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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영화 ‘남산의 부장들’ 원작자 김충식 가천대 부총장

“문명 진화해도 권력·인간·조직의 관계는 제자리걸음”

  •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영화 ‘남산의 부장들’ 원작자 김충식 가천대 부총장

  • ● 동아일보 2년 2개월 연재, 53만 부 판매
    ● 중정부장 10명 이야기 연재 위해 300여 명 만나
    ● 1985년 중공기 특종으로 안기부서 고문당하며 보도 결심
    ● 원작은 ‘삼촌’, 이병헌·이성민 출연 영화는 ‘조카’
    ● 태극기부대는 박정희 정신·유산에 대한 신봉
    ● 원고지 칸 하나하나가 다 낭떠러지였다
    ● 겉모습 뒤 본질 캐내는 기자 많이 나오기를


[박해윤 기자]

[박해윤 기자]

현대사의 가장 극적인 한 장면이다.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했다. 40년 전 그 사건이 2020년 1월 소환됐다. 설 개봉영화 ‘남산의 부장들’을 통해서다. 이 영화는 저격 사건 이전 40일간의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중앙정보부를 중심으로 밀도 있게 전한다. 이병헌 이성민 곽도원 이희준 김소진 등 빼어난 배우들과 ‘내부자들’의 우민호 감독이 함께 추위를 녹일 뜨거운 작품으로 만들었다. 

영화를 통해 동명의 베스트셀러도 되살아났다. 53만 부가 팔린 단행본 ‘남산의 부장들’. 1990년 8월부터 1992년 10월까지 2년 2개월 동안 동아일보에 인기리에 연재된 기사가 바탕이 됐다. 김충식(66) 가천대 특임부총장이 동아일보 기자 시절 주말판 ‘동아마당’에 연재했다. 김 부총장은 기자 시절 한국기자상을 2회 수상했다.


동아일보 2년 2개월 연재, 53만 부 판매

지금도 국가정보원은 강력한 기관이지만, 전신인 중앙정보부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초헌법적 기관이었다. 당시 중정부장이 하는 일은 두 가지였다. ‘남산의 부장들’에 나오는 일화다. 1978년 1월 김재규 부장이 ‘김종필(JP) 의원이 대통령을 꿈꾼다’는 거짓 정보를 듣고 청구동 가택을 수색한 뒤 JP에게 이렇게 말했다.“(중정이 하는 일은) 하나는 공산당 잡는 거고 다른 하나는 대통령 각하를 철두철미하게 모시는 것입니다. 만일 각하(김재규는 JP를 이렇게 불렀다)를 포함해서 누구라도 다른 생각을 가진다면 이 김재규가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1년 10개월 뒤 김재규 부장은 ‘오랫동안 민주혁명을 꿈꿨다’며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했다. JP는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촌평했다. “나는 그(김재규)가 차지철과 충성경쟁에서 지게 되니까 빵 하고 車를 쏘고 뭐가 미우면 뭐도 밉다고 영감(박 대통령)까지 쏜 게 10·26이라고 믿는다.” 



영화와 책은 조금 차이가 난다. 저자 김 부총장은 “원작이 삼촌이라면, 영화는 조카” 정도 된다고 말했다. 원작이 10명의 중앙정보부장 역사를 통해 박정희 시대 18년을 정리했다면, 영화는 그 핵심인 4대 김형욱, 8대 김재규를 끄집어내 집중 조명하고 있다. 2시간의 몰입도를 위해서. 

“우민호 감독이 2016년에 제게 와서 제 책내용을 영화화하고 싶다고 했어요. 우 감독은 군 제대 후 이 책을 읽었는데, 손이 부르르 떨리면서 말런 브랜도가 주연한 영화 ‘대부’와 같이 만들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해요. 몇몇 영화에 실패했지만 ‘내부자들’이 성공하면서 드디어 이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겁니다.” 

영화에선 캐릭터 이름이 실제와는 조금 다르게 나온다. 김재규는 김규평(이병헌 분), 김형욱은 박용각(곽도원), 차지철은 곽상천(이희준)이다. 혼신을 다한 배우들의 연기가 스크린을 압도한다. 이희준은 실제 차지철의 이미지에 다가가기 위해 체중을 25kg이나 늘리기도 했다.


중공기 특종으로 안기부 고문당하며 보도 결심

1985년 9월 1일 동아일보 
편집국 기자들이 
이채주 편집국장, 
이상하 정치부장, 
김충식 기자 연행 및 
가혹행위를 규탄하는 
글을 작성해 안기부에 
전달했다(왼쪽).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 전·현직 중앙정보부장 역을 맡은 이병헌(왼쪽)과 곽도원. [김충식 제공, 쇼박스 제공]

1985년 9월 1일 동아일보 편집국 기자들이 이채주 편집국장, 이상하 정치부장, 김충식 기자 연행 및 가혹행위를 규탄하는 글을 작성해 안기부에 전달했다(왼쪽).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 전·현직 중앙정보부장 역을 맡은 이병헌(왼쪽)과 곽도원. [김충식 제공, 쇼박스 제공]

영화화를 계기로 1월 6일 동아일보 충정로사옥에서 김 부총장을 만났다. 한때 그도 근무했던 빌딩이다. 그는 ‘친정’에 와서 처음 인터뷰한다며 조금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엄혹했던 시절에 자신이 최선을 다했던 일에 대한 인터뷰였지만 “쑥스럽다”며 겸손해했다. 

영화야 엔터테이닝 요소가 강하지만, 그 역사를 겪은 이들에게 과거는 잊을 수 없는 아픔이다. 연재 기사 ‘남산의 부장들’이 잉태된 곳도 바로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의 전신)가 있던 남산이었다. 1985년 여름 남산 안기부 조사실. 당시 김충식 기자는 중공기 귀순 조종사 신병처리를 특종 보도했는데, 안기부는 포괄적 보도금지 지시를 어겼다며 김 기자와 이채주 편집국장, 이상하 정치부장을 남산으로 연행해 가혹한 고문을 가했다. 

“팬티만 입힌 채 발가벗겨서 취재원을 대라고 고문했습니다. 얻어맞아도 취재원을 불지 않자 저의 인격 해리(解離)를 겨냥해서 제가 신던 구두를 입에 물렸어요. 저의 몰골을 비참하게 해서 자존심을 무너뜨리려고 했던 겁니다. 십수 시간 침을 흘리며 모욕을 당해야 했지요.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1985년 헌법과 법률이 있는 법치주의 국가의 서울 한복판에서 이렇게 비통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나, 언젠가 이 일을 기록으로 남겨야 하겠다’라고요. 중정에 이어 안기부도 정치와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엄청 났지요. 이런 기관에 대해 제대로 쓰지 않는 것은 기자로서 직무유기요, 배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보도금지 지시가 그렇게 엄격했습니까. 

“중공에 대해서는 그 무엇도 써서는 안 된다는 지침을 어겼다는 것인데, 그 일은 따지고 보면 동아일보가 그해 2·12총선 때 야당을 지원하고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것에 대한 보복이었습니다. 총선 결과로 신민당이 약진하고 관제야당인 민한당이 참패하자 벼르고 있다가 중공기 귀순 보도에 시비를 건 겁니다. 이를 알게 된 편집국 기자들이 들고일어나 언론자유와 인권을 침해한 안기부에 ‘우리의 입장’이라는 글을 9월 1일 전달했는데, 이낙연 기자(전 총리)가 대표 집필을 했습니다.”


5·16군사정변 때 전두환 역할 포착

이후 김 기자는 연재 기사를 쓸 수 있는 적절한 때를 기다렸다. 그러다1990년 김중배 기자가 편집국장으로 오면서 그의 기획안이 채택됐다. 김 국장도 정부에 비판적인 신문 칼럼을 써서 1984년 도쿄로 쫓겨난 적이 있었고, “금기는 없다”며 ‘남산의 부장들’ 연재를 지시했다. 

“연재 기사 꼭지명을 ‘남산의 부장들’이라고 짓고, 10번 정도 쓰면 다른 기자들이 이어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5, 6회분을 쓰니 기사량을 늘리라더군요. 김중배 국장도 저를 따로 불러서 ‘김충식이 혼자 해’라고 해요. 국장의 기대가 고맙기도 했지만 출입처 기사도 맡아야 해서 사실 앞이 캄캄했어요. 10회를 넘어가며 한 면(面) 분량으로 늘렸고, 기사 하단에 롯데 음향기기 광고도 매주 붙었어요. 이제 호랑이 등에 올라탄 거라 내릴 수도 없었습니다.” 

-연재 기사를 그대로 책으로 묶은 건가요. 

“신문 연재 당시엔 1대 김종필, 2대 김용순, 3대 김재춘, 4대 김형욱 순으로 나갔는데 기승전결로 치면 ‘기(起)’가 없었습니다. 책에는 ‘기’ 부분에 육사 11기 전두환 대위가 등장합니다.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정변)의 날, 전 대위는 서울대 학군단 교관으로 있다가 쿠데타 성패의 분수령이 된 ‘육사 생도의 혁명지지 시가행진’을 주도해 쿠데타 주체 세력의 말단에 진입합니다. 그리고 책은 1980년 박정희 권력의 소멸과 더불어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과 대통령에 오르는 것으로 종지부를 찍습니다. ‘기’ 부분은 연재와 취재를 병행하면서, 제가 호미로 캐낸 사료들을 연결해서 완성했습니다. 이것이 책의 생명력을 높인 것 같습니다. 역사책 개설서에 몇 줄 기여했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동아일보 주필을 지낸 천관우 선생은 “모름지기 사학도라면 개설서의 한 대목쯤을 보태거나, 바꾸는 호미질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의미의 호미질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눈 내리는 밤 무작정 김계원 부장 집으로

동아일보사에서 1992년 출간한 초판 ‘남산의 부장들’. 시중에는 폴리티쿠스에서 펴낸 개정증보판이 나와 있다.

동아일보사에서 1992년 출간한 초판 ‘남산의 부장들’. 시중에는 폴리티쿠스에서 펴낸 개정증보판이 나와 있다.

-연재할 때 가장 힘들었던 일은 무엇인지요. 

“결국 사람을 만나는 일이 가장 힘들었지요. 국회 입법조사국에서 만든 한국정치연표가 큰 도움이 됐습니다. 1945~1985년까지의 정치 사건을 일지로 기록한 책입니다. 여기에 밑줄을 쳐가며 중앙정보부가 개입했을 만한 사건들을 뒤졌습니다. ‘1975년 4월 9일 인혁당계 8명 사형집행’ ‘4월 29일 주월한국대사관 사이공에서 철수’…. 이런 사건과 연관된 사람들을 찾아다녔습니다. 수사를 했던 사람들, 국회의원들, 은퇴한 사람들, 감옥에 있는 사람들 등 정말 다양했습니다. 상당수는 거절해서 만나지 못했지만, 대략 200~300명은 만났을 겁니다. 중정 공무원의 경우 재직 중의 기밀을 누설한 게 알려지면 연금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입을 잘 열지 않아 그들을 취재할 때가 아주 어려웠습니다.” 

-김계원 부장을 만날 때 특히 어려움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김종필 김용순 김재춘 김형욱에 이어 5대 김계원 부장에 대해서 써야 할 때였어요. 김 부장을 만나야 하는데, 자꾸 피했어요. 집으로 전화하면 지방에 갔다, 교회 갔다, 동창회 갔다 하면서 전화를 바꿔주지 않아요. 연재 기사 하나를 쓰려면 3, 4개의 새 비화가 필요합니다. 새롭지 않은 내용이라면 인터뷰이에게 직접 물어서 새 답변이라도 넣어야 새롭게 보입니다. 그런데 당사자가 만나주지 않으니 소화도 잘 안 되고, 잠도 잘 안 오는 겁니다.” 

원고 마감 시한이 다가오자 그는 하루 종일 김계원 부장 만나는 일만 고민했다. 그날은 일요일 밤이었다. 밖에는 눈이 내렸다. 교회를 가든, 동창회를 가든, 지방을 가든 일요일 밤 10시면 누구도 밖에 있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김계원 부장은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김 기자는 무작정 집을 찾아갔다.


전두환·노태우 대위 친위 쿠데타 보도로 곤욕

“문을 두드리니 대답이 없어요. 틀림없이 안에 있을 것 같았는데, 인기척이 없어요. 한참 있다가 다시 두드렸어요. 그제서야 안에서 ‘누구요?’ 하는 겁니다. 정신이 번쩍 들어 ‘동아일보 김충식 기자입니다. 뵙고 싶습니다’라고 하자, ‘볼일 없어요, 가세요’ 하고는 조용해지는 겁니다. 할 수 없이 다시 두드리자 ‘기자면 다요? 경찰을 불러야 되겠소?’ 하며 역정을 내더군요. 그래서 제가 ‘돈을 빌리러 온 것도 아니고, 취직을 부탁하러 온 것도 아닙니다. 기자의 직분상 사실관계를 여쭤보러 왔는데, 이렇게 대하십니까’라고 하자 ‘할 말 없어요’ 하며 조용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이판사판이다 하고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전 1시쯤 지나자 인기척이 나는 겁니다. 문을 열어주기에 안으로 들어갔더니 트레이닝복을 입고 가족 없이 혼자 있더군요. 김 부장은 냉장고에서 맥주를 한 병 끄집어내더니 ‘거 참 지독한 사람이구먼’ 하면서 한 잔 따라줘요. 그렇게 말문이 트여서 날이 밝을 때까지 취재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취재가 도움이 많이 됐는지요. 

“그렇지요. 이후락을 권력 핵심부 안에서 어떻게 느꼈는지 정적(政敵)이 아닌 사람으로부터 들었으니까 유익한 내용이 많았습니다. 김종필도 이후락과는 정적이었는데, 김계원은 이후락과 불가근불가원하며 지냈습니다. 그분 표현 중에 ‘그 시대에는 다 그 사람도 필요했어요’라고 한 말이 기억납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전체 큰 그림을 헬기에서 보는 듯했습니다.” 

김 부총장은 연재 기사에 전두환·노태우 대위 등 육사 11기가 1963년 친위쿠데타를 시도했다는 증빙인 수사 기록을 최초로 발굴, 폭로함으로써 구속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그들의 거사설에 대한 수사 기록인데, 그 자체로 1면 톱기사가 될 자료였어요. 그들이 1980년 신군부의 중심 인물이었으니까요. 1963년 대위·소령들의 친위쿠데타가 80년대 고스란히 재연돼 5공화국이 된 겁니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그 기사를 보고 노발대발했다고 합니다. 비록 과거 일이라 해도 현직 대통령에 대한 수사 기록을 어떻게 보도할 수 있느냐는 거였지요. 그런데 주말판 비화 연재글에 나오는 내용이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자고 해서 구속은 면했다고 나중에 한 참모가 알려주더군요.”


원고지 칸 하나하나가 다 낭떠러지

‘남산의 부장들’은 연재 당시 독특한 기사 스타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유신 무렵 이후락 부장에 대한 글이 나올 때 김 기자의 글은 ‘궁정동 감나무에 감이 익어갈 무렵이었다’로 시작했다. 이후락이 청산가리를 움켜쥐고 비밀리에 평양을 찾아갔을 때의 상황을 전하는 기사는 ‘아직 봄이 무르익지 않아 날씨는 쌀쌀했다’가 첫 문장이다. 

“전면으로 늘어나면서부터는 시작과 끝이 한 편의 단편소설처럼 완결성 있는 이야기가 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팩트는 철저하게 확인하려 했고, 다른 시비에 걸린 적은 없습니다. 원고지 칸 하나하나가 다 낭떠러지였어요. 중정부장 지낸 사람들의 힘, 그들을 추종하는 변호사 검사들이 원고지 칸칸을 들여다보면서 이를 갈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얼마나 스트레스가 심했겠어요. 스님들이 ‘피를 찍어 불경을 쓴다’는 말을 하는데요. 그런 경지는 아니더라도, 기록을 남기고 싶어 시작한 것이니 내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하자고 했습니다. 좋게 보면 그런 것이 우민호 감독에게 ‘필(feel)’을 갖게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박정희 시대는 끝났다고도 하는데, 지금 ‘남산의 부장들’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요. 

“주말마다 태극기와 촛불이 광장을 메우고 있지 않습니까. 태극기는 박정희의 정신과 유산에 대한 칭송이고 신봉이죠. 결국 1961년 쿠데타로 시작해 6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우리 사회는 박정희 그늘에 묻혀 있는 거죠. 박정희 시대 때 했던 관제 데모를 2014년 김기춘 비서실장이 주도했지 않았습니까. 그때 우연히 광화문에 모임이 있어 나갔다가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왜 그처럼 명석한 분이 과거의 전철을 밟았을까요. 의제(擬製)된 정의와 반공국가의 틀 안에 시대착오적으로 불나비처럼 휘말려 들어갔던 겁니다. 문명이 진화하는 것 같으면서도, 권력과 조직 내 인간관계에서는 제자리걸음을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허물 많은 인간 사회의 ‘백미러’ 일부가 ‘남산의 부장들’ 아닌가 합니다.”


리얼리티 중시하는 기자의 시린 운명

김충식 부총장은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한때 철학과 교수가 되려다 방향을 바꿔 동아일보 기자로 30년을 보냈다. 정치부 기자, 도쿄특파원, 사회부장, 논설위원을 거쳤다. 2006년 기자를 그만둔 뒤 청춘의 꿈이었던 교수(가천대)가 됐다. 2011~2012년 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과 부위원장을 역임한 것 외에는 교수(신문방송학과)로 소임을 다하고 2019년 정년을 맞이했다. 대학에서 취재보도론과 미디어원론 등을 강의했는데, 특히 취재보도론 강의는 세밀한 첨삭 강의로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가 기자나 PD 지망생들에게 늘 해오던 말이다. 

“요즘 언론인들은 (본질적인 정보를) 호미로 캐는 노력보다 ‘집게’로 손쉽게 주운 것을 나열하는 데 급급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정치 기사만 해도 무의미한 말싸움을 실시간 중계해 정쟁을 부추기고, 시청자와 독자가 고개를 돌리게 하지 않느냐는 거지요. 현상과 사안의 겉모습 뒤에 가려져 있는 본질과 연유에 대해, 좀 더 사명감을 갖고 호미질을 해야 해요.” 

정년 뒤에도 그는 글 쓰는 일을 마음의 중심에 두고 있다. ‘남산의 부장들’ 후기에 썼듯 자의성을 거부하고 리얼리티를 중시하는 기자의 ‘시린 운명’을 아직 벗지 못한 듯하다. 

“근대적 개혁운동인 갑신정변을 주도했다 실패한 김옥균에 관심이 많습니다. ‘개혁은 왜 조롱당하는가’라는 부제로 그의 평전을 쓰면서 혁명보다 어렵다는 개혁을 궁구해 볼 생각입니다. 여건이 된다면 ‘남산의 부장들’ 후속작도 집필하고 싶어요. 전작에서 다루지 못한 KCIA 수장 20여 명에 대해서도 관심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젊은 기자 시절의 열정과 패기를 가지고 진행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의미 있는 작업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신동아 2020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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