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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는 어쩌다 ‘갈라파고스 세대’ 됐나

[봉달호 편의점 칼럼] 1991년 5월 분신 정국과 지독한 ‘상실의 시대’

  • 봉달호 편의점주

40대는 어쩌다 ‘갈라파고스 세대’ 됐나

  • ● 민주당 더 지지하는 유일한 세대
    ● 焚身의 기저, 좌절과 상실
    ● 지배세력에 대한 총체적 불신
    ● 승리한 적도, 主流였던 적도 없어
    ● 그들은 종속된 세대가 아니다
1991년 4월 26일 명지대 학생 강경대가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한 ‘강경대 폭행치사 사건’은 학생 시위에 불을 붙였다. 사진은 당시 학생과 전경이 격렬히 대립하고 있는 모습. [동아 DB]

1991년 4월 26일 명지대 학생 강경대가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한 ‘강경대 폭행치사 사건’은 학생 시위에 불을 붙였다. 사진은 당시 학생과 전경이 격렬히 대립하고 있는 모습. [동아 DB]

고(故) 김지하 시인이 1991년 ‘분신 정국’ 당시 쓴 칼럼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학생운동권의 반감을 샀다. 사진은 2014년 5월 22일 ‘동아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는 모습. [허문명 기자]

고(故) 김지하 시인이 1991년 ‘분신 정국’ 당시 쓴 칼럼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학생운동권의 반감을 샀다. 사진은 2014년 5월 22일 ‘동아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는 모습. [허문명 기자]

풍경 #1 죽음의 굿판

1980~1990년대 학생운동권에서 사랑받은 민중가요 가운데 하나인 ‘타는 목마름으로’. 노랫말의 원작자인 시인 김지하가 5월 8일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부고에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엔 애도의 글귀가 잇따랐지만 “그의 변절은 용서할 수 없다”는 독한 글도 적지 않았다. 이런 글을 쓴 사람의 상당수는 40~50대. 학번으로 따지면 88~97학번쯤이다. 박정희 정권 때 민주화운동으로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운동권의 맏형’을 까마득한 후배들이 변절자라고 폄훼하는 까닭은 그가 훗날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지지했던 이유도 있지만 대개 1991년의 ‘칼럼’ 때문일 것이다. 1991년 5월 분신 정국 때 “죽음의 굿판을 집어치워라” 일갈한 그 칼럼이다.

풍경 #2 40대 진보대학생

서울 소재 한 중견기업 부장인 A(46)씨는 대통령선거 이후로 뉴스를 보지 않는다. “어떻게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될 수 있느냐”면서 윤석열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고 “그를 지지한 민심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뉴스만 나오면 기분이 나쁘다고 채널을 돌려버린다. 인터넷 뉴스도 보지 않는다. 본인이 보고 싶은 매체만 골라 본다. 그렇다고 열렬한 정치참여자도 아니다. 그저 평범한 직장인일 따름이다. 대학 시절 운동권 언저리에 있긴 했지만 핵심도 아니었다. 술자리에서 “요즘 회사 신입들은 우리보다 의식이 꽉 막혔고 자기밖에 모른다”며 혀를 끌끌 찬다. 요즘 20대는 A부장 같은 사람을 ‘40대 진보대학생’이라고 부른다. 21세기형 ‘신(新) 꼰대’의 탄생이다.

풍경 #3 이대녀, 사대남

3월 대통령선거와 5월 지방선거 결과를 압축하자면 역시 세대와 성별일 것이다. 20~30대는 남성과 여성이 뚜렷이 대비되는 투표 성향을 보였다. 40~50대는 전체 연령층을 통틀어 유일하게 민주당 지지가 더 높게 나타난 세대가 됐다. 특히 40대 남성의 민주당 지지는 가히 독보적이라고 할 정도다. 방송 3사가 발표한 지방선거 출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40대 남성의 63.2%가 민주당을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20대 남성과 정반대 성향이자 20대 여성과 더불어 민주당 지지율이 가장 높게 나타나는 세대다. 왜 그럴까.

오늘은 이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1991년 5월 ‘분신 정국’에 대한 회상, 그리고 대한민국의 40대는 어찌해 다른 세대와 동떨어진 ‘갈라파고스’ 세대가 됐는가 하는 의문 말이다. 이른바 86세대라고 불리는 50대들이 민주당을 지지하는 것은 일종의 동조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40대가 그러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이 많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1990년대는 ‘상실의 시대’로 정의된다. 그 시절 학생운동권이 대학과 사회에 미치는 역할이 그리 크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청년기 성장의 ‘분위기’를 좌우했다는 측면에서 부지불식간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게 사실이다. 굳이 학생운동이 아니더라도 1990년대는 혼돈의 시대였다. 과도기적 시대이자 갈피를 잡지 못하는 시대였으며, 무언가가 무너진 바탕 위에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는 조바심의 시대이자, 좌파의 입장에서는 ‘뭘 해도 되는 것이 없는’ 좌절의 시대였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이 살아온 과정을 합리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내가 살아온 길이 전혀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고 위안을 삼으려고 말이다. 오늘을 살아갈 용기를 찾는다는 측면에서 그러한 태도가 전적으로 잘못된 것만은 아니지만 때로 반성적 성찰을 가로막는 원인이 되기도 하고, 잘못을 자꾸 외부 탓으로 돌리는 세대적 습관으로 고착되기도 한다. 대한민국의 40대는 어느 쪽에 서 있을까.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몸을 태우며 번진 ‘죽음의 굿판’

청바지에 청재킷을 입고 흰색 헬멧을 쓰고 다녀 이른바 ‘백골단’으로 불린 사복조 전경들은 ‘강경대 폭행치사 사건’을 일으켰다. 이들은 폭력적인 시위 진압으로 물의를 빚었다. [동아 DB]

청바지에 청재킷을 입고 흰색 헬멧을 쓰고 다녀 이른바 ‘백골단’으로 불린 사복조 전경들은 ‘강경대 폭행치사 사건’을 일으켰다. 이들은 폭력적인 시위 진압으로 물의를 빚었다. [동아 DB]

1991년 5월 분신 정국은 4월 26일 명지대생 강경대가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지는 사건으로 시작됐다. 당시 경찰에는 ‘백골단’이라 불리는 시위대 체포 전담 부대가 있었는데, 청바지에 청재킷을 입고 흰색 헬멧을 쓰고 다녀 그렇게 불렸다. 방패도 작은 것을 들어 일반적인 전의경 부대와 외양부터 달랐다. 복장이 가볍다 보니 시위 현장에서도 폭력성이 도드라졌는데, 당시 명지대에 갓 입학한 1학년 강경대가 시위대가 후퇴하는 과정에 학교 담장을 넘다 백골단에 붙잡혀 구타당하고 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진 것이다. 당시 명지대 학생들의 시위 목적은 사실 정치적 이슈가 아닌 ‘등록금 인하’였다. 1990년대 들어 학생운동 이슈를 좀 더 생활 속으로 확대하자는 측면에서 그랬고, 신입생을 운동권으로 끌어들이는 차원에서 학기 초엔 등록금 이슈 같은 것을 들고 나가는 것이 하나의 관행이기도 했다. 특히 명지대는 재단의 비민주적 운영이 늘 문제가 되던 학교였다.

강경대가 사망하자 전국 대학에 추모 집회가 열리기는 했으나 그때만 해도 여느 5월의 초입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4월 29일 전남대에서 박승희가 분신하면서 1991년 5월은 특별히 기억에 남는 5월이 됐다. 이른바 분신 정국이 발화한 것. 전남대 식품영양학과 2학년으로 교지 편집위원이기도 했던 박승희는 강경대 추모 집회 도중 학교 광장에서 온몸에 시너를 뿌리고 분신했다. 집회가 진행되던 중이라 분신 장면을 모두 목격한 학생들의 정신적인 충격이 컸다. 사건 당시 필자는 집회 현장에 없었는데, 그날 저녁 선배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깡소주를 들이켜며 한없이 울던 모습을 기억한다.

문제는 박승희의 분신 하나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5월 1일 안동대 학생 김영균, 3일 경원대(현 가천대) 학생 천세용이 박승희와 똑같은 방법으로 분신자살을 택했다. 앞에서 언급한 김지하의 칼럼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이렇게 세 명이 잇따라 분신을 감행한 직후인 5월 5일 발표됐다. 사실 김지하가 붙인 칼럼 제목은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였는데, 신문사에서 고른 부제(副題)가 더욱 유명해졌다. 해당 칼럼은 내용과는 상관없이 ‘운동권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생명을 경원시한다’는 여론을 확산하는 데 일조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나중에 김지하는 “학생들이 상당히 흥분해 있었다. 흥분한 그들에게 권유의 형태가 아닌, 날카로운 글을 쓴 것이 잘한 것 같지는 않다”고 스스로 평가하는 한편 “매체 선택을 잘한 것 같지 않다”고 후회하는 내용의 인터뷰를 남겼다.

이제 와 돌아보면 어쨌든 내용은 극단적 투쟁 방식을 지양하라는, 선배가 후배들에게 으레 건넬 수 있는 따끔한 조언이지만 김지하 특유의 직설적 화법과 당시 정세 등이 맞물려 그 시절 운동권 학생들에게 적잖은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어떻게 김지하 선생이 그럴 수 있느냐”면서 말이다. 김지하의 시에 곡을 붙인 ‘타는 목마름으로’를 자체 금지곡으로 정해 한동안 부르지 않은 친구가 있었을 정도다.

저항하거나, 투항하거나, 각자 길을 가거나

문제는 점점 더 커졌다. 분신과 사망이 끊이지 않은 것이다. 5월 8일에는 재야 운동단체인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의 김기설 사회부장이 서강대 본관 옥상에서 분신자살했다(분신에 투신까지 했다). 그 이틀 전인 5월 6일엔 박창수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이 병원에서 숨진 채 발견되는 의문의 사건이 있었다. 5월 10일 전남대에서 노동자 윤용하가 분신자살했고, 5월 18일에는 노동자 이정순이 연세대 정문 앞 철교 위에서 분신 및 투신했으며, 같은 날 전남 보성고등학교 3학년 김철수가 5·18 기념식이 진행되는 도중 학교 운동장에서 분신했다. 5월 22일에는 전남대병원 영안실 옥상에서 노동자 정상순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그렇게 1991년 5월에만 분신자살한 사람이 8명에 이른다. 경찰의 시위 진압 과정에 사망한 사람이 2명, 의문사한 사람이 1명. 하루건너 한 명, 죽음의 소식이 들렸다.

그럼 여기서 제기할 만한 의문. 1991년의 잇따른 자살은 무엇 때문일까. 김지하 시인의 표현대로 ‘네크로필리아’, 즉 시체선호(選好)증인 것일까. 역시 김지하의 말처럼 싹쓸이 충동, 자살특공대, 테러리즘과 파시즘의 시작일까. 자살이란 전염되는 것일까. 지하조직에서 그 무슨 명령이나 지시를 내려 분신자살을 감행했다는 주장은 상상만으로도 어처구니없는 발상이다. 당시 분신 정국의 한복판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그 시절을 돌아보면 일종의 상실감과 좌절감이 시대의 기저에 있지 않았나 싶다. 뜻대로 되는 것이 없으니 이렇게라도 해보겠다는 최후의 수단으로 자살을 통한 선동을 택한 것이다.

1990년대를 관통한 운동권 용어 가운데 하나가 ‘전민항쟁(全民抗爭)’이다. 전 국민이 들고일어나 항쟁을 일으킨다는 뜻인데, 말하자면 ‘Again 1987’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영광을 되살려보자는 것. 이미 선거를 통해 정권을 심판할 수 있게 됐다. 정당을 만들 수 있는 자유도 한껏 늘어났다. 돌아보면 굳이 대규모 항쟁을 통해 정권을 뒤집어엎겠다는 발상이 우습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지난날의 영광에 대한 미련이자 추앙이 아니었을까 싶다. 혹은 열등감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선배들이 이루었으니 우리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유혹 말이다. 하지만 전민이 들고일어나는 일은 결코 이뤄지지 않았다. ‘도대체 민중은 왜 우리를 따르지 않는 걸까’ 한탄하며 회의감에 사로잡혀 갈수록 과격해지다 스스로 좌절해 버린 것이 1990년대 학생운동이다.

1990년 1월 22일 민주정의당 총재인 노태우 당시 대통령(가운데)이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왼쪽),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와 함께 청와대에서 ‘3당 합당’을 공식 발표하고 있다. 3당 합당은 오늘날 국민의힘으로 이어지는 보수정당의 뿌리가 됐으며 현 40대에겐 ‘불신의 트라우마’로 남았다. [동아 DB]

1990년 1월 22일 민주정의당 총재인 노태우 당시 대통령(가운데)이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왼쪽),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와 함께 청와대에서 ‘3당 합당’을 공식 발표하고 있다. 3당 합당은 오늘날 국민의힘으로 이어지는 보수정당의 뿌리가 됐으며 현 40대에겐 ‘불신의 트라우마’로 남았다. [동아 DB]

1990년 1월 3당 합당이 있었다. 노태우의 민정당과 김영삼의 민주당, 김종필의 공화당이 하나로 합쳐 거대 여당이 탄생한 것이다. 곧 내각제 개헌이 이루어지리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어떻게 이룬 직선제 개헌인데, 제도적 민주화는 얼추 이뤘다고 생각했는데, 보수정당이 내각제를 통해 영구 집권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한국 40~50대들이 내각제에 대해 갖는 지독한 불신은 이때의 트라우마 탓이 크다. 그리고 이른바 ‘변절’에 대한 거부감도 이때 김영삼에게 가졌던 배신감의 탓이 적지 않을 것이다. 민정당과 공화당이 합치는 일은 그러려니 하는데, 거기에 민주당이 끼어든 것이 충격이었다. 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당황스럽기도 하고 분통이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1990년대엔 그런 일이 많았다. 시대가 황망했다.

1990년 10월엔 독일이 통일됐다. 독일은 우리와 똑같은 분단국가라고 여겼다. 그래서 동독=북한, 서독=남한이라고 생각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동독이 서독에 흡수돼 버린 것이다. 동독 시민은 공산당을 물리치고 선거를 통해 자발적으로 서독에 흡수되는 길을 택했다. 당시 운동권엔 상당한 정서적 충격이었다. 게다가 1980년대 후반부터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종주국 소비에트연방(소련)마저 민주화 시위와 민족 분쟁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급기야 몇 개 공화국이 이탈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1991년 12월 소련은 공식 해체를 선언했다. ‘소련 붕괴’라는 네 글자가 큼지막하게 인쇄된 호외(號外)가 거리에 나뒹굴던 겨울은 유난히 쓸쓸했다.

불신이 과연 그들만의 잘못이랴

게다가 1989년 6월 중국 천안문 광장에서는 인민해방군이 탱크로 시위 군중을 밀어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전두환과 똑같은 짓을 ‘인민의 군대’가 저지른 것이다. 거기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으로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과 잇따라 수교하면서 헐벗은 사회주의의 실상을 더욱 또렷이 알게 됐다. ‘우파의 질곡을 넘어 좌파의 시대로 접어들 수 있겠다’ 생각하던 시절에 저쪽의 ‘오리지널 좌파’들이 우수수 붕괴하고, 이쪽의 우파들은 결집하며 세력을 확장하는 모양새를 갖추면서 좌파의 좌절감은 한층 극심해졌다. 그것이 1990년대를 관통한 정서다. 저항하거나, 투항하거나, 각자의 길을 가거나. 셋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여기에 또 문제적 사건이 더해진다. 1991년의 분신 정국을 회고하자면 역시 빠뜨릴 수 없는 사건은 이른바 ‘유서 대필 사건’. 5월 8일 사망한 김기설은 사실 서강대와 아무런 인연이 없는 인물이었는데, 서강대를 분신자살지로 선택하면서 당시 서강대 총장이던 박홍이 이 문제에 개입하게 된다. 그가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는 발언을 하면서 잇따른 분신자살이 그저 우연인 것 같지 않다는 여론이 확산됐다. 공안 당국은 즉각 ‘배후 추적’과 ‘발본색원’을 공언했다. 게다가 김기설의 유서가 그의 필적이 아닌 것 같다는 의혹이 일었고, 그의 동료 강기훈이 유서를 대신 써준 사람으로 지목돼 구속됐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 불리는 이 사건의 결말은 모두가 아는 바다. 2015년 대법원은 재심을 통해 강기훈에게 최종 무죄를 확정했다. 한 사람의 운명을 처참히 짓밟은 이 사건의 전말을 지켜본 사람들은 크게 3가지 불신을 갖게 됐다.

첫째, 언론에 대한 불신. 상식적으로 죽으려는 사람이 굳이 유서를 다른 사람에게 써달라고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세상은 상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유서의 필적이 강기훈의 것과 같다’는 감정을 해줬던 탓도 있지만 그의 편을 들어준 언론은 많지 않았다.

둘째, 국가기관에 대한 불신. 국과수의 필적 감정은 허위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문서를 감정한 국과수 담당자는 이 사건 이외에도 여러 문서를 허위 감정한 혐의로 나중에 구속됐다. 90년대 학번들이 이런저런 음모론에 쉬이 휩쓸리는 것을 그들만의 탓이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셋째, 검찰에 대한 불신.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그 시대 ‘지배 세력’에 대한 총체적 불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91년 5월 박홍이 ‘어둠의 세력’을 운운하자 공안기관은 즉각 반응했다. 당시 치안관계대책회의를 열어 검찰에 철저한 조사를 지시했던 법무부 장관이 바로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이다. 당시 수사 검사들도 나중에 모두 승승장구했는데, 그중 한 명이 곽상도 전 의원이다. 더 말해 뭐 하겠는가.

‘그때 그 사람들’ 때문에…

1991년 6월 3일 한국외대 강의실 복도에서 당시 정원식 국무총리 서리가 학생들로부터 달걀과 밀가루 세례를 받아 안경이 벗겨지고 얼굴과 상체가 밀가루 뒤범벅이 된 채 학생들에 의해 밖으로 끌려 나가고 있다. 이는 학생운동권의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혔다. [동아 DB]

1991년 6월 3일 한국외대 강의실 복도에서 당시 정원식 국무총리 서리가 학생들로부터 달걀과 밀가루 세례를 받아 안경이 벗겨지고 얼굴과 상체가 밀가루 뒤범벅이 된 채 학생들에 의해 밖으로 끌려 나가고 있다. 이는 학생운동권의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혔다. [동아 DB]

업보가 대를 잇는 ‘막장 드라마’처럼 시대의 비극은 이어진다. 1991년 5월 분신 정국의 ‘막장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는 사건은 단연 ‘정원식 총리 폭행 사건’ 아닐까. 지금 기록을 살펴보는 사람들은 국무총리 서리(국무총리 자리가 공석일 경우 국무총리 업무를 대리해 수행할 사람. 대통령이 임명한다)로 임명된 고(故) 정원식에게 학생들이 밀가루와 달걀을 투척한 단순한 항의성 시위쯤으로 이해하는데, 당시 학생들은 페인트와 돌맹이, 술병, 인분까지 가리지 않고 던졌다. 강의실에서 그렇게 패악질을 했을 뿐 아니라 연구실에 피신한 사람을 찾아 끌어내 교내 여기저기를 쫓아다니면서 집요하게 집단 구타했다.

당시 신문 1면에 밀가루를 뒤집어쓴 총리 후보자 사진이 대문짝만 하게 실렸다. 국무총리에 지명됐으면서도 마지막까지 수업을 계속한 정원식은 시대의 참스승 격으로 추앙받게 됐다. 스승을 폭행한 학생운동권은 패륜 집단으로 낙인찍혀 엄청난 사회적 지탄을 받았다. 이쪽이 실수하면 저쪽이 더 큰 실수를 해서 돌고 도는 것이 역사다. 당시 정국이 그대로 흘러갔더라면 역사엔 ‘유서 대필’이라는 공안기관의 헛발질만 남았을 텐데, 총리 폭행이라는 더 큰 헛발질이 일어남으로써 운동권은 도덕적으로 구제받지 못하게 됐다. 여담이지만 당시 정원식 총리를 학생들에게서 떼어내 경호원처럼 옹위하며 구출한 열정적인 기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박병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다. 당시 모 신문사 정치부 기자였다. 역사는 이렇듯 엇갈리며 돌아간다.

현재 40대의 정치적 성향이 유독 도드라지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때 그 사람들’에 대한 인식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민정-민자-신한국-새누리-국민의힘 식으로 정당의 계보를 나열하면서, ‘결국 우리 사회의 주류는 여전히 교체되지 않았고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고 상상하는 ‘계속 혁명’ 식의 사고방식 말이다. 사실 이와 절연할 책임은 40대 스스로에게 있으나 보수정당에도 있다. 보수정당이 구태 인사(人士)와 관계를 끊고 혁신하면서 40대의 사고방식을 낡은 것으로 만들어버려야 하는데, ‘찔끔찔끔’식 개혁으로 ‘아직도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는 생각을 유지하게 만드는 것이다.

90년대 학번들은 끊임없이 좌절했다. 물론 가장 축복받은 세대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승리’의 경험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세대이자 스스로 주류가 됐다는 경험을 아직 획득하지 못한 세대이기도 하다. 작은 승리의 경험이 있다면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것과 촛불 시위로 현직 대통령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만든 것일 듯하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90년대 학번은 늘 군중이었지, 주도 세력은 되지 못했다. 또 자기 위 세대와의 관계 속에서 지금 자신의 세대를 가늠하기만 하지, 자기 아래 세대와의 관계를 충분히 가늠하지 못한다. 50~60대 나이에 이르러 자식들이 20대 성인이 되고, 현실의 고민을 세대적으로 중첩하며 정치적 사고가 다듬어진 86세대와 달리 90년대 학번이 여전히 ‘갈라파고스’로 남아 있는 이유다.

70년대生 정치지도자 등장할 때

어떤 이는 90년대 학번을 ‘종속된 세대’라고 말한다. 86세대의 기세에 눌려 그들의 영광만 찬미하며 살았을 뿐 ‘자기 머리로, 자기 생각을 갖고, 자기 목소리를 내본 적이 없는’ 세대라고 말이다. 일견 타당하지만 지나친 폄훼다. 86세대가 유난히 유능하고 97세대(90년대 학번, 70년대 출생)가 유난히 무능하다고 말할 수 없다. 시대 조건이 각각 다르게 주어졌을 뿐이다. 사회 곳곳에서는 이미 86세대가 퇴조하고 97세대가 주역이 된 지 오래다. 오직 정치권에만 유독 ‘86세대 카르텔’이 강하게 유지되고 있다.
 
좀 느닷없는 이야기지만 1991년을 돌아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해봤다. 이제는 70년대생 정치지도자가 등장할 때 아닐까. 이러한 기회와 조건이 주어질 때 ‘40대 진보대학생’도 현실 속에서 정치적 세계관을 다듬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한동훈, 박용진, 윤희숙, 김해영 같은 ‘차세대 기수’들이 있지 않은가. 그들이 정당을 떠나 “86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 우리 시대가 됐다”고 함께 선언하면 좋겠다. 40대의 압도적 세대 성향이 언젠가 이들과 결합해 건전한 영향력을 발휘하길 기대할 따름이다. 선배가 아닌 동년배를 지도자로 앞세우며 말이다. 그러할 때 우리는 비로소 1990년대 대학 시절을 휘감았던 ‘상실의 시대’에서 벗어나 어른이 됐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신동아 2022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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