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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근 SF] 차원이동자(The Mover) 12-4

모든 이야기의 시작, 1987년 서울

  • 윤채근 단국대 교수

[윤채근 SF] 차원이동자(The Mover) 12-4

  • 탁월한 이야기꾼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SF 소설 ‘차원 이동자(The Mover)’를 연재한다. 과거와 현재, 지구와 우주를 넘나드는 ‘차원 이동자’ 이야기로, 상상력의 새로운 지평을 선보이는 이 소설 지난 회는 신동아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편집자 주>
1
술에 취한 혜선이 몽롱하게나마 의식을 회복했을 때 그녀는 박혜선과 어깨동무한 채 철길을 걷고 있었다. 어디 철길인지도 알 수 없었다. 박혜선의 키는 혜선보다 훨씬 컸고 완력도 강했다. 겨우 어깨동무를 풀고 주변을 둘러봐도 아무도 없자 혜선이 물었다. 

“선배, 여기 어디예요?” 

비틀대며 선로 위로 올라서서 간신히 균형을 잡은 박혜선이 소리쳤다. 

“이대 앞. 네가 오자고 했잖아?” 

“다른 사람들…, 아니 지훈인 어디 있어요?” 



선로에서 껑충 뛰어내려 몇 걸음 다가온 박혜선이 대답했다. 

“진짜 기억 안 나?” 

“전혀요.” 

“나머진 신촌 주점에 있어. 네가 나보고 밖에 나가자고 했어. 바람 쐬자며?” 

혜선을 와락 껴안은 박혜선이 잠시 동작을 멈추고 다시 말했다. 

“세상은 근본적으로 변할 거야. 그리고 난 운동권 아니야.” 

“그럼 왜 어울리세요?” 

“글쎄. 잘 살펴보면 내 주변은 대부분 외로운 애들이야. 외로움은 뭐랄까…, 괴테가 말한 친화력 같은 거야.” 

박혜선 품에서 벗어난 혜선이 물었다. 

“친화력이요?” 

“그래. 고대 그리스 철학에도 등장하는 말이지. 우주는 친화력으로 움직여. 인력 같은 거지. 인간에겐 그게 외로움으로 나타나는 거야. 사랑도 마찬가지고. 알고 보면 다 물리법칙을 따르는 거라 이거지.” 

담배 연기를 검은 창공을 향해 길게 뿜은 그녀가 혜선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날 운동권으로 규정하지 마. 난 나야. 넌 너고. 한 대 피울래?” 

혜선이 상대로부터 건네받은 담배를 입에 물자 박혜선이 불을 붙여줬다. 매캐한 연기가 폐 속으로 스미자 머리가 핑 돌았다. 박혜선이 하늘 곳곳에 점점이 빛나는 별을 올려다보며 다시 말했다. 

“난 가끔 외계인과 만나는 꿈을 꿔. 그럼 그 존재와 난 대등하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서열을 정하기 전까지는.” 

“서열이요?” 

“그래, 서열. 이제 주점으로 돌아갈까?”

2
새벽의 신촌은 을씨년스럽고 황량했다. 지훈과 단둘이 된 혜선이 금화터널 쪽으로 걷다 물었다. 

“지훈아. 난 가끔 외계인과 만나는 꿈을 꿔. 그럼 그 존재와 난 대등하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서열을 정하기 전까지는.” 

푸르스름한 새벽 기운을 품고 미동도 않은 채 서 있던 지훈이 혜선의 손을 쥐고 속삭였다. 

“넌 이미 만났어.” 

고개를 갸웃한 혜선이 잠깐 망설이다 물었다. 

“뭘?” 

“외계인을.” 

“외계인? 너?” 

“응. 나 외계인이야. 믿지 못하겠지만.” 

“그럼 넌 안드로메다 성운 뭐 그런 먼 곳에서 날아와 지구인 몸에 침투한 거야?” 

“비슷해. 증명할 수도 있어.” 

지훈의 눈동자를 지긋이 응시하던 혜선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증명해 봐.”


3
커튼 사이로 환한 햇살이 비쳐들고 있었다. 먼저 잠에서 깬 혜선이 창문을 열자 인왕산 방향에서 부는 시원한 유월의 바람이 모텔방 안으로 밀려들었다. 곧이어 눈을 뜬 지훈이 혜선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잘 잤어?” 

급히 시트 안으로 들어선 혜선이 천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외계인도 잠을 자야 해?” 

고개를 저은 지훈이 대답했다. 

“자는 척하는 거야. 밤새 널 바라보고 있었어.” 

“언제 떠나? 여기 지구 말이야.” 

“당장 떠나진 않을 거야.” 

“그럼 나랑 살 거야?” 

“아니. 난 쫓기고 있어. 곧 이 친구…, 이 숙주에서 벗어나야 해.” 

“어쨌든 우린 서로에게 외계인인 거야, 그치? 대등해진 거고. 무슨 일이 벌어져도 난 나일 뿐이야. 그렇게 살 테야. 아빠에겐 네 얘기 이미 했었어. 네가 간첩이라도 상관없어 난.” 

말을 멈추고 지훈 쪽을 돌아본 혜선은 흠칫 놀랐다. 갑자기 몸을 떨며 웅크렸던 지훈이 퀭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일어서려던 그는 두통을 호소하며 다시 누웠다. 그의 이마를 짚으며 혜선이 속삭였다. 

“어쩐지 많이 마시더라. 더 쉬어야겠다. 그래도 외계인 놀이는 감동적이었어. 내 의식을 자주 끊기게 한 건…, 어떻게 한 건진 몰라도. 아마 술 때문이었겠지?”


4
 ‘전생윤회클럽’ 모임 장소에 도착한 박수무당 한상원이 주변을 둘러봤다. 공민서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회장 인사말이 시작되기 직전 백팩을 멘 젊은 여성 한 명이 뛰듯이 들어와 맨 뒷줄 구석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녀는 자주 졸았다. 

같은 줄 한 칸 건너로 옮겨 앉아 민서를 관찰하던 상원이 물었다. 

“기자분이시죠? 독특하군요. 단어에도 꼭 피리어드를 찍으시네.” 

턱을 괸 채 머리를 돌려 상원을 바라보던 민서가 대답했다. 

“프리랜서예요.” 

고개를 끄덕인 상원이 웃음을 머금고 다시 말했다. 

“공민서 기자님. 동양일보 과학전문 출신 아니세요?”

5
자신을 인터뷰하기 위해 앞자리에 앉은 민서에게 상원이 물었다. 

“인터뷰 전에 재밌는 인연 하나를 얘기해도 될까요?” 

어깨를 움찔한 민서가 어서 해보라는 손짓을 하며 인터뷰 자료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그 모습을 미소 띤 채 바라보던 상원이 천천히 속삭였다. 

“전 실은…, 공 기자님 어머님을 잘 압니다.” 

무심한 표정의 민서가 휴대전화 녹음 기능을 확인하며 건성으로 물었다. 

“무슨 인연일까요? 저희 엄만 워낙 사교적이라.” 

팔짱을 낀 상원이 마치 독백하듯 말했다. 

“다 대학 시절 추억이죠. 전 성혜선 씨와 같은 87학번이었거든요.” 

“우리 엄마 혜선 씨는 여대 출신인데? 선생님 혹시 성전환하셨어요?” 

피식 웃은 상원이 다리를 꼬고 덧붙였다. 

“세계는 우리에게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죠. 기자님 계신 회사 명칭이 ‘서프라이즈 월드’ 아닌가요?” 

“그래서요?” 

“다른 차원에선…, 제가 공 기자님의 아빠일 수도 있었다는 거죠.” 

“그럼요. 그리고 또 다른 차원에선 제가 선생님의 엄마였을 수도 있고 말이죠?” 

“아 그런가요? 자 그럼 인터뷰 시작해 볼까요?”

6
두 눈이 동그래진 민서가 물었다. 

“선생님께서 그 구멍들을 요리조리 타고 지구에 오신 외계인이시다?” 

“네.” 

“그럼 왜 오셨어요? 하필이면 별 볼 일도 없는 이 별에?” 

“구경하러.” 

“구경하시겠다고 그 먼 길을 오셨다?” 

“당연히. 전 시간 이동을 하며 이 별을 관찰하고 있어요. 지금 이 몸뚱이는 말하자면 관광용 탈것이죠. 여기서 쓸 이동수단 같은 겁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민서가 미동 하나 없이 말했다. 

“그럼 증명해 보세요.”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



신동아 2020년 9월호

윤채근 단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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