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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萬事

파르티아 1千 낙타, 로마군을 궤멸하다

  • 이강원 동물칼럼니스트 powerranger7@hanmail.net

파르티아 1千 낙타, 로마군을 궤멸하다

  • 교병필패(驕兵必敗), 군사력의 강함만 믿고 섣불리 적에게 위엄을 보이려 하면 반드시 패한다는 뜻이다. 기원전 53년 지금의 터키 땅인 카레에서 로마 대군(大軍)이 파르티아 군대가 뿌린 ‘화살비’를 맞고 궤멸했다. 낙타와 말이 나르는 짐의 양 규모가 다르다는 단순한 사실을 로마인들은 파악하지 못했다.
[©The Creative Assembly  SEGA]

[©The Creative Assembly SEGA]

토끼는 환경 적응 능력이 탁월해 남극과 대륙에서 멀리 떨어진 극소수 도서를 제외한 지구상 대부분 지역에서 서식한다. 토끼는 어디서나 살 수 있고 개체 수도 풍부해 포식자들이 침을 흘리는 사냥감이지만 토끼를 잡는 일은 매우 어렵다.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특유의 재빠른 몸놀림으로 포식자를 따돌리고 자신만의 은밀한 아지트로 숨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자도 토끼를 잡으려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격언이 전해진다. 토끼가 작다고 해서 만만히 보다가는 낭패 보기 쉽다는 뜻이다.


러시아 월드컵의 교병필패, 대한민국과 독일

중국의 대혼란기 춘추전국시대 서술된 손자병법(孫子兵法)에 아무리 만만하게 보이는 적이라도 깔보면 안 된다는 뜻을 가진 교병필패(驕兵必敗)라는 사자성어가 나온다. 이는 토끼와 사자가 등장하는 격언과도 의미가 일맥상통한다. 

인간의 근육과 기술이 결합된 경연장인 스포츠의 세계는 교병필패의 원리가 잘 작동하는 분야다. 게리 리네커(Gary Lineker)는 잉글랜드 축구를 대표하는 레전드다. 자국 리그는 물론 월드컵에서도 득점왕을 차지했을 만큼 당대를 대표하는 세계적 골잡이였다. 한국으로 치면 리네커는 차범근과 비교할 만하다. 

리네커는 축구를 논할 때 매우 냉정했다. 잉글랜드인이면서도 “축구는 90분간 싸워 독일이 이기는 경기”라고 정의했다. 잉글랜드 출신 공격수가 그렇게 말할 정도로 독일 축구는 유럽은 물론 세계 축구계를 장기간 지배했다. 독일 축구 전성기는 2018년 러시아 월드컵 개막 직전까지 이어졌다. 여러 지표에서 다른 경쟁국을 압도했다. 당연히 FIFA(국제축구연맹) 랭킹도 선두였다. 심지어 독일은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우승국으로 디펜딩 챔피언(defending champion)이었다. 

독일 축구의 우수함은 브라질 월드컵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독일은 강력한 우승 후보면서 홈팀인 브라질을 준결승에서 7대 1로 대파하는 믿기 어려운 성과를 창출했다. 이 세상 어느 나라도 브라질을 그렇게 이길 수 없다. 오직 독일만 가능한 일이다. 월드컵 개막 1년 전마다 컨페더레이션스컵(Confederations Cup)이 열린다. 러시아 월드컵 1년 전에 열린 컨페더레이션스컵도 독일의 차지였다. 누구도 독일의 러시아 월드컵 우승을 의심하지 않았다. 



독일이 러시아 월드컵 첫 게임에서 북중미의 맹주 멕시코에 불의의 일격을 당했으나 세계 축구팬들은 예방주사를 맞은 정도로 생각했다. 방심하다가 그럴 수도 있다는 평가였다. 그다음 경기에서 독일은 북유럽의 강호 스웨덴에 승리를 거두고 패배의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 

독일의 조별 리그 마지막 상대는 스웨덴, 멕시코에 연패한 한국이었다. 독일에 한국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최약체 한국과의 일전은 16강으로 가는 연습경기나 마찬가지로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교만한 독일은 마치 토끼 정도로 생각한 한국에 0대 2의 패배를 당하고 만다. 독일 축구 역사상 최초의 월드컵 조별 리그 탈락이었다. 

독일이 패배한 것은 누가 뭐래도 한국이 잘 싸웠기 때문이다. 아시아의 호랑이, 한국이 세계 최강 독일에 모처럼 크게 포효했다. 하지만 독일이 상대를 가볍게 여겼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월드컵 폐막 후, 독일이 한국과 멕시코의 전력을 철저하게 분석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독일은 한국의 맞춤 전술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반면 한국은 독일의 공격을 수비벽으로 막으며 경기 내내 강한 압박을 가했다. 그러다가 공을 낚아채면 번개 같은 속도로 역습했다. 축구는 점유율이 아닌 골로 승부를 가르는 경기임을 한국은 독일에 가르쳐주었다. 한국에서는 카잔의 기적이라고 부르는 이 경기는 축구판 교병필패라고 할 수 있다. 독일에서는 이 경기를 지금도 카잔의 치욕(Schande von Kasan)이라고 일컫는다. 

교병필패는 국가가 가진 물리력을 총동원해 다른 나라와 싸우는 전쟁에서 태어난 말이다. 일일이 예를 들지 않더라도 상대의 전력을 가볍게 여기다가 낭패(狼狽)한 강국은 역사상 부지기수로 많다. 객관적으로 아무리 약하게 보이는 상대라고 해도 전장에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치명적 무기나 획기적 전술 한두 개 정도는 보유하고 있게 마련이다.


로마공화국의 유일한 경쟁자 파르티아

카이사르, 크라수스, 마그누스(왼쪽부터). [wikimedia commons]

카이사르, 크라수스, 마그누스(왼쪽부터). [wikimedia commons]

2000여 년 전 서반구의 패자 로마의 권력 구조는 매우 독특했다. 공식 정체(政體)는 공화국(Roman Republic)이지만 마치 힘센 수사자 여럿이 사자 무리를 공동으로 지배하는 프라이드(pride)와 같았다. 

로마라는 거대한 프라이드를 공동 지배하는 실력자는 세 명이었다. 갈리아(Gallia)를 정복한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골칫거리이던 지중해 해적을 소탕한 폼페이우스 마그누스(Pompeius Magnus), 로마 최고 갑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Marcus Licinius Crassus), 이 시기를 세 명의 거두가 정치를 좌우한 때라는 뜻의 삼두정(triumvirate·三頭政)이라고 하기도 한다. 

세 영웅의 속내는 같았다. 혼자 권력을 독식해 황제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군중이 열광할 만한 위대한 업적을 더 쌓고 싶어 했다. 셋 중에서도 경쟁자들에 비해 나이도 많고, 군사적 업적이 부족한 크라수스의 마음이 특히 조급했다. 크라수스가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업적은 스파르타쿠스(Spartacus)의 반란을 진압한 것이었는데 냉정하게 평가하면 오합지졸 노예 반란을 막아낸 것일 뿐이었다. 그래서 당시 시민 대부분은 크라수스의 군공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크라수스는 그런 상황을 돌파하고 싶었다. 그의 선택은 도박이었다. 꾸준히 국력이 신장되던 파르티아(Parthian Empire)를 정복하기로 마음먹고 행동에 옮긴다. 

로마는 포에니전쟁을 통해 해양대국 카르타고(Carthage)를 정복하고 유럽과 아프리카의 패자가 된 지 오래였다. 로마의 평화 혹은 질서를 위협할 만한 존재는 당시 서반구에 없었다. 하지만 잠재적 도전자까지 고려하면 한 나라가 있었다. 파르티아였다. 파르티아의 영역은 현재의 이란, 이라크, 쿠웨이트,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전역과 터키,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일부를 아울렀다. 대제국이라고 칭하기는 부족하지만, 지역 강국으로 평가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약탈로 물자 확보한 원술, 백성 피해 최소화 조조

당시 파르티아는 동서의 중간에 위치한 이점을 활용해 무역으로 국가의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로마와 맞먹을 만한 국력을 가진 동양의 제국 한(漢)과 교역하기 위해 파르티아는 실크로드(silk road)를 이용하기도 했다. 국부의 원천인 장사의 주인공들은 낙타와 말의 등에 짐을 싣고 운반한 카라반(caravan)들이었다. 역사에서 대상(隊商)이라고 하는 이들이다. 

당시 로마인의 시각에서는 파르티아만 정복하면 그들이 아는 문명 세계를 모두 정복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파르티아의 거대한 영토와 막대한 재화는 승리와 함께 덤으로 딸려오는 보너스와 같았다. 크라수스는 그래서 큰 도박판에 뛰어든 것이다. 

파르티아라는 대국을 정복하려면 병력이 많이 필요했다. 로마의 시리아속주 총독으로 취임한 크라수스는 병력 확보를 위해 자신의 최고 무기인 재력을 활용한다. 자비를 들여 6개나 되는 군단을 모집하고 부임지인 시리아속주로 향한 것이다. 

시리아속주에는 2개 군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크라수스는 그중 1개 군단도 파르티아 원정에 차출하고 남은 1개 군단에 치안 임무를 맡겼다. 이렇게 편성된 원정군은 보병 3만4000, 기병 4000, 기타 2000 등 도합 4만이나 됐다. 당시 인구를 고려하면 엄청난 규모가 아닐 수 없다. 

원정군의 부장(副將)은 크라수스의 아들인 푸블리우스(Publius Licinius Crassus)였다. 그는 갈리아 원정에서 큰 공을 세워 아버지의 정적인 카이사르에게도 총애를 받은 인물이다. 카이사르는 푸블리우스를 위해 당시 유럽 최강으로 평가받던 갈리아 기병 5000기 중 1000기를 떼어 맡긴다. 정적의 원정길에 최정예 기병을 보태줄 만큼 카이사르는 ‘대인배’였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전력을 구성한 크라수스 군단은 시리아속주에서 승리를 위한 훈련보다 다른 활동에 치중한다. 원정군 사령관인 크라수스는 파르티아 원정 편성에 소요된 본전이 생각났던 것 같다. 원정에 앞서 시리아속주에서 비용을 회수하려 한 것이다. 신전(神殿)의 재물까지 털어버렸다고 하니 할 말이 없는 셈이다. 

무릇 군기는 엄정해야 한다. 군기가 전시에 승리를 담보한다. 후한(後漢) 말, 크라수스처럼 군을 운영한 제후가 있다. 남양태수(南陽太守) 원술(袁術), 그의 군은 배고픈 메뚜기 무리였다. 부족한 군량과 물자를 현지에서 약탈해 조달했다. 하지만 그의 경쟁자인 조조(曹操)는 달랐다. 근거지 연주에서 군수물자를 준비해 원정에 임했고, 전쟁을 하면서도 백성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노력했다. 군의 기강도 엄정했다. 그런 차이가 조조가 원술과는 전혀 다른 업적을 세우게 만들었다.


교만한 장수, 크라수스가 주는 교훈

기원전 53년 지금의 터키 땅인 카레(Carrhae)에서 크라수스의 대군은 파르티아의 수레나스(Surena)가 이끄는 파르티아군을 만난다. 수레나스의 병력은 로마 군대의 4분의 1에 불과했다. 파르티아가 소수 병력으로 로마의 대군에 맞선 데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 

당시 파르티아의 주력은 다른 곳에서 전쟁을 펼치고 있었다. 파르티아 조정은 수레나스가 카레에서 로마군의 진격을 늦추고 최대한 시간을 벌어주기를 바랐다. 파르티아 국왕 오로데스2세(Orodes II)의 주력군이 아르메니아와 전투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메니아는 로마군에 파르티아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향도(嚮導) 역할도 맡고 있었다. 

그런데 크라수스의 대군을 상대한 수레나스는 파르티아 국왕은 물론 로마인들까지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승을 거뒀다. 4만의 로마군 중 3만을 전사시키고 사령관인 크라수스와 그의 아들이며 부장인 푸블리우스까지 죽였다. 

수레나스는 150년 전 코끼리를 타고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침공한 카르타고의 한니발(Hannibal)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카레에서 전사한 3만의 로마군은 모두 로마의 시민이었다. 수많은 로마인이 카이사르를 포함한 실력자들에게 파르티아에 대한 피의 복수를 요구했다. 

크라수스의 패인은 상대를 얕보고, 치밀한 준비 없이 전쟁에 뛰어든 것이다. 교병필패(驕兵必敗)의 원리가 그대로 적용됐다.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아무리 상대가 약해도 자신이 사용 가능한 모든 카드를 활용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승리는 물론 아군 피해도 최소화할 수 있다. 하지만 크라수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승리를 가져온 파르티아의 낙타

로마-파르티아 전쟁을 묘사한 그림. [Wikia 홈페이지]

로마-파르티아 전쟁을 묘사한 그림. [Wikia 홈페이지]

카레의 들판에서 조우한 로마군과 파르티아군의 승패를 가른 것은 낙타였다. 수레나스는 낙타를 잘 활용해 병력이 4배에 달하는 크라수스의 대군을 격파했다. 

수레나스의 1만 병력 중 9000은 무장이 가벼운 경기병(輕騎兵), 1000은 중기병(重騎兵)이었다. 기동력이 우수한 경기병의 무기는 활이었다. 파르티아의 경기병들은 사정거리를 늘린 활을 가지고 로마군의 화살 사정거리 밖에서 화살비를 날렸다. 화살비가 쏟아지자 로마의 주력인 중갑보병들이 테스투도(Testudo)라는 귀갑(龜甲) 진영을 구축해 방어하려 했으나 파르티아의 중기병들이 일시에 돌진해 그 귀갑을 흔들어버렸다. 이렇듯 로마 군영이 혼란한 틈에 파르티아 경기병들은 다시 화살비를 퍼부었다. 이 같은 소모전에 당할 보병부대는 세상에 없다. 로마의 대군은 화살비에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로마의 보병들이 맥없이 쓰러지는 가운데 기병들도 같은 운명을 맞이한다. 파르티아 경기병들이 펼친 유인 전술에 걸려 이들도 보병처럼 화살비를 맞고 기병대장인 푸블리우스와 함께 전멸했다. 

로마군에 내린 화살비는 ‘사막의 배’ 낙타로 운송됐다. 파르티아의 대상들은 교역할 때 낙타의 등에 물자를 싣고 다녔는데, 군도 낙타를 활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파르티아의 낙타들이 카레로 엄청난 양의 화살을 싣고 왔다. 1000마리나 되는 낙타가 동원됐다. 파르티아 기병들이 화살비를 내릴 때 로마군은 잠시 후 그치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오판이었다. 그 비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과 낙타가 나르는 짐의 양은 그 규모가 다르다는 단순한 사실을 당시 로마인들은 파악하지 못했다. 

수레나스의 승리는 침략국 로마는 물론 파르티아 내부까지 불안하게 했다. 오로데스2세는 수레나스의 전과에 기뻐하면서도 질투했다. 임금이 신하의 공적을 시기하면 신하의 목숨은 위험해지는 법이다. 

카레 전투 결과, 시리아속주에는 로마 군단이 한 개밖에 남지 않았다. 8개나 되는 로마 대군 중 7개가 궤멸했기 때문이다. 또한 로마의 동맹을 자처하던 아르메니아도 파르티아의 보호국이 됐다. 상당 기간 로마는 파르티아를 공략하기 어렵게 됐다.


토사구팽 당한 수레나스

오로데스2세는 수레나스를 더는 필요 없는 존재로 여겼다. 결국 수레나스는 토사구팽(兎死狗烹) 신세가 된다. 셀레우키아로 입성한 수레나스는 의문투성이 죽음을 맞는다. 누가 그를 죽였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낙타를 효율적으로 이용해 로마의 대군을 궤멸한 수레나스는 한니발처럼 로마의 두통거리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하늘은 그가 한니발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로마의 쇄락도 원하지 않았다. 수레나스 사후 파르티아군은 여세를 몰아 시리아속주를 공격했으나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패퇴한다. 패인은 간단했다. 파르티아 군영에는 수레나스가 없었고 오직 시기심에 눈이 멀어 신하를 의심하고 질투한 오로데스2세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동아 2020년 5월호

이강원 동물칼럼니스트 powerranger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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