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호

환상극장

근심의 성에 숨어버린 은둔자

  • 윤채근 단국대 교수

    입력2022-04-14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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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우리 고전에 기록된 서사를 현대 감성으로 각색한 짧은 이야기를 연재한다. 역사와 소설,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져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율곡 이이가 사망한 직후 조정은 살얼음판처럼 위태로운 곳이 돼버렸다. 정신적 지도자를 잃은 서인들은 더욱 긴밀히 결집해 나갔고, 동인들은 권력의 공백을 틈타 주도권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동인도 서인도 아니었던 승정원 주서 윤군평은 병든 노모를 핑계로 자리에서 물러나 서촌에 있던 맏형 집에 기식하며 술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서촌에 낯선 손님이 방문한 때는 여름의 초입. 유난히 더위가 빨리 찾아와 서촌 사람들이 인왕산 아래 계곡물로 뛰어들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군평 방에 들어선 손님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윤 주서. 자넨 날 모르겠지만, 난 자넬 잘 아네. 나 홍문관 교리 구봉령일세.”

    상대를 빤히 노려보던 군평이 볼멘소리로 물었다.

    “교리시라면 5품직 고관이신데, 저처럼 7품직에 그것도 이미 물러난 놈을 어인 일로 찾아오신 겁니까?”



    야릇하게 미소를 품은 표정이 된 봉령이 갓을 벗으며 대답했다.

    “율곡 선생의 뜻을 전하러 왔네.”

    긴장한 눈빛이 된 군평이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말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만 저희 집안은 당쟁에 관심이 없습니다. 율곡 선생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서로 잠시 가까웠으나 그건 그저 관무 때문이었습니다.”

    “오해 말게! 내가 서인인 건 맞지만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로 뭘 부탁하러 온 건 절대 아닐세.”

    “그럼 도대체 율곡 선생께서 무슨 뜻을 제게 남기셨단 말씀입니까?”

    “율곡 선생께서 일을 추진하실 때 몹시 치밀한 데다가 지나칠 정도로 계획에 집착하셨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겠지?”

    “아다마다요! 강원도에 어사로 파견돼 죽다 살아남았지 뭡니까?”

    살며시 웃던 봉령이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말했다.

    “바로 그 일과도 관계된 일일세! 날도 더운데 우리 계곡으로 자리를 옮길까? 어린 친구가 술을 그리 좋아한다면서? 내 한잔 사지.”

    율곡이 남긴 뜻

    군평과 봉령은 청아한 달빛을 받으며 나란히 앉아 계곡물에 발을 담갔다. 한기가 사르르 발끝으로 전해졌다. 낮부터 마신 술로 취기가 오른 군평이 먼저 입을 뗐다.

    “이번엔 호남으로 암행을 다녀오라는 말씀입니까?”

    고개를 끄덕인 봉령이 물에서 발을 빼내며 대답했다.

    “그렇지! 율곡 선생께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내게 분명히 하신 말씀일세. 자네가 나이는 비록 어리지만 강원도 어사로서 일을 아주 잘했다고 하시던데?”

    상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군평이 길게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율곡 선생께서 돌아가신 지 벌써 여러 달입니다. 그동안 뭐 하시다 이제야 절 찾으신 겁니까? 보아하니 저번처럼 힘든 임무라 다들 피했던 건 아닙니까?”

    “절대 그건 아닐세! 율곡 선생께선 분명 자넬 지목하셨어! 믿어주게. 다만 자넬 조금 관찰해야만 했지.”

    “혹시 제가 동인의 끄나풀인가 의심하셨습니까?”

    흠칫 놀란 눈빛을 애써 감추며 봉령이 속삭였다.

    “부인하진 않겠네.”

    두 사람은 말없이 달을 바라보다 급히 눈을 감았다. 감미롭던 미풍이 갑자기 거세져 정면으로 불어왔기 때문이다. 군평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결국 저더러 나주로 가서 임제의 그간 행적을 조사하라는 말씀 아닙니까? 아울러 주변 지역 방백들의 언행도 감찰하고 말입니다.”

    고개를 살며시 끄덕인 봉령이 차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맞네! 임제는 충신일 수도 있고 역적일 수도 있어. 생육신인 원호를 추앙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지. 노산군의 충신이었던 생육신이 지금의 주상께도 충신이라 여긴다면 임제 역시 충신이겠지만, 그 반대라면, 혹시라도 그렇다면, 임제는 세조의 후손이신 지금의 주상께는 반역자가 아니겠나?”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군평이 온몸을 가늘게 떨며 다시 물었다.

    “임제가 반역자인지를 알아내야 하는 거로군요?”

    군평의 어깨를 살짝 토닥인 봉령이 시를 읊조리듯 낭랑하게 대답했다.

    “그 임무를 왜 자네에게 맡기라고 하셨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 율곡 선생께선 숨을 가두시기 직전까지도 국사에 걱정이 아주 많으셨어. 우리 그 얘기나 더 나누며 밤을 새워볼까?”

    세상에 품은 불편한 마음

    나주목사의 도움으로 관아 객사에 짐을 푼 군평은 두문불출한 채 임제에 관한 자료를 읽어나갔다. 임제의 가문은 오랜 세월 나주 지역의 유지였다. 호남의 여러 토호와 긴밀히 연결돼 있었다. 이는 언뜻 문학으로 맺어진 순수한 지역 결사체처럼도 보였지만 조금만 시각을 달리하면 중앙 조정에 대항할 수 있는 무장단체로도 볼 여지가 있었다. 둘은 종이 한 장 차이였다.

    어느 날 밤 객사를 몰래 방문한 나주목사가 군평에게 물었다.

    “우리 젊은 어사께서도 이제 깨달으셨겠지만, 임제는 수상한 자가 아니올시다! 내 그자와 술도 몇 번 대작해 봤소만, 기개 있는 사내긴 하겠으나, 뭐랄까, 반역을 도모할 위인은 못 됩디다.”

    팔짱을 긴 채 눈을 감고 있던 군평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목사께서는 구 교리님과 같은 해에 급제한 동방으로서 친분이 두터우시다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믿고 의지하고 있습니다.”

    들뜬 표정이 된 목사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친하다마다요! 구 교리가 비록 귀한 홍문관 청요직에 올랐지만 여전히 친구인 절 생각해 줍디다. 언젠가 이 사람을 조정 내직으로 이끌어줄 걸로 뭐 확신하고 있습니다만.”

    상대를 말없이 쏘아보던 군평이 자료를 이리저리 넘기며 말했다.

    “임제는 매우 뛰어난 재능이 있었음에도 한양 고관대작들과 척을 지고 외직으로만 떠돌았더군요. 고산도찰방이라. 이건 하급 무직이 아닙니까? 덕분에 무신들과 교분도 꽤 깊었고, 또 젊은 비장들이 지금도 이곳에 자주 방문한다고 들었습니다.”

    군평 쪽으로 바싹 다가앉은 목사가 당황한 표정으로 서둘러 말했다.

    “임제가 젊은 시절 지나치게 광달하여 조금 놀았습디다. 기생들과 벌인 방자한 놀음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요. 그 불같은 성격이 한양에 간다고 변했겠습니까? 과거에 급제하면 뭐 합니까? 어차피 벼슬은 능력보단 인품 보고 내려지는 것이거늘. 지금도 예전에 친했던 하급 무장들이 나주로 찾아오는 건 맞습니다. 한데 그저 술친구들입디다. 제가 보장합죠!”

    “하여튼 타고난 재주에 비해 관력은 몹시 초라하고, 별로 하는 일도 없이 고향 나주에 눌러앉아 있군요? 들리는 소문에는 세상에 불만이 아주 많았다고도 합니다.”

    두 팔을 벌려 손사래를 치며 목사가 대답했다.

    “아니, 아니올시다! 그 친구 폭음하는 습성이 있어 주사가 심합니다. 취하면 아무도 못 말린다고 합디다. 그저 주사올시다, 주사! 칼은 좀 쓰긴 하는데, 누굴 해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책 몇 권을 방바닥에 늘어놓으며 군평이 다시 말했다.

    “임제가 지은 소설들입니다. ‘원생몽유록’은 아시다시피 생육신인 원호 선생을 기린 작품입니다. 원호 선생이 노산군께야 천하의 충신이겠지만, 세조 임금 입장에선 한낱 반역자 아니겠습니까?”

    얼굴을 붉힌 목사가 잠시 침묵에 잠겼다가 낮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 문제라면 지금의 주상께서 김시습을 생육신으로 추켜세우신 마당에 다 해결된 게 아닐까 합니다만. 율곡 선생께선 생전에 ‘김시습전’까지 지으시지 않았습니까?”

    고개를 까닥대던 군평이 다른 책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건 ‘수성지’인데, 근심의 성에 대한 일종의 우화입니다. 마음에 생긴 근심을 성에 비유했지요. 그 성을 술의 힘으로 함락시킨다는 이야기인데, 문제는 내용이 아닙니다. 내용이야 해학으로 치부하면 그뿐입니다.”

    “그럼 뭐가 문젭니까?”

    “근심의 성을 쌓는 과정이 지나치게 자세하고, 또 그 성을 쌓는 인물들이 죄 불행했던 역사적 실존 인물들입니다. 초나라 왕에게 버려졌던 굴원 같은 불우한 신하들 말입니다. 이런 걸 불평지기, 세상에 품은 불평한 마음이라 부르지 않던가요? 역적이 어디 따로 있나요? 왕에게 불평지기 품으면 그게 역적입니다.”
    “아니, 아니올시다! 역심이라니? 여기 나주 고을을 어떻게 보시고?”

    “임제와 교분을 나눈 호남 인사들 목록을 만들어주십시오. 근심의 성에 숨은 그자의 진짜 얼굴을 봐야겠습니다.”

    [게티이미지]

    [게티이미지]

    외딴 산사의 살육

    군평은 임제 주변에 출몰하는 모든 인물을 차례로 감찰해 나갔다. 워낙 다양한 신분이 뒤죽박죽 섞여 있어 언뜻 보기엔 그들 사이에 아무 계통이 없어 보였지만 무질서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그 내부엔 분명한 흐름이 존재했다. 소속이 불명확한 하급 무관이나 지방 관아에 근무하는 아전들이 주기적으로 임제의 나주 집에 들렀는데, 그들과의 짧은 만남 직전엔 천하의 술꾼인 임제가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짧은 회동이 끝나면 임제는 어김없이 고주망태의 옛 모습으로 되돌아가곤 했다.

    한양 포도청 소속 기찰포교 한 명이 군평을 돕기 위해 나주에 내려오고 한 달여 지난 어느 날 군평은 임제를 방문한 젊은 비장 한 무리를 추적하기로 결심했다. 포교와 함께 삯꾼 복장으로 위장한 군평은 영산강 포구 장터를 거쳐 영암 쪽으로 넘어가려는 무리를 바싹 따라붙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 무렵, 네 명의 비장은 무언가 길게 서로 얘기를 주고받더니 대로변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몸이 단 군평이 그들 뒤를 쫓으려 하자 포교가 이를 제지하며 낮게 속삭였다.

    “어사 나리! 기다리면 다시 나타납니다. 저쪽으로 길이 없잖습니까?”

    사라졌던 무리는 과연 다시 대로로 되돌아왔다. 한데 그 복색은 전혀 딴판이었다. 긴장한 군평이 침을 꼴깍 삼키고 나서 입을 열었다.

    “승려 복장 아닌가? 저들 무슨 짓을 벌일 셈인 거지?”

    몸을 잔뜩 낮추고 그들을 엿보던 포교가 가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실은 포구에서 저들이 하는 말을 지나가며 슬쩍 들어봤는데, 어투가 비장답지 않았습니다. 무부에겐 독특한 말투가 있는 법인데 말입니다. 게다가 전투용 철릭을 격식에 맞춰 입지도 않았고 말입니다.”

    “가짜란 말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지금 저 네 명 다 삿갓을 썼는데, 필경 대머리일 겁니다. 비장들이 아니었습니다.”

    “애초 승려들이었다는 말인가?”

    “그건 두고 봐야겠지요. 아무튼 변장을 잘하는 거로 봐선, 범상한 중들은 아닐 겁니다.”

    수상한 무리는 영암 방향으로 한참을 이동하다 샛길로 빠지더니 제법 규모가 되는 한 산사로 들어섰다. 군평과 포교는 길을 크게 우회해 대웅전이 바라다보이는 산기슭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새벽에 이르도록 괴승 무리가 묵은 객방 쪽을 감시했다.

    사건이 벌어진 건 새벽 공양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일렬로 서서 대웅전으로 향하려던 승려 무리 맨 끝에 서 있던 괴승들은 공양을 드리기보다는 절을 막 떠나려는 차림새였다. 갑자기 봇짐에서 단검을 빼 든 그들은 한 치 망설임 없이 후미의 승려들을 도륙해 나갔는데, 선두에 섰던 일부 나이 든 승려들만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된 절 경내로 다른 요사에 묵던 승려들이 달려 나왔고,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방장스님의 절규가 울려 퍼졌다.

    괴승들을 추격하는 기찰포교의 솜씨는 상상 이상이었다. 군평은 도주하는 괴승들과의 거리를 빠르게 좁혀가는 포교의 뒷모습을 멀리 바라보며 달리기를 멈춰야 했다. 기진맥진한 채 가까스로 산사 초입 대로변에 다다른 군평은 바위 옆에 웅크리고 앉은 포교와 그 앞에 널브러진 괴승 한 명을 발견했다. 포교가 칼에 찔린 옆구리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신음하듯 말했다.

    “나머지 셋은 놓치고 저 녀석만 잡았는데, 제가 그만 힘을 과하게 썼는지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임제는 죽어가고 있었다. 마흔도 되지 않은 나이였지만 풍성했던 체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비쩍 마른 몸에선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거실 서안에 의지해 비스듬히 앉은 그는 마른 입술을 힘겹게 떼내며 말문을 열었다.

    “보다시피, 뭐 이 육신은 지금 죽어가고 있소. 실컷 써먹었으니 달리 여한도 없고.”

    상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군평이 천천히 팔짱을 끼며 물었다.

    “그런데도 그토록 술을 마셔댄 겁니까?”

    빙그레 미소 짓던 임제가 슬쩍 군평을 노려봤는데, 그 순간 형형한 활기가 눈동자에 맺혀 살기로 뿜어져 나왔다. 군평이 조금 움찔했다. 임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술도 없이 이 무도한 세상 어찌 사누? 날 감시했었소? 그래서 뭘 발견했는데? 어디 들어나 봅시다.”

    한숨을 크게 몰아쉰 군평은 자신의 감찰 업무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곰곰이 그의 얘기를 듣기만 하던 임제가 갑자기 손을 들어 말을 멈추게 한 뒤 방문 앞을 지키던 노복에게 주안상을 차려오라 명했다. 잠시 후 군평에게 탁주 한 잔을 따라 권한 그가 자신의 잔에도 술을 따르려다 멈추더니 아예 병째 들이켜기 시작했다. 술병 바닥까지 남김없이 배속으로 털어 넣은 임제는 눈을 치켜떠 군평을 노려보더니 거침없이 말하기 시작했다.

    “충과 불충은 보기에 따라 뒤바뀌지. 중원의 개국 시조들도 이전 왕조 입장에서 따지면 모두 반역자들 아닌가? 성공하면 창업 군주고 실패하면 역도가 된다 이 말이지. 반드시 천도가 어떤 한 사람만 딱 지목해 깃든다고 누가 장담하느냐 말이야. 어사는 천도를 보았소? 그게 과연 어디 있습디까?”

    적잖이 당황한 군평이 뭐라 말을 하려 했지만 갑자기 목이 메어 입을 뗄 수 없었다. 싱긋 미소를 머금은 임제가 노복에게 술병을 더 주문하고 속삭였다.

    “한데 난 반역자는 아니지. 어린 양반은 모르겠지만 반역도 말이지,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때를 만난 반역자는 천자가 되지만, 때를 못 만나면, 때가 찾아와 주지 않으면, 그저 소나 돼지를 잡는 백정으로 삶을 마감하는 거야.”

    묵묵히 듣고만 있던 군평은 상대를 고발하려던 마음을 고쳐먹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미치광이 선비를 압송한다 한들 치세에 득이 될 게 하나도 없어 보였다. 대신 산사에서 벌어진 살육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가야 했다. 그 문제를 거론하자 임제의 표정이 급속히 굳어갔다.

    “조선의 관군들이 얼마나 강하다고 생각하지? 이를테면 이 산하가 도탄에 빠지면 백성들을 온전히 구할 수 있겠소? 탐관오리는 넘쳐나고, 군율은 흐려졌고, 전장에서 싸울 용맹한 장수들은 부족하오. 난 이제 입을 다물 테니 차후 처분은 젊은 감찰어사 마음대로 하구려!”

    임제는 상에 오른 술병을 잡아 다시 단숨에 들이켰고 군평의 어떤 질문에도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울상이 된 채 상대를 바라보다 엉거주춤 일어서려던 군평을 향해 임제가 슬쩍 덧붙였다.

    “내 계절은 여기서 끝났소. 임실현감을 찾아가 보시오.”

    임실현감

    산사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은 이상하게 유야무야 덮이는 분위기였다. 절의 승려들은 살해된 자들의 신분을 쉬쉬하기에 급급했고, 심문관이 아무리 승적을 뒤져봐도 피살자들 이름을 찾아낼 수 없었다. 범인들의 행적도 오리무중인지라 임제와의 관련성은커녕 그들의 희미한 자취조차 파악하기 힘들었다. 군평은 자신을 제외한 유일한 목격자인 기찰포교를 설득해 한양으로 그냥 돌려보냈다.

    관아 객사에 틀어박혀 사건의 실체를 따져보던 군평은 막다른 벽에 부딪힌 기분이었다. 역모는 물론이려니와 그 흔한 재물이나 원한에 얽힌 관계도 성립되기 어려웠고, 유력한 단서를 쥐고 있던 임제마저 첫 만남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건 임실현감뿐이었다.

    군평이 임실현감을 찾아 나선 데에는 뚜렷한 이유가 없었다. 지방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은 자신의 소관 사항이 아닌 데다, 감찰 대상인 임제마저 죽고 없어진 마당에 더 수고할 하등의 필요가 없었다. 그건 그저 대궐 대소사를 기록하던 승정원 주서로서 오래도록 몸에 밴 호기심 때문이었다.

    군평은 한양으로 돌아가는 경로를 조금 바꿔 임실에 들렀다. 현감인 김천일은 딱 봐도 역모를 꾸밀 위인은 못 됐는데, 우직하고 꼼꼼하게 오직 관무에만 집중하는 유형이었다. 역모가 아니라면 어사로서 상대에게 더 따지고 캐물을 의무가 군평에겐 없었다. 사나흘 후한 대접을 받으며 관아 별채에 묵었다 떠날 채비를 하던 그는 퇴청하던 현감과 우연히 마주쳤다.

    “봇짐을 꾸리시는 걸 보아 하니 내일 떠나시나 봅니다그려?”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인사하는 천일을 바라보던 군평은 자기도 모르게 임제 얘기를 꺼내고 말았다.

    “현감께선 혹시 임제 선생을 잘 아시는지요?”

    표정이 굳어진 천일은 묵묵히 군평을 쏘아보다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친했습니다. 나주 상가에도 다녀왔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군평이 또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산사에서 벌어진 사건을 언급했다. 별채 툇마루에 털썩 주저앉은 천일이 긴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말했다.

    “결국 제 예감이 맞았습니다그려! 본관도 눈치는 채고 있었습니다. 임제를 감찰하고 계셨던 거지요? 그렇지요? 당연히 저도 의심하고 계신 거고.”

    의도치 않은 자백에 당황한 군평이 손사래를 치려다 문득 멈추고 상대의 입을 바라봤다.

    “임제와 전 같은 나주 출신으로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물론 나이만 많았지 제 재주는 그에 한참 못 미쳤지만 말이지요. 산사에서 살해된 승려들은 왜군들이 보낸 간자들입니다.”

    “간자라니요? 승려들이었습니다!”

    “왜군들은 간자들을 승려로 꾸며 조선 삼남 땅 곳곳으로 보냅니다. 조정에서만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그려. 더러 진짜 왜승이 간자로 오기도 합니다. 구분이 힘들지요. 놈들이 왜 오겠습니까? 조선 산하의 지형과 지세를 파악하려는 수작 아니겠습니까? 미구에 전란이라도 벌어지면 어쩌겠습니까? 관군이 못 하면 의로운 조선 장정들이라도 발 벗고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잠시 멍한 표정을 하고 있던 군평이 서둘러 물었다.

    “그럼 그 괴승들은 사병들이란 말입니까? 조정의 명령 없이 사병을 발동하면 어찌 되는지 아십니까?”

    간절한 눈빛을 한 천일이 침통한 음성으로 천천히 대답했다.

    “다 사병은 아니고 관병들도 더러 섞여 있습니다. 의로운 자들입니다. 본관의 말을 제발 믿어주셨으면 합니다그려!”

    미완의 복명

    한양으로 돌아온 군평은 조정에 복명하기 위해 아주 긴 보고서를 작성했지만 마지막에 찢어버렸다. 내용을 먼저 검토한 교리 구봉령의 충고 때문이었다. 봉령은 이렇게 군평을 설득했다.

    “조선에 왜군 간자들이 넘쳐나고 있음을 나도 이미 알고 있네. 하지만 이 문제를 키우면 조정은 또다시 난장판이 되어 동인과 서인이 서로 물고 뜯고 싸우겠지. 정치란 때론 그런 것일세! 전쟁 얘기는 이해관계가 하도 얽히고설켜 함부로 꺼내지 못해. 이해하게.”

    “왜병 간자들이 넘어오는 이유는 뻔하지 않습니까? 왜 관군이 토벌하지 않는 겁니까?”

    “이보게! 그게 다 나랏돈 들어가는 일 아닌가? 게다가 외교로 해결하는 수도 있으니 너무 덤비면 안 되네.”

    어깨를 늘어뜨린 군평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물었다.

    “그럼 율곡 선생께선 왜 저를 나주로 파견하라 하신 겁니까?”

    궐내각사인 홍문관에 비쳐드는 석양빛이 봉령의 얼굴 반쪽을 물들였다. 그 상태로 그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율곡 선생께선 10만양병설을 주장하셨지 않나? 유사시에 관병이 10만이 안 된다면, 그럼 어째야 하겠나? 의병이라도 모여야겠지? 바로 그걸세! 호남에서 꿈틀대는 사병들이 역도로 변하지만 않는다면 그들은 결국 의병이 될 테고, 모자란 관군 병력을 보충하는 셈이 되겠지? 그래서 임제의 동향이 무척이나 중요했던 걸세.”

    * 이 작품은 임제의 ‘수성지’를 모티프로 창작됐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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