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호

“백범 김구 정신에서 탄생한 단국대…교육으로 더 좋은 세상 만들고픈 꿈”

교육사업가 장충식 단국대 명예이사장 인터뷰 [단국대 HK+사업단 연속 기획 ‘한국사회와 지식권력’]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21-07-12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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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강점기 태어나 현대사 질곡 살아낸 교육사업가

    • 세상을 바꾸는 교육의 힘

    • 남북 체육 교류와 북방 외교무대에서 활약

    • 넬슨 만델라 정신 세상에 알리고픈 꿈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Knowledge is Power)”이라고 했다. 이 말엔 “지식이 곧 권력”이라는 통찰이 담겨 있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이 논의를 더 진전시켰다. 그는 “권력은 자기에게 필요한 지식을 생산해 낸다”며 “권력이 곧 지식(Power is Knowledge)”임을 역설했다. 정보가 막대한 가치를 창출해 내는 현대사회에 지식의 중요성은 점점 더 강조되고 있다. 지식과 권력의 관계 또한 나날이 긴밀해지는 추세다.

    ‘신동아’는 이 시점에 단국대 일본연구소 HK+ ‘동아시아 지식권력의 변천과 인문학’ 사업단과 함께 ‘한국사회와 지식권력’ 연재를 시작한다.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개인을 인터뷰해 그의 삶과 지식이 어떻게 권력으로 작용했는지 살피고, 지식과 권력의 미래상 또한 모색하려는 기획이다.

    장충식 단국대 명예이사장은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태어나 한평생 대학교육과 스포츠 외교 등에 헌신했다. [조영철 기자]

    장충식 단국대 명예이사장은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태어나 한평생 대학교육과 스포츠 외교 등에 헌신했다. [조영철 기자]

    한국 현대사 관통하며 살아온 교육자

    첫 순서로 만난 인물은 장충식(89) 단국대 명예이사장이다. 그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훈한 독립운동가 고(故) 장형(1889~1964) 선생 아들이다. 중국에서 백범 김구 선생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한 장형 선생은 광복 후 귀국해 단국대를 세웠다. 그가 눈을 감을 때 장 명예이사장에게 남긴 유언이 “학교를 지키라”였다고 한다.

    장 명예이사장은 아버지 뜻에 따라 1967년 35세 나이로 단국대 총장에 취임한 뒤 평생 교육사업에 헌신했다. 남북체육회담 수석대표, 베이징 아시안게임 단장,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지내며 남북교류 및 스포츠 외교에도 앞장섰다. 2019년 ‘아름다운 인연’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펴내며 작가로도 데뷔했다. 교육자, 협상전문가, 소설가 등 여러 면모를 가진 그의 삶은 ‘지식 권력’의 현재적 의미를 짚어보기에 걸맞다.



    6월 11일 단국대 죽전캠퍼스에서 만난 장 명예이사장은 아흔을 앞둔 나이를 믿기 어려울 만큼 건강한 모습이었다. 1932년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그는 식민의 아픔을 몸소 겪었다. 장 명예이사장이 미수(米壽)에 출간한 소설 ‘아름다운 인연’에는 그의 개인적 체험이 깊이 녹아 있다. 그 내용에 대해 묻는 것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 ‘아름다운 인연’ 주인공 ‘이대성’은 평안북도에 사는 독립운동가의 아들이다. 소설 도입부를 보면 중학생 이대성이 광복 후 조선 땅에 남은 일본인들의 비참한 삶을 알게 된 뒤 충격을 받는 대목이 나온다. 이후 그들에게 음식을 갖다주는 등 적극적으로 돕기 시작하는데, 독립운동가 아들이 일본인을 도와주는 이야기를 어떻게 구상했나.

    “내가 광복 직후 평안북도에 살았다. 열네 살 때 조선에 남은 일본군 가족들이 농협 창고에 임시로 수용돼 있는 걸 봤다. 먹을 것도 제대로 없는 비참한 처지였다. ‘사람을 이렇게 두면 안 된다’는 생각에 열심히 도왔다. 소설 앞부분은 그때 내가 겪은 일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단, 독립운동가의 아들과 일본군 장교 부인이 사랑에 빠지는 등의 내용은 소설적으로 만들었다.”

    - 독립운동가 아들로서 일제강점기에 온갖 고초를 겪지 않았나.

    “그렇다. 어린 시절 학교를 여러 번 옮겨 다녀야 했다. 어딜 가든 일본인 교사들이 나를 ‘나쁜 조선 사람 자식’이라며 구박했다. 아버지는 동학군 출신으로 3·1 운동 이후 보성전문학교에 다니다 손병희 선생을 도와 독립운동에 뛰어드셨다. 전북 곡창지대 등을 돌며 후원금을 모아 중국에 있는 임시정부로 보내는 일 등을 맡아 하신 걸로 안다. 어머니도 아버지를 도우셨다. 한번은 어머니가 내 윗옷 등 쪽에 안주머니를 만들고, 독립자금으로 사용할 어음을 넣어 꿰매시던 일이 기억난다. 그 옷을 입고 어머니와 함께 국경을 넘었다. 기차에서 일본인 형사를 만났지만 어린아이를 동반한 여성이라 따로 조사를 받지 않았다.”

    세상을 바꾸는 교육의 힘

    - 부모님이 독립운동하는 걸 보고 자랐는데 어떻게 일본인을 돕겠다는 생각을 했나.

    “가정교육의 영향인 것 같다. 소설 ‘아름다운 인연’ 속 어머니 캐릭터에는 실제 우리 어머니 모습이 많이 투영돼 있다. 나는 어머니로부터 원한과 복수보다 사랑과 용서가 중요하다는 걸 배웠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를 보라. 그는 28년 동안 감옥에 있다 나왔지만, 자신을 괴롭힌 이들에게 보복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된 뒤 백인을 용서했다.

    우리 역사를 보면 백제 왕인박사는 천자문과 논어를 갖고 일본에 가서 그들의 무지를 일깨우고 계몽했다. 대륙 문화를 일본에 전달해 준 게 바로 우리다. 나는 우리가 소인배처럼 행동하는 걸 원치 않는다. 이제는 형 된 입장에서 일본을 용서해야 하지 않겠나. 그런 생각으로 이 소설을 썼다.”

    - 교육의 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아버지 장형 선생도 광복 후 고국에 돌아와 단국대를 설립하는 등 교육사업에 뛰어들었다. 그 배경을 알고 있나.

    “아버지는 귀국 후 백범이 만든 한독당에서 청년 교육 담당 조직을 맡으셨다. 단국대를 세운 건 백범이 꿈꾼 통일정부 수립에 기여할 인재를 키워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군사정부가 그것을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5·16 이후 단국대 주간부가 폐교를 당했다. 아버지가 장면 박사를 도운 데 대한 보복이었다. 당시 군인들이 아버지를 체포하려 한다는 이야기가 돌아 아버지는 잠시 몸을 피해야 했다. 그러자 군인들은 나를 대신 잡아가 아버지 은신처를 대라고 고문했다. 자루를 뒤집어씌운 뒤 막 때렸다. 고문 전문가들은 상처가 안 나게 폭력을 휘두를 줄 안다는데, 당시 나를 때린 자들은 곳곳에 상처를 남겼다. 그러고 나서 어머니를 모셔와 나를 보게 했다.”

    - 어머니가 많이 놀라셨겠다.

    “물론이다. 곧 아버지를 설득해 자수하도록 했다. 이런 고초를 겪다 아버지가 그만 돌아가셨다. 그때 내게 단국대를 부탁하며 하신 말씀이 있다. ‘대학에는 공부하는 학생과 이념을 가진 학생, 두 부류가 있다. 공부하는 학생들은 교수들이 알아서 챙길 테니 너는 이념을 가진 아이들을 도와줘라’였다. 나는 총장 취임 후 이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군사정권 시절, 수많은 학생이 정부 반대 데모를 했다. 그러다 구속되면 학교에서도 제적당했다. 그때 대한민국에서 시국사건으로 감옥에 다녀온 학생을 퇴학시키지 않은 유일한 학교가 단국대다.”

    남북 체육교류와 북방 외교무대에서 활약

    - 서슬 퍼런 시대에 그러고도 괜찮았나.

    “중앙정보부, 교육부, 청와대 등에서 가만히 있지 않았다. 내게 ‘당장 그들을 퇴학시키라’고 요구했지만 ‘못 한다’고 버텼다. ‘우리 학교 학칙에 반정부 데모한 사람을 자르라는 조항이 없다. 학생을 퇴학시키고 싶으면 나를 자르라’고 했다. 나는 우리 학교 학생들이 데모하다 재판을 받게 되면 그 비용도 대줬다. 정부와 100% 등지면 학교 운영이 안 되니까, 어느 정도 정부 요구를 들어준 부분도 있다. 운동권 학생들이 그런 나를 ‘어용’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는데, 나는 그들의 울분을 이해했다.”

    장 명예이사장이 대학교육 못잖게 관심을 기울인 것은 스포츠 발전이다. 서울대 사범대 재학 시절 럭비부에 몸담았던 그는 1965년 대학배드민턴협회장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여러 체육기구에서 활동했다. 1986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남북체육회담 한국 대표를 맡아 스포츠를 고리로 한 남북교류에도 앞장섰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에는 한국 선수단장으로 참가했다. 당시 북한 선수단장과 수차례 접촉한 끝에 남북 축구 교류 기회를 만들고, 1991년 세계청소년축구대회 남북 단일팀 구성 등을 이끌어낸 것은 그가 자랑스러워하는 기억이다. 장 명예이사장은 “당시 내가 북한 단장에게 ‘우리 젊은이들이 통일된 미래를 생각할 수 있도록 평양을 방문할 기회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 그게 이뤄져 우리 선수들이 북한에 가서 축구를 하고 북한 선수들도 남쪽에 오게 됐다”고 회상했다. 이후 그는 김대중 정부 시절 대한적십자사 총재로서 남북교류를 전면에서 이끌었다.

    노태우 정부 때는 북방외교의 한몫을 담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장 명예이사장은 “노태우 대통령은 육군사관학교(육사) 럭비부 출신이다. 대학 시절 내가 다닌 서울대 사대와 육사가 럭비 교환 경기를 자주 해서 서로 잘 알았다”고 회상했다.

    - 그 인연으로 노태우 대통령이 북방외교의 일익을 맡긴 건가.

    “내가 중국어, 일본어를 다 한다. 에스페란토도 할 줄 안다. 노태우 대통령이 그걸 잘 아니까 나를 많이 써먹었다. 앞에 나타나지 않고 뒤에서 일하게 한 거다.”

    - 좀 더 구체적으로 공개할 수 있는 부분이 있나.

    “1980년대 후반 헝가리 부다페스트공대 부총장이 에스페란토 애호가였다. 그와 인연이 닿아 대학 간 교류를 하기로 했다. 그쪽에서 단국대에 유학생 5명을 보내고, 우리도 학생 3명을 그 학교로 보냈다. 헝가리와 우리나라 사이에 유학생이 오고간 건 그때가 처음이다. 서로 대화를 나누다 부다페스트공대가 원자로 장비 고장으로 어려움을 겪는 걸 알았다. 자금이 부족한 탓에 수리를 못 한다는 얘기를 듣고 우리 정부가 500만 달러를 지원하도록 주선했다. 그걸 계기로 삼성그룹이 헝가리에 사업소를 개설하는 등 우리 기업이 동구권에 진출하는 길이 열렸다. 이런 민간교류가 한국-헝가리 간 국교 수립에 밑거름이 됐다.”

    장충식 단국대 명예이사장은 앞으로 넬슨 만델라의 평화 사상을 널리 알리는 일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조영철 기자]

    장충식 단국대 명예이사장은 앞으로 넬슨 만델라의 평화 사상을 널리 알리는 일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조영철 기자]

    넬슨 만델라 정신 세상에 알리고픈 꿈

    장 명예이사장은 “노태우 대통령이 내 공을 인정해 장관직을 제안했지만 사양했다. 이후 국무총리를 맡아달라고 했지만 역시 ‘안 하겠다’고 했다”고 회상했다.

    - 공직 제안을 거듭해 거절한 이유가 있나.

    “‘남북통일이 될 때까지는 절대 정치를 하지 말라’고 하신 아버지 말씀을 지킨 것이다. 노태우 정부 외에도 여러 정부에서 장관, 국회의원 등을 해달라고 했지만,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난해 12월 단국대 이사장직에서 물러난 그는 앞으로 넬슨 만델라의 평화 사상을 널리 알리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넬슨 만델라 기념 콘서트홀’을 지어 수익금을 아프리카 청년교육 등에 사용하고 싶다는 꿈도 밝혔다. 교육에 미래가 있다는 마음으로 한평생을 달려온 천생 교육자다운 바람이었다.

    #지식권력 #장충식 #아름다운인연 #넬슨만델라 #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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