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호

단독

조영남 ‘그 사건’ 후 첫 인터뷰

“대작 논란, 떳떳하지만 구차하게 해명하고 싶지 않다”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9-12-21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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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심 유죄, 2심 무죄…4년의 침묵

    • ‘조영남 사건’ 한국 현대미술사에 중요한 일로 기록될 것

    • 미술학원도 안 다닌 놈이 미술 얘기 한다고 밉보인 거지…

    • 세칭 ‘대작화가’ 송씨, ‘다시 일하자’고 연락 왔다

    • 연말 디너쇼, 1월 유튜브 채널 개설 등으로 대중 만날 계획



    [홍중식 기자]

    [홍중식 기자]

    조영남 씨 집은 마치 화실 같았다. 현관부터 거실, 방 안에 이르기까지 눈 닿는 곳 어디에나 그림이 놓여 있었다. 벽면을 따라 겹겹이 쌓인 작품은 대부분 지난 3년여 사이에 조씨가 완성한 것이라고 했다. 대중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던 시간, 조씨 표현을 빌리자면 ‘유배생활’의 흔적이다. 

    조씨는 한때 ‘화수(畵手)’로 불렸다. ‘그림 그리는 가수’라는 뜻이다. 화투를 테마로 한 그의 작품은 대중 사이에서 큰 인기를 모았다. 그러다 2016년 ‘그 사건’이 터졌다. 무명 화가 송모 씨가 조씨 그림을 대신 그려줬다는 의혹이다. 

    조씨는 작품 제작 과정에서 송씨 도움을 받았다고 인정했다. “화가가 조수를 두는 것은 미술계 관행”이라고 했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 등이 조씨 의견에 힘을 실어줬다. 반면 ‘대작(代作)은 용납할 수 없는 범죄’라는 주장을 펴는 이도 적잖았다. 검찰은 후자 편에 섰다. 조씨는 사기 혐의로 기소됐고, 1심에서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2017년 10월의 일이다. 수십 년 간 가수, 화가, 방송 진행자로 대중 앞에 섰던 그에게 그렇게 ‘사기꾼’ 딱지가 붙었다.

    생산적인 시간

    [홍중식 기자]

    [홍중식 기자]

    조씨 이름이 다시 언론에 등장한 건 2018년 8월, 2심 법원이 원심을 파기하고 조씨에게 무죄를 선고했을 때다. 검찰이 이에 불복해 상고하면서 사건은 대법원으로 넘어갔다. 유죄 한 번, 무죄 한 번을 받으며 혹독한 시간을 보낸 조씨는 대법원 판단을 기다리는 상태다. 동시에 세상을 향해 조금씩 걸어 나올 준비를 하고 있다. 2019년 12월 29일, 서울 여의도 63컨벤션센터에서 4년 만에 디너쇼를 연다. 



    조씨를 만나면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부터 물으려 했다. 그러나 자택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이미 답이 보였다. 군데군데 물감 묻은 코듀로이 바지를 입은 그는 인터뷰를 하면서도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다. 

    “그동안 그림을 많이 그렸고, 책을 2권 썼다. 엄청 생산적으로 보냈다. 시간이 많으니까.” 

    조씨가 방송에서 자주 보던 사람 좋은 얼굴로 씨익 웃었다. 덥수룩한 머리와 검은 뿔테안경, 후줄근한 듯 보이지만 패션 센스가 느껴지는 스타일은 예전 그대로였다. 

    - 4년 만의 디너쇼 소식을 들었다. 다시 활동을 시작하는 건가. 

    “그런 셈이다. 공연기획자들이 ‘음악 활동은 해도 되는 거 아니냐’고 연락을 해왔다. 방송 출연이 정지된 거지 다른 거는 제한이 없으니까 ‘그래, 해보자’ 했다.” 

    - 그럼 그동안은 부르는 곳이 없어서 쉬었나. 

    “자의 반 타의 반이라는 표현이 정확할 거다. 제안이 없지는 않았다. 조용히 지낸 건 무슨 얘기를 하기가 힘들어서다. 법적으로 걸려 있는 후배가 있다. 나한테 ‘형 형’ 하던 친구다. 그가 잘못했다는 걸 크게 떠들고 싶지 않았다. 혼자 욕 다 먹고 말았지.” 

    - 세칭 대필화가 송씨 얘긴가. 

    “그렇다. 내가 가만있으니까 의외로 진중권 같은 사람이 애를 많이 써줬다. 나 대신 욕을 엄청 먹었지. 오죽하면 그분이 인터넷 안 한다고 선언했겠나.” 

    2016년 얘기다. 당시 진 교수가 쓴 글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처음으로 화투를 그릴 생각을 한 것은 조영남이고, 화투 시리즈를 화랑과 전시회에 들여보낸 것이 조영남이고, 개별 작품의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이 조영남이고, 그림을 그려달라고 주문을 넣은 것이 조영남이고, 그렇게 그려진 작품에 덧칠을 한 것이 조영남이며, 그것을 제작품으로 인정하여 사인을 한 것이 조영남이라면, 그 작품은 700% 조영남의 ‘원작(original)’이다. 이것이 이른바 ‘개념적 혁명’을 통해 관철된 현대미술의 논리다.” 

    진 교수는 이런 말도 했다. 

    “뒤샹은 그림을 안 그렸지만 오늘날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꼽힌다. 왜? 예술의 개념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중략) 뒤샹이 자신은 ‘그림을 그리지 않는 화가가 될 것’이라고 선언한 게 무려 100년 전이다.” 

    그러나 여론의 질타는 따가웠다. 그 무렵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전국 19세 이상 501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 “조수가 그림 대부분을 그린 작품임을 밝히지 않고 전시 혹은 판매했다면 사기”라는 의견이 73.8%였다. “미술계의 통상적 관행이므로 문제 삼을 수 없다”는 의견은 13.7%에 불과했다. 언론과 인터넷 공간에서 조씨는 이미 ‘범죄자’였다. 이를 부정하는 진 교수에게도 비난과 욕설이 쏟아졌다. 진 교수는 결국 팔로어가 86만 명에 이르던 트위터 계정을 닫고 말았다.

    이 망할 놈의 현대미술

    - 당시 마음고생을 좀 했겠다. 

    “그걸 뭐라고 규정하느냐에 따라 다를 텐데…. 사람들이 워낙 강하게 몰아쳐 서운했던 건 틀림없다. 안 서운했다면 거짓말일 거다.” 

    - 최근 진 교수는 당시 사건을 정리하며 ‘현대미술에 대한 몰이해가 빚어낸 소극’이라고 평가한 책을 출간했다. 

    “그러잖아도 읽어보려던 참이다. 나도 책을 낼 계획이었는데 진 교수가 먼저 했다.” 

    - 뭘 쓰려고 했나. 

    “1심에서 내가 왜 유죄를 받았는지, 2심에서는 그게 왜 뒤집혔는지. 대법원 판결 나오면 재판 전체에 대해 상세히 알리려 한다. 그전에 나올 책도 있다. 내가 예전에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이라는 책을 썼다. 재판을 하면서 보니 법정에서 일하는 사람을 포함해 여전히 대다수가 현대미술에 대해 잘 모르더라. 좀 더 쉽게 다시 써야겠구나 생각했다. 쉬는 동안 그걸 썼다. 제목은 ‘이 망할 놈의 현대미술’이다. 여기에 내 사건 얘기는 안 들어간다. 지금 마무리 편집 단계다.” 

    조씨는 직접 그린 이 책 표지 그림을 보여줬다. 

    - 한동안은 그림을 쳐다보기도 싫었을 것 같은데 아닌가 보다. 집 곳곳에 그림이 무척 많다. 

    “나는 그림을 그만두고 싶다고 그만둘 수가 없다. 초등학생 때부터 계속 그렸다. 남들은 시간 나면 낚시하고 바둑 두고 등산 가지만 나는 그림을 그린다. 일종의 습관이다. 최근엔 일이 없으니 시간이 무척 많다. 친구 만나고 영화 보고 밥 먹고, 그래도 시간이 있으면 뭘 하겠나. 엄청난 생각을 갖고 그린 게 아니다. 늘 해오듯, 그냥 그렸다.” 

    - 이제 조수 안 쓰나? 

    “안 쓰지, 하나도.” 

    - 그 사건 이후로 전혀? 

    “안 썼다.”

    “미대 문턱도 안 가본 가수가 감히…”

    - 미술 작업에 조수를 써도 관계없다는 생각 아닌가. 

    “물론이다. 그 생각엔 변함없다. 2심 법원도 그 말이 맞다고 했다. 진중권 교수도 같은 의견이다. 대한민국에서 미학으로 진중권만큼 공부한 사람이 있나. 다만 이제 안 바쁘니까 조수 쓸 일이 없다. 그때는 많이 바쁠 때라 도움을 받았다.” 

    - 아직도 ‘조영남이 부정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대작화가로 알려진 송씨에게 못할 짓을 했다고도 한다. 

    “그 친구 얘기를 하고 싶지는 않은데…. 이제는 좀 알려진 부분만 말하겠다. 기사도 나왔는데, 그 친구가 내 그림을 몰래 팔았다. 그러다가 어느 언론사에 걸렸다. 일을 무마해보려고 이런저런 얘기를 한 게 그 사건으로 이어졌다. 당시 방송사에서 나를 많이 찾아왔다. 진실을 털어놓으라고, 그대로 보도해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러면 동생이 나쁜 사람이 되지 않나. 남의 그림 몰래 팔면 죄가 된다. 형으로서 ‘걔가 그랬다’고 할 수 없었다. 방어권 포기하고 아무 말 안 했다. 온갖 욕을 먹고 재판에서도 지고…. 한동안은 그때 행동을 굉장히 후회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잘했다 싶다. 내 자신이 기특하다.”
     
    당시 ‘대작화가’라는 이름으로 불린 송씨는 자신이 조씨 의뢰를 받아 작품 상당 부분을 대신 그렸다고 언론에 밝혔다. 이 발언이 자기 잘못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나왔다는 얘기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다면 그 작품을 조영남 것이라고 볼 수 있느냐’ 쪽에 관심을 쏟았다. 순식간에 ‘그림을 전혀 그릴 줄 모르는 가수가 무명 예술가를 고용해 대신 작업하게 하고 마치 자기 작품인 것처럼 속여 막대한 돈을 벌었다’는 프레임이 완성됐다. 주류 미술계 또한 이에 힘을 보탰다. 한국미술협회를 비롯한 11개 단체는 ‘조수를 쓰는 건 관행’이라고 발언한 조씨를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대한민국 전체 미술인의 명예를 더럽히고 사기꾼 누명을 씌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조수를 죄악시하는 건 현대미술 조류와 맞지 않다고 말한다. 미술평론가 반이정 씨는 당시 앤디 워홀, 제프 쿤스, 데이미언 허스트 등 해외 유명 작가 이름을 거론하지 않아도 조수와 일을 분담하는 동시대 생존 작가가 수없이 많다며 미술계 반응을 비판했다. 반씨는 이른바 ‘조영남 대작 사건’의 풍랑이 잦아든 후 벌어질 현상을 이렇게 예측하기도 했다. 

    “주문-제작이 미술계를 구성하는 엄연한 풍경이건 말건, 미술가를 다루는 교양 방송 프로그램과 미디어는 작업실에 고독하게 서 있는 미술가의 모습을 대중에게 전파할 것이다.” 

    - 당시 대중이 잘 모르던 미술계 현실을 가수가 세상에 알렸다는 이유로 많은 이의 미움을 샀다는 얘기가 있었다. 애초부터 미술계가 조영남을 싫어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터졌다는 말도 들었다. 

    “바로 그거지. 내가 그 사람들 처지라도 기분 나쁠 거다. 미대 앞에도 못 가본 사람, 아니 미술학원에도 안 가본 사람 아닌가. 보통 화가는 전시회 한번 열기 힘들다. 그런데 나는 여기저기서 전시회 한다 하지, 작품이 완판이라고 하지, 얼마나 속상했겠나. 그래서 아무 대응 안 했다. 하지만 1심에서 유죄를 받으니 이렇게 있어서는 안 되겠다 싶더라. 당시 내게 ‘집행유예 판결로 구속을 면했으니 됐다. 이제 그만 ‘잘못했다’ 하고 방송으로 복귀하라’고 조언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사기꾼’으로 살 수는 없지 않나. 그래서 항소했다. 2심 재판부도 내가 유죄라고 하면 도리 없다고 생각했다. 대한민국 법이 그렇다면 받아들여야지. 그런데 무죄를 받았다. 우리 법 체계가 환상적이다. 그때부터 좀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송씨가 다시 일하자고 연락”

    [홍중식 기자]

    [홍중식 기자]

    조씨는 이 대목에서 새로운 얘기를 꺼냈다. 무죄판결을 받은 날 송씨에게서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형과 다시 일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대작 논란 당시 여론이 조씨에게 등을 돌린 건 그가 송씨 존재를 숨기고 제대로 대우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제기돼서였다. 미술 이론적 관점에서 조씨를 옹호한 진 교수조차 “나는 조영남이 조수를 사용할 ‘권리’를 옹호하지, 그가 조수를 사용한 ‘방식’까지 옹호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 왜 송씨가 다시 같이 일하자고 하나. 

    “그러게. 걔가 그런 애다. 자기 죄 덮으려다 얼결에 일을 만들었지, 치밀하게 뭘 계획하고 움직인 게 아니다. 재판 선고받은 날 나한테 미안하다고, 다시 같이 그림 그리면 안 되겠냐고 하기에 ‘좀 기다려봐라’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친구가 미워서는 아니다. 다만 당장 똑바로 쳐다보기가 힘들 것 같다.” 

    - 당시 송씨를 제대로 대접하지 않았다는 비난이 거셌는데. 

    “진중권 교수도 그러더라. 그 조수에 대해서 내가 ‘짰다’고. 우리가 사적으로 만난 적은 한 번도 없다. 법정에서 진 교수가 증언할 때 들은 말이다. 가슴에 대못이 박히는 것 같았다. 그 친구가 담당한 작업이 대단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대학생 조수를 쓸 때보다 비용을 더 줬다. 만약 돈이 필요하다고 말했으면 더 올려줄 수도 있었을 거다. 일하면서 그런 말 한 마디 없었다. 나중에도 당사자가 돈 얘기를 한 적이 없다. 그런데 내가 인색했다, 짰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내가 뭐라고 하겠나. 사실대로 다 말하자면 너저분한 얘기가 많다. 내가 감수하면 그걸로 끝나니까, 더 말하고 싶지 않다.” 

    - 송씨와 다시 같이 일한다면 자연스레 오해가 사라질까. 

    “글쎄. 우리가 협업해 전시를 한다면 센세이셔널할 수도 있겠다. 이 시대에. 그런데 지금은 못 할 것 같다. 3년 넘게 힘들었다. 이제와 다시 형 동생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지…. 내가 못나서 이런 거다.” 

    - 전시는 오랫동안 못 했지만, 다른 활동은 재개하는 것 같다.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레 그렇게 됐다. 연말에 디너쇼를 하고, 새해에는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려 한다. 또 책도 나올 거다.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 외에 ‘시인 이상과 5명의 아해들’이라는 책을 썼다. 이상과 피카소, 아인슈타인, 말러, 니체를 주인공으로 하는 픽션이다.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유일하게 ‘꽂혀’ 있던 대상이 이상이다. 예전에 ‘이상은 이상 이상이었다’는 책도 썼다. 이번에 그의 위대성을 재조명해보고 싶다. ‘우리나라에 이상이라는 인물,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문학가이자 피카소·아인슈타인·말러·니체에 필적하는 천재가 있었다’는 걸 세상에 알리고 싶다. 책을 쓰면서 이 모든 일이 하늘이 내게 준 기회 같다는 생각까지 했다. 평생 꿈도 못 꿨던 픽션을 쓰게 됐으니까.” 

    조씨는 이 책에서 다섯 명의 주인공이 공연을 한다고 귀띔했다. 이상이 서태지나 조용필 같은 존재라 책 제목을 ‘시인 이상과 다섯 명의 아해들’로 정했다고 한다. 이 얘기를 할 때 조씨는 이날 대화 중 가장 신나 보였다.

    “젊은 날의 잘못 반성”

    마지막으로 그에게 물었다. 지난 사건에 대해 추호도 거리낄 게 없는지. 그는 대답에 앞서 잠시 시간을 뒀다. 

    “내가 유배를 받아도 싸다, 그런 생각은 한다. 시련이 주어지는 게 맞다 하는 이유는…. 내 평생의 콤플렉스 때문이다. 어린애들 두고 가정을 깬 것. 그것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한다. 이 얘기는 언젠가 한번 하고 싶었다. 이제 칠순도 지났고,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다. 이런 걸 얘기할 나이가 됐다. 내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으니, 벌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이런 상황을 잘 이겨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사건만 보면 분하고 원통하다고 할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그런 마음이 없다.” 

    인터뷰를 마치고 조씨는 피아노가 있는 방으로 자리를 옮겨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상의 ‘이런 시’를 가사로 삼고 직접 곡을 붙인 미공개 작품이었다. 이날 동석한 친지는 “집에서 그림을 그리지 않을 때는 주로 노래를 연습한다. 디너쇼 일정이 정해진 뒤 노래 부르는 시간이 더욱 길어졌다”고 밝혔다. 조씨는 최근 생애 최초의 트로트곡 ‘깜빡깜빡’을 담은 디지털 싱글 앨범도 제작했다. ‘그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마무리되면, 대중이 방송에서 조씨의 트로트를 듣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신동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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