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호

‘검찰 슈퍼 네트워크’로 얽힌 내각 인선 우려스럽다

[신기욱의 밖에서 본 한반도] 한류-실리콘밸리에는 있고 文-尹 정부에는 없는 것

  • 신기욱 미국 스탠퍼드대 사회학과 교수·아시아 태평양 연구소장

    gwshin@stanford.edu

    입력2022-06-16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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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류를 글로벌 현상 만든 여성의 시선

    • ‘박스에서 나오는(out of box)’ 사고

    • 존 F 케네디의 Affirmative Action

    • ‘다양성=혁신’은 연구로 증명됐다

    • 서열 경쟁 사회의 좁은 슈퍼 네트워크

    윤석열 대통령(가운데)이 5월 26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첫 정식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가운데)이 5월 26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첫 정식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한류가 글로벌 현상이 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다름 아닌 여성의 시선(Female Gaze)이었습니다.”

    5월 스탠퍼드대 한국학 설립 20주년을 기념하는 회의에서 나온 신선한 주장이다. 앤젤라 킬로렌 CJ ENM 아메리카 CEO(최고경영자)는 한류가 지구촌에서 큰 성공을 거둔 데는 K-콘텐츠가 애초부터 여성 소비자의 관점에서 가려운 곳을 긁어줬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할리우드 콘텐츠는 남성의 시각에서 등장 여성을 묘사하지만, K-콘텐츠는 여성의 위치에서 로맨스와 감정을 보여준다”며 “남성 중심의 문화에서 소외된 여성들, 특히 젊은 여성들이 이 점을 환호한다”고 역설했다.

    하루 뒤 서울에선 새 정부 첫 한미 정상회담이 열렸다. 회담 후 공동 기자회견에서 한 외신기자는 윤석열 대통령에게 “내각엔 여자보다는 남자만 있다”며 그 이유를 물었다. 해외에서 ‘안티 페미’의 이미지가 형성된 윤 대통령에게 정곡을 찌른 질문이었고, 대통령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당시까지 공개된 윤 정부 초대 내각을 보면 국무총리를 포함한 19명의 국무위원 중 여성이 3명, 차관 및 차관급 인사는 41명 중 여성이 2명에 불과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이질적 노동력

    윤 대통령 측은 ‘서울대·남성· 50~60대’에 인선이 편중됐다는 지적에 대해 “해당 분야 전문성과 실력을 우선으로 한 결과”라고 설명해 왔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지역·학교·정책 노선 등에서 균형이 미흡하다”고 꼬집었고, 정의당은 “‘경육남(경상도 출신·60대·남성)’ 잔치판”이라고 비판했다.

    흥미로운 것은 양측이 정반대 위치에서 동일한 문제의식을 공유한다는 점이다. 실력주의를 내세우는 쪽에서는 이런저런 배려를 하다 보면 ‘나눠 먹기식’이 돼 제대로 성과를 내기 어렵다고 하고, 다양성 부족을 비판하는 측에서도 지역 및 여성 안배 등 균형과 배려 차원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지구촌을 휩쓴 한류의 성공 비결인 ‘여성의 시선’이 나올 수 있던 것은 획일적 실력주의도, 배려의 결과도 아니다. 기존 남성의 시각을 뛰어넘는 여성의 시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다양한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조직에선 단순히 다양한 의견만 나오는 게 아니다. ‘박스에서 나오는(out of box)’ 사고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나와는 다른 관점이나 대안을 고려하고 평가하게 됨으로써 새로운 사고와 혁신의 원동력이 마련된다. 이를 통해 조직 전체의 성과를 제고할 수 있다.

    사회적 소수자를 보호하고 배려하며 균형을 찾는 것은 당연히 중요한 민주적 가치이자 정책적 과제다. 다만 이제는 균형과 배려의 차원을 넘어 혁신과 성과의 차원에서 다양성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 정부 내각과 같이 고도의 정신적·지적 능력과 판단을 요구하는 조직일수록 그룹 구성원의 다양성 확보는 필수적이다.

    한국은 단일민족과 순혈주의를 강조하고 학연·지연·혈연으로 얽힌 가부장적 ‘슈퍼 네트워크 사회’다. 그러니 다양성 확보는 더욱 절실하다. 산업화 시대엔 표준화된 상품을 만들어낼 동질적 노동력이 필요했다. 다양성은 자칫 효율성을 높이는 데 방해 요소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창의력과 혁신이 요구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이질적 노동력이 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다양성이 배려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혁신과 성과에 필수적인 덕목이라고 인식하지 않으면 어떤 조직이나 사회도 미래를 기약하기 어렵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에 있는 구글 본사에서 직원들이 이동하고 있다. [구글닷컴]

    미국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에 있는 구글 본사에서 직원들이 이동하고 있다. [구글닷컴]

    소수자 배려에서 조직의 성과로

    미국에선 기업에서의 채용은 물론 대학교수 임용이나 입학 사정에서도 가장 중요한 고려 사항 중 하나가 다양성(diversity) 확보다. 과거엔 사회적 소수자를 배려한다는 명분이 컸다. 이제는 다양성을 확보해야만 그 조직의 성과를 최대화할 수 있다는 논거에 기반하고 있다. 다양성을 확보하는 방법 또한 다양하다. 인종이나 나이, 성별의 다양성뿐 아니라 백그라운드나 경험의 다양성 등 여러 방면을 본다. 조직의 구성원이 다양해야만 획일적인 사고나 경직된 문화에서 벗어나 혁신과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학교, 회사, 정부 등에 다양성 제고를 담당하는 부서를 두고 있으며 CEO, CFO(최고재무책임자) 등과 함께 다양성 책임자(Chief Diversity Officer)를 두는 곳도 적지 않다.

    미국이 처음부터 다양성을 존중하고 추구한 것은 아니다. 잘 알려진 대로 이민 국가인 미국은 원래 동화주의(assimilation)를 추구했다. 언어도 영어만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그러다 1960년대 민권운동이 일어나고 이후 페미니스트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사회 내의 소수자, 약자를 배려하려는 움직임이 생겼고, 이를 제도화하려는 노력도 이어졌다. 그 대표적 법안이 소수집단(계) 우대 정책, 적극적 우대 조치라고 할 수 있는 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이다.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처음 도입한 어퍼머티브 액션은 인종, 성별, 종교, 장애 등의 이유로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회적 소수자에게 우대 조치를 제공함으로써 차별과 불이익을 시정하려는 정책이었다. 초기엔 인종 차별 완화가 주된 목적이었으나 범위가 성, 장애 등으로 확장됐다. 한국에서 시행되는 가산점, 할당제와 유사하다. 주로 고용과 대학 입시에서 시행됐는데 쿼터제가 적용되기도 했다.

    어퍼머티브 액션에 대한 논란은 그치지 않았다. 역차별이라는 주장에서부터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새로운 차별을 유발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실제로 일부 백인 남성들은 역차별이라고, 아시아계는 이중 잣대라고 비판하며 어퍼머티브 액션의 폐지를 주장했다. 대학 지원 시 열심히 노력해 높은 점수를 얻었는데 대학이 어퍼머티브 액션에 따라 인종 쿼터를 운영함으로써 피부색 때문에 입학 기회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들은 1978년 연방대법원이 쿼터제를 금지했지만 미국 명문대들은 일정 수준의 흑인, 라틴계 비율을 유지하며 사실상의 암묵적 쿼터제를 시행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번 가을에 미 대법원은 아시안계 학생들이 입학 사정에서 차별을 받고 있다며 하버드대와 노스캐롤라이나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을 심의할 예정이기도 하다.

    필자가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는 미국에서도 가장 진보적인 주에 속한다. 그런데 1996년에 미국의 주 중에서 처음으로 주민투표로 어퍼머티브 액션을 금지했다. 당시 나는 UCLA에 재직 중이던 터라 이 법안을 두고 주민과 시민단체는 물론 교수와 학생들 사이에서도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후에도 어퍼머티브 액션을 둘러싼 논쟁은 멈추지 않았다. 2020년에는 이를 재도입하자는 안건이 주민투표에 부쳐졌으나 큰 표 차로 부결된 바 있다. 이처럼 미국에서도 다양성을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배려 차원으로 보는 데 대한 거부감이 적지 않다. 반면 인적 구성의 다양성이 조직의 혁신과 성과를 제고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인식은 더욱 확산하고 있다.

    다양성=혁신

    나는 강의 계획서를 만들 때 강의 주제, 과제물, 학점 이외에도 두 가지 점을 명시한다. 우선 스탠퍼드의 오랜 전통인 아너 코드(Honor Code)를 준수할 것을 다짐한다. 스탠퍼드에선 아너 코드에 따라 시험을 볼 때 감독관이 없다. 또 다른 하나는 “다양성에 대한 존중”이다. 나는 교수로서 “학생들이 갖고 있는 다양한 백그라운드, 관점, 상황을 존중할 것”이며, 이를 통해 “학생들이 수업에 가져오는 다양성은 자원이자 장점이고 베너핏(benefit)”임을 천명한다. 다양성을 배려 차원에서 접근하는 게 아니라 학생들의 배움에 필수적인 도움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 수업에서 “다양성을 존중하는 자료의 사용과 활동을 장려할 것이며” 이는 “젠더, 성, 장애, 나이, 사회경제적 지위, 인종, 종교, 정치적 지향, 문화 등을 포함한다”고 적는다. 다양성에 대한 이러한 언급은 계획서에 꼭 넣어야 하는 의무가 아닌 권고 사항이지만 점차 확산하고 있다.

    구글이나 마이크로소프트 등 미국 기업에서도 ‘다양성 책임자(CDO)’를 두고 인종, 사회계층, 성 정체성 등에서 다양한 구성원을 모으기 위해 애쓴다. 다양성은 성, 인종 등 타고난(inherent) 면과 해외 유학, 경험 등 습득된(acquired) 면에 의해 확대될 수 있다. 이들 기업은 다양한 구성원이 모여야 생산성이 높아지고 변화하는 환경에 더 잘 대응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다양성을 확보하는 데 사활을 건다. 구글의 CDO는 그의 미션을 “우리 주위에 있는 세상의 상황을 잘 반영해 변화와 열정적인 사고의 리더를 만드는 데 있다”고 선언했다. 혁신과 창조는 다양한 배경과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새로운 아이디어와 철학을 나눌 때 나올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다.

    ‘다양성=혁신’이라는 등식은 단순한 믿음이 아니다. 미국 학계에선 이미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경험적 연구가 축적돼 있다. 실례로 미시간대 경영학 교수인 스콧 페이지(Scott Page)는 ‘다름(The Difference)’이라는 책에서 왜 다양성이 혁신을 가져오는지에 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페이지의 연구에 의하면 그룹 구성원의 다양성은 인지 능력의 다양성을 가져와 문제 해결에 중요한 도구가 되며 특히 어려운 과제를 해결할 때에는 개개인의 능력보다 더욱 큰 역할을 한다고 한다.

    컬럼비아대의 경영학 교수였던 캐서린 필립스(Katherine Phillips)도 ‘다양성이 어떻게 우리를 더 똑똑하게 하는가’라는 논문에서 다양한 멤버로 구성된 팀에서는 자신이 생각지 못했던 견해나 대안을 고려하고 평가하게 됨으로써 과제를 수행하는 능력이 향상된다고 역설했다. 반면 비슷한 환경에서 비슷한 교육을 받고 비슷한 생각을 가진 비슷한 사람들만 모여 있는 조직에서는 혁신적이고 색다른 아이디어를 기대하기 어렵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스탠퍼드대의 D스쿨에서는 이를 ‘극단적 협력(Radical Collaboration)’이라고 한다. 수업이나 과제를 수행할 때에도 서로 다른 관점과 경험을 가진 이들을 섞어놓는 것이다. 가령 컴퓨터공학 전공자와 인문학 전공자를 섞어 협업하게 하는 방식이다. 스탠퍼드에 있는 인간중심 인공지능 연구소(Stanford Institute of Human Centered Artificial Intelligence)도 이러한 사고방식을 반영하듯 컴퓨터공학과 교수와 철학과 교수가 공동으로 이끌고 있다.

    미국 인사관리협회(Society for Human Resource Management) 조사에 따르면 91%의 기업이 다양성 관리가 조직 경쟁력 향상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응답했다. 또한 세계적 성별 다양성 정책 연구 기관인 캐털리스트(Catalyst)의 조사에서도 최고 경영진에 여성 참여 비중이 높을수록 기업 경영이 투명해지고 창의적인 전략 실행 등을 통해 수익성이 높아진다는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1700개의 기업을 조사한 BCG(보스턴컨설팅그룹)의 연구에서는 평균 이상의 다양성을 가진 기업이 평균 이하의 다양성을 가진 기업에 비해 혁신을 통해 얻는 수익이 19% 높았다.

    다양성과 혁신의 상관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은 다름 아닌 글로벌 기술혁신을 이끌고 있는 실리콘밸리다.

    “아이폰은 기계가 아니다, 그것은 문화다.”

    2021년 11월 28일(현지 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소파이 스타디움 무대에서 방탄소년단(BTS)이 약 3시간 동안 공연했다. [빅히트 뮤직]

    2021년 11월 28일(현지 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소파이 스타디움 무대에서 방탄소년단(BTS)이 약 3시간 동안 공연했다. [빅히트 뮤직]

    “아이폰은 기계가 아니다, 그것은 문화다.” 스티브 잡스가 한 말이다. 단지 애플에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다. 실리콘밸리의 가치와 정신을 압축적으로 담은 명언이다. 2015년 4월, 일본의 아베 신조 당시 총리가 스탠퍼드대를 방문해 애플, 구글, 야후, 트위터, 마이크로소프트 등 대표적인 미국 IT(정보기술) 기업의 최고 경영 책임자와 기술혁신을 주제로 토론회를 연 적이 있다. 나도 그 자리에 참석했다. 그런데 그 토론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토론에서 아베 총리는 혁신의 기술적 측면에 초점을 맞춘 반면 실리콘밸리 리더들은 한결같이 혁신의 문화적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 혁신은 기술이 아닌 문화에서 나온다는 것이 이들 토론의 공통된 전제였다. 그리고 그 핵심은 다름 아닌 문화적 다양성이었다.

    내가 스탠퍼드대에 부임해 실리콘밸리 지역에 산 지도 벌써 20년이 지났다. 단일민족임을 자랑스러워하며 한국에서 자랐고 교육을 받은 내가 이곳에 살면서 가장 많이 피부로 느낀 점은 문화적 다양성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사고방식이다. 실리콘밸리는 미국의 백인 남성들끼리 만든 것이 아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인재들이 어울려 경쟁과 협력을 하면서 함께 만들었다. 인텔, 야후, 테슬라, 구글, 트위터 등 실리콘밸리에서 창업한 회사의 절반이 이민자에 의해 세워졌다. 기업뿐 아니라 학교와 상점 등 거리 곳곳에서 문화적 다양성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다양한 배경과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모일 때 새로운 아이디어와 또 다른 관점이 나오고, 이것이 기술혁신으로 이어진다는 논리는 실제로 실리콘밸리 기업문화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 “실리콘밸리의 90%는 문화이고, 10%는 기술이다”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스티브 잡스가 한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미국은 이민 국가라 그렇다고 항변할지 모른다. 하지만 한국처럼 강한 민족주의를 가진 이스라엘의 경우도 다양한 인재 풀을 활용해 창조경제의 모델로 우뚝 섰다. 이스라엘은 극심한 경제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기술 중심의 창업 지원 환경을 구축해 현재 전 세계가 주목하는 스타트업 네이션(Startup Nation)이 됐다. 이 과정에서 1990년대 초 소련 붕괴와 함께 유입된 85만 명의 이주민이 큰 역할을 했다. 이들 가운데 40% 이상은 연구 경력이 풍부한 교수·과학자·엔지니어였고, 이스라엘은 이들을 배척하지 않고 중요한 인적 자원으로 적극 활용했다. 수도 텔아비브에서는 히브리어뿐 아니라 여러 언어가 자유롭게 통용되고 있다. ‘스타트업 네이션’은 우연히 탄생한 게 아니다.

    산업화 시대엔 표준화된 상품을 만들어낼 노동력이 매우 중요했다. 따라서 다양성은 효율성을 높이는 데 방해가 될 수 있었다. 민족주의 연구 권위자 어니스트 겔러(Ernest Geller)는 일찍이 근대 민족주의의 기원을 동질적인(homogenous)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산업화의 수요에서 찾았다. 즉 규격화된 상품을 대량 생산하기 위해선 동질적인 노동력이 필요했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민족이라는 공동체하에서 동질적인 정체성을 갖는 국민/시민을 육성하는 것이었다. 한국이나 일본이 고속 성장으로 산업화를 이룩한 것도 동질적이고 표준화된 노동력을 단시간에 만들어낸 능력에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강한 단일민족 의식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동질적인 노동력으로는 리더가 될 수 없다.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가 아닌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되려면 이질적인 노동력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한국처럼 혈연, 지연, 학연에 얽매여 모두가 동일한 교육을 받고 동일한 스펙을 쌓고 동일한 목표를 향해 일사불란하게 뛰는 사회와는 정반대다. 남들과 다르게 ‘튀는’ 순간 타깃이 되는 기업과 사회문화 속에서 창조와 혁신이 자유롭게 흘러나올 리 만무하고 ‘적당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한국 사회는 새로운 활력이 필요한 때다. 다양성 확보를 통한 혁신과 변화가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다.

    순혈주의와 동화주의를 넘어서

    2019년 10월 17일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에서 열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대검찰청 국정감사에서 한동훈 당시 반부패 강력부장이 질의에 답하고 있다. 앞줄 왼쪽은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 [동아DB]

    2019년 10월 17일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에서 열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대검찰청 국정감사에서 한동훈 당시 반부패 강력부장이 질의에 답하고 있다. 앞줄 왼쪽은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 [동아DB]

    한국 사회에서 다양성의 부족과 그 폐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교수 사회의 순혈주의와 다문화라는 구호 아래 이뤄지는 동화주의다.

    2014년 한 자료에 따르면 서울대는 84.1%, 연세대 73.9%, 고려대 58.6%가 자교 출신 교수다. 최근 자료인 2012~2019년간 서울대 전임 채용을 보면 자교 출신 비율의 경우 전체 93개 학과 중 28개 학과가 100%, 40개 학과가 80% 이상이었다. 한국 대학의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국인들은 내가 당연히 스탠퍼드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닌 걸 알면 오히려 더 놀란다. 나뿐 아니라 스탠퍼드 교수 중 이 대학 출신은 그리 많지 않다. 나도 교수직에 지원할 때는 관행에 따라 내가 졸업한 곳은 제외하고 다른 대학에만 지원했다.

    이처럼 미국은 한국과 정반대에 가깝다. 미국에선 자교 출신 교수 채용을 ‘학문적 동종교배(academic inbreeding)’라 칭하며 극도로 제한하고 있다. 특별한 사유가 있지 않은 한 자교 출신 교수는 임용되기 힘들며 더욱 엄밀한 심사와 토론을 거친다. 대부분 대학에서 10%에서 20% 정도의 비율을 넘지 않는다. 자교 출신 교수가 본교로 다시 돌아오는 사례도 적을뿐더러 오게 되더라도 다른 곳에서 오랫동안 학문적 업적을 쌓고 학계의 인정을 받은 후에야 온다. 한국과 같은 ‘순혈주의’나 ‘동종교배’는 생각할 수 없다.

    미국에선 동종교배는 득보다는 실이 많다는 것이 정설이다. 자교 출신 교수들의 연구 논문 실적이 타교 출신들에 비해 15% 떨어지고 외부 학계와의 소통 면에서는 40%나 뒤처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한국에서도 순혈주의에 대한 비판적 논의가 이루어지곤 있지만 실제로 얼마나 개선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한국은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자교로 돌아온 경우가 많으므로 상황이 좀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선후배들로 가득 찬 학과에서 얼마나 창의적인 학문 활동이 이루어질지 궁금하다. “내가 참석하면 교수 회의, 안 하면 동문회가 된다”는 한 지인의 말이 실감 난다.

    또 다른 사례는 다문화주의라는 이름 아래 펼쳐지는 동화주의다. 2000년대 들어 저출산·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이주 결혼자와 노동자의 숫자가 증가했다. 이에 노무현 정부는 다문화주의를 주요 정책으로 채택했다. 오랫동안 단일민족 의식을 강조했던 한국이 다문화주의를 받아들인 것은 매우 획기적인 일이다. 하지만 한국의 다문화주의는 안타깝게도 본래 취지와는 달리 대부분의 프로그램이나 정책이 외국인을 한국 사회와 문화로 동화하는 데 편중돼 있다.

    반면 타문화에 대한 자국민의 이해를 돕는 일에는 소홀하다. 가령 베트남 신부에게 한국어와 한국 역사를 가르치고 김치 만드는 법은 알려주지만 자국민, 하다못해 그 신부의 한국인 가족들로 하여금 베트남의 역사나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도록 선도하고 돕는 노력은 부족하다.

    또한 한국의 다문화정책은 결혼이주민, 비숙련 외국인근로자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따라서 사회적 약자 보호 정책의 측면에서만 접근하는 성향이 매우 강하다. 다문화정책의 ‘보호’와 ‘특혜’를 받는 이주민은 ‘약자’가 돼버리고 내국인과의 관계에서 보이지 않는 수직 상하관계에 놓이게 된다. 이로 인해 때로는 ‘다문화’라는 용어 자체가 ‘불우이웃’의 의미로 인식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암묵적 갑과 을의 우열 관계를 조성해 대상자들로부터 호응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내국인들에게는 반감과 혐오감을 일으켜 이들과 다문화가정 사이에 사회갈등을 유발하기도 한다.

    소프트웨어정책연구소(SPRi)는 지난해 보고서를 통해 올해에만 4차 산업혁명의 4대 축인 AI(인공지능), 빅데이터, 클라우드, 가상·증강현실 분야에서 한국은 개발자 3만1833명이 부족할 것으로 전망했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대기업을 중심으로 해외 인재 유치에 나서는 이유다. 하지만 여전히 배타적인 사회문화적 환경으로 인해 한국은 외국인 기술 전문 인력의 선호도 면에서 한참 뒤처진다. 프랑스의 대표적 경영대학원 인시아드(INSEAD)가 매년 발표하는 ‘글로벌 탤런트 경쟁력 지수’에서 한국은 지난해 134개 국 중 27위에 머물렀다. 특히 ‘이민자 수용성(Tolerance of immigrants)’ 면에선 65위에 그쳐 한국의 배타적 모습을 그대로 보여줬다. 글로벌 경제 10위권인 한국으로선 매우 실망스러운 수치다.

    이런 사회문화적 환경에서 한국이 필요로 하는 글로벌 인재를 유치하겠다는 건 환상에 불과하다. 최근 법무부는 이민청(가칭) 신설 추진을 공식화했는데, 해외 인재들을 통해 가시화할 인종적·문화적 다양성과 그것이 혁신에 미칠 영향 등에 대해 인식 제고부터 선행돼야 한다.

    슈퍼 네트워크의 담장을 헐자

    필자가 저서 ‘슈퍼피셜 코리아’에서 지적한 대로 한국은 슈퍼 네트워크 사회다.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3.6사람만 거치면 아는 사이라고 한다. 3, 4명의 인맥만 통하면 모두가 연결되는 슈퍼 네트워크 사회라고 칭할 만하다. 이러니 지연, 학연, 혈연 등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 건 당연하다. 연결고리가 많고 두터울수록 그들만의 네트워크는 좁아지고 특별해지며 장벽은 거대해진다. 그룹 내 유대감은 더욱 강해지지만 외부 집단을 향해서는 점점 더 배타적인 성향을 띠게 되고 이에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워진다. 서열 경쟁 사회의 좁은 슈퍼 네트워크 속에서 폐쇄적 집단주의가 생기는 것이다.

    한국이 다음 단계로 도약하기 위해선 지연, 학연, 혈연으로 얽힌 폐쇄적 슈퍼 네트워크의 담장을 허물어야 한다. 그 자리에 다양한 배경, 관점, 경험을 가진 인재가 함께 어울려 사는 터를 세우고 새 집을 지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성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갖춰야 한다. 다양성을 배려와 균형의 문제가 아닌 혁신과 성과의 문제로 보는 것이다.

    대선 기간 뜨거운 논쟁을 일으켰던 여성가족부 이슈만 해도 주요 미션을 새롭게 업그레이드해야 할 때가 됐다. 여성에 대한 보호와 배려의 차원을 넘어 성별의 다양성을 제고함으로써 한국 사회에 어떤 혁신과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이를 정책적으로 뒷받침하는 데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운동권으로 얽힌 슈퍼 네트워크에 크게 의존했던 문재인 정부는 혁신에 실패했다. 윤석열 정부의 내각 인선을 보며 법조계 특히 ‘검찰 슈퍼 네크워크’로 얽혀 문재인 정부의 전철을 밟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생긴다. 법무, 통일, 국토교통, 행정안전부 장관이 대통령과 같은 대학 같은 학과 출신의 선·후배 법조인이다. 국무총리, 대통령비서실장,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등이 소위 ‘모피아’(옛 재무부의 영문 약칭 MOF와 마피아의 합성어) 출신이다.

    대통령실의 항변대로 개개인의 능력이 출중하고 탄탄한 팀워크로 일의 효율성을 높여 단기간에 성과를 낸다고 가정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급변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한국 사회가 필요로 하는 혁신에 성공할 수 있을까? ‘여성의 시선’이 한류의 성공을 가져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명심해야 한다.


    신기욱
    ●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미국 워싱턴대 사회학 석·박사
    ● 미국 아이오와대, UCLA 교수
    ● 現 미국 스탠퍼드대 사회학과 교수 및 아시아·태평양연구소장
    ● 저서 : ‘슈퍼피셜 코리아: 화려한 한국의 빈곤한 풍경’ ‘한국 민족주의의 계보와 정치’ ‘하나의 동맹, 두 개의 렌즈’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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