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호

내가 만난 백선엽은 진정한 영웅이었다

영웅이 없는 게 아니라 영웅을 보지 못하는 우리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0-07-15 14:00:01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허문명이 만난 사람]

    • 美보병박물관에 울려 퍼지는 백 장군의 육성

    •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 美軍 고위인사 “백선엽은 한국의 조지 워싱턴”

    • “사단장이 선두에 서서 직접 돌격에 나섰다”

    • 백 장군이 친일파면 일제강점기를 산 모두가 친일파

    • 90세 넘어서도 악몽을 꾸다

    • 조국은 백선엽을 잊은 지 오래였다

    백선엽 장군. [동아DB]

    백선엽 장군. [동아DB]

    2009년 6월 19일 미국에서 뜻깊은 박물관이 개관했습니다. 조지아주 콜럼버스시 포트베닝 육군보병학교 내 보병박물관입니다. 2년 7개월 공사 끝에 낡고 좁던 건물이 번듯한 3층 건물로 탈바꿈했습니다. 개관일은 234년 역사를 가진 미국 육군 보병 창설 기념일이었습니다. 

    ‘군(軍)의 근간’이라 할 보병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한 이 박물관 3층에는 6·25전쟁 전시관(415m²)도 있습니다. 한국 정부, 삼성그룹, 한국군 장교들의 모금이 주요 재원이 돼 마련된 공간입니다.

    美보병박물관에 울려 퍼지는 백선엽 장군의 육성

    7월 15일 오전 대전시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에서 ‘고(故) 백선엽 장군 안장식’이 열리고 있다. [뉴시스]

    7월 15일 오전 대전시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에서 ‘고(故) 백선엽 장군 안장식’이 열리고 있다. [뉴시스]

    다양한 시각 자료를 갖춘 전시관 안에 들어서면 한 한국인 노병(老兵)의 목소리가 흐릅니다. 7월 10일 별세한 6·25전쟁 영웅 고(故) 백선엽 장군의 육성입니다. 백 장군이 박물관 개관 3개월 전 직접 방문해 녹음한 것이라고 합니다. 

    백 장군이 미국을 다녀온 직후인 2009년 7월 기자에게 담담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당시 분위기를 전하던 표정과 음성에는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이 묻어났습니다. 

    기자는 2009년 6월 그의 6·25전쟁 회고록 ‘군과 나’(시대정신)의 감수를 맡은 인연으로 고인과 수차례 만나 식사하고 대화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를 만날 때마다 살아 있는 전쟁영웅,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참군인’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었구나 하는 부끄러움이 들었습니다. 



    하루는 그를 용산 미8군 사령부에서 만났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그와 함께 경내를 걷는데 젊은 미군들이 먼발치에서 알아보고 뛰어와 경례를 했습니다. 속으로 살짝 충격을 받았습니다. 과연 우리 한국의 젊은 군인 중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어떻게 젊은 미군들이 그를 멀리서 알아보고 경례를 할까 궁금증이 일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주한미군들에게 그는 ‘살아 있는 전설(living legend)’로 통하고 있었습니다.

    “백선엽은 한국의 조지 워싱턴”

    역대 주한미군사령관들은 ‘한국전쟁의 영웅이신 백선엽 장군님’을 호명하며 이·취임사를 하고 있었고 미 국방부 직원들은 매년 리더십 교육으로 백 장군 강연을 들으러 방한하고 있었습니다. 장군 진급을 한 미군들도 한국에서 그의 전투 지휘 체험을 듣는 게 필수 코스였습니다. 

    주한 미8군은 미군 부대에 배속된 한국군(카투사·KATUSA) 우수 병사에게 주는 상을 ‘백선엽상’이라 명명하고 있었으며 국내 미8군 예하 27개 부대도 매년 6월이 되면 앞다퉈 그를 초청해 강연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가 1992년 펴낸 영문판 ‘From Busan to Panmunjeom(부산에서 판문점까지)’은 주한 미군은 물론 전사(戰史)나 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필독서로 꼽히는 미국 내 스테디셀러로 한국에 배속되는 미군은 당연히 읽어야 할 책이었습니다. 그의 삶과 얼굴을 잘 알고 있을 젊은 미군들이 먼발치에서 그를 알아보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거지요. 

    백 장군은 2013년 명예 미8군사령관에 임명됐고 2016년엔 한국인 최초로 미8군사령관 이·취임식에 초대되기도 했습니다. 백 장군 생일에는 항상 주한미군사령관이 참석했는데 그러고 보니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가 휠체어를 탄 장군 앞에서 무릎을 꿇고 생일을 축하하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이러니 그의 별세 소식에 미군 전·현직 장성들이 진심으로 가슴 아파하는 애도사를 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겠지요. 이들의 추도사는 건조하고 의례적인 멘트가 아닌 가슴속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존경심이 묻어나는 언어들이 담겨 있습니다.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사령관은 “진심으로 그리워질 영웅이자 국가의 보물”이라고 했고, 버웰 벨 전 주한미군사령관은 미국 독립전쟁을 이끈 ‘조지 워싱턴’에 비유했으며, 존 틸럴리 전 주한미군사령관은 “나의 스승이었다”고 했습니다. 이 밖에 제임스 서먼, 빈센트 브룩스 전 주한미군사령관들도 앞다퉈 추모 성명을 냈습니다.

    청와대가 할 말을 백악관이 대신해

    미국 백악관과 고위 장성들의 이런 모습은 11년 전 용산 미군기지 경내에서 만난 젊은 미군들의 경례와는 또 다른 울림을 줍니다. 군인으로서 함께 전장을 누빈 형제애 같은 게 느껴집니다. 실제로 백 장군의 존재는 미국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바쳐 싸운 전쟁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증언자로서의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의 부재가 크게 여겨졌으리라 짐작이 됩니다. 

    더 깜짝 놀랐던 것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가 7월 12일(현지 시각) “백 장군 같은 영웅 덕분에 한국은 번영한 민주공화국이 됐다”고 애도 성명을 낸 일일 것입니다. 백악관이 최고 외교안보기구인 NSC 명의로 현직도 아닌 전역한 외국 장성의 죽음에 별도 성명을 낸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청와대가 해야 할 말을 백악관이 대신하는 작금의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할 따름입니다. 

    그의 6·25전쟁 회고록 ‘군과 나’에는 전투 곳곳에서 한 몸이 돼 싸웠던 미군과의 일화가 많이 등장합니다. 고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함께 전투를 치르면 민족과 나라를 넘어 동지가 된다. 피로 맺어진 동맹, 혈맹은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를 지켜주기 위해 기꺼이 희생한 나라 국민들은 남이 아니라 형제다.” 

    6·25전쟁에서 백 장군이 미군과 함께 수행한 작전은 숱하게 많으나 최고의 전과(戰果)는 낙동강 최전선의 다부동 전투일 것입니다. 

    백 장군이 이끌던 1사단은 개전 초기 임진강 전선에서 북한군의 수도 진입을 끝까지 저지하다 서울이 함락되는 바람에 거의 맨손으로 한강을 넘다시피 합니다. 백 장군은 유랑하는 병사들을 끌어모아 수원 부근 풍덕천 전투에서부터 낙동강 전선에 이르기까지 끈질긴 접전으로 적의 남하를 지연시키면서 낙동강 최후 방어선 다부동에 이릅니다. 

    1950년 8월이었습니다. 총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1사단은 수류탄과 총검을 동원한 육박전을 벌이며 한 달 넘게 그야말로 혈전을 벌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북한군 2만여 명의 총공세를 3대 1도 되지 않는 8000여 명 병력으로 막아냅니다. 다부동 전투의 승리는 이후 연합군의 반격과 인천상륙작전의 계기를 만듭니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1952년 9월 3일 미국 유학을 떠나는 장교단 환송 행사에 참석한 백선엽 장군(왼쪽).

    1952년 9월 3일 미국 유학을 떠나는 장교단 환송 행사에 참석한 백선엽 장군(왼쪽).

    이 다부동 전투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전쟁사가(史家)들은 스파르타의 300용사가 마케도니아 해안의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페르시아 대군을 막다가 전원 옥쇄한 전사(戰史)와 종종 비교할 정도입니다. 다부동 전투는 미군과의 첫 합동작전이었습니다. 고립된 고지에서 물 한 모금 마시지도 못하고 전투에 지쳐 후퇴하던 부하 군인들에게 피를 토하며 독려하던 백 장군의 유명한 말은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더 후퇴할 장소가 없다. 더 갈 곳은 바다밖에 없다. 저 미군을 보라. 미군은 우리를 믿고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후퇴하다니 무슨 꼴이냐. 대한 남아로서 다시 싸우자.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사단장이 선두에 서면 적의 표적이 되고 저격되면 부대를 지휘할 사람이 없어집니다. 그런데도 사단장이 몸을 사리지 않고 ‘돌격 앞으로’를 외치니 병사들의 비장함이 어떤 수준으로 고양됐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당시 다부동 전장에서 백 장군과 함께 싸우다가 1971년 주한미군사령관으로 오게 된 존 마이켈리스는 대령으로 참전한 6·25전쟁을 회고하면서 “사단장이 선두에 서서 직접 돌격에 나서자 병사들의 함성이 골짜기를 진동했다. 한국군은 신병(神兵)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회고합니다.(‘군과 나’ 참조)

    “당시 미군 지휘관들은 한국군 부대의 전투 능력과 지휘관 능력을 예민하게 관찰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언제 한국군과 연합해 싸우게 될지 몰랐기 때문이다. 미군이 1사단과 백 장군의 전술능력과 전투정신을 믿지 못했다면 다부동 골짜기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혈맹이라지만 미군은 남의 나라 국민입니다. 더구나 제2차 세계대전 후 평화를 구가하다 듣도 보도 못한 나라에 징병돼 온 미군 병사들이 잘 싸워주기를 바라는 것도 무리인데 자기 나라를 자신들이 지키겠다는 의지와 결기가 없는 남의 나라 군대를 지켜줄 리는 만무하겠지요. 백 장군은 이런 점을 꿰뚫고 있었습니다. 백 장군의 말입니다. 

    “우리가 산 위에서 격퇴되면 미군은 골짜기에서 고립된다. 미군이 무너지면 우리는 산중에 고립된다. 상대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불안해서 싸울 수가 없다. 미군도 상황이 좋을 때는 ‘오케이’ ‘오케이’ 하지만 불리할 때는 냉혹하게 변한다. 국군이 자기 책임을 완수해 신뢰를 얻고 그들로부터 도와줄 가치가 있는 전우라는 신임을 얻지 못하면 연합작전은 성공하기 어렵다.” 

    6·25전쟁 당시 유엔군사령관을 지낸 매튜 B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과 제임스 A 밴플리트 미8군사령관도 ‘군과 나’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백선엽을 처음 만난 것은 1951년 초였다. 우리의 지휘하에 있을 동안 백선엽은 사단, 군단, 그리고 그보다 높은 지휘계통을 거치며 계속해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가 대한민국 육군에서 가장 뛰어난 작전 지휘관이라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전투란 리더십을 검증하는 가장 가혹한 시험장이다. 무엇보다 그는 직업군인으로서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이고 확고한 교의인 국가에 대한 충성, 개인에 대한 명예, 도덕적 용기, 부하들에 대한 변치 않는 애정, 그리고 승리를 향한 의지가 있었다.” 

    백 장군은 미군 덕분에 목숨도 여러 번 구합니다. 1·4후퇴로 퇴각하면서 극도의 분노와 수치심, 허탈감, 긴장으로 헛소리까지 하던 그를 업다시피 해 트럭에 태워 탈출시킨 사람도 미군이었고, 전쟁 내내 그를 괴롭힌 말라리아를 완치해준 사람도 미군 군의관이었습니다.

    국군의 토대를 만들어준 美軍

    국토의 대부분을 포기해야 했던 개전 초기 국군은 북한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습니다.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소총조차 제대로 갖지 못했으며 5만분의 1 축척의 세밀한 지도도 없어 괘도용 ‘대한민국 전도’에 의존하면서 산과 골짜기를 구별하지도 못한 채 전투에 투입됐습니다. 전장에서 육박전을 벌여야 했던 그야말로 민병대 수준이었습니다. 

    구령도 미국 또는 일본 말을 우리말로 직역한 것을 사용할 정도였고 병사들이 6·25전쟁 때 처음 전차를 보고 질려 ‘전차 공포증’에 시달릴 정도였다고 백 장군은 증언합니다. 

    전투를 하면서 병력을 증강시키고 신병들도 훈련시키는 와중에 병참 기반시설까지 닦아야 했던 눈물겨운 현장의 한가운데에 백 장군이 있었던 것입니다. 

    1950년 11월 20일자 중공군 제66군사령부가 간행한 전훈속보에는 중공군 부사령관 덩화가 작성한 기록이 나옵니다(‘군과 나’ 참조). 

    “미군은 전차와 포병의 협동 전투가 장기다. 공군의 대지 공격력도 강하다. 그러나 보병이 약하다. 죽음을 두려워해 과감한 공격이나 진지를 사수하겠다는 의지가 없다. 낮에만 행동하는 버릇이 있다. 야간전투나 근접전에는 아주 미숙하다. 보급이 끊기면 곧 전의를 상실하고 후방을 차단하면 스스로 물러난다. 한국군은 모든 면이 미숙하다. 훈련이 절대 부족하다. 화력과 전투력을 비교할 때 미군 사단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전의는 어느 정도 갖추고 있다.” 

    국군이 훗날 베트남전쟁에서 미군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성장한 것은 6·25전쟁에서의 경험 때문이었으며 여기에는 미군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고 백 장군은 말합니다. 

    실제로 전쟁 기간 국군은 미군이 제공하는 집중 훈련을 받았습니다. 미군에게 받은 훈련이 오늘날 육군의 뿌리를 튼튼히 하는 기초가 됐습니다. 대구참모학교가 설치됐고(1951. 12.) 4년제 육사가 진해에 창설됐으며(1952. 1.) 1951년 말에는 미 보병학교에 장교 250명, 미 포병학교에 100명을 단기 유학시켜 육군이 급성장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휴전 때까지 전선의 3분의 2를 국군이 담당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토대 덕분이었습니다. 

    백 장군은 생전에 탁월한 미군들과 함께 일했던 것이 대단한 영광이었다며 대표적인 사람으로 리지웨이 사령관을 꼽습니다. 

    “서울 수복을 함께했던 리지웨이 사령관은 지프를 타고 일일이 전장을 누비며 장병들의 경례만 보고도 사기를 평가했고 장갑과 양말은 제대로 보급되고 있는지, 병사들이 따듯한 음식을 먹고 있는지, 심지어 고향에 보낼 편지지를 갖고 있는지까지 신경 쓴 세심한 사령관이었다.”

    백 장군이 친일파면 일제강점기를 산 모두가 친일파

    백 장군은 1920년 11월 23일 평양에서 진남포쪽으로 2㎞ 떨어진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강서지방은 일찍이 서양 문물과 기독교가 전파됐고 교육열도 강한 곳입니다. 도산 안창호, 고당 조만식 선생이 태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백 장군은 일곱 살 때 어머니를 따라 평양으로 이사 옵니다. 생활고를 견디다 못한 어머니는 삼남매를 데리고 대동강 강물에 동반 투신을 기도했을 정도라고 하는군요. 강물로 뛰어들려던 찰나에 큰누나가 “나무도 뿌리를 내리려면 3년이 걸리는 데 우리는 평양에 온 지 1년밖에 안 됐다. 적어도 3년은 버텨보고 그래도 안 되면 그때 결심하자”고 통곡하는 바람에 되돌아 나왔다고 백 장군은 증언합니다. 

    이후 어머니와 누나가 고무공장 여공으로 일하면서 형편이 조금 나아졌습니다. 백 장군도 보통학교에 입학했으며 우등생들이 주로 입학했다는 명문 평양사범학교를 1940년 2월 졸업합니다. 졸업반 때 후일 비행사로 이름을 날린 박영환 등 만주군관학교 학생들로부터 군인을 해보라는 권유를 받고 군인의 길을 가기로 결심합니다. 

    백 장군은 생전 인터뷰에서 “극강(克强)으로 가고 있던 일본의 힘을 제대로 알고 싶어 군인이 됐다”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만주국 군대 장교들을 양성하던 2년제 봉천만주군관학교를 마치고 1942년 초 헤이룽장(黑龍江) 자무쓰(佳木斯)의 만주군 신병학교 교관을 1년 정도 역임한 뒤 배치받은 곳이 ‘간도특설대’입니다. 그를 향한 ‘독립군을 때려잡은 친일파’란 낙인은 바로 이 간도특설대 복무입니다. 간도특설대는 일본이 세운 괴뢰국가인 만주국에 의해 1938년 창설됐습니다. 독립군을 소탕한 부대였기 때문에 고인이 독립군을 때려잡은 친일파란 주장이 생겨난 겁니다. 

    1930년대 만주 항일투쟁은 독립군이 주축도 아니고 중국공산당 지휘를 받는 동북항일연군이 주축이었습니다. 그가 부임한 건 1943년 2월로 항일연군이 궤멸하고 김일성 등 조선인 잔여 세력도 소련으로 도피한 뒤였습니다. 그런 이유로 백 장군은 간도 근무 시절 순찰 활동만 했고 교전은 없었다고 생전에 여러 차례 밝힌 바 있습니다.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해 일제 군대의 일원이 된 것을 친일파로 낙인찍는 것도 백 장군이 1920년에 태어난 식민지 청년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무리한 것입니다. 

    그 시절 조선 땅에서 어느 누가 광복을 예감할 수 있었겠으며 지금 대한민국이란 나라 자체를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 식이라면 당시 조선에서 태어나 일제가 강요한 교육을 받고 직업을 가진 사람 모두를 친일파로 내몰 수도 있다는 논리가 됩니다. 죽어서 변호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 산 자들이 지금의 논리로 재단하는 것은 오만이자 횡포입니다. 

    백 장군은 1945년 8월 9일 소만(蘇滿)국경을 돌파해 만주 중심부로 진격하는 소련군을 만나 백두산 등반로 입구에서 무장해제를 당합니다. 이때 소련군을 따라온 한인 통역에게 조선 사람들 미래가 어떻게 될지 물었더니 “조선은 곧 독립된다”고 답했답니다. 그는 이 말을 듣자마자 수백㎞ 먼 길을 꼬박 걸어 고향 평양으로 돌아옵니다. 

    평양은 이미 소련군이 점령하고 있었고 김일성이 출현해 급부상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친척이 당시 평남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이던 조만식 선생 비서실장으로 일했습니다. 그 친척의 소개로 조만식 선생의 비서실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이 사무실에는 김일성도 가끔 찾아왔다고 하는군요. 백 장군은 김일성이 훗날 우리가 아는 김일성이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수개월 후 조만식 선생이 감금당하자 1945년 12월 27일 38선을 넘어 월남합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6년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입대해 부산 제5연대 중대장을 맡아 국군 창군 원년 멤버가 됩니다.

    90세 넘어서도 악몽을 꾸다

    백 장군은 정전이 될 때까지 3년 1개월 2일 17시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최전선의 야전지휘관으로 활약합니다. 북한의 침공으로 군대가 부산 앞바다까지 후퇴해 밀려 떨어질지 모르는 존망의 위기에서부터 압록강까지 국군이 진격해 통일의 꿈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순간까지 6·25전쟁의 최전선을 체험한 드문 군인이었습니다. 

    또한 한미연합작전을 실제 상황에서 수없이 수행했고, 정전회담에서 국군을 대표해 유엔군 측 대표단 일원으로 적군과 마주 앉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전후 육군 최고 책임자로서 미군 원조를 받아 국군을 재건하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전장에서는 인간 본성의 맨 밑바닥이 드러나는 법입니다. 백 장군은 비정상적인 전쟁터에서도 평상심을 잃지 않았고, 부하를 애정과 성의로 대함으로써 최대의 충성과 전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며칠간 굶으면서도 부하들에게 먹을 것을 양보하고 자신은 설탕물로 버틴 일화는 유명합니다. 개전 초기 한강 이북 전선에서 퇴각하는 상황에서 장병들에게 한 말에서는 끝까지 목숨을 함께하겠다는 비장함이 느껴집니다. 

    “오늘 아침 서울이 함락됐다. 한강다리도 폭파됐다. 미군이 참전한 모양이지만 우리나라는 우리가 지켜야 한다. 우선 시흥 보병학교에서 재집결하자. 여의치 않으면 지리산으로 가자. 거기서 농성하며 게릴라가 돼 철저히 항전하자. 2, 3년 버티면서 유리한 정세를 기다리자.” 

    생전 그는 기자에게 “90세를 넘겨서도 악몽을 꾼다”고 했습니다. 적에게 밀리다가 다급하게 소리를 지르며 깨는 꿈을 자주 꾼다고 하면서요. 

    백 장군은 전쟁 중 잃은 전우들을 생각할 때 가장 가슴이 아프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자신을 영웅이라고 치켜세우면 “용감하게 나아가 전투를 치르다 숨지거나 다친 장병들이 진짜 영웅”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는 생전에 “전쟁이 터지자마자 서울이 넘어가 퇴각할 때 간간이 마주친 민간인과 뱃사공들의 무표정 속에 담긴 원망과 배신감 어린 눈빛을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라고 했습니다. 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군인이 도망을 가느냐는 눈빛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면서 말이지요. 

    풍전등화의 조국을 온몸으로 지킨 그의 삶을 돌이켜 보노라면 그 시기 백 장군이 없었더라면 나라의 운명은 고사하고 내 운명이 어찌 됐을지, 식은땀이 날 정도입니다.

    조국은 백선엽을 잊은 지 오래였다

    조국은 백선엽을 잊은 지 사실 오래입니다. 최근까지도 개인적 친분이 있는 몇몇 부대를 제외하고 대다수 군대에서 그를 초청한 일은 별로 없다고 합니다. 6·25전쟁이 남침인지 북침인지도 잘 모르는 요즘 청소년 중 ‘백선엽’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그는 연대장, 사단장, 군단장, 참모총장을 거쳐 국군 최초 4성 장군을 지냈습니다. 1956년 5월 25일 정·부통령선거로 이승만 대통령이 3선을 한 후 대구 부정선거 사건으로 내무부 장관이 사퇴하자 입각 제의를 받았지만 군인으로 일생을 마치고 싶다면서 사양했습니다. 평생을 흔들리지 않고 군인 외길을 걸어온 백 장군의 삶은 ‘어른이 없다’ ‘영웅이 없다’고 한탄하는 우리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영웅이 묻힐 현충원 장지를 놓고 벌인 논란은 그 정점일 것입니다. 영웅이 없다고 한탄할 게 아니라 있는데도 보지 못한 우리의 ‘눈 나쁨’을 한탄할 일입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