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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38도선 이북을 ‘직접’ 통치했다

김학준이 다시 쓴 현대사 결정적 장면 ③

  • 김학준 단국대 석좌교수

소련은 38도선 이북을 ‘직접’ 통치했다

  • 우리는 지난 회에서 1945년 9월 하순부터 11월 하순의 3개월 사이에 미국과 소련이 각각 자국의 점령 지역 안에 자국에 충실할 정부를 세우기 위한 잠정적 계획을 세운 사실을 지적했다. 말하자면, 이 시기에 한반도에서 장차 두 개의 국가가 성립되는 원형이 거친 형태로나마 마련된 것이다. 

    그러면 왜 이러한 일이 벌어졌을까. 

    그 원인은 이미 이 시기에 미국과 소련 사이에 세계적 차원에서 전개되기 시작한 냉전에 있다. 미·소냉전이 한반도에 그대로 투영된 것이다. 제3회는 우선 미·소냉전의 초기 양상을 살피고 이어 그 영향 아래 두 강대국이 각각 남과 북에서 자신에 충실할 정권을 세워나가는 초기 과정에 관련된 논점들을, 특히 소련의 대북(對北) 점령정책에 초점을 맞춰 다루기로 한다.

논점1
미·소냉전은 언제 어떻게 시작됐나.

트루먼(앞줄 왼쪽)과 스탈린(앞줄 오른쪽). [GettyImage]

트루먼(앞줄 왼쪽)과 스탈린(앞줄 오른쪽). [GettyImage]

미·소냉전의 기원에 관한 논쟁은 국제정치학계에서 매우 중요하면서도 뜨거운 논쟁 가운데 하나였으며, 자연히 참으로 많은 저술이 출판됐다. 이 제한된 지면에서 그 논쟁을 자세히 다루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단순화해 짧게 설명하기로 한다. 

스탈린의 급속한 동유럽 소비에트화가 서방세계를 긴장시키다 | 2차대전을 계기로 연합을 형성했던 미국과 소련 사이의 협력관계는 나치독일의 패망이 눈앞에 닥친 1945년 4월 중순이 되면서 갈등·대립관계로 바뀌기 시작했다(또는 잠재하던 갈등·대립이 표면화하기 시작했다). 나치독일의 지배 아래 놓여있던 동유럽 국가들을 해방시킨 소련군은 우선 폴란드를 점령하자마자 자신의 괴뢰정부를 세웠으며, 이어 헝가리와 불가리아를 비롯한 나머지 국가들에도 자신의 괴뢰정부 또는 친소정부를 세워나간 것이다. 다만 유고슬라비아와 알바니아는 각각 자신의 힘으로 나치독일을 물리쳤기에 소련이 자신의 체제를 강요하기가 어려웠다. 

이때는 소련과의 협력을 중시한 ‘대소(對蘇) 유화주의자’ 루스벨트 대통령이 별세하고 소련을 ‘악(惡)의 존재’로 간주한 전형적 반공·반소주의자 트루먼이 대통령직을 계승한 직후였다. 그 스스로도 폴란드 문제를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던 터에, 주소 미국대사 애버럴 해리먼은 물론이고 영국 총리 처칠도 그에게 소련의 영토 팽창 정책에 대해 깊은 우려를 전달했다. 그들은 공격적인 스탈린의 동유럽 정책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여러 차례 경고하기도 했다. 

트루먼, 몰로토프를 차갑게 대하다 | 트루먼은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니 걱정 말라”는 취지로 대답하곤 했는데, 그의 강경 정책은 대통령에 취임한 때로부터 11일이 지난 4월 23일에 확연하게 드러났다. 백악관을 예방한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의 인사를 받자마자 분노한 목소리로 몰로토프의 발언을 중단시키면서, 소련이 얄타에서의 합의를 무시한 채 동유럽을 소련의 위성국가들로 채우려는 정책을 쓰고 있다고 비난하는 ‘강의’ 또는 ‘설교’를 한 것이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백전노장인 몰로토프가 “나는 평생 상대방으로부터 이런 식의 말을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라고 대꾸하자, 트루먼은 “귀하는 약속을 이행하십시오. 그러면 귀하는 그런 식의 말을 듣지 않게 될 것입니다”라고 거칠게 반박했다. 

트루먼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나치독일이 항복한 5월 8일 직후부터 그사이 미국이 소련에 베풀던 무기 대여를 일방적으로 끊었다. 스탈린이 격노했음은 물론이다. 최소한 이 두 가지만 종합해도, 전시에 형성됐던 미·소 사이의 협조 분위기는 이 시기에 이르러 상당히 손상된 것이 확실해졌다. 그리고 이 사실을 중시하는 학자들은 이미 이 시점부터 미·소 사이에 냉전이 시작됐다고 주장했다. 



트루먼에게 책임이 있다 | 어떤 학자들은 상황이 이렇게 바뀐 데는 트루먼에게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그때 스탈린이 유럽에서는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의 우려와 경계를 불러일으킬 만한 영토 팽창정책을 쓴 것이 사실이지만, 아시아에서는 훨씬 신중하게 처신하고 있었는데도 트루먼이 지나치게 반소적으로 대응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냉전이 이후 어떻게 확대됐으며,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둘러싼 논쟁에 대해, 우리는 앞으로 더 자세히 살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 한정해 살핀다면, 트루먼의 자세는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동유럽에서 나타난 철저한 인권탄압과 공산주의자들의 행패, 특히 암살과 기존 질서의 전복을 포함한 소련의 반민주적 정치 공작은 그것이 아시아에서도 되풀이될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이러한 미·소 사이의 초기 냉전은 한반도의 명운에 직접 영향을 주었다.

논점2
소련점령군의 북한 통치는 간접통치였나 직접통치였나.

소련은 당시에도 그러했지만 훗날에도 자신이 북한을 점령하던 시기에 모든 것을 조선인에게 맡겨 조선인에 의한 통치가 실시됐다고 자랑했다. 특히 미국의 남한점령정책과 비교해, “미국은 남한을 직접통치했지만 우리는 북한에 자율권을 주었다”고 부연하기도 했다. 이 주제에 관해, 결코 친소적이지도 친북적이지도 않은 객관적 연구자들도 “미국은 남한에서 직접통치를 했으나 소련은 북한에서 간접통치를 했다”는 결론을 제시하곤 했다. 

미국의 어떤 학자들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그들은 “소련의 북한점령정책은 소련의 동유럽점령정책과 많이 달랐다. 소련이 동유럽의 몇몇 나라에서 현지인들을 무시하고 강압 통치를 한 데 비해 북한에서는 북한인의 이익과 판단을 존중했다”고 논평하면서, 소련의 북한점령통치를 소련의 동유럽점령통치와 동일시하는 방법은 오류라고까지 주장했다. 

과연 그러했던가. 우선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 제1극동방면군 산하 제25군이 취한 일련의 조치를 살피기로 한다. 

‘붉은 군대는 무슨 목적으로 조선에 왔는가’ |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은 북조선주둔소련군사령부의 이름으로 평양에서 ‘붉은 군대는 무슨 목적으로 조선에 왔는가’ 제하의 문건을 발표했다. 이 문건이 언제 발표됐는지에 대해서는 엇갈리는 주장이 여럿 있다. 그러나 소련이 평양에 주둔하기 시작한 날인 1945년 8월 24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문건은 우선 “붉은 군대의 위력은 크고도 큽니다”라는 문구로 시작했다. 북한인들에게 자신의 막강한 무력을 과시함으로써 앞으로 소련점령군에 저항하지 말라는 ‘협박’을 함축한 것이다. 그다음에, “붉은 군대는 이 위력을 다른 나라 사람들을 정복함에 이용하지 않았으며 또 이용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다짐하고, “붉은 군대는 조선에 소비에트 질서를 설정하거나 또는 조선을 얻으려는 그러한 목적을 가지지 않았습니다”라고 부연했다. 

더욱 구체적으로, “민주주의 원칙과 시민의 자유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반일적이고 민주적인 정당의 창당과 그것을 위한 모든 활동을 허락할 것입니다”라고 약속했다. 이 문건은 소련군의 해방자로서의 이미지를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나 달랐다. 곳곳에서 부녀자에 대한 성폭행, 북한 주민으로부터의 재물 탈취 등이 빈번히 일어났던 것이다. 이런 행각은 1945년 12월 초순에 이르러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한 본국 정부의 강력한 지시에 따라 중단된다. 

그렇지만 그런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들이 있었다. 소련군이 입북하기에 앞서, 제2회에서 지적했듯, 조선인들은 북한의 모든 곳에서 이미 자치기구들을 세워놓고 있었는데, 소련군은 입북하자마자 그 기구들을 자신의 입에 맞게 개편했으며, 여기에 저항하거나 어긋나는 사람들을 제거했다. 약 30만 명에서 50만 명에 이르는 북한 주민의 목숨을 건 탈북·월남은 이러한 배경에서 발생했다. 

군경무사령부의 통치 | ‘붉은 군대는 무슨 목적으로 조선에 왔는가’ 문건 발표와 동시에 북조선주둔소련군사령부는 1945년 8월 26일에 평양에 ‘봐나야 코멘다투라’, 곧 군경무사령부(軍警務司令部) 총사령부를 개설했다. 그러곤 주요한 시(市)와 군(郡) 등의 행정단위에 그 지역을 관할하는 군경무사령부를 세워, 그 수가 1945년 9월 28일께 시점에서 모두 54개에 이르렀다. 면·리·동의 단위에는 군경무사령부가 설치되지 않았으나, 군에 설치된 군경무사령부의 관할은 그 아래 단위들에까지 미쳤다. 

군경무사령부는 차차 더 확대됐다. 1948년 중반에는 그 범위가 평안남도·평안북도·함경남도·함경북도·황해도·강원도 등 도합 6개의 도(道)와 7개의 시 및 85개의 군에 미쳤으며, 이 모든 지역에 배치된 군경무사령부 소속 군인의 수는 1262명에 이르렀다. 

결론부터 말해, 그들이 바로 북한의 실질적 지배자였다. 모스크바에서 당시 소련의 기밀문서들을 활용해 소련의 북한점령정책을 연구한 전현수 경북대 교수는 “군경무사령관은 법령의 효력을 지닌 명령과 지시를 발(發)하고 이의 불이행을 소련군에 대한 적대행위로 처벌할 수 있었다. 그는 친일적인 정당과 사회단체의 해산과 그 재산의 몰수 그리고 경찰서와 헌병대의 근무자들과 일본군대 군무원들의 의무적인 등록을 명하거나, 총포·도검·폭발물·라디오방송기의 소지와 제조를 금할 수 있었으며, 통행시간의 제한은 물론이고 우편과 전신의 검열 그리고 거주이전의 제한도 명령할 수 있었다”고 썼다. 

전 교수는 이어 “군경무사령관은 (ⅰ)소련군 보급에 긴요한 시설과 상업기관 및 생산기업소의 조업 재개를 명하고 노동자와 사무원의 직장 이탈을 금할 수 있었으며, (ⅱ)주류 판매와 밀수 행위의 금지, 마약업소와 사창가의 폐쇄, 생필품 가격 통제의 권한도 보유했고, (ⅲ)도로와 교량의 수리, 파괴된 건물의 해체, 도시의 청소, 정미소와 발전소 및 상수도의 복구와 군사시설의 해체를 위한 의무노동에 주민을 동원할 수 있었다”고 부연했다. 전 교수의 해설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군경무사령관은 자신의 관할 지역에서 열리는 모든 집회와 회의에 소련군 대표를 파견해 참관하거나 감시하게 하는 권한을 가졌으며, 모든 연주회와 연극 공연을 사전에 검열하는 권한을 가졌고, 모든 신문과 잡지 및 기타 출판물을 폐지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주민에 대한 철저한 감시 |
군경무사령관의 권한은 그것들 밖에도 더 많았다. 군대 내부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주민에 대해서도 휘하의 요원들을 통해 감시할 수 있었다. 그의 지휘를 받는 그들은 “우리 요원들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라는 스탈린의 구호에 따라 행동했다. 그들은 거의 모두가 정치공작에 숙달된 정치장교들로서, 대중 동원과 선동 그리고 반대 세력 제거를 위한 폭력 행사를 주업으로 삼고 있었다. 

실제로 당시 북조선주둔소련군사령부의 제2인자로 북한 전역의 군경무사령부를 지휘했던 군사위원 니콜라이 레베제프 소장은 훗날 “군경무사령부는 반인민적 세력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다”고 공개 발언했다. 여기서 ‘반인민적 세력’은 소련군의 점령통치 또는 공산주의 그 자체를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사람 또는 집단을 의미했다. 


1945년 8월 24일 함경남도 함흥에 도착한 소련 극동군 제25군. [독립기념관 제공]

1945년 8월 24일 함경남도 함흥에 도착한 소련 극동군 제25군. [독립기념관 제공]

시베리아로의 유배 | 그 작은 실례들을 지적해 보자. 이몽(李蒙)을 비롯한 온건한 사회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이 평양의 한 음식점에서 조선민족사회당 결성을 토론한 사실을 알게 된 평양의 군경무사령부는 그 음식점에 출입한 약 30명을 모두 검거했다. 그들은 발기인대회나 창당식을 열어보기는커녕 정강정책을 토론해 보지도 못한 채 어디론가 사라져야 했다. 이용목(李容穆) 등이 추진한 태극협회 결성도 불법 단체를 결성하려 했다는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또 그때 함흥에서 작가 박연희(朴淵禧) 등과 함께 민주청년회를 결성한 한교석(韓喬石)에 따르면, 자신을 포함한 민주청년회의 간부들은 10월 초 소련군 당국에 체포돼 시베리아로 유배됐다가 평양형무소로 이감됐다. 다행히도 박연희와 한교석은 우여곡절을 겪은 뒤 탈북·월남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 사례들은 결사와 집회의 자유가 철저히 금압됐었음을 보여준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철저한 탄압 | 사상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 역시 성립될 수 없었다. 두 가지 사례만 지적하기로 한다. 하나는 ‘고상한 사실주의’의 강요다. 스탈린 치하의 소련은 예술가들에게 “사실주의라고 해서 현실 그대로 묘사해서는 안 되며, 소비에트사회의 고상한 부분을 묘사해야 한다”라는 이론으로써 소련 사회의 어두운 면을 묘사하지 못하게 강요했는데, 군경무사령부는 이 이론을 북한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했던 것이다. 

1946년 12월 ‘응향(凝香) 사건’이 그 한 보기였다. 원산의 예술인들이 ‘응향’이라는 시집을 발행하자, 소련군 당국은 이 시집이 ‘퇴폐적이며 반동적’이라고 규정하고 자아비판을 강요했다. 이 시집에 기고한 시인 구상(具常) 그리고 표지화를 그린 화가 이중섭(李仲燮)은 이 사건을 계기로 탈북·월남한다. 

똑같은 일은 평양에서도 일어났다. 황순원(黃順元)과 양명문(楊明文) 등이 발간한 ‘관서시인집(關西詩人集)’을 ‘부르조아적이고 퇴폐적’이라고 단정한 소련군 당국은 관계자들을 엄격히 조사한 뒤 자아비판을 강요했다. 이 일을 계기로 황순원과 양명문 역시 탈북·월남한다. 

위에서 지적한 여러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이제 모든 것이 죄다 조선인 여러분에게 달렸다”라는 1945년 8월 15일자 ‘치스치아코프 대장의 포고문’의 그 유명한 구절은 헛말임이 확실했다. “이제 모든 것은 소련점령군에게 달렸다”가 현실이었다. 

각도보안부장회의의 사례 |
소련점령군이 얼마나 철저하게 북한을 직접통치했는지를 말해주는 사례들 가운데 하나가 1946년 7월 1일부터 3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각도(各道)보안부장회의에서 니콜라이 자구루진 대령이 내린 ‘지시’다. 이 회의의 회의록 전문은 6·25전쟁 기간에 미군에 입수돼 미국에서 공개됐기에 우리는 그 진상을 알 수 있게 됐다. 

이 회의록에 따르면, 각 도의 보안부장은 자신이 관할하는 도에서 철도경비대와 수상경비대 및 비밀경찰을 포함한 경찰 전반과 검찰을 관장하는 실질적 권력자였다. 각 도 보안부장들로부터 보고를 빠짐없이 청취한 자구루진은 회의를 총괄하는 자리에서 ‘지시’를 내렸다. 그는 칭찬할 부분은 칭찬하면서도 비판할 부분은 비판하고 보안요원들이 앞으로 수행해야 할 임무에 대해 구체적으로 지시했다. 그의 지시가 끝나자, 보안부장회의를 소집한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보안국 국장 최용건은 “중대정치범 취급은 반드시 소련군의 지시하에 집행하라”고 강조했다. 

보안국이 자체 신문을 발행하자는 제의에 대해서도 “소련군사령부가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므로” 그만두자고 결론이 내려졌다. 이러한 문제에서도 최종결정권은 소련주둔군에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그저 단편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거듭 말하지만, 소련군 점령 아래서 북한의 크고 작은 모든 문제는 소련주둔군의 직접적 ‘지시’에 의해, 또는 동의에 의해 결정된 것으로, 소련의 ‘직접통치’를 증명하기에 충분했다.

논점3
소련의 북한점령통치는 군정이었나 아니었나.

소련의 북한점령통치가 직접통치였나 간접통치였나에 관한 논쟁은 그것이 군정이었나 아니었나의 논쟁과 표리관계를 형성했다. 직접통치였다는 주장은 그것이 군정이었다는 주장으로 이어지고, 간접통치였다는 주장은 그것이 민정이었다는 주장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핀 군경무사령부의 역할은 소련군이 사실상 군정을 실시했음을 보여주었다. 북한 전역에 설치된 군경무사령부가 주민을 감시하면서 북한을 지배한 것이다. 그 점을 우리는 다음의 논점 4에서 자세히 보게 될 것이다. 

민정담당부사령관직의 신설 | 소련 정부는 일본이 태평양지역연합국최고사령부(SCAP)의 사령관 맥아더 원수를 상대로 항복 문서에 조인한 1945년 9월 2일 다음 날에 북한은 물론이고 만주와 몽골 등 동북아시아의 주요 지역들을 점령한 소련 극동군 제1방면군을 연해주군관구로 개편했다. 이때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은 9월 초순과 중순 사이에 연해주군관구는 북조선주둔소련점령군사령부에 군경무사령부와 별도로 민정담당부사령관직을 신설했다. 군경무사령부를 통해 북한을 철저히 통제하면서도 소련은 자신이 군정이 아니라 민정을 실시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그러한 이름을 붙인 새로운 직책을 만들었던 것이다. 민정담당부사령관은 우리가 다음에서 보듯 군경무사령관과 함께 북한 전반에 관한 점령통치를 강화하는 데 힘을 보탰다. 

민정담당부사령관으로는 연해주군관구에 소속된 제35군 군사위원 로마넨코 소장이 임명됐다. 그와 그의 참모들은 1945년 8월 초순과 중순 사이 평양으로 부임했으며, 행정정치부·사법검찰부·보안검열지도부·상업조달부·산업부·농림부·통신부·교통부·재정부·보건위생부·교육문화부 등 11개 부를 개설하고 1945년 10월 3일 공식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어느 무엇보다도 사법검찰부 및 보안검열지도부는 그 명칭이 말하듯 북한 주민을 통제하거나 강압하는 부서였다. 

연해주군관구 군사위원 테렌티 포미치 스티코프 상장의 지시를 받으면서, 그는 북한의 모든 기관과 주민들을 통제했다. 북한 사람들 사이에 펴진 소문으로는, 그는 여러 곳에 비밀 처형장을 설치하고 소련의 통치 방향이나 방식에 저항하는 북한 사람들을 죽이기도 했는데, 나중에는 비밀 처형장이 평양에만 17곳으로 늘어났다.

논점4
‘스티코프 일기’는 가짜인가 진짜인가.

‘스티코프 일기’.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스티코프 일기’.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소련의 북한점령통치와 관련해 중요한 자료 가운데 하나가 연해주군관구 군사위원 스티코프 상장의 ‘스티코프(쉬띄꼬프) 일기’다. 스티코프는 바로 위에서 설명한 연해주군관구의 제2인자였다. 그는 더구나 당시 소련 권력구조에서 스탈린에 버금가는 2인자로 지목되던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정위원 안드레이 즈다노프의 사위였다. 

스티코프의 맏아들, 아버지의 일기를 공개하다 |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스티코프가 스스로 어떤 기록을 남겼을까는 오랫동안 연구자들의 관심사였다. 이 관심을 풀어주는 대답이 그의 일기였다. 소련이 해체되고 그 후계자로 러시아연방이 출범한 때로부터 4년 뒤인 1995년에 스티코프의 맏아들은 50년 가까이 묻혀 있었던 아버지의 일기, 곧 ‘스티코프 일기’를 공개했다. 

이 일기를 두고 학계에서는 논쟁이 벌어졌다. 한쪽에서는 그것을 ‘가짜’로 보았다. 특히 스탈린 시대에 각급 공직자들은 모두 자신에게 어떤 위해가 닥치는 경우 일기장이 수색의 1차 대상이 되고 발견되면 불리한 자료로 쓰일 수 있기에 일기 쓰기를 자제했으며, 때로는 각 공직자의 생각과 행위를 파악하기 위해 일기장을 뒤지는 검열도 진행됐기에 일기 쓰기를 자제했던 터에, 어떻게 스티코프와 같은 최상위급 군인이 일기를 남길 수 있었겠느냐고 물었다. 이렇게 묻는 이들은 소련이 해체된 뒤 서방세계가 소련 시대의, 특히 스탈린 시대의 자료라고 하면 비싸게 사주는 시류를 이용해 ‘스티코프 일기’라는 위작(僞作)이 나왔을 것이라는 추측을 덧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스티코프 일기’ 전체를 면밀히 검토한 러시아 국내외 전문가들은 이것이 위작이 아니라 진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자신의 질병을 포함해 본인이 아니면 결코 알 수 없는 많은 정보를 담고 있을 뿐 아니라 내용이나 흐름에서 여러 다른 자료와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메모광(狂)으로 평소에 많은 비망록을 작성해 보관한 사실 등이 그러한 결론을 뒷받침한 것이다. 

핀란드에 소련 괴뢰정부를 세우는 일에 관여하다 | 그러면 스티코프는 어떤 사람이었던가. 1907년 태어나 1929년 22세의 나이로 소련공산당에 입당한 그는 스탈린이 1930년대 후반에 주도한 대숙청 이후 스탈린 스스로 소련공산당 지도부로 끌어올린 ‘새로운 피’의 일원이었고, 그리하여 소련의 제2도시인 레닌그라드―오늘날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포함하는 레닌그라드주의 당 제2비서로까지 뛰어올랐다. 

스티코프의 경력에서 중요한 대목은 그가 소련이 핀란드와 전쟁하던 때인 1939~1940년 이 전쟁을 담당한 제7군사령부의 군사위원, 곧 제2인자였다는 사실이다. 소련은 핀란드를 침공한 직후인 1939년 12월에 소련에 접경한 핀란드의 도시 테리요키(오늘날의 젤레노고르스크)에 핀란드공산당의 창설자로서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 비서인 오토 쿠시넨을 수반으로 하는 핀란드민주공화국정부, 통칭 핀란드인민정부를 세웠다. 그것은 소련의 괴뢰정부였으며, 그러했기에 쿠시넨은 훗날 핀란드정부로부터 국가반역자로 규정돼 결코 고국 땅을 밟아보지 못한 채 소련에서 죽는다. 

이 정부를 세우는 과정에 스티코프가 깊이 개입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거기서 얻은 경험이 북한에 친소국가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됐을 것이다. 

소련의 ‘북한총독’ | 소련이 북한을 점령한 뒤, 스티코프는 군관구의 사령부가 위치한 하바롭스크에 앉은 채 실상 북한을 통치하는 ‘소련총독’이나 마찬가지였다. 북조선주둔소련군사령부의 사령관 치스치아코프 상장, 사령부의 제2인자 군사위원 레베제프 소장, 그리고 제3인자 민정부사령관 안드레이 로마넨코 소장 등은 모두 그의 지시를 따라야 했다. 

스티코프의 역할에 대해, 레베제프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가 조선에 있건 관구참모부에 있건 또는 모스크바에 있건 간에 그의 참여 없이 북조선에서 이루어진 조치란 하나도 없는 것이다”라고 썼다. 레베제프의 이 회고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이 시기 북한의 정치 과정이 거의 전적으로 스탈린의 복안과 명령에 충실한 스티코프에 의해 직접적이면서 강력한 영향을 받았음을 뜻한다.

논점5
‘스티코프 일기’는 어떤 내용을 담았나.

그러면 스티코프는 자신의 일기에 소련의 북한 통치와 관련해 어떤 기록을 남겼나. 이 물음에 대해 일일이 매거(枚擧)하기는 불가능하다. 소련이 북한을 직접통치했음을 보여주는 자료를 너무 많이 담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일기에 기록된 몇 가지 사례에 국한해 논의하기로 한다. 

스티코프, 북한에서 선거를 지휘하다 | 첫째, 1946년 11월 3일에 실시될 북조선 도·시·군 인민위원 선거의 후보 등록이 끝난 때로부터 엿새 뒤인 10월 21일에 스티코프는 비행기를 타고 황해도 해주로 갔다. 그 날짜의 일기를 보면, 그는 이 선거의 전반에 걸쳐 매우 꼼꼼하게 점검하고 지시를 내렸음을 알 수 있다. “각급 인민위원회에 특별선전실을 설치하도록 지시를 내렸고, 선거전선사업에 대한 미술가·문필가·사진사·영화촬영기의 활동을 점검했다”는 구절이 그것을 말해 주었다. 

이렇게 세밀히 챙긴 뒤에, 스티코프는 평양으로 가서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이면서 ‘북조선공산당’ 책임비서인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의 지도자들 그리고 이미 월북해 평양에서 활동하던 남조선로동당 부위원장 박헌영을 만났다.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보안국장 최용건으로부터는 ‘선거준비활동의 진행’에 대한 보고를 받았으며, 소련점령군 방첩부대장 보쟈긴 대령에게는 선거와 관련해 경계를 강화하고 경각심을 높일 것을 지시했고, 소련점령군 정치부장 알렉산드르 게오르기예비치 그로모프 대령을 따로 불러 “선거 준비와 관련해서 반드시 실행해야 할 조치들에 대해 지시했다.” 

스티코프, 김일성의 연설문을 직접 수정하다 | 연해주군관구로 돌아간 뒤, 스티코프는 김일성에게 따로 전화했다. “북조선 인민 모두에게 선거에 참여하도록 독려하는 연설을 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이에 따라 김일성은 11월 1일 ‘조선인민에게 고함’이라는 연설을 했다. 그런데 이 연설도 사전에 스티코프가 세밀하게 살핀 뒤 직접 수정했다. 스티코프는 자신의 1946년 10월 28일자 일기에서 “김일성의 연설문에 논평을 가하다. 내가 수정한 김일성의 연설문 초안을 전달하다”라고 쓴 것이다. 

당시 북한의 권력구조에서 조선인으로서는 제1인자인 김일성에게 어떤 연설을 하라고 지시하고, 또 그 연설문의 초안을 수정하라고 지시하며 스스로 수정할 정도로 스티코프는 북한의 모든 것에 대해 개입한 것이다. 미군이 점령한 남한에서는 이에 상응하는 사례를 찾을 수 없다. 예컨대, 미군사령관이 이승만을 포함한 몇몇 지도자에게 “이렇게 연설해라, 저렇게 연설해라”라고 지시하거나 그들의 연설문을 미리 보고받아 수정을 가한 사례는 이제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이러한 대비가 말해주듯, 북한은 철저히 소련의 연해주군관구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던 것이다. 

스티코프, 선거 현장을 시찰하면서 지시하다 |
11월 3일의 인민위원 선거와 관련해, 스티코프의 개입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선거 당일에 평양시와 진남포시의 선거 현장을 직접 시찰했으며, 선거 현황을 사진 또는 영화로 남기도록 지시했다. 선거가 끝난 뒤에도 평양에 남아 사후대책을 지휘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선거 결과에 대한 중간발표문과 중앙선거지도위원회의 공식보도문을 작성하는 방법, 그리고 투표 결과를 집계하는 절차와 선거 관련 서류를 보관하는 방법 등에 대해서도 ‘지도’했다. 또 당시 상황과 관련해 ‘남조선의 김구 이승만과 같은 반동분자들의 책동’을 비난하라고 지시했다. 비난의 대상에 이승만보다 김구를 앞세운 것이 흥미롭다.

논점6
소련이 1945년 9월 초에 보인 일련의 조치를 둘러싼 논쟁

소련군은 1945년 9월 3일과 12일 사이에 38도선 이북에 있으면서 그 선에 접한 모든 지역에까지 점령을 끝냈다. 말하자면, 9월 12일에 이르러 소련의 북한점령은 완료된 것이다. 비슷한 시점인 9월 9일 미군은 남한 점령을 완료했다. 

미·소 연락장교 면담 | 이렇게 미군과 소련군이 각각 점령을 완료하자 남한을 관할하던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는 모스크바 주재 미국사절단을 통해 남한의 미군사령부와 북한의 소련군사령부 사이에 연락장교들을 교환·회담할 것을 소련 측에 제의하라고 지시했으며, 모스크바의 소련군총참모부는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9월 11일 남한 주둔 미군의 한 그룹이 서울 주재 소련총영사관의 관리 2명과 함께 평양에 도착해, 북조선주둔소련군사령부의 제2인자 레베제프 군사위원을 만났다. 

이 면담에서 양측은 (ⅰ) 서울과 평양에 각각 자신의 연락장교들을 파견한다는 데 합의했고, (ⅱ) 38도선 부근의 양측 부대들 사이에 라디오와 전화 통신망을 개설한다는 데 합의했다. 그 결과 9월 하순 서울에는 소련군 연락장교단이, 평양에는 미군연락장교단이 각각 자신의 사무실을 열었다. 그러나 라디오 및 전화 통신망 개설에 관한 합의는 매우 제한된 범위 안에서 실현됐다. 소련군은 서울 주재 소련총영사관에 관한 정보만 받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은 소련이 분단의 현상을 비록 매우 초보적인 수준이기는 하나 개선하려는 미국의 시도에 덜 열정적이었거나 부정적이었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조선에 관한 제안’ | 소련군의 이러한 태도는 소련군이 이미, 이 시점에 분단 상황의 개선에 대해서보다는 자신이 점령한 북한을 자신의 영역으로 고착화하려는 데 목표를 두었음을 말해준다. 실제로 9월 초순부터 하순까지에 소련으로부터 그러한 방향으로의 가시적인 조치들이 취해졌다. 말하자면, 대체로 이 시점부터 북한에 대한 정책을 어떤 총론적인 수준에서 벗어나 각론적인 수준으로 구체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점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1945년 9월-날짜 미상-에 소련 외무부의 극동제2국이 작성한 ‘조선에 관한 제안’이라는 문서다. 이 문서는 9월 12일 런던에서 열릴 미국·영국·소련 3개국 외무장관 회담을 앞두고 소련의 입장을 검토하기 위해 마련된 문서들 가운데 하나다. 따라서 9월 초순 작성했다고 봐도 틀림없을 것이다. 이 문서의 작성자가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제한된 지면에서 이 문서의 내용을 자세히 검토하기란 매우 어렵다. 단순화해서 짧게 말한다면, 이 문서는 소련이 한반도에 대해 매우 공세적이며 적극적인 구상을 지녔음을 보여주었다. 한반도에 대해, 얄타회담과 포츠담회담에서 약속됐듯, 미국·영국·중화민국·소련 등 4대국의 신탁통치가 실시돼야 하며 그 경우 소련은 부산-진해, 제주도, 인천 등 세 지역을 소련군의 관할 아래 둘 수 있도록 할당받아야 한다고 제안한 것이 그 한 보기다. 

그러나 런던회담은 처음부터 미·소의 갈등과 이해충돌이 표면화되면서 ‘음울하게’ 진행됐으며 일본의 북해도를 분할해 일부를 소련이 점령해야 한다는 소련의 제의를 미국과 영국이 거부하면서,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그러했기에 소련은 한반도와 관련해 이 문서에 제시된 계획을 회담에 제의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 전개는 소련으로 하여금 적어도 자신이 점령한 북조선만큼은 자신에게 확실히 우호적이며 충실한 국가로 만들어야 한다고 결심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논점7
스탈린의 1945년 9월 20일자 ‘지령’을 둘러싼 논쟁 : 
그 ‘지령’은 소련이 북한에 단독정권을 세우겠다는 의지와 계획을 담은 것인가 아닌가.

런던회담이 아무런 합의에 도달하지 못한 채 결렬된 때로부터 4일이 지난 9월 20일 스탈린은 소련군최고총사령관의 자격으로 연해주군관구 및 북조선주둔소련군사령부에 전보로 ‘지령’(이 용어는 소련 스스로의 용어다)을 내렸다. 이 지령은 물론 비밀리에 내려졌으며, 소련이 해체된 뒤에야 비로소 그 전문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 지령의 핵심은 “(북조선에서) 반일적인 민주단체들과 민주정당들의 광범위한 동맹에 기초해 부르조아민주주의적 정권을 수립하도록 하라”는 데 있었다. 이것은 부르주아민주주의적 정권의 지붕 아래 공산 세력과 비공산 세력의 ‘순수형 연립’을 수립하라는 뜻으로 풀이됐다. 동유럽에서 보았듯, ‘순수형 연립’은 공산당의 단독정권 수립으로 가는 첫 단계였다. 여러 다른 조항이 함께 포함된 이 지령은 그 전문이 공개된 이후 학계에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이정식(李庭植) 교수는 스탈린이 북한 지역에 ‘부르조아민주주의정권’이라는 단독정부를 세우라고 지시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 중요한 지령에 남한을 점령한 미군과의 협의 문제나 조선반도의 통합 또는 통일 문제에는 언급이 없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그 사실은 스탈린이 이미 이 시점에 미국과의 협의를 통한 조선반도의 통일에 대해 관심을 쏟지 않았음을 보여준다”는 해석을 제시했다. 종합적으로, 그는 “이 지령은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화하는 것이었다”는 결론을 제시하면서, 한반도에서 분단고착화를 먼저 추구한 쪽은 소련이었다고 추론했다. 

이정식 교수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김성보(金聖甫) 연세대 교수는 수긍하지 않았다. 김 교수는 “부르조아민주주의권력을 만들도록 지시한 것이 북한 지역에만 배타적인 국가권력을 수립하라는 의미인지, 그렇지 않으면 단지 북한 지역에서 개혁을 추진할 때 사회주의적 성격이 아닌 부르주아민주주의적 성격의 개혁을 추진하고 이에 입각해 권력구조를 형성해 나가라는 의미인지 불확실하다”고 보았다. 김 교수는 문제의 지령이 작성됐을 때는 아직도 미국과 소련 사이에 동북아시아 문제를 놓고 난기류가 형성되기 이전이라고 보고, 따라서 스탈린은 미국과의 협력을 아주 포기하지 않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론하면서, 이 지령은 전자의 성격을 지녔다기보다는 후자의 성격을 지녔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교수는 이 지령을 “스탈린이 처음부터 북조선 단독정권의 수립을 지시했음을 보여주는 극히 귀중한 문서”라고 평가하고, “이 지령이 내려간 시점부터 분단을 향한 움직임이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전현수 교수, 그리고 모스크바에서 소련의 원자료를 중심으로 소련의 북한 정책을 깊이 연구한 이지수(李志樹) 명지대 교수 역시 비슷한 논지를 전개했다.

논점8
‘북조선 10개 행정국’ 출범은 북한 단독정권 출범을 의미한 것이었나.

스탈린의 ‘지령’을 구체화하는 작업은 곧바로 시작됐다. 9월 하순에, 소련군총정치국의 제7부 차장 사보즈니코프 소장은 연해주군관구의 정치장교들 및 북조선주둔소련군사령부의 정치장교들과 함께 평양에서 합동회의를 열고 북한을 이끌어나갈 ‘최고지도자’로 비공산계 민족주의자 조만식과 친소공산주의자 김일성을 ‘지목’하고 두 사람의 ‘협력적 제휴’를 모색하기로 했다. 

북조선5도연합회의의 소집 | 이 기본 틀이 세워지자, 북조선주둔소련군사령부 치스치아코프 사령관은 1945년 10월 8일부터 11일까지 평양에서 ‘북조선5도연합회의’를 소집했다(이 무렵에 강원도는 종전의 6도에서 제외됐다). 이 회의에는 물론 소련군사령부 대표도 무려 20명이나 참석했다. 

이 회의에 바탕을 두고 북조선주둔소련군사령부는 ‘북조선 전체를 통할하는 임시적인 인민위원회를 창설하되 그 인민위원회를 지도하기 위해 소련인들로 구성된 자문기구 역시 설치할 것’을 연해주군관구에 건의했으며, 연해주군관구는 곧바로 모스크바의 소련군총정치국을 통해 중앙당과 정부에 건의했다. 같은 시점에, 서울 주재 소련총영사관 폴리안스키 총영사도 본질적으로 같은 내용을 주일소련대사 야콥 말리크를 통해 본국 정부에 건의했다. 

북조선행정10국의 출범 | 본국 정부는 이들의 건의를 받아들이고, 1945년 10월 17일 북조선주둔소련군사령부에 ‘지령’(이 용어 역시 소련이 사용한 용어다)을 내려보냈다. 그 핵심은 1945년 11월 초 평양에 ‘북조선림시민정자치위원회’를 구성하며, 이 위원회는 산하에 산업·농업·재정·교통·통신·교육·보건·보안·사법의 10개 행정국을 개설한다는 것이었다. 이 위원회와 산하 10국은 모두 북조선주둔소련군사령부의 ‘직접적이고 상시적인 통제’를 받는다는 것도 포함됐다. 이 일정에 따라 10개 북조선행정국은 11월 19일 평양에서 공식 출범했다. 

이 기구의 성격을 둘러싸고 학계에서는 논쟁이 전개됐다.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와 이정식 교수는 자신들의 공저 ‘코리아에서의 공산주의’ 제1권에서 이 기구가 사실상 ‘북한의 태아적(胎兒的) 정부’였다고 평가했다. 다시 그들에 따르면, “그것은 북한의 분리적(分離的) 국가의 수립을 향한 첫걸음을 의미했다.” 

이 해석에 대해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이 기구는 북조선의 다섯 도(道)를 느슨하게 연결하거나 다섯 도 사이의 입장을 조정하는 하나의 연락기구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기구의 출범을 마치 소련이 북한만을 단위로 하는 하나의 통일된 행정기구를 창립한 것으로, 그리하여 한반도에서 분단을 추구하기 시작한 쪽은 미국이 아니라 소련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논쟁을 두루 살핀 뒤 류길재(柳吉在) 교수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분석을 제시했다. 그는 그때로부터 3개월 뒤인 1946년 2월 평양에서 북한 전체를 통할하는 중앙행정기구로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가 출범했으며 “이 기구가 기존의 ‘북조선림시민정자치위원회’ 및 산하 10국 체제를 그대로 이어받았고 모든 업무는 단절없이 계승되었다는 점에서 북한의 중앙집권화에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신동아 2020년 10월호

김학준 단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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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38도선 이북을 ‘직접’ 통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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