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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근 SF] 차원 이동자(The Mover) 9-3

제베, 니키, 타파히의 운명

  • 윤채근 단국대 교수

[윤채근 SF] 차원 이동자(The Mover) 9-3

  • 탁월한 이야기꾼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SF 소설 ‘차원 이동자(The Mover)’를 연재한다. 과거와 현재, 지구와 우주를 넘나드는 ‘차원 이동자’ 이야기로, 상상력의 새로운 지평을 선보이는 이 소설 지난 회는 신동아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1
헤라트 성곽 위로 떠올랐던 초승달이 지고 있었다. 새벽이 다가오자 군막 곳곳에 서 있던 초병이 교대됐고 어디선가 뿔피리 소리가 울렸다. 제베는 우울했다. 요괴의 시도가 성공해 행성의 차원이 파열되고 나면 지구는 미지의 세계로 연결될 통로로 전락할 터였다. 제베가 요괴에게 물었다.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너와 나의 고향이 여기 지구라면 어떻게 되지?” 

요괴가 수직으로 솟구쳤다 천천히 하강하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얘기더냐?” 

“우리의 탈피가 이곳에서 시작됐다면…, 우린 스스로의 과거를 지우는 셈이잖아? 그럼 우린 어찌 되는 거냐고?” 



침묵하던 요괴가 갑자기 낄낄거리며 웃었다. 

“탈피가 지구에서만 시작된 줄 아는 것이냐? 천만의 말씀이로다! 파동 진화는 우주 전체에서 벌어졌음을 모르는구나.” 

흉갑을 벗어 바닥에 내려놓으며 제베가 천천히 물었다. 

“그건 안다만…, 너의 출발은 지구가 아닌 거야?” 

성곽 깃대를 한 바퀴 일주한 뒤 요괴가 대답했다. 

“뭐, 별 관심 없지만…, 지구는 아닐 게다. 이동자에게 출신 행성은 의미 없느니라. 설마 네 녀석 지구 출신이더냐? 그리 믿고 있는 것이냐?” 

고개를 끄덕인 제베가 입술을 깨물며 속삭였다. 

“난 이상한 꿈 때문에 이탈자가 됐어. 들어보겠어?” 

제베는 자기 꿈 얘기를 길게 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요괴가 물었다. 

“탈피 과정에 문제가 있었겠구나. 한데 그 꿈의 장면을 이 행성에서 찾긴 한 것이냐?” 

제베가 쓸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찾았어. 네가 블루피를 살해하고 도주한 뒤 난 다시 벌어진 로봇 전쟁에 뛰어들었지. 들어보겠어?”

2
다시 시작된 로봇 전쟁으로 지표 문명은 초토화되기 직전이었다. 전쟁 양상을 가른 건 일렉트로노이드 신기술이었다. 그들은 생체수용기를 단 로봇 사이로 자유롭게 육화되며 싸울 수 있었다. 이는 지상군이 일렉트로노이드 로봇 안에 내장된 칩을 부숨으로써 상대를 제거할 수 있었던 이전 전쟁들과 다른 결과를 초래했다. 로봇은 파괴할 수 있었지만 수용기를 통해 이동하는 일렉트로노이드 자체는 없앨 수 없었다. 일렉트로노이드는 불멸이었다. 

지상의 정예 로봇군이 일렉트로노이드에 의해 속수무책 궤멸되자 지표 문명의 식민지화가 현실로 다가왔다. 남부 방위군 소속이던 니키 바일이 파라나이클 여사의 호출을 받은 게 그 무렵이다. 

“전공이 혁혁하다고 들었습니다. 니키 양.” 

대륙지휘부 지하통제실에서 만난 파라나이클 여사는 초췌해 보였다. 니키가 아무 대답이 없자 여사가 다시 말했다. 

“지구 문명은 이제 막을 내리게 될 것 같군요. 아쉽지만 우린 결단의 순간에 서 있습니다.” 

“어떤 결단인가요?” 

망설이던 여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구를 버릴 겁니다.” 

“이주하는 건가요?” 

“이주와는 다릅니다. 우린 대기권에 일렉트로노이드의 섬보다 더 큰 인공섬들을 띄울 겁니다.” 

“그 우리라는 게 정확히 누군가요?” 

니키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여사가 한숨을 내쉰 뒤 대답했다. 

“각 대륙 지도부와…, 그리고 소수의 선발 인원만 승선이 허용될 겁니다. 아쉽지만 나머지 인류는…,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괴로운 결정이었다는 것만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니키는 말없이 일어섰다. 더는 머물 이유가 없었다. 여사가 급히 말했다. 

“당신은 특별한 능력을 지녔습니다. 도와주십시오.” 

“뭘 돕죠?” 

“우리 대륙의 인공섬이 곧 출발합니다. 전 가장 마지막에 탑승할 겁니다. 우리 가족을 경호해 주시겠습니까? 당신은…, 외부 존재지만 제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여사는 ‘사람’이라는 발음에 힘을 줬다. 니키가 웃었다. 

“도와드릴 수 있지만 일렉트로노이드 쪽에서 섬들을 가만히 둘까요? 격추하려 들 텐데.” 

“각 대륙의 인공섬은 오랫동안 준비됐습니다. 강력한 방어 시스템을 갖췄습니다. 일단 대기권으로 상승하면 공멸을 각오하지 않는 한 저들도 쉽게 공격하진 못할 겁니다.” 

팔짱을 낀 니키가 잠시 상대를 뚫어지게 응시한 후 속삭였다. 

“도와드리죠.”

3
마지막 비행선은 모선인 인공섬을 향해 필사적으로 상승했다. 일렉트로노이드 로봇들과 치열한 교전을 벌인 니키는 출입구 도크를 닫고 방전 상태로 쓰러졌다. 그녀가 지켜낸 파라나이클 여사 가족들은 비행선 조종 구역으로 안전하게 이동했다. 니키 옆으로 다가와 앉은 파라나이클 여사가 속삭였다.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지만 진심을 담아 감사를 전합니다.” 

헬멧을 벗은 니키가 물었다. 

“이제 어쩌실 건가요? 지구를 포기하면 인공섬만으론 자립할 수 없을 텐데.” 

몸을 일으킨 여사가 대답했다. 

“우린…, 일렉트로노이드의 길을 따를 겁니다.” 

“무슨 뜻이죠?” 

“우리도 육체를 버릴 겁니다. 그게 노아의 방주에서 우리가 생존할 유일한 방법입니다.” 

말을 마치고 조종 구역으로 움직이는 여사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던 니키는 문득 뭔가를 깨닫고 전율했다. 전투복을 다시 비상 모드로 전환한 그녀가 여사가 방금 들어선 조종 구역 입구로 천천히 다가섰다. 문을 열자 비행 요원들과 여사의 가족이 보였다. 조종간 너머로는 검푸른 대기권을 배경으로 남부 대륙이 띄운 인공섬이 다가오고 있었다. 

자장가가 들려왔다. 파라나이클 여사가 자기 어린 아들을 위해 부르는 노래였다.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 뒤 여사의 남편이 말했다. 

“몸은 진화의 방해 요소일 뿐이야. 한숨 자고나면 자유를 얻는 거지.” 

고개를 끄덕인 여사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함께 잠들면 우린 영생을 얻는 거야. 두려워 마, 우리 아가.” 

니키가 들어선 걸 알아차린 여사가 미소 지으며 뒤돌아봤다. 니키가 절박한 음성으로 외쳤다. 

“모두 몸을 고정하고 전투 모드로! 공격이 시작돼요.” 

폭음이 연이어 울렸고 파편들이 튀었다. 후미로 따라붙은 일렉트로노이드의 비행선은 자비가 없었다. 파괴된 비행선에서 비상 탈출한 여사의 가족들은 착용한 우주복 분사 장치 출력을 최대치로 올리며 필사적으로 인공섬을 향해 접근했다. 그들을 뒤에서 호위하던 니키는 결말을 이미 알고 있었다. 여사의 아들만 생존해 섬으로 들어갔다. 부유하는 여사 부부의 시신 옆을 지나던 니키의 시야 저 아래로 창백하게 빛나는 지구가 보였다.


윤채근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



신동아 2020년 6월호

윤채근 단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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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Opinion Leader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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