수입 재개하면 중소기업 두 번 죽어
    ● 수입 없이 수출만? 자유무역체제 부정!
    ● 대기업이 美·유럽과 합작회사 만드는 방법 고려
[GettyImage]

[GettyImage]

현재 우리나라 기업들의 최대 과제는 ‘소재·부품·장비(소·부·장)의 국산화’다. 엄밀히 말하면 ‘소·부·장의 탈(脫)일본화’다. 하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에 대한 회의론이 강하게 일고 있다. 반도체 등 IT 산업 핵심 소재를 자체 개발하더라도 시장경쟁력을 담보할 수 없고, 정부의 성급한 정책 추진이 ‘예산 낭비’로 귀결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또한 자유무역체제를 부정하는 정부 정책은 오히려 산업계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올 7월 초 일본이 한국을 상대로 일부 품목에 대해 수출을 규제한 데 이어 8월 말 화이트리스트(백색국가)에서도 우리나라를 배제하면서, 국내 반도체 업체에 대한 소재 자급화 요구가 강해졌다. 일본이 수출을 규제한 고순도 불화수소, 포토레지스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산업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소재다. 이에 정부는 국내 기업들이 소·부·장 분야에 연구개발과 투자를 빠르게 추진할 수 있도록 100여 개 품목을 정해 5년에 걸쳐 총 3조 원의 예산을 투입하기로 했다. 

소재 국산화에 가장 먼저 속도를 낸 곳은 디스플레이 업계다. LG디스플레이는 일본 수출규제가 시작되자 바로 ‘고순도 불화수소 대체 테스트’에 착수해, 두 달 만인 9월 초 OLED 패널 생산라인에 국산 불화수소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삼성디스플레이도 일본산 고순도 불화수소 재고가 남아 있긴 하지만 9월 내로 국산화 테스트를 종료하고 이후 양산 작업에 적용한다는 방침이다. 디스플레이에는 반도체에 비해 순도가 낮은 불화수소가 사용된다.


정밀소재산업, 일본 따라가기 힘들어

반도체 업계도 국산은 아니지만 일본산 불화수소 대체품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삼성전자는 대만, 중국 등에서 원료를 받아 국내 업체들과 협력해 대체 불화수소를 양산했다. 이는 상대적으로 민감도가 낮은 공정에서부터 쓰이고 있다. SK하이닉스도 7월 초부터 국내 기업에서 만든 대체품으로 테스트를 진행해왔고, 이를 조만간 반도체 공정에 사용할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국내 반도체 업체들이 잇달아 불화수소 양산에 나선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일본산 고순도 99.9999999999%(투웰브나인) 수준에 도달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일각에서는 “완벽한 소재·부품 국산화는 불가능하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이덕환 서강대학교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교수는 “자원 부족 국가인 우리나라에서 소재·부품의 100% 자립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이 교수의 말이다. 



“소재산업은 100% 화학산업이다. 품목이 간단하고 대량 사용하는 범용소재산업과 품종은 많고 소량 사용하는 정밀화학산업(불화수소 등)으로 나뉘는데, 우리나라는 1960년대 후반부터 범용소재산업에 집중 투자했다. 그 결과 대표적인 범용소재산업인 정유산업에서 현재 세계 5~6위를 유지하게 됐다. 정유사가 20개사가 넘는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는 4개에 불과하지만 품질 경쟁 면에서는 일본에 앞서며 상당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정밀소재산업에서는 일본을 비롯한 타 선진국에 비해 경쟁력이 많이 뒤처졌다.” 

이어 그는 “범용소재산업은 과거 선진국으로부터 기술과 시설 이전을 비교적 쉽게 받을 수 있었고, 대규모 자본을 투자해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밀소재산업은 각 분야에 고도의 기술, 다양한 설비투자, 인력이 모두 필요해서 일본을 따라가기 결코 쉽지 않다”고 말했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1970년 후반부터 정밀소재산업에 투자하기 시작했지만 제약산업에서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둔 것을 제외하고는 일본을 따라가기 힘든 상황이다. 이 교수는 “정밀소재산업은 소재 하나하나마다 상황이 다 달라 우리나라는 아직 시작도 못한 소재가 있다. 몇 개 소재를 선별해 집중투자해도 모자랄 판에 100개나 되는 품목에 3조 원을 쏟아붓겠다는 건 무모한 짓”이라고 비판했다. 

성급한 정책으로 예산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기업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소재가 개발이 필요한지 먼저 파악하고, 현재 우리의 기술력과 중간재 수입 확보 가능성 등은 어떻게 되는지 꼼꼼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얘기다.


“소재 시장 너무 작아”

애써 소재를 개발해놓고 국내 기업만 사용한다면, 이 또한 의미가 없다. 이홍배 동의대 무역유통학부 교수는 “장기적으로 봤을 때 우리가 일본을 능가할 만큼의 기술력을 확보해 다른 선진국으로도 해당 소재를 수출할 수 있어야 한다. 당장 눈앞의 문제만 해결하고자 국내 대기업 수요만 충족하는 소재를 개발하는 건 향후 중소기업에도 부담”이라고 지적했다. 

이와 더불어 소재 개발을 국내 중소기업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는 시각도 있다. 이주완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그동안 대기업이 소재를 직접 개발하지 않은 이유는 못해서가 아니라, 할 필요가 없어서였다. 시장 자체가 너무 작아 경쟁력이 없는데, 이는 소재를 개발하는 업체들도 마찬가지”라며 “정부가 나서서 중소기업의 소재 및 부품 개발을 지원하겠다고 하지만 향후 판로까지 책임져주는 것은 아니기에 생산 설비를 늘리는 건 깊이 고민해봐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국내 중소기업이 소재 국산화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우리나라가 일본과 외교 관계가 다시 회복되거나, 기존 소재와 조금이라도 차이점이 발견되면 대기업들은 다시 일본 제품으로 회귀할 수 있다. 이는 결국 중소기업을 두 번 죽이는 꼴이 되는 만큼, 차라리 대기업이 미국이나 유럽 등 외국 케미컬 회사와 합작 회사를 세워 특정 화학소재를 국내 대기업에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방법도 고려해볼 만하다”고 밝혔다. 

중소기업이 소재의 적합성을 판정받아 대기업 납품에 성공하더라도 기존의 소재 업체가 가격을 낮춰버리면 대기업은 질 좋고 값싼 소재로 다시 눈길을 돌릴 수밖에 없다. 그러지 않고서는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대기업에 국산만 사용하라 강요해선 안 돼”

이번 일본의 수출 규제로 정부와 대기업이 나서 국내 소재 기업에 먼저 ‘러브콜’을 보내는 상황은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다시 오지 않을 기회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대기업을 비롯한 소재 수요 기업에 ‘국산’이라는 이유만으로 특정 소재와 부품을 채택하라고 종용하는 건 옳지 않다는 여론이 뜨겁다.
 
이상호 한국경제연구원 산업혁신팀장은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소재 구매를 약속하고, 기술·자금도 지원해서 국산화를 앞당기는 상생 협력은 물론 바람직하다. 실제로 이런 상생이 성공한 사례도 많이 있다”며 “하지만 이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자발적으로 할 일이지 정부가 종용해서는 안 된다. 전 세계를 뒤져서라도 최고의 소재와 부품, 장비를 찾아내는 게 기업 오너의 의무다. 기업이 글로벌 경쟁에서 이기고 생존해야 국산 소재도 사줄 수 있고, 일자리도 창출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현재 정부가 추진 중인 소재 국산화는 자칫 자유무역 원칙마저 거스를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조장옥 서강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오늘날 전 세계는 국가 간 분업과 협업을 기반으로 하는 자유무역체제로 구축돼 있다. ‘일본의 몽니를 이겨내자’는 당위성을 앞세워 이러한 대전제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소재 수입은 거부하면서 완제품은 수출하겠다는 발상은 매우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기존의 핵심 소재와 부품을 갑자기 다른 제품으로 바꿔야 하는 기업 처지에서는 불안감이 클 수밖에 없다. 반도체 업계 한 관계자는 “반도체는 워낙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기 때문에 소재 테스트 과정에만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들어간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바꾸기는 힘들고 소재 개발 과정을 지켜보며 점차적으로 바꿔나가야 할 것 같다”고 밝혔다.




신동아 2019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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