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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외정책 누르하치에 해답 있다

[백승주 칼럼]

  • 백승주 국민대 석좌교수·전 국회의원 kidabsj@gmail.com

윤석열 대외정책 누르하치에 해답 있다

  • ● 새 국제질서 대비책 마련할 시기
    ● 강대국 틈 뚫고 淸 시대 연 누르하치 리더십
    ● 완벽히 ‘스마트’했던 누르하치 안보전략
    ● 유연한 대외정책으로 ‘삼전도 굴욕’ 재현 방지
8기제도는 누르하치가 시행한 국방 혁신이다. 후금(청)이 강대한 명을 꺾을 수 있던 비결로 꼽힌다. 그림은 누르하치가 8기군을 사열하는 모습. [글항아리]

8기제도는 누르하치가 시행한 국방 혁신이다. 후금(청)이 강대한 명을 꺾을 수 있던 비결로 꼽힌다. 그림은 누르하치가 8기군을 사열하는 모습. [글항아리]

‘듣보새’는 없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새 국제질서는 없다는 뜻이다. 국제질서에 변곡점이 될 만한 큰 사변이 수시로 발생하지만 본질적으로 새로운 건 없다. 그저 한스 모겐소(Hans Joachim Morgenthau·1904~1980)가 주장한 ‘현실주의 국제정치’의 생생한 반복일 뿐이다. “약육강식 국제사회에서 모든 국가는 국력을 키우려 노력하고, 기득권을 획득하면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무력과 위협 등 수단을 사용한다”는 모겐소의 주장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본질을 설명하는 데 안성맞춤이다.

정권교체기마다 새로운 국제질서와 이에 대한 대응 방향이 논의된다. 올해도 예외가 아니다. 윤석열 시대를 맞이한 국제질서의 현재는 어떠하며 향후 5년간 어떻게 변화해 나갈 것인가. 러시아가 냉전시대 구소련의 위상을 되찾으려 모험에 나섰다. 러시아의 도전에 서방은 각자도생 생존전략을 소매 속에 감추고 소프트파워(정보과학이나 문화·예술 등이 행사하는 영향력)로 무장한 국제공조로 자국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독일이,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가해자·패배자의 멍에를 망각의 강에 던져버리고 안보대국의 길을 가려 한다. 중국은 푸틴의 도전이 실패할 경우 미국 중심의 단극적 질서가 강화되는 상황을 경계하고 있다. 한반도에서는 김정은이 핵강대국 지위를 확보 및 활용해 한반도 질서를 좌지우지하는 ‘한반도 대표선수’가 되려고 한다. 미국은 러시아의 도전과 중국의 경계를 그물망같이 촘촘한 동맹외교로 무력화하며 현재의 영향력을 좀 더 유지하려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낯설지 않다. 2000년대 이후 줄곧 진행된 상황이다. 한국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불리한 여건에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국가 비전을 달성한 청태조 누르하치(1559~1626)의 국가전략을 눈여겨볼 만하다. 조선왕조는 병조호란 때 누르하치의 아들 홍타이지에게 굴욕을 당했다. 이런 부분에선 누르하치를 거론하는 것이 달갑진 않으나 그의 전략적 안목을 ‘스마트 안보’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누르하치가 이끌었던 만주 지역의 건주여진은 여진족 중에서도 최약체 부족이었다. 국력은 명, 조선을 전쟁 상대로 고려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인구가 곧 국력이었던 시대에 건주여진의 인구는 중국의 1/50, 일본의 1/16, 조선의 1/2 수준이었다.



50배 국력 明 꺾은 누르하치의 비결

누르하치는 자칫 위기가 될 수도 있었던 임진왜란을 기회로 삼아 힘을 비축했다. 여진족을 통일하고 후금을 세워 청의 기틀을 닦았다. [위키피디아]

누르하치는 자칫 위기가 될 수도 있었던 임진왜란을 기회로 삼아 힘을 비축했다. 여진족을 통일하고 후금을 세워 청의 기틀을 닦았다. [위키피디아]

1973년 미국의 유명한 1세대 동양사학자 페어뱅크(John Fairbank), 라이샤워(Edwin Reischauer), 크레이그(Albert Craig) 3인 공저 ‘동아시아, 현대적 전환(East Asia’s Tradition and Transformation)’에 따르면 1590년대 일본의 인구는 3200만 명이고 조선의 인구는 500만 명 이하로 추정된다고 했다. 명나라 인구는 1억 명을 상회한 것으로 판단된다.

건주여진의 인구는 약 200만 명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분열돼 있었다. 그럼에도 누르하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한반도를 침략해 조성된 국제 정세 변화를 활용해 국가를 건설했고 그의 후대는 1636년 조선을 복속하고 명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러곤 여진족이 이끄는 280년간의 동아시아 시대를 열었다.

한국이 지금 처한 위상은 어떠한가. 1580년대에 누르하치가 처한 안보 환경과 유사하다. 강대국 숲속에 있다. 북핵 위협에 대응해야 하며 미국·중국·일본·러시아와 같은 초강대국을 상대로 외교를 펼쳐 통일국가를 만들어가야 한다. 또 통일국가 건설이라는 국가 비전 역시 누르하치의 여진족 통합 전략에서 배울 점을 찾을 수 있다.

누르하치는 당시 초강대국 명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의 후대는 1660년대 중반에 명을 멸망시켰다. 누르하치의 정복 전쟁과 국가 건설 과정엔 1592년 ‘임진왜란’이라는 변곡점이 있었다. 누르하치는 임진왜란이 진행되는 동안 인접한 여진족을 아우르며 힘을 키워나갔다.

7년간 이어진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 일본에선 도요토미 히데요시 세력이 약화됐다. 명은 국력이 쇠락했다. 조선은 전쟁의 폐허 속에 스스로를 지킬 의지도, 힘도 없는 상황이 됐다. 누르하치는 명과의 결전을 선언하기 전까지 야심을 철저하게 숨기며 명에 조공의 예를 다했다. 아울러 1601년 8기제도(八旗制度)를 발전시켜 군사력을 극대화했다.

1618년 4월 누르하치는 ‘조부와 아버지를 살해하고 영토를 위협한 명을 용서할 수 없다’는 내용이 골자인 격문 ‘7대한(명에 대한 7가지 큰 원한)’을 발표하고 명에 선전포고를 했다. 누르하치와 그의 후손들은 그 후 30여 년간의 전쟁을 통해 명을 물리치고 청을 건국해 여진족의 동아시아 시대를 열었다.

누르하치의 정확한 정세 판단, 국가 목표, 국방 혁신은 현시점에서 봐도 놀라운 몇 가지가 있다. 첫째, 국제 정세에 대한 예리한 판단이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 일본, 조선 모두가 전후 급격히 쇠약해질 것이라고 판단한 것. 둘째, 엄청난 국력 차이에도 명을 멸망시켜 여진족의 시대를 열리라는 담대한 비전과 이를 실현하려는 불굴의 의지다. 셋째, 때를 기다리는 내공이다. 명에 선전포고하기 전까지 조공의 예를 다하며 야심을 숨기고 힘을 기른 것을 말한다. 넷째, 전쟁에 대비해 군사 태세를 끊임없이 발전시킨 것이다. 다섯째, 전쟁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국가정체성’ 차원의 대적관(對敵觀) 확보다. 누르하치가 명에 대한 선전포고 명분으로 제시한 ‘7대한’은 정신전력의 극대화를 위한 ‘이데올로기’라고 볼 수 있다. 이론적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청나라 장병의 전의를 들끓게 했다.

尹, 누르하치로부터 ‘스마트’하게 배워야

5월 10일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하고 있다. 새 정부는 우크라이나 전쟁, 미·중 갈등, 북핵 등 산적한 안보 과제를 헤쳐나가야 한다. [뉴스1]

5월 10일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하고 있다. 새 정부는 우크라이나 전쟁, 미·중 갈등, 북핵 등 산적한 안보 과제를 헤쳐나가야 한다. [뉴스1]

스마트(SMART) 안보는 필자가 국방·안보 업무를 수행하며 수립·제시해 온 안보 독트린이다. 안보는 강하고(Strong), 현대화되고(Modernized), 적극적(Active)·개혁적(Reformative)이어야 하며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Timely)한다는 의미다. 누르하치의 안보 전략이 스마트 안보 기준에 정확히 부합한다. 누르하치의 안보 태세는 강했다. 어떠한 불리한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았다. 8기제도로 대표되는 국방 ‘개혁’은 ‘현대화’에 부합한다. 인접한 여진족을 아우르며 ‘적극적’으로 힘을 키웠다. 백미는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 임진왜란이 조성한 명나라, 조선의 국력 쇠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만든 유리한 형세를 놓치지 않고 극적으로 활용했다.

새롭게 출범한 윤석열 정부에도 ‘스마트 안보’에 맞춰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기준을 제시해 본다. 첫째, 국가 비전을 수립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강철 같은 신념을 견지해야 한다. 단기적으론 북한을 민주화해 한반도 민주화를 달성하고, 중장기적으론 통일한국을 건설하는 국가 비전을 설정해야 한다. 한국 지도자들은 통일국가 건설을 ‘시대정신’으로 삼아야 한다. 약해져 가는 통일 의지를 현실 정치에 접목해 실천해야 한다.

서울대 평화통일연구원의 정례 여론조사에 따르면 20대와 30대 젊은 층을 중심으로 통일의 필요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급격하게 확산하고 있다. 19~29세 연령대에서 통일이 ‘필요하다’는 비중은 2018년 54.1%에서 2019년 41.1%, 2020년 35.3%, 2021년 27.8%로 급격히 줄고 있다. ‘필요하지 않다’는 비중은 2018년 17.6%에서 2019년 25.3%, 2020년 35.3%, 2021년 42.9%로 상승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정부 시기 통일에 대한 청년들의 부정적 인식이 급격히 확산한 원인을 찾아 대처해야 한다.

둘째, 안보 위협에 실질적 대비를 강화해야 한다. 현존 최대 안보위협은 북핵이다. 4월 25일 김정은이 북한군 창설 90주년 열병식에서 밝힌 ‘근본이익 침탈 시 핵무기 사용’ 사항을 소홀히 판단해선 안 된다. 사실상 핵무기를 선제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북한이 먼저 도발해 한국이 반격한 것이라도 북한은 핵을 사용할 가능성이 높다. 북핵 위협에 대해 한국은 우선적으로 핵우산 등 미국의 확장 억제를 신뢰해야 하지만 독자적 군사대책을 모색하고 추진해야 한다. 한미동맹과 핵우산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핵 위협에 대한 대책을 강구해 놔야 한다.

북한은 이미 핵무기를 전술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국가다. 그 대상 국가가 바로 한국이다. 새 정부가 북한을 주적으로 규정함은 바람직하다. 누르하치가 7대한을 공표해 안보 위협 대상을 분명히 한 것과 같다. 이는 비전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정신전력이 된다.

셋째,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형성될 국제질서를 정확히 예상할 수 있도록 특단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독자적으로 우크라이나 상황 자체를 바꿀 수 있는 수단이 한국엔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형성될 국제 정세를 분석할 정부와 민간의 합동대책반(TF)을 한시적으로나마 운영할 필요가 있다. 합동대책반의 판단을 기초로 단·중기 안보정책을 설계해야 한다.

넷째, 정세 변화에 따른 전략적 유연성을 발전시켜야 한다. 주변 강대국 명, 일본, 조선 간 국제전쟁으로 존재 자체가 소멸될 수도 있던 위기 상황을 큰 기회로 인식한 누르하치의 담대함을 배워야 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유럽을 넘어 세계적 차원의 신(新)냉전 질서를 만들고 있다. 새로운 질서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이를 활용해 국가 비전을 달성해 나가는 전략적 유연성을 발휘해야 한다. 1960년대 초 미국의 월남전 참전 요청을 받은 박정희 정부가 당당한 대미외교로 브라운각서(한국 정부가 1965년부터 1973년까지 베트남전에 국군을 파병하면서 미국 측과 파병에 대한 보상 조치로 맺은 각서)’를 체결해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끌어올리고 근대화를 달성한 것 역시 위기를 기회로 활용한 대표적 성공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전략적 유연성에 근거해 대외정책 설계해야

강대국 틈에 있는 한국의 외교 정세는 과거 누르하치가 처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gettyimage]

강대국 틈에 있는 한국의 외교 정세는 과거 누르하치가 처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gettyimage]

전략적 유연성에 대해선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이는 2001년 9·11테러 이후 부시 정부가 발전시킨 해외 부대 운영 개념이다. 미군을 특정지역에 ‘붙박이’로 고정하지 않고 분쟁지역에 신속히 재배치함이 골자다. 필자가 제언하는 전략적 유연성은 더 확장된 개념이다. 고정된 상황에 집착하지 않고 상황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해 국가 이익을 극대화하는 국제 현실주의다. 병자호란 때 “멸망을 각오하고 청과 전쟁하자”는 주전론자보다는 “화친을 하고 후일을 도모하자”는 주화론자가 되는 게 더 바람직하다.

1998년부터 판매된 비아그라는 건강한 성생활을 오래 지속하길 바라는 남성에게 복음이 된 의약품이다. 비아그라는 원래 미국 제약회사 화이자가 협심증 치료 목적으로 개발한 약이다. 임상시험 중 환자들이 갑작스러운 발기 증상을 호소하자 화이자는 비아그라를 협심증 치료제 대신 발기부전 치료제로 개발했다. 시행착오가 오히려 이윤 극대화 계기가 된 것은 화이자 경영진의 전략적 유연성 덕분이다.

국가는 계획이나 전략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로부터 파생한 다양한 성격의 부차적 효과에 직면하게 된다. 마르크스와 스탈린은 한국의 공업화나 근대화, 수출 강국화에 기여하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마르크스 사상과 스탈린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당시 한국보다 선진 산업국이었던 동유럽 국가집단을 사회주의적 생산양식에 묶어뒀다. 그것이 냉전시대 한국 기업이 서구 국가에 공산품을 수출하는 데 유리한 무역 환경 조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동유럽 국가들이 오늘날처럼 자본주의적 경제 운영 방식하에 한국과 경쟁했다면 당시 한국의 수출산업은 고전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다양한 부차적 효과를 일차적 목표에 근거해 어떻게 관리·대처하는지가 전략적 유연성(flexibility)의 핵심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미·중 갈등, 북핵 등 안보 과제가 차고 넘치지만 본질적으로 ‘듣보새’는 아니다. 어느 때보다도 전략적 유연성이 필요한 시기다. 1592년 일본의 조선 침략이 건주여진 추장 누르하치에게 청을 건국할 기회를 줄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누르하치는 임진왜란이 불러온 국제질서 변화를 하늘이 준 기회로 활용했다.

윤석열 정부는 유연한 대외정책을 구사할 준비를 하고 또 해야 한다. 단선적 전략이 아닌 중층적 대안을 설계하고 전략적 유연성을 발휘해야 한다. 통일국가 건설이라는 국가 비전에 근거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정책추진을 기대한다. 그래야 ‘삼전도의 굴욕’에 영원한 이별을 고할 수 있다. 누르하치를 본받자. 그의 전략적 유연성이 필자가 꿈꾸는 스마트 외교의 정수다.

백승주
● 1961년 출생
● 부산대 정외과 졸업, 경북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
● 前 한국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장
● 前 한국정치학회 부회장, 중국 베이징대 방문교수
● 前 국방부 차관, 20대 국회의원
● 現 국민대 석좌교수
● 저서 : ‘백승주 박사의 외교이야기’ 外



신동아 2022년 6월호

백승주 국민대 석좌교수·전 국회의원 kidabsj@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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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외정책 누르하치에 해답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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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Opinion Leader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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