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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위해 살아남다” 신라 전쟁영웅 비사(祕史) [환상극장]

  • 윤채근 단국대 교수

“그녀를 위해 살아남다” 신라 전쟁영웅 비사(祕史) [환상극장]

  •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우리 고전에 기록된 서사를 현대 감성으로 각색한 짧은 이야기를 연재한다. 역사와 소설,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져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고삐를 놓고 말의 갈기를 움켜잡은 설수연은 고개를 숙이고 통곡했다. 바로 눈앞은 천 길 낭떠러지였다. 달릴 길이 더는 없었다. 말에서 내려 바위에 걸터앉은 그녀는 먼동이 터오기만을 기다리며 어두운 밤하늘을 응시했다. 아득한 북쪽에서 고구려군과 싸우고 있을 약혼자 가실을 떠올렸다. 

서라벌 율리에서 함께 나고 자란 그녀와 가실은 평소 눈도 마주치지 않는 사이였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병약한 아버지를 홀로 돌봐야 했던 그녀로선 또래 소년에게 곁눈질하는 건 그저 사치였다. 그녀는 무던히 일하며 집안만을 돌봤다. 산에서 나무를 해오느라 손바닥은 거칠어졌고 남의 도움 없이 짓는 농사로 피부는 늘 까맣게 탔다. 본디 고운 외모를 지니고 태어난 그녀의 옛 모습을 기억하는 마을 사람은 많지 않았다.

서라벌 율리의 소녀

늙은 아버지를 아들 못지않게 잘 봉양하겠다는 그녀의 기백이 단숨에 꺾인 건 전쟁 탓이었다. 이웃 나라와 전쟁을 일삼던 신라 진평왕은 국경을 지킬 병력이 모자라자 가구마다 한 명의 남성을 강제로 징집하기에 이르렀다. 아들이 없던 그녀 아버지는 입대를 준비했지만 이미 죽은 자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수연은 번민했다. 어느 날 밤, 이웃집에서 빌린 갑옷을 입고 아버지 앞에 앉은 그녀가 말했다. 

“여자라고 싸우지 말란 법은 없잖아요? 어차피 이리된 이상 진짜 아들로 살겠습니다. 대신 출전하게 해주셔요!” 

물끄러미 딸을 바라보던 아버지가 애처로운 눈빛으로 힘없이 대답했다. 



“네가 아들이었다면 오죽이나 좋았을까? 한데 군대가 그리 녹록한 곳이 아니야. 그 힘든 훈련은 어찌 견디며, 설령 견뎌냈다 쳐도, 막상 적을 마주하면 칼을 쥘 용기도 내기 힘들 게다. 전쟁을 모르고 하는 소리니 갑옷이나 어서 돌려주거라.” 

아버지를 설득하기 어려워지자 그녀는 징집관에게 찾아가 하소연했다. 

“아비의 군역을 대신하기 힘들다면 따라가서 호종이라도 하게 해주셔요! 곁에서 지키며 수발드는 건 할 수 있지 않나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한 관리는 팔짱을 끼고 대답했다. 

“너 하나 때문에 군율을 바꾸란 말이더냐? 어림도 없는 소리! 뭐 남장을 하겠다고? 내 모가지 날아가는 소리 관두고 빨리 꺼져라.” 

울상이 된 그녀가 등을 돌리고 몇 걸음 뗄 때 징집관이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결혼하면 해결될 일을 가지고 한심하긴!” 

고개를 홱 돌린 그녀가 급히 물었다. 

“그건 무슨 말씀이신가요? 결혼하면 될 일이라 하셨어요?” 

머리를 긁적이던 징집관이 귀찮다는 얼굴로 퉁명스레 대답했다. 

“널 보아하니 열일곱은 돼 보이는데, 이미 혼기가 찼지? 사위가 대신 출전한다면 누가 뭐랄 것이냐?”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수연의 눈동자가 기쁨으로 빛났다.

천관마와의 인연

[GettyImage]

[GettyImage]

아버지 부탁으로 추격에 나섰던 관병과 율리 사내들이 낭떠러지 앞 바위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수연을 발견한 건 날이 밝고도 한참 뒤였다. 이미 여러 차례 한 경험인지라 관병들은 어지간히 성난 표정들이었고 마을 사내들은 혀를 끌끌 차며 조롱의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아비 속 그만 썩이고 새로 정해준 사내에게 시집이나 갈 것이지, 아휴 이게 웬 소동이람? 가실인지 뭔지 입대한 게 벌써 언제야? 살아 있다면 벌써 돌아왔겠지!” 

마을로 이끌려 돌아가는 동안 한없는 슬픔에 빠져 있던 수연은 가실이 결코 죽지 않았다고 속으로 되뇌었다. 가실은 그리 쉽게 목숨을 포기할 리 없는 강인한 사내였다. 무엇보다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잘 길러달라며 그가 남기고 간 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을 태우고 있는 말의 목덜미를 어루만져 체온을 느꼈다. 가실의 손길을 수도 없이 거쳤을 바로 그 자리였다. 그녀는 문득 가실과 헤어지던 순간을 떠올렸다. 

고구려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던 북쪽 낭비성으로 파견되기 직전, 가실은 마지막으로 수연을 찾았다. 그는 말 한 마리를 그녀에게 넘기며 말했다. 

“이건 천관마라고 불리는 명마야. 이걸 네게 맡길게.” 

갈기가 유난히 길고 몸통이 검푸르게 윤기 나는 말은 한눈에 봐도 특별했다. 수연네보다 집안 형편이 그리 좋을 것 없던 가실로선 갖기 힘든 말이었다. 그녀가 물었다. 

“이렇게 좋은 말이 어디서 났어?” 

잠시 망설이던 가실이 속삭였다. 

“귀한 분이 타던 말인데, 주인을 잃었어. 말을 맡아 기르던 어떤 분을 우연히 길에서 만났는데 그냥 주시더라고.” 

“어떤 분이 누군데 이런 말을 그냥 줘?” 

수연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가실이 목소리를 더 낮춰 대답했다. 

“사람 운명을 엿보는 분이었어. 그분께서 이 말의 주인은 나라며 주셨어.” 

“그럼 원래 이 말을 타던 귀한 분은 누구셨어?” 

침을 꼴깍 삼킨 가실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건 몰라. 알 필요 없잖아? 어쨌든 이 말은 나와 운명으로 연결돼 있다고 하셨어. 그렇다면 너의 운명과도 맺어져 있을 거야. 잘 보살펴줘. 그리고 혹시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쓸모가 있을 거야. 아주 영리한 말이거든.” 

고개를 끄덕이며 말의 목덜미를 쓰다듬던 수연이 흠칫 놀라며 물었다. 

“여기 말의 목에 깊은 상처 흔적이 있네? 꽤 깊어 보이는걸?” 

같은 부위를 만지며 가실이 조심스레 대답했다. 

“처음 말을 받았을 때 이미 아물어 있었어. 그래도 혹시 몰라서 몇 개월 동안 정성스레 약을 발라줬지. 지금은 아주 멀쩡해.” 

정신이 돌아온 수연은 눈앞으로 다가오는 율리의 풍경을 바라보다 오래전 가실과 함께 어루만지던 말의 목 부위를 조심스레 손으로 훑었다. 마치 가실의 손을 맞잡은 기분이었다.

3년간 소식 없는 가실

돌아온 딸을 앞에 두고 아버지는 격노했다. 평소 기력 없이 처져 있던 그는 이글이글 타는 눈빛으로 울부짖었다. 

“도대체 이게 몇 번째냐? 아무리 가실이 이 아비를 위해 종군하다 죽었다지만 이미 없는 사람이다! 살았다면 돌아와도 벌써 돌아왔어야지. 얼마나 훌륭한 혼처를 잡았는데 이리 겁 없이 날뛰는 것이냐?” 

고개를 꼿꼿이 세운 수연이 앙칼진 음성으로 대답했다. 

“가실이 죽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습니다. 낭비성 전투가 격렬해 교대를 못 하고 있을 뿐이에요! 꼭 돌아와요.” 

벌떡 일어선 아버지가 주먹을 쥔 채 소리쳤다. 

“가실과 네가 약혼할 때 난 그와 약속했다. 그게 3년이었어! 이미 기한이 지나고도 넘쳤다. 이 아비를 봐라. 늙고 병들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세상 떠나기 전 믿음직한 사위를 보겠다는데, 그게 그리 문제더냐?” 

따라 일어선 수연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나지막이 속삭였다. 

“가실이 아버지 대신 수자리 살겠다고 했을 때, 그때 바로 결혼할 수도 있었습니다. 가실이 간절히 원하는데도 제가 그렇게 하지 않은 건, 이미 마음으로 허락했기 때문이었어요!” 

“도대체 마음 따위가 뭐가 중요하니? 이미 혼처를 정했으니 넌 내 말만 따라라! 나중엔 고마워할 게 틀림없다.”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란 무엇인가요? 전 껍데기로만 살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가실은 절대 죽지 않았어요! 그가 남기고 간 말이 밤마다 그렇게 말해 줍니다.” 

갑자기 방문을 박차고 나간 아버지는 헛간에 있던 낫을 쥐고 마구간으로 걸어가며 신들린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다 저 말 때문이야. 저놈만 없었으면 착하던 네가 자꾸 도망갈 일도 없었을 거야. 가실이도 벌써 잊었을 테고. 내 오늘 죽이고야 말겠다.” 

말 앞으로 다가서는 아버지를 가로막으며 수연이 외쳤다. 

“말을 죽이시면 저도 오늘 죽습니다! 이 말은 저와 가실의 운명을 이어주는 마지막 끈이에요! 가실이 손을 부여잡고 고맙다고 우시던 아버지는 지금 어디 계신가요? 사람이 거짓말하는 게 제일 못쓴다고 하시던 분 아니셔요?” 

손에서 낫을 떨군 아버지는 한참 말을 노려보다 천천히 방으로 돌아갔다. 홀로 남은 수연은 말의 목을 끌어안고 목 놓아 흐느꼈다.

중당당주가 용감한 이유

중원의 요새였던 낭비성을 지키던 신라군은 여러 차례 성을 빼앗겨 후퇴했다 다시 수복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만큼 고구려군의 공격은 집요하고 드셌다. 전투가 얼마나 참혹했는지, 처음 낭비성을 지키던 신라군 대부분이 전사했을 정도였다. 가실은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최초 병력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래서인지 서라벌 지휘부에서 새로 투입한 중당군의 지휘관 중당당주(中幢幢主)는 가실을 부관으로 삼아 새로운 전략을 짤 때마다 배석시켰다. 

젊은 당주는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무섭게 싸웠다. 말로만 용맹을 과시하다 막상 전투에 임하면 후미로 숨거나, 갑주와 방패로 제 몸 하나 보신하기에 바빴던 다른 장교들과는 아예 다른 인물이었다. 그런 당주를 가실은 진심으로 존경했다. 그는 사력을 다해 당주 곁을 지켰고, 선봉에 설 때마다 번번이 그와 함께 적진 깊숙이 파고들어 외로이 싸웠다. 그 많은 전투에서 둘 모두 살아남은 건 기적이었다. 

전투가 그치고 잠시 휴식하던 어느 깊은 밤, 성곽 초소로 가실을 불러낸 당주는 공활한 하늘에 위태롭게 걸린 초승달을 바라보며 물었다. 

“가실은 무엇 때문에 그리 용감한 거지?” 

당주가 피로 얼룩진 갑옷을 푸는 것을 도우며 가실이 대답했다. 

“뻔한 대답을 원하는 건 아니시겠죠?” 

가실을 돌아보며 싱긋 웃은 당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옆에 나란히 서며 가실이 속삭였다. 

“낭비성에 도착해 처음 싸움에 투입됐을 땐, 나라를 위해 싸웠습니다. 아니, 그렇다고 믿었지요. 그러다가 아군 대부분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하고 제 주변에서 하나둘 사라졌습니다. 그때부터 전 저를 위해 싸웠습니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서.” 

가실의 어깨를 툭 친 당주가 말했다. 

“실은 나도 그래. 생사의 갈림길에서 칼을 휘두르다 보면 살고 싶은 욕망 하나만 남아. 신라에 대한 충성심은 뒤집어쓴 적의 피를 닦으면서야 되돌아오지. 그게 우리 운명이야.” 

“당주님께선 누군가를 그리워하진 않으십니까?”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라. 가실 자네는 그런가?” 

“저는 그렇습니다. 그리운 정인이 있습니다. 적들의 섬뜩한 눈초리와 마주할 때도 반드시 살아남아 만나고 싶은 사람이 떠오릅니다. 저보다 강한 상대가 내리친 검의 진동을 어깨로 받아낼 때도, 그 집념이 살려는 의지를 만듭니다. 적들을 베며 앞으로 제가 살아갈 길을 여는 거지요.” 

한숨을 내쉰 당주가 어두운 표정으로 속삭였다. 

“누구나 살아야 할 이유들로 이 지옥을 버티는 거지. 난 마음속 정인을 이미 베어냈네. 언제든 미련 없이 죽을 수 있도록!” 

조용히 당주를 돌아본 가실은 냉혹하고 침착한 상대의 표정을 보며 전율했다. 그러다가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실은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전 당주님을 살리고 싶어서 힘써 싸웁니다. 그게 제 소명이라도 되는 양, 전장에 뛰어들면 전 당주님 그림자가 돼 함께 있게 됩니다.”

맞붙은 두 개의 거울

아침부터 아버지는 무척 신나 있었다. 그는 신랑을 맞을 채비로 분주한데도 자주 수연 방에 들러 딸 상태를 거듭 확인했다. 시름으로 가득한 수연은 그런 아버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마침내 새신랑이 율리로 들어섰다는 전갈을 받은 그는 딸에게 속삭였다. 

“이번 일만 잘 치르면 우리 가난도 끝나는 거다. 내가 죽더라도 넌 어엿한 진씨 가문 며느리가 돼 평안한 여생을 보낼 거야.”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눈물을 흘리던 수연이 대답했다. 

“아버님 소원이라 혼인은 하겠지만, 설수연의 삶은 오늘로 끝입니다. 제게 무얼 앗아가고 있는지 아버님은 모르세요!” 

아버지가 뭐라고 말하려고 할 찰나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신랑이 벌써 도착했다고 여긴 아버지가 서둘러 뛰어나갔지만 동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문간에 서 있는 건 낯선 여승이었다. 그녀는 신부에게 축언을 올려주겠다며 아버지를 설득해 수연 방으로 들어섰다. 

방으로 들어선 여승은 말없이 수연을 끌어안았다. 그런 상대를 의아하게 바라보던 수연이 물었다. 

“스님께선 저를 아시나요?” 

몸을 조금 물린 여승이 고개를 끄덕이며 속삭였다. 

“암요. 제가 맡긴 말을 잘 보살펴주신 분이신걸요.” 

말을 잊고 한참 여승의 눈만 바라보던 수연이 겨우 입을 뗐다. 

“가실이한테 말을 준 분이시군요? 맞나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던 여승이 몸을 앞으로 굽혀 수연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가실은 돌아옵니다. 그것도 오늘! 결혼식을 최대한 미루세요.” 

수연이 무언가 더 물어보려 했지만 여승은 서둘러 일어서더니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런 그녀에게 수연이 급히 물었다. 

“성함이라도 알려주세요. 나중에 찾아뵙고 싶습니다.” 

망설이던 여승은 방문을 열며 낮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천관사에 기거하는 천관녀라 합니다.” 

여승이 사라지고 난 후 수연은 온갖 핑계를 대며 혼례가 시작되는 걸 미뤘다. 마음 급한 신랑이 억지로 신부 집 문지방을 넘으려 할 때는 서쪽 하늘로 노을이 차츰 번지고 있었다. 가실이 나타난 건 그 순간이었다. 처음엔 누구도 그가 가실임을 알아채지 못했다. 오랜 전쟁으로 쇠약해져 부쩍 야윈 가실에게 다가간 수연이 얼빠진 표정으로 물었다. 

“그대가 진정 가실이라면, 징표를 보이시오.” 

낮게 신음하던 가실이 품 안에서 쪼개진 손거울 반쪽을 꺼냈다. 급히 자기 방으로 가 나머지 반쪽을 가지고 나온 수연이 둘을 합쳤다. 거울 두 쪽이 정확히 들어맞자 그제야 대성통곡한 수연이 가실의 가슴에 쓰러지듯 안겼다. 그녀 등을 어루만지던 가실이 뜨거운 눈물을 왈칵 쏟으며 마치 자장가를 부르듯 되뇌었다. 

“살아 돌아온다고 약속했지? 난 약속을 지켰어.”

전쟁 영웅의 통곡

가실 부부는 행복했다. 그들은 오래 떨어져 있던 거울이 한 치 어긋남 없이 아귀가 맞듯 서로에게 딱 들어맞는 짝이었다. 그들 앞에 가실의 옛 상관이었다는 젊은 장수가 나타난 건 고구려와의 긴 전쟁이 마무리되던 해 가을 무렵이었다. 

젊은 장수는 가실을 친구처럼 대했다. 그는 서라벌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미룬 채 가실 집에서 하루를 묵었다. 술이 거나해지자 그가 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설 낭자! 그댈 그저 이렇게 부르겠으니 용서하시오. 가실이 당신을 얼마나 연모했는지 아시기는 하오? 돌아가셨다는 낭자 부친을 대신해 군역을 했다 들었소. 우리 신라엔 엄청난 행운이었지.” 

상대의 잔에 술을 가득 부은 가실이 들뜬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당주님이야말로 신라의 행운이자 부적이십니다. 단 한 차례도 패한 적이 없으셨지요?” 

술잔을 입에 가져가 단숨에 들이켠 당주가 눈을 감더니 흐느끼듯 대답했다. 

“그래, 단 한 번도. 단 한 번도 지지 않았어. 대신 많은 걸, 너무 많은 걸 잃었어. 부상당한 가실도 계속 내 옆에 있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거야. 중당군 태반이 목숨을 잃었지. 난 전우들 시신 위에서 명성을 쌓은 악귀지. 너무 모진 운명이야.” 

감개에 사무친 표정의 당주는 소피를 보고 오겠다며 방 밖으로 나갔다. 그런 그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걱정이 된 가실 부부는 등잔에 불을 붙이고 마당으로 나섰다. 차가운 공기가 허름한 마당을 쓸고 지나갔다. 등불을 측간 쪽에 비췄지만 인기척조차 없었다. 당주가 한 말로 불길함을 느낀 수연이 기이한 두려움에 남편 팔을 꼭 움켜쥐었다. 가실이 마구간을 향해 등불을 비춘 순간, 얼어붙은 사람처럼 미동도 없이 말을 바라보고 선 당주의 뒷모습이 나타났다. 

조심스레 당주에게 다가간 가실이 살며시 상대의 어깨에 손을 대며 물었다. 

“왜 여기 이리 서 계십니까? 편찮기라도 하신 건가요?” 

당주는 대답하지 않고 등불 빛으로 인해 더 환히 제 모습을 드러낸 말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마치 오랜 세월 떨어져 있던 주인을 만난 것처럼 천관마가 콧김을 내뿜으며 당주를 향해 머리를 흔들었다. 당주가 물었다. 

“이 말, 어디서 났나?” 

가실이 떨리는 목소리로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당주의 어깨가 무너졌다. 그는 조금씩 고개를 숙이더니 끝내 고요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술기운 탓이었는지, 아니면 사라진 전우들에 대한 회한 때문인지 가실은 알 길이 없었다. 말 앞에 무릎 꿇은 당주는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말한테 미안해서 이러는 거네. 저 목의 상처, 저 상처를 내가 낸 거거든.”

신라 화랑과 천관녀

화랑 김유신은 거나하게 취해 주점을 벗어나 자기 말에 올랐다. 시끌벅적하던 서라벌 중심지를 벗어난 말은 주인이 고삐를 쥐지 않고 잠들어 버리자 갈 곳을 모르고 이리저리 방황했다. 왕궁 앞에서 잠시 망설이던 말은 제 몸에 익숙한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유신이 술에 취하기만 하면 들르던 곳, 아니 시도 때도 없이 말을 몰아 당도하던 곳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겨 주인을 목적지에 이르게 한 말이 유신을 깨우려고 크게 한 번 울었다. 그 소리에 집 안에 있던 여인이 먼저 기척을 알아채고 뛰어나왔다. 여인은 말 위에 잠들어있는 유신을 발견하고 대뜸 흐느끼기부터 했다. 그녀는 하염없이 울며 앞으로 다가가 유신을 부축해 말에서 내렸다. 

겨우 정신을 차린 유신이 희미하게 눈을 뜨자 오랜 세월 정분을 쌓은 천관녀의 얼굴이 보였다. 술기운이 달아난 그가 뒤로 몇 걸음 물러나며 외쳤다. 

“네가 여긴 웬일이냐? 우린 이미 끝낸 사이 아니더냐?” 

서러운 표정을 한 천관녀가 속삭였다. 

“그건 유신 낭도 혼자만의 결정 아니었나요? 소녀 마음은 그대로입니다. 하늘의 달과 당신의 말이 여기로 이끌었으니 이것 역시 좋은 인연입니다. 어서 제 방으로 드세요.”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며 사태를 파악한 유신이 칼을 뽑아 들었다. 

“기녀와 어울리는 삶을 정리하기로 부모님과 이미 약조했다! 대의를 위해 살 것이니 이제부터는 날 영원히 잊어라.” 

다시 말에 오르려는 유신에게 달려간 천관녀가 상대를 뒤에서 안았다. 그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 대의에 왜 제가 없어야만 하는 건가요? 유신 낭도와 소녀가 보낸 세월이 과연 얼마던가요? 제가 낭도 앞길이라도 막는다는 것인가요? 그저 남은 정애를 다하려는 것뿐입니다. 우리 인연을 부처님께서 맺어줬다고 한 건 바로 낭도셨어요!” 

유신 몸이 잠시 흔들렸다. 그는 몸을 돌려 정인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때마침 구름이 달빛을 가리자 밤은 더 깊어진 듯했다. 천관녀 집 마구간 쪽으로 고개를 돌린 말이 쉬고 싶다는 양 히힝 울음소리를 냈다. 유신이 두 손으로 칼을 다잡으며 외쳤다. 

“내 차마 널 벨 수는 없구나. 대신 이 말을 베어 내 마음을 보여주마!” 

위로 높이 솟구쳤던 검신이 사선으로 빗기며 말의 목을 쳤다. 피를 뿜으며 말이 쓰러지자 유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향해 걸었다. 천관녀의 울음소리가 오래도록 귀를 맴돌았다. 그는 이제 됐다며 스스로를 설득하고 또 설득했다. 하지만 집에 당도할 즈음 유신의 얼굴은 예전과 달리 미묘하게 뒤틀려 있었다.

* 이 작품은 ‘삼국사기’의 ‘설씨녀전’을 천관녀 설화와 엮어 현대적으로 각색한 것이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




신동아 2021년 3월호

윤채근 단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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