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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 조선, 대우주가 일거에 사라진 이유 [환상극장]

  • 윤채근 단국대 교수

압구정, 조선, 대우주가 일거에 사라진 이유 [환상극장]

  •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우리 고전에 기록된 서사를 현대 감성으로 각색한 짧은 이야기를 연재한다. 역사와 소설,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져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한국 국적 비행선 용궁 2호기가 화성 남반구 K구역에 조용히 착륙했다. 화성 개발 총책임자 한선아 박사는 자신이 이룩한 위업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이 익숙하고도 낯선 별을 직접 방문했다. 연결 통로를 거쳐 캡슐 모양 궤도열차에 오른 그녀는 설레는 표정으로 저 멀리 빛 무리로 다가오고 있는 K구역 돔 시티를 바라봤다.

돔 시티 내부는 지구의 서울을 모델로 만들어져 어떤 이질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 박사는 시장에게서 간략한 보고를 받은 뒤 호텔로 이동해 여장을 풀었다. 샤워를 마친 후 영락없이 서울을 연상시키는 도시 야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시력을 강화해 주는 렌즈를 끼고 다시 풍경 하나하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참으로 기이한 노릇이었다. 전체적으로 도시는 그럴싸하게 잘 꾸며져 있었지만 세부로 들어갈수록 어설픈 구석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건 마치 화가가 그림을 그리다 마감까지는 미처 못 한 상태처럼 보였다.

은행 입구에 설치된 보안 게이트에는 손잡이가 없었고, 방송국 옥상 전자안테나는 지지해 줄 기둥 없이 공중에 붕 떠 있었다. 더 놀라운 건 도시를 화성의 대기로부터 차단해 주는 돔 천장 군데군데가 뻥 뚫려 있다는 점이었다. 도저히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태였다. 겁에 질린 그녀는 급히 내선 전화로 시장을 호출했다.

객실 안으로 허겁지겁 뛰어 들어온 시장은 한 박사 앞에 앉자마자 무슨 말인가를 하려 애썼지만 한마디도 뱉지 못했다. 입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주르륵 흐르며 코털을 통과하자 땀이 흐른 궤적을 따라 공백이 생겨났다. 시장은 차츰 그 존재가 뭉개지고 있었다. 경악한 채 자기 손을 내려다본 한 박사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그녀의 손가락들이 사라지고 없었다.

돔 시티 전체가 그렇게 차례차례 지워져 나갔다. 한 박사는 이 모든 현상의 배후에 악마가 있거나, 아니면 자신이 악몽을 꾸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믿었다. 그녀는 자기 뇌가 사라지려는 찰나, 이 상황은 이미 무한히 반복돼 온 세계의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거꾸로 흐르던 날

서울 중림동에 막 자기 집을 마련한 고기형은 한쪽 팔로 아내 한혜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다른 쪽 팔로는 천체망원경의 각도를 조금씩 조정해 나갔다. 5월이었지만 바람이 잘 드는 빌라 옥상은 여전히 쌀쌀했다. 혜지가 물었다.

“당신 전공은 통계학인데, 개기월식에 뭔 관심이 그리 많아?”

망원경 각도를 정확히 달에 맞추고 렌즈 상태를 점검한 기형이 사랑스러운 아내를 향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어쩌다 대학에서 통계를 가르치고는 있지만, 내 원래 꿈은 천문학자였잖아. 잘 알면서.”

남편 어깨에 담요를 덮어주며 혜지가 속삭였다.

“그거야 알지만. 월식에 유난히 집착하는 것 같아서 그래.”

약간 달뜬 목소리로 기형이 대답했다.

“내가 월식에 집착하는 이유라. 예전에 한번 얘기했던 것 같은데?”

“잘 기억 안 나. 또 해줘, 그거 재밌었던 것 같아.”

“초등학교 때였지. 우리 집이 북아현동 꼭대기였잖아? 큰형이 지금은 펀드매니저지만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조경철 박사님의 열렬한 팬이었어.”

“조경철 박사님?”

“예전 한국에 천문학 붐을 일으키셨던 유명한 분이지. 그분 영향을 받아 다들 작은 천체망원경 하나 갖는 게 소원이었거든. 아버지에게 떼를 써서 큰형이 그 어려운 일을 해냈었어.”

“그래서?”

“그 시절 형제들이 옥상에 모여서 함께 달을 관찰하는 게 큰 재미였어. 그러다 우연히 개기월식을 관찰하게 됐거든. 미리 알고 본 게 아니고 그냥 우연히. 그런데 월식이 이상하게 진행되는 거야. 원래 월식은 달의 왼쪽부터 서서히 지구 그림자에 가려져야 하거든. 분명 그게 맞는데, 이게 반대로 시작된 거야.”

“오른쪽부터?”

“그래. 큰형이 놀라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어. 우리도 달려들어 번갈아 달을 관찰했지. 오른쪽부터 어두워지더니 커다란 붉은 덩어리가 됐어. 그리고 달의 오른쪽부터 다시 밝아지더라고. 태양계가 미쳤던 거지.”

“그럼 세상이 난리가 났을 거 아냐?”

“아냐. 아무도 그걸 눈치채지 못했어. 큰형이 조경철 박사님께 편지까지 써봤지만 우리 형제 외엔 아무도 그 현상을 못 봤다는 거야. 기가 찰 일이었지. 세월이 흐르며 형들은 그 사건을 잊어버리더라고. 나는 잊히지 않았어. 그래서 개기월식이 오면 달을 봐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된 거지.”

부부는 캔 맥주를 홀짝이며 어두워지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코발트블루로 짙어진 밤의 색감은 이윽고 먹빛으로 변해갔다. 기형이 낮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그 현상을 설명할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

“그게 뭔데?”

“개기월식이 역방향으로 일어났던 그 짧은 순간, 시간이 거꾸로 흐른 거지. 그날은 월식이 예고된 날도 아니었어. 시공간에 모종의 왜곡이 발생했던 게 틀림없어. 지구 전체에서 그 몇 분 동안 달을 관찰한 사람이 우리만은 아니었을 거야. 천문학자들도 분명 그걸 봤을 거라고! 그런데 다들 침묵했어. 행성 차원에서 시간이 역류하는 건 이미 과학자들 사이에선 공공연한 비밀 아니었을까? 지구의 사건 세계만 안정돼 있다면 그 사실을 알려 혼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을 테니까.”

갑자기 한기를 느낀 혜지가 남편 어깨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어쩐지 으스스한 기분이야. 드라마 ‘X파일’이 떠오르는걸.”

기형이 그때 몸을 일으키며 망원경 경각을 조절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유난히 크게 떠오른 달이 오른쪽부터 점점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멍한 표정이 된 기형이 아내를 돌아보자 아내 역시 두려움에 빠진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내 머리카락이 올올이 사라지더니 얼굴 윤곽마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역류하기 시작한 시간의 물결이 이리저리 출렁대며 공간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우주의 대몰락

종로경찰서 소속 한만기 경부는 독립단 소속 밀정 두 명을 색출한 공으로 일주일 휴가를 받아 기분이 좋았다. 주변에서 그를 친일경찰이라 놀려댔지만 아무 상관할 바가 없었다. 일제의 조선 지배는 최소 100년은 갈 것처럼 보였고, 그 정도 시간이라면 만기에겐 영원과 동일했다. 그는 사후세계 따위를 믿지 않았다.

총독으로부터 직접 휴가 은사와 표창을 수상한 만기는 총독부 건물을 나서며 가슴이 한껏 벌어졌다. 유럽식으로 가꾼 정원을 지나 경찰서로 복귀하려던 그는 문득 일본인 애인 하나코를 떠올리고는 황금정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일본인만 출입이 허락된 요정 ‘낭만도쿄’에 들어선 그는 당당한 목소리로 하나코를 찾았다.

머리가 헝클어진 채 나타난 하나코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언가 의심스러운 면이 있었다. 만기가 일본어로 물었다.

“하나코, 내가 알아선 안 되는 일이 있었던 건가?”

사케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그녀가 천천히 대답했다.

“아직 초저녁이고, 당신이 나타날 시간은 아니었으니까. 하나코에게도 자유라는 건 있으니까. 그리고 당신은 유부남이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만기는 순간 이성을 잃을 뻔했다. 꽉 움켜쥔 주먹을 애써 푼 그는 도쿠리를 집어 들어 한꺼번에 입안에 털어 넣었다. 빙그레 웃음기를 머금은 하나코가 속삭였다.

“당신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조선인이라는 사실은 지워지지 않아.”

이를 악문 만기는 계속 술을 시켰고 그렇게 연달아 마신 덕에 취하고 말았다. 불쌍하다는 표정을 지은 하나코가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우리 한 경부님. 이 하나코는 종업원이지 게이샤가 아니라고. 당신을 좋아하지만 누구의 소유다 그런 건 절대 없어. 그리고 다음 달엔 내지로 돌아갈 생각이고.”

일어서서 돌아서려는 하나코의 허리를 낚아챈 만기가 소란을 일으키자 주방에서 건장한 사내 두 명이 나타나 그를 제압하려 했다. 권총을 뽑아 든 만기가 외쳤다.

“물러서라! 난 대일본제국 경부다. 그리고 저 손님들이 먹고 있는 그 술값, 오늘 내가 다 내주마. 내가 조금 전 누구를 만나고 왔는지 너희들은 모르지?”
권총 총신을 자신의 이마에 가져다 대며 하나코가 물었다.

“일본인을 쏘면 어찌 될까나? 조금 전 누굴 만나셨는데? 총독?”

씩씩대기만 하던 만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까르르 웃음보가 터진 하나코가 소리쳤다.

“개가 주인을 만나고 온 거잖아? 뼈다귀를 던져줬을 테고.”

권총 총신을 바닥으로 향하며 만기가 신음하듯 물었다.

“하나코, 너 오늘 왜 이래? 그동안 우리 사이에 쌓인 정이 얼마인데. 왜 갑자기 이래?”

그 순간 하나코 뒤로 젊은 사내 한 명이 천천히 다가왔다. 고개를 든 만기가 상대를 노려봤다. 술이 약간 깨며 상대의 얼굴이 선명히 인식되자 다리가 풀린 만기가 속삭였다.

“이노우에 경시님?”

만면에 거만한 미소를 머금은 종로경찰서 이노우에 경시가 하나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경부, 이제 그만해라. 무도를 아는 사내라면 내 유도 실력에 대해선 익히 소식을 접했으리라 믿는다. 하나코가 경부의 애인인 줄은 몰랐다. 하지만 기왕 이리된 거 경시가 경부에게 굽힐 순 없지 않은가? 포기하고 빨리 조용히 떠나라.”

나이는 어리지만 자신보다 강하고 계급도 상관인 경시의 경고에 주눅이 든 만기가 천천히 몸을 돌려 요정 현관으로 걸음을 뗐다. 그런데 그는 그 걸음이 단두대를 향하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한번 걸어 나가면 다시는 이승으로 되돌아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저 분노 때문이라기보다 소멸 직전에 놓인 자신의 존재를 구원하기 위해 만기는 총을 뽑아 들었다.

첫 발을 발사하기 직전, 만기는 놀라운 광경을 목도했다. 경시와 하나코의 몸이 뒤엉켜 하나로 합쳐지고 있었다. 아니, 합쳐지는 게 아니라 조각조각 분리된 두 육체가 공기 흐름에 따라 뒤죽박죽 뒤섞이고 있다고 해야 정확할 것 같았다. 총신을 벗어난 탄환은 맞힐 표적을 잃고 유탄이 돼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총을 쥐고 있던 만기의 오른팔이 사라졌고 요정 전체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우주의 대몰락이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만기는 차라리 이쯤에서 세계가 사라져 버리는 게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해 버렸다.

누가 조선의 왕인가

[GettyImage]

[GettyImage]

압구정에서 바라보는 한강 건너 목멱산 풍경은 절경 중 절경이었다. 사계절 가운데서도 특히 늦가을 정취가 잔뜩 묻어나는 9월은 동호에 배를 띄우고 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압구정 정자를 직접 짓고 이름까지 붙인 한명회는 그러한 관광의 별미를 실없이 놓칠 위인이 절대 아니었다.

배 세 척을 띄워놓고 동호에서 서호로 물결 따라 흘러갔다 압구정이 있는 동호 쪽으로 다시 되돌아오는 동안, 명회는 자기 주변에서 아첨하는 당상관들에게 두루 한 잔씩 따르며 축원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어느덧 삶의 황혼기에 접어든 그로선 실직에 있는 후배들과 척을 질 이유가 없었다. 대신 그들이 점점 역겨워졌기에 기생들이 타고 있던 옆 배로 이선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중국의 대시인 조식이도 낙수의 여신을 만나고서야 ‘낙신부’라는 희대의 걸작을 지었다지 않소? 이 몸이 비록 재주 박약하나 한강의 여신들과 풍월 읊조릴 마음이 아예 없진 않소만.”

그의 말에 담긴 뜻을 알아들은 관료들은 갑자기 호들갑을 떨며 기녀들이 탄 배를 향해 어서 다가오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대궐을 지켜야 할 금군 가운데 정해진 번마저 깨고 파견 나와 있던 젊은 장교 둘이 판자를 쥐고 배와 배를 이을 준비를 했다. 물결을 따라 이리저리 출렁이는 두 배를 고정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나이 어린 동기들까지 달려들어 용을 쓴 덕에 명회는 간신히 배를 갈아탈 수 있었다.

명회가 기녀들 배로 올라서자 악공들이 탄 다른 배에서 풍악을 울리기 시작했고, 이제 막 그를 떠나보낸 관료들 배에선 아쉬움의 탄식이 터져 나왔다. 온 우주가 그의 심기를 살피려 애쓰는 듯했고, 찬란한 가을 강산과 정처없이 떠도는 갈매기들마저 그의 건강을 염려하는 듯했다.

명기 일지홍이 간드러지게 죽지사 일절을 부르고 헌주를 올리자 기운차게 일어선 명회가 단숨에 잔을 비우고 어깨춤을 덩실덩실 춰댔다. 까르르 웃는 동기들이 그를 부축하면서 장구 장단에 맞춰 한판 신명 나는 춤판이 벌어졌는데, 그 사이를 저물녘 낙조가 힘없이 스며드니 기이한 슬픈 분위기가 연출되고야 말았다. 명회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천하를 얻은 이 한명회도 저무는 해를 잡을 순 없구나! 아, 이 얼마나 슬픈 일이더냐?”

그 순간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압구정 쪽 강변에서 일제히 수백 개의 횃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기쁨으로 입이 크게 벌어진 명회가 관료들이 탄 배 쪽을 돌아보자, 열을 이룬 조정 대신들이 그를 향해 고개 숙여 공수의 예를 올리고 있었다. 명회는 가슴을 한껏 펼치고 어두워오는 북궐을 향해 웃어젖혔다. 그러고는 감회에 젖은 얼굴로 울먹이며 속삭였다.

“내 한때 칠삭둥이라 놀림당했지만, 자 보아라! 누가 진짜 저 북궐의 주인이냐?”

그 소리를 유일하게 알아들은 일지홍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명회의 가슴속으로 파고들며 콧소리를 섞어 말했다.

“누가 한양의 주상 전하인지 알 사람은 다 알고 있나이다.”

한명회의 최후

뱃놀이가 끝나고 압구정에 주안상을 마련한 명회 일행은 거나하게 취해 갔다. 낮부터 이미 혼곤히 취해 있던 병조판서가 명회에게 잔을 올리며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말했다.

“나으리, 우리 지존 나으리! 이 세상 가장 무서운 이치가 무엇인지 아시옵니까?”

받은 잔을 입술로 가져가려다 병판 얼굴에 술을 끼얹은 명회가 사색이 된 상대를 향해 웃으며 대답했다.

“내 그걸 모를 줄 알고? 바로 이런 거 아닌가?”

상체를 비틀대며 얼굴의 술을 닦아내던 병판이 명회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제게 하신 이런 거 말씀이십니까?”

팔짱을 낀 명회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지! 술자리 흥을 깨는 것 말이지.”

갑자기 박수를 쳐대며 웃음을 터뜨린 병판이 감탄을 연발하며 소리쳤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요! 그것이 바로 가장 무서운 세상 이치입니다요! 흥진비래! 흥이 다하면 찾아오는 알 수 없는 그 슬픔이라 그겁니다. 그게 인생의 묘미이자 가장 큰 슬픔입죠!”

쓸쓸한 표정이 된 명회가 옆자리 일지홍을 끌어안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삶이란 우리가 잠시 찾은 축제 같은 거지. 아니지, 언제 우리가 선택이란 걸 했었던가? 뜬금없이 벌어진 한바탕 잔치라고나 할까? 잘 놀다 가면 그만인 걸세. 뭐, 흥진비래? 흥이 왜 깨져? 깨질 것 같으면 다시 불을 붙이면 되는 거야. 횃불을 태우면 밤이 낮이 되는 거라네!”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키득대던 병판이 다시 외쳤다.

“슬픔이란 애초에 없다, 그 말씀이시로군요! 그렇습니다요! 진정한 슬픔이란 결국 죽음일 터, 죽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을 텐데, 과연 무슨 슬픔 따위가 있겠습니까요?”

돌연 거룩한 낯빛이 된 명회가 병판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바로 그것이 진실이네! 흥을 깨지만 않으면 되는 걸세! 죽음? 그깟 게 다 뭐란 말인가? 우리 다 아직 여기 살아 있지 않은가? 개똥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옛말이 왜 생겼겠어? 우리가 누릴 건 다 여기, 여기 이승에 있는 거야.”

벌떡 일어선 그가 압구정 주변을 손으로 가리키며 절규했다.

“이게 이 세상의 전부라고! 이것 밖에는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없어!”

그의 말이 끝날 무렵, 강물이 차츰 불어나더니 무서운 속도로 압구정을 향해 밀려왔다. 비비 꼬인 시공간의 회랑 안으로 말려들어 간 압구정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명회의 마지막 말은 들끓는 포말 사이에서 덧없는 여운으로 맴돌았다.

용궁에 간 고려 유생 한생

용궁 안으로 들어선 고려 유생 한생은 자기가 과연 아직 현실에 있는지 확인해 보고자 볼을 여러 차례 꼬집었다. 틀림없는 현실이었다. 심해에 자리 잡은 용궁은 화려한 전각과 인간 세상에선 볼 수 없었던 놀라운 기구로 가득 차 있었다. 무엇보다 용궁 곳곳을 비추는 빛의 색깔은 인간계에선 존재하지 않는 희한한 종류였다. 그 어떤 멋진 단청 빛깔로도 설명하기 어려웠다.

궁궐 가장 깊숙한 내전에서 마주한 용왕은 전혀 거드름을 피우지 않았지만 위엄 넘치는 기품으로 한생을 압도했다. 한생이 물었다.

“훌륭한 곳으로 초청해 주신 은혜 갚을 길 없사오나, 왜 하필 고려 개경의 한미한 서생인 저였는지 궁금합니다. 재주도 보잘것없고 가문도 형편없어, 여태 낙방이나 거듭하고 있던 미천한 자일 뿐입니다. 혹시 사람을 잘못 보신 건 아니신지요?”

크게 한번 웃은 용왕이 옥좌에서 내려와 한생 옆으로 다가오며 대답했다.

“진리를 전달할 사도란 본디 평범해야 하느니라. 평범함이 얼마나 귀한 재주인지 아느냐? 자고로 진리를 깨달은 자가 욕심을 부리면 세상을 파탄에 빠뜨리는 법이지. 알면서도 무지를 가장할 줄 아는 자야말로 진짜 선지자가 될 수 있다.”

“무얼 알아야만 합니까?”

“이 세상의 덧없음이다.”

“이 세상이 덧없다는 걸 모르지는 않사옵니다.”

“덧없다는 걸 알면서도 의미를 밝히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어떻게 의미를 밝히는 것입니까?”

“평범한 인생을 선하게 긍정하는 것이다. 이승이 전부라 믿으면 못할 짓이 없어지지 않겠느냐? 그렇다고 삶의 덧없음을 부정해 의미를 찾으려들면 부질없는 집착에 시달릴 것이다. 인생은 평범하고 덧없지만 잘 살아내야 할 연극 같은 것이다.”

“연극 같은 것입니까?”

“그렇다. 연극이다. 기왕에 연극이라면 잘 쓰인 연극이면 좋지 않겠느냐? 모두가 행복해지는 연극이면 좋지 않겠느냐?”

잠시 망설이던 한생이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제가 사는 세속이 덧없고 무의미한 세상인 건 알겠습니다. 용왕님 말씀처럼 그런 속세를 착하게 살고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말 궁금합니다. 용왕님께서 사시는 이곳 용궁은 의미로 넘치는 곳이 아닌지요? 그렇다면 속인 모두를 이곳으로 데려온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리되면 덧없고 무의미한 게 지겨워 악행을 저지르지도, 찾지도 못할 의미를 발견하려 속절없이 삶을 낭비하지도 않을 것 아니겠습니까?”

한참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용왕이 입을 뗐다.

“내가 사는 이곳 역시 덧없고 무의미한 곳이니라.”

“어찌 그렇습니까? 적어도 제가 사는 세속보다는 더 깨달은 자들의 세상이 아닙니까?”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진 용왕이 한숨을 쉬고 나서 천천히 대답했다.

“너희가 사는 세상, 그곳을 만든 자가 바로 나이니라. 불완전한 세상을 만든 나는 이 빛의 지옥에서 영원을 견디고 있다. 아무리 고쳐 써도 일은 꼬이기만 하니 이를 어쩌란 말이더냐? 그러니 너처럼 내 고충을 이해할 선지자를 보내 속죄라도 하려는 것이다.”

“용왕님이 만드신 세상이라면?”

“그렇다. 나도 너와 같은 작가니라. 너희 눈엔 이 모든 게 실체로 보이겠지만 다 환상인 것이야. 내가 만든 이 환상에 절대 속지 마라. 알겠느냐?”

머리를 끄덕이려다 도로 숙인 한생은 아주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압구정 #한명회 #화성여행 #윤채근 #신동아

* 이 작품은 김시습의 ‘용궁부연록’을 에드거 앨런 포의 ‘어셔가의 몰락’을 활용해 각색한 것이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



신동아 2021년 6월호

윤채근 단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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