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호

겨울날, 모카포트에서 뽀글뽀글 올라오는 진한 쓴맛

[김민경 ‘맛’ 이야기]

  • 김민경 푸드칼럼니스트

    mingaemi@gmail.com

    입력2022-12-25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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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카포트에서 진하고 쓴 커피가 뽀글뽀글 올라오고 있다. [Gettyimage]

    모카포트에서 진하고 쓴 커피가 뽀글뽀글 올라오고 있다. [Gettyimage]

    내가 일하는 사무실은 단열재 없이 시멘트로만 지어진 낡은 건물에 있다. 한여름엔 꽤나 선선해 좋을 때가 많은데 겨울이 되면 바깥보다 안이 더 춥게 느껴지는 날이 허다하다. 게다가 북향으로 난 창으로는 햇살 대신 겨울바람만 들어온다. 아침마다 어두컴컴하고 냉기 가득한 사무실에 도착해 불을 켜고, 창문을 열고, 기름 난로에 불을 지핀다. 모카포트에 물과 커피를 채우고 난로 위에 올려두고 기다린다. 그사이 컴퓨터를 켜고, 일력을 넘기며 오늘 할 일을 떠올리다보면 어느새 치이익 소리와 함께 작은 포트 안에 새까맣게 커피가 차오른다. 커피 향이 사무실을 벗어나 계단이 있는 복도까지 간다. 1년 365일 습기 냄새를 머금은 건물에 좋은 향이 돈다. 춥기만 한 이곳에 더 열심히 오게 되는 이유다. 낡은 건물에 사는 냉기와 습기라는 악당을 매일같이 물리쳐야 하기 때문이다.

    앙증맞고 독특한 생김새

    긴 손잡이가 달린 포터필터. [Gettyimage]

    긴 손잡이가 달린 포터필터. [Gettyimage]

    모카포트는 수증기 압력을 이용해 커피를 추출하는 도구다. 바닥면이 있는 물통에 커피를 담고, 평평한 깔때기처럼 생긴 커피 바스켓에 커피가루를 담아 그 위에 올리고, 손잡이가 달린 포트를 놓고 돌려서 꽉 닫는다. 열을 가하면 물이 커피를 통과해 포트 쪽으로 뽀글뽀글 올라와 모인다. 이 커피는 색이 아주 새까맣고, 맛이 진하고 쓰며 향이 폭발적으로 난다. 에스프레소에 비하면 크레마가 없고, 다소 텁텁하다. 사실 모카포트의 앙증맞고 독특한 생김새는 전 세계인에게 호응을 얻었지만 그 커피 맛을 즐기는 이는 별로 없다. 한동안 친구와 가족에게 내가 즐겨 선물한 모카포트 중 대부분은 커피 추출보다 진열장에 놓여 있는 게 일이다. 오로지 이탈리아의 가정집에서만 마르고 닳도록 모카포트로 커피를 만들어 마신다.

    겨울 아침의 커피 루틴 이후에는 캡슐커피, 프렌치프레스, 드립백 같은 걸 활용하며 하루를 보낸다. 사무실 찬장에 수동 에스프레소 머신이 숨어 있으나 수년째 꺼내지 않는다. 호기롭게 구매했지만 커피 가루를 필터 바스켓에 담아 골고루 꾹 누르는 탬핑(tamping)도 어렵고, 긴 손잡이가 달린 포터필터(추출기)를 매번 조였다 풀었다하는 것도 일이다. 세척도 번거롭다. 이런 노고에 비해 내가 만드는 커피 맛은 그 값을 못한다. 편리한 건 일회용 드립백이다. 손가락만한 병에 든 다양한 종류의 콜드브루 커피도 꽤 있다. 그러나 콜드브루 커피는 마셨다 하면 가슴이며 관자놀이가 두근거리는 증상을 동반해 손님용으로 미뤄뒀다. 내겐 그림의 떡일 뿐이다. 드립백은 커피가 든 조그마한 주머니를 벌려 컵에 끼워 올리고 물만 부으면 향도 은은히 퍼져나가 좋다. 나는 이때 괜히 드립포트를 쓰는데 소용없는 짓인 줄 알지만 어딘가 공을 들인 것 같아 기분은 좋아진다.

    둥글게 떨궈야

    드립커피라고도 하는 필터커피. [Gettyimage]

    드립커피라고도 하는 필터커피. [Gettyimage]

    드립커피라고도 하는 필터커피를 제대로 접한 건 ‘취준생’ 때 잠깐 일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였다. 사장님은 유일한 ‘알바생’이던 내게 반자동 에스프레소 기계 다루는 법을 가르쳐 준 다음, 한 달이 지나자 필터커피 내리는 방법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당시 손님 중에 에스프레소나 필터커피를 주문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쩌다 한번 단골에게 사장님이 커피를 무료로 내드리는 게 전부였다. 그럼에도 사장님은 매일 원두를 핸드 그라인더에 넣고 간 다음 종이 필터를 접어 도자기 드리퍼에 맞춰 끼우고, 커피 가루를 담아 주둥이가 우아한 드립포트로 물을 졸졸, 둥글게 둥글게 떨어뜨렸다. 아침마다 요리사, 알바생, 사장님 이렇게 셋이 함께 갓 내린 모닝커피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했다. 일하는 동안 기회가 될 때마다 배운 대로 커피를 만들어보았으나 사장님 커피 맛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일을 그만두고 드립커피도 가게도 잊었다. 내가 그만두고 오래지 않아 가게도 문을 닫았다. 늘 알쏭달쏭함을 지니고 있던 사장님은 사진가라는 본업으로 돌아간 게 아닐까 싶다.

    필터커피를 다시 만난 건 6년 뒤 지금 같은 겨울의 해인사에서다. 학교 선배 덕에 해인사에 며칠 묵었는데 그때 방 자리를 내어주고 살펴봐주신 스님께서 차와 커피를 종종 내려주셨다. 미리 옹기에 받아 놓은 물을 떠내는 것으로 시작해 각자의 찻잔에 커피가 담기기까지의 과정은 마치 작은 공연 같았다. 군더더기 없는 몸짓과 편안한 대화를 거쳐 나온 커피 역시 유하고 부드러웠다. 그윽하고 다양한 향이 코와 입, 가슴을 채웠다. 머리가 맑아지고 눈을 반짝이게 하는 것이 꼭 좋은 차를 마신 것 같았다. 흰 눈이 소복하게 쌓인 해인사의 풍경에 겹쳐 그날의 커피는 내 혀에, 마음에 각인됐다. 지금 우리 집 찬장 여기저기에 있는 필터커피 도구들은 그날의 인연으로 내게까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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