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호

박팽년과 성삼문의 은밀한 약속 [환상극장]

  • 윤채근 단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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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2021-04-11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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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우리 고전에 기록된 서사를 현대 감성으로 각색한 짧은 이야기를 연재한다. 역사와 소설,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져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꿈이라 여기기엔 머리로 전달되는 느낌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분명 현실이었다. 의식을 잃기 전 상황을 복기해 보려 했지만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자기 이름조차 기억해낼 수 없었다. 눈을 뜨려 노력하던 그는 포기했다. 기괴한 합성음이 귀를 찢을 듯 들려왔고, 몸이 산산이 부서졌다가 다시 조립되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청각을 제외한 어떤 감각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음을 눈치챈 그는 체념한 채 소리의 물결에 사지를 내맡기고 말았다. 

    누군가 다가와 그를 일으켜 세울 무렵 시각이 천천히 돌아왔다. 주위를 둘러보자 달걀을 옆으로 누인 듯한 둥근 타원체 안이었다. 태어나 처음 보는 괴상한 구조물이었다. 자신을 일으켜 세운 자를 그윽이 노려보던 그가 문득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기억을 떠올리고 소리쳤다. 

    “네 녀석, 네 녀석이로구나! 무슨 꿍꿍이로 날 납치한 것이냐?” 

    투명하고 얇은 은빛 비늘로 된 갑옷으로 무장한 상대는 아무 대꾸 없이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그가 신음하듯 속삭였다. 

    “잠들기 직전이었어! 네 녀석이 불쑥 나타난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런데 내 성명이 떠오르지 않는구나! 이건 분명 생시일 텐데, 여긴 또 어디인 것이냐?” 



    은빛 갑옷의 사내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시 돌아와 자신이 입은 것과 똑같은 갑옷을 내밀며 대답했다. 

    “기억은 언젠가 돌아온다. 이동의 충격 때문에 잠시 그런 것일 뿐이다. 이걸로 갈아입어라. 그리고 우리는 너를 박이라고 불렀다.” 

    멍한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보던 그가 “박”이라고 되뇐 뒤 다시 물었다. 

    “맞다! 박이 내 성이었다. 이제 조금씩 기억이 돌아오는구나! 여긴 어디더냐?” 

    박이 입고 있던 옷을 벗긴 뒤 갑옷으로 갈아입히며 상대가 대답했다. 

    “나는 이동을 담당할 따름이다. 나머지는 주군님께 여쭤보아라.”

    거대한 붉은 사막

    타원체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강한 화염 기운이 끼쳐왔다. 박은 그제야 상대가 자신에게 씌워준 투명한 투구 모양 얼굴 덮개가 왜 필요했는지 깨달았다. 갑옷과 투구가 없었다면 박의 몸은 그대로 녹아버렸을 것이었다. 박은 문득 숨쉬기가 곤란함을 느끼고 상대에게 다급히 손짓했다. 급히 다가온 상대가 박의 얼굴을 밀폐하고 있던 투구와 허리에 찬 공기여과기를 연결하는 호스를 조절해 줬다. 맑은 공기가 주입됐다. 

    타원체에서 땅 위로 내려서자 더욱 강한 열기가 갑옷 너머로 전해졌다. 타고 온 타원체를 올려다보니 둥근 원반 같은 비행체였다. 지표면은 가늠하기 힘든 고온으로 녹아 액체에 가까운 상태로 미끈거리고 있었다. 몇 걸음 앞서 걷던 상대가 박에게 몸을 숙이라는 신호를 보냈다. 강력한 열 폭풍이 몇 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세상 전체가 붉은 화염에 휩싸여 춤추고 있는 듯했다. 

    노란빛으로 깜박이는 사각형 패널 앞에 도착한 이동담당자는 손으로 무언가를 조작했다. 갑자기 주변이 밝아지며 긴 도로 하나가 나타났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건 도로가 아니었다. 마치 바닥에 양탄자가 깔린 것처럼 열기와 화염이 제거된 좁고 긴 회랑 하나가 만들어져 있었다. 회랑을 형성하는 공간 바닥에서 흰빛이 뿜어져 올라와 주변의 붉은 화염을 밀어내고 있었기에 마치 도로처럼 느껴졌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흰빛으로 가득한 공간 안으로 들어섰다. 막상 빛 안으로 진입하자 오히려 눈부심이 사라졌고 주변 풍경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사방천지는 불길로 타오르는 거대한 붉은 사막 같았다. 박은 그 모습에 압도돼 한참 동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빛의 회랑을 따라 움직이던 박의 눈에 갑자기 이상한 광경이 나타났다. 처음에 그건 모래 바닥에 판 구덩이에서 꾸물대며 기어 나오는 애벌레처럼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애벌레의 정체는 온몸이 녹아내렸다 응고되기를 반복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팔다리가 제 모습을 잃을 정도로 몸 전체가 녹거나 탄 그들은 잽싸게 구덩이로 들어가 원형을 회복하고 다시 기어 나왔다. 경악한 박이 이동담당자에게 다가가 물었다. 

    “저들도 나와 같은 인류가 맞나?”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상대가 무심히 대답했다. 

    “당연히! 두 다리로 걷고 두 팔로 물건을 잡으니 사람일밖에.” 

    회랑 밖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던 박이 서둘러 상대를 따라잡으며 다시 물었다. 

    “저런 처참한 환경에서도 저들은 웃고 떠들고 있군. 고통을 못 느끼는 건가?” 

    발길을 멈춘 이동담당자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이곳은 불로 된 세계다. 네가 살던 세계와 다르지만 이 또한 사람이 사는 세계지. 밤이 되려 한다. 빨리 가자!” 

    박은 이런 불모의 세상에도 밤과 낮의 구별이 있다는 데에 놀랐다. 하지만 밤은 존재했고 그건 낮의 세계와 반대되는 지옥처럼 보였다. 화염이 가라앉자 천지는 온통 엄혹한 냉기로 가득 찼으며 사람들 몸은 얼어 터져 흉측하게 뒤틀렸다. 그럼에도 그들은 낮보다 더 여유롭게 구덩이 밖에서의 삶을 즐기는 것 같았다.

    불 나라 주군의 제안

    주군이 산다는 궁궐은 하늘 높이 솟구치는 불길로 에워싸인 거대한 절벽 너머에 있었다. 절벽 중앙의 출입구를 통과하자 연이어 중문이 나타났는데 그때마다 박은 꼼꼼한 검문을 받아야만 했다. 언뜻 불지옥처럼 보이는 이 기괴한 세계를 다스리는 주군은 둥근 돔 모양의 내전 정중앙에 앉아 박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군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고개 들어 나를 보아도 좋다.” 

    천천히 머리를 들어 올린 박은 상대를 꼼꼼히 관찰하다 깊은 의혹에 휩싸였다. 금빛 비늘 갑옷과 황금 투구로 무장한 주군의 모습은 박이 내심 예측하고 있던 지옥의 염라대왕 형상과는 딴판이었다. 주군의 갑옷과 황금투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휘황한 빛은 오히려 부처의 몸에서 퍼져 나오는 신성한 불빛인 광배를 닮아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던 박이 물었다. 

    “이곳이 지옥이라면 당신께선 염라대왕님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혹시 다른 모습으로 화신하신 부처님이시라면 이곳은 환술로 만들어진 허상이 아니겠습니까? 저를 시험하고 계신 건지요?” 

    주군은 한참을 껄껄 웃더니 옥좌 손잡이에 있던 버튼을 눌렀다. 돔 전체에 공기가 순환하는 굉음이 울려 퍼지며 모든 창문이 저절로 닫히기 시작했다. 이윽고 투구를 벗은 주군이 박에게 말했다. 

    “이제 머리에 쓴 걸 벗어도 좋다.” 

    박이 투구를 벗으려 애쓰자 뒤에 서 있던 시종이 다가와 대신 벗겨주었다. 시야를 가리던 일체의 장애가 사라지자 주군의 진면목도 정체를 드러냈다. 놀랍게도 주군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특별히 잘생기지도 못생기지도 않은 50대 가량의 남성일 뿐이었다. 시력이 좋은 박이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자 얼굴에 있는 잡티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주군이 말했다. 

    “보다시피 난 부처도 아니고 염라대왕 따위는 더더욱 아니다. 한데 그대가 생각하는 지옥이 이곳과 같다면 염라대왕이라 해도 크게 틀렸다 할 순 없겠구나.”
    자신이 있는 곳을 지옥이라 확신한 박은 그렇다면 상대는 틀림없이 염라대왕이며, 설령 스스로 그것과 다른 존재라 주장한다 할지라도 결국엔 차이가 없으리라 내심 단정했다. 이윽고 이를 악문 박이 힘을 내 큰 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께선 염라대왕이 틀림없습니다. 저를 이곳으로 끌고 오신 이유가 뭡니까? 그럼 전 이미 죽은 몸입니까? 무슨 죄목으로 여기에 오게 된 것입니까?” 

    길게 한숨을 내쉰 주군이 시종들을 내보낸 뒤 낮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죄를 묻고자 데려온 게 아니다. 부탁할 게 있어 급히 부른 것이다.” 

    “저처럼 미천한 자에게 무슨 부탁할 게 있으십니까?” 

    야릇한 표정의 주군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 나이가 얼마로 보이느냐?” 

    잠시 망설이던 박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저보다 조금 많아 보이십니다. 한 스무 살 정도?” 

    호탕하게 웃어젖힌 주군이 미소를 가득 머금고 속삭였다. 

    “그리 젊게 보아주니 고맙구나. 내 나이 이제 만 살이 넘었다. 수명이 다해가고 있지.”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자신을 노려보는 박을 향해 가까이 다가오라고 손짓하며 주군이 덧붙였다. 

    “네게 제안할 게 있다. 우선 가까이, 이리 가까이 오너라.”

    처참한 영생

    [GettyImage]

    [GettyImage]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내내 이동담당자는 말이 없었다. 흰빛으로 만들어진 회랑 중간쯤 지날 때가 돼서야 그가 헬멧 안 스피커를 통해 입을 열었다. 

    “주군의 제안을 받아들였나?” 

    상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박은 그제야 자신이 이동담당자의 맨 얼굴을 한 차례도 본 적이 없었음을 깨달았다. 침울한 목소리로 박이 대답했다.
    “그렇다. 내가 살던 세계로 돌아가서 마저 정리할 게 있다. 그 뒤에 되돌아오기로 했다.” 

    갑자기 태도가 숙연해진 이동담당자가 박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속삭였다. 

    “그럼 그대가 우리의 다음 주군이 된 거로군. 고맙다!” 

    고개를 비스듬히 해 바깥 풍경을 바라보던 박이 쓸쓸한 음성으로 물었다. 

    “듣자 하니 저들은 저런 처참한 모습으로 영생을 누려야 한다지? 어쩌다 이 별은 이 지경이 된 건가?” 

    말없이 박을 응시하던 이동담당자가 천천히 헬멧을 벗기 시작했다. 상대의 얼굴을 본 박이 깜짝 놀라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동담당자의 얼굴은 수없이 녹았다 얼어붙기를 반복하며 흉측하게 변형돼 있었다. 한때 입이었던 구멍을 비틀어 웃음 비슷한 모양을 만든 그가 다시 헬멧을 쓰고 나서 대답했다. 

    “나도 저들 가운데 하나다. 이 행성의 모든 인류가 이렇다고 보면 된다. 우리는 우리 별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했고 그 응보로 이런 끝없는 고통을 견뎌야만 한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는 없었나?” 

    상대가 몸을 돌려 비행체 쪽으로 다시 전진하며 대답했다. 

    “주군께서 이미 설명하셨을 텐데? 비록 흉하지만 이 모습은 이런 악조건 속에서 우리가 선택한 진화의 최종 산물이다. 자살이라고? 아주 오래전 수많은 자가 자살해 사라져갔다. 말하자면 도태된 거지. 지독하게 바뀐 별의 환경에 적응한 소수가 새로운 생존법을 터득해 오늘에 이른 거다. 바로 나처럼!” 

    상대의 등을 바라보며 따라 걷던 박은 구덩이에서 기어 나와 자신을 쳐다보는 생명체들을 향해 살며시 손을 흔들었다. 행성의 생존자들 역시 박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들이 무어라 떠들었지만 빛에 의해 차단돼 제대로 전달되지는 않았다. 박이 다시 이동담당자에게 물었다. 

    “저들에게도 주군이 사는 궁궐 같은 장소를 지어주면 되지 않나? 그럼 저들의 삶이 훨씬 편해질 것 같은데.” 

    멀리 붉은 화염 폭풍에 휩싸인 비행체의 모습을 발견한 상대가 걸음을 재촉하며 빠르게 대답했다. 

    “이곳은 엄연한 계급사회다. 우리의 과학 기술은 놀랍도록 발전했었지만 그것들을 가동할 수 있는 동력원은 거의 고갈됐다. 우리는 연료를 최소한만 쓰면서 가까스로 문명을 유지해왔다. 값싼 동정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다.” 

    비행체 도어를 열고 몸을 안으로 진입시키던 이동담당자가 자신을 따라 사다리를 오르던 박을 내려다보며 덧붙였다. 

    “이동한 뒤엔 마치 꿈을 꾼 것 같을 것이다. 올 때처럼 기억을 한 동안 잃었다가 천천히 회복할 테니 크게 염려는 하지 말고.”

    김시습의 미소

    박팽년은 한양 남촌 자기 집 서재에서 온몸을 경련하며 깨어났다. 잠들기 직전 읽던 서책들이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창문을 열자 남산 쪽에서 서늘한 새벽 기운이 밀려들었다. 팽년은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해 내기 힘들어 잠시 고개를 숙이고 묵상에 잠겼다. 그는 그렇게 오시가 다되도록 서재 안에 홀로 머물렀다. 

    두통을 참으며 육조로에 위치한 형조 건물로 뒤늦게 출근한 팽년은 업무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다 급히 조퇴해 상관인 형조판서에게 며칠 휴가를 청하는 편지를 썼다. 밀봉한 편지를 하인을 시켜 부친 그는 좌포청에 들러 포졸 둘을 빼내 길잡이 삼아 야행을 시작했다. 삼각산으로 갈 요량이었다. 

    포졸들이 손에 든 등불이 봄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릴 때마다 팽년이 탄 말의 그림자가 마치 괴물 형상처럼 어두워가는 산길에 비치곤 했다. 그때마다 젊은 포졸은 식겁하며 놀랐고 나이가 꽤 든 포졸은 그를 타박하는 재미로 산행의 지겨움을 더는 눈치였다. 삼각산 중턱 절에 도착할 즈음 해는 이미 떨어진 지 오래였고 저녁 공양도 다 끝난 상황이어서 팽년은 배고파하는 포졸들을 산 아래 객점으로 내려보내야 했다. 

    손님들이 묵고 있던 요사의 방문을 차례로 열어나가던 그가 마침내 찾던 인물을 발견하고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좁은 방 안에서 책을 읽고 있던 젊은이가 팽년을 보고는 벌떡 일어서서 뛰어나오며 외쳤다. 

    “학사 어르신이 이 시각에 어인 일로? 대궐에 무슨 변고라도 벌어진 것인가요?” 

    젊은이를 도로 안으로 밀어 넣으며 급히 방으로 들어선 팽년이 상대의 두 손을 부여잡으며 물었다. 

    “과거 공부는 잘 돼 가는가? 천하의 김시습이 이리 공손할 건 또 뭔가? 어서 앉게. 내 몹시 놀란 일이 있어 이리 찾아왔네.” 

    시습과 자리에 마주앉은 팽년은 자신이 간밤에 꾼 신기하고도 기이한 꿈 이야기를 자세히 털어놨다. 미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습에게 팽년이 한마디 덧붙였다. 

    “이게 꿈은 꿈인데 또 그저 꿈은 아니란 말일세. 어떻게 생각하나?” 

    서안을 옆으로 밀친 시습이 조용히 바닥을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하필 그 말씀을 제게 하시는 연유가 무엇인지요?” 

    팔짱을 낀 채 상대의 표정을 그윽이 관찰하던 팽년이 힘주어 대답했다. 

    “이게 말일세. 이게 만약 꿈이 아니라 내게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라면 말일세. 그렇다면 자네는 나보다 먼저 그 염마왕이란 자에게 불려갔던 거란 말이지. 헤어지기 직전 그가 분명 그렇게 말했거든. 한양의 젊은 포의 김시습이 이미 다녀갔다고. 자기 자리를 이어받기를 보기 좋게 거절했다고 말일세.” 

    희미하게 미소를 띤 시습이 잠깐 망설이다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의 미래

    밤을 새워 이야기꽃을 피운 선배와 후배는 새벽 먼동이 터올 무렵에야 격정적인 토론을 멈출 수 있었다. 시습은 자신이 갔던 세계가 결코 불교의 지옥은 아니었다고 주장했고, 팽년은 아직 다 이해하긴 어렵지만 아수라가 만든 환계이거나 염라대왕이 다스리는 지옥의 일종임에 틀림없다고 역설했다. 지친 모습의 시습이 물었다. 

    “그곳이 아수라장이거나 지옥이라면 그 주군이란 자는 왜 우리에게 자기 자리를 물려주려 했겠습니까? 우린 그저 인간이지 않습니까? 결국 그 주군 역시 한때는 우리와 똑같은 존재였던 겁니다. 그 역시 누군가의 초대로 인해 그 자리를 물려받았던 것이지요!”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내 비록 염마라는 그 주군에게 자리를 계승하겠다고 약속은 했네만, 그 세계와 우리 세계는 속한 질서가 서로 다르거늘, 내가 진짜 그곳의 주군이 될 리 있겠는가?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서늘한 냉기가 감도는 표정이 된 시습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생이 판단컨대, 그곳의 주군인 염마왕은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서 건너갔음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그 화염 세계는 아주 먼 미래의 우리 세계인 셈이지요.” 

    “미래 세계?” 

    “그렇습니다! 수십, 아니 수백만 년 뒤의 세계 말입니다. 우린 미래세계를 엿보고 온 것이지요. 그리고 그 둥근 비행체는 시간을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는 기구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럼 그 구덩이 속의 누에 인간들이 우리 후손이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의 미래 모습입니다.” 

    침을 꼴깍 삼키며 오래도록 시습을 바라보던 팽년이 힘없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시공을 멋대로 이동할 수 있는 탈것이라. 그래, 그러면 이해가 조금 되는군. 그럼 왜 하필 우리처럼 과거 세계 사람을 납치해 주군으로 삼으려는 걸까?” 

    고개를 갸웃한 시습이 천천히 대답했다. 

    “혹시 우리를 데리고 이동했던 자에게 그들이 왜 영생할 수 있게 됐는지 자초지종을 물어보진 않으셨습니까?” 

    “그걸 묻는다는 걸 깜빡했지 뭔가.” 

    “전 물어봤습니다. 그들은 혹독한 자연환경을 이겨내려고 남녀 상합의 생식 질서를 버렸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남녀 구별이 사라진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모두가 남자였던 겁니다.” 

    “맞네! 맞아! 내 거기서 여자를 본 적이 없지!” 

    “기억하시는군요. 천지음양의 조화를 포기하고 오직 양의 기운으로만 버텼던 겁니다. 그리하여 더는 후손을 만들 수 없는 대신 영생을 얻은 것이지요. 하지만 자신들 주군만큼은 인류의 원형을 갖춘 자로 추대하고 싶은 게 아닐까요?” 

    “그래서 과거로 찾아와 자기들 마음에 드는 누군가를 데려가기 시작했다 그 말인가?” 

    장지문 밖에서 번져드는 햇살로 얼굴 반쪽이 환하게 빛나고 있던 시습이 속삭이듯 대답했다. 

    “그게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즐거움 아니었을까요?”

    박팽년의 최후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실패해 역적으로 몰린 팽년은 처형되기 전날 밤 감옥 밖 먼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다 자신도 모르게 번지는 미소를 억지로 삼켰다. 그는 모진 고문으로 피투성이가 된 동료들이 갇혀 있는 다른 편 옥사를 향해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이보게들! 내 말 들리는가? 난 죽지 않는다네. 난 수많은 미래의 별세계 가운데 한 군데로 곧 떠나네. 이보게들, 들리는가?” 

    성삼문이 갇혀 있는 옥사 쪽에서 허탈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팽년이 쥐어짜듯 다시 외쳤다. 

    “특히 성삼문 공은 잘 들으시게! 난 염부주라 하는 미래 세계로 갈 것이야. 비록 이 몸은 죽지만 다른 몸은 그 직전에 다른 법계로 이동하는 것일세! 믿어주게! 우리 삶은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닐세. 결코 이게 끝이 아니란 말일세!” 

    삼문의 신음 섞인 음성이 그제야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제 보니 박 공의 해학이 나보다 더하군그래. 부디 잘 가시게. 때가 되면 나도 좀 부르시고.” 

    벗의 음성을 듣는 순간 팽년의 얼굴에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가 피를 토하듯 외마디 절규를 한 뒤 대답했다. 

    “당연히 자넬 부르고야 말 걸세! 우리 인간들도 염부주라는 그곳에 가면 만 년을 넘게 살 수 있다더군! 내 만 년 뒤엔 꼭 삼문 자네를 불러 만 년을 더 살게 해줄 것이야!” 

    잔잔한 웃음소리가 옥사 전체에 일렁이며 퍼져나갔다. 감옥을 지키던 포졸 하나가 다가와 속삭였다. 

    “내일 군기감 앞에서 치러질 처형이 아주 힘들 거랍니다요. 끝까지 의기를 잃지 않으시려면 일찍 자두시는 게 좋겠습니다요.” 

    벽에 힘없이 기대 포졸의 얼굴을 가만히 살피던 팽년이 물었다. 

    “자네 삼각산에 같이 갔던 그 늙은 포졸이 아니던가?” 

    포졸이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미소를 지은 팽년이 얼굴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내 유언 하나만 들어주겠나? 삼각산에서 내가 만났던 젊은이 기억하겠지? 김시습이라고. 그 친구를 찾아가서 이렇게만 전하게. 어쨌든 양보해 줘서 고맙다고 말일세. 그냥 그리 말하면 잘 알아들을 걸세.” 

    * 이 작품은 ‘금오신화’의 ‘남염부주지’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것이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




    환상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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