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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죽자 흐느끼던 평양과 엘리자베스 2세의 런던에서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보다

[노정태의 뷰파인더] 자기연민에 함몰된 韓 역사관

  •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김정일 죽자 흐느끼던 평양과 엘리자베스 2세의 런던에서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보다

  • ● ‘민주주의 종주국’ 실은 ‘왕국’
    ● ‘비동시성의 동시성’ 개념 탄생
    ● ‘시대 뒤떨어진 사람’ 취급 논거
    ● 선진국 시민이 후진국 관점
9월 19일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장례식이 엄수된 뒤 운구 행렬이 웰링턴아치로 향하고 있다. 영국 근위병이 거리 양쪽에 도열해 있다. [런던=AP 뉴시스]

9월 19일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장례식이 엄수된 뒤 운구 행렬이 웰링턴아치로 향하고 있다. 영국 근위병이 거리 양쪽에 도열해 있다. [런던=AP 뉴시스]

9월 16일 영국 축구 스타 데이비드 베컴(오른쪽)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관에 참배하기 위해 줄을 서면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트위터]

9월 16일 영국 축구 스타 데이비드 베컴(오른쪽)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관에 참배하기 위해 줄을 서면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트위터]

현지시각으로 9월 16일, 영국 축구 스타 데이비드 베컴이 13시간 줄을 서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관에 참배했다. VIP에 속하는 베컴은 본인이 원하면 그렇게 긴 시간 줄을 서지 않을 수 있었지만 평균 12~24시간을 대기하는 평범한 영국인과 함께 줄을 섰다. 그렇게 엘리자베스 2세의 마지막을 배웅했다.

그런데 이 미담에는 다소 의아한 면이 있다. 우리가 알던 영국의 모습과 상반되는 풍경이다. 많은 한국인에게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민주주의를 시작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마그나 카르타(대헌장)에서 이어지는 왕권 축소 및 의회민주주의 여정을 시작한 민주주의 ‘원조’ 격인 국가다. 나치 독일과 파시즘의 물결을 견뎌내고 민주주의의 전통을 지켜낸 나라이기도 하다.

우리는 알게 됐다. ‘민주주의 종주국’ 영국이 실은 ‘왕국’이라는 것을. 여왕이 세상을 뜨자 온 나라가 말 그대로 상갓집이 되고, 온 나라가 멈추고,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조차 한 주 쉬며, 베컴 같은 유명한 인물이 줄을 서서 조문하는 모습이 뉴스뿐 아니라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쏟아졌다.

그런 광경 앞에 삐딱한 태도를 취하는 이들이 있다. 영국 혹은 영연방 국가에 사는 공화주의자들이다. SNS를 통해 접하는 영국계 공화주의자들의 태도는 시니컬하기 짝이 없었다. 자국의 풍경을 북한과 비교하는 SNS 게시물을 올리기도 했다. 김일성, 김정일이 죽었을 때 북한 사람들이 울고불고 하던 것이나, 지금 영국에서 벌어지는 일이나, 대체 뭐가 다르냐는 비아냥거림이다.

말이 좀 심한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단지 혈통에 따라 세습된 신분을 가지고 있었던 누군가 세상을 떠났다는 이유로 민주주의 사회의 주권자인 국민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 이는 ‘현대 민주주의 국가’와 썩 잘 어울리는 모습이라고 보기 어렵다. 엘리자베스 2세가 당연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영국 사회 기저에 깔린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수면 위로 떠오른 셈이다.



히틀러 선택한 나라의 속사정

20세기 초,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는 사회 갈등 원인을 탐구했다. 어떤 사회 구성원 모두가 동일한 사고방식과 성격, 생활 습관을 지닌다면 갈등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설령 갈등이 생긴다고 해도 크고 심각하지 않을 것이며 금방 해결 혹은 해소될 수 있어야 마땅하다.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회 갈등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오래 지속될 뿐 아니라 심지어 집단들끼리 대를 이어가며 갈등하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블로흐가 볼 때 사회 갈등의 원인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근본적이었다. 단지 특정 사안에 대해 견해가 달라 싸우는 게 아니었다. 같은 달력을 쓰는 같은 국가에 살고 있지만, 실은 전혀 다른 시대에 속한 사람들이기에 싸움이 벌어진다. ‘비동시성의 동시성’은 바로 그런 개념이다. 같은 시대에 공존할 수 없는 요소들이 같은 시대에 있기 때문에 화해와 타협이 불가능한 사회 갈등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현재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오늘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외형적으로만 동일한 현재에 존재할 뿐이다. 사실상 그들은 예전의 요인들을 갖고 있다. 그것들이 서로 간섭한다.”

미국의 역사학자 벤자민 카터 헷이 ‘히틀러를 선택한 나라’에서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20세기 초의 세계는 도시, 농촌 간 간극이 매우 크고 심각했다. 도시와 농촌은 사실상 ‘다른 세계’라고 불러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21세기의 우리는 바이마르 시대를 이야기하면 베를린의 선진적 문화와 개방성만을 떠올리지만 “1925년 독일인 6250만 명 중 400만 명만 베를린에 살았다. 인구의 3분의 1 이상은 농촌 사회, 주민이 2000명을 넘지 않는 마을에서 살았다. 베를린 밖 주민들의 삶은 베를린의 초현대적인 삶과 엄청나게 달랐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무너지고 히틀러라는 독재자를 독일인이 스스로 뽑게 된 데는 바로 이 ‘비동시성의 동시성’ 문제, 그로부터 파생되는 정치적 교파화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헷의 설명이다. 마치 특정 교회의 교파에 일단 속하고 나면 어지간해서는 믿음을 바꾸지 않는 것처럼 사회주의 진영, 가톨릭 진영, 신교도 중산층 진영으로 나뉜 바이마르 공화국 유권자는 서로 끝없는 반목과 질시를 이어갔다. 그러다가 반공주의로 쏠린 신교도 중산층 진영을 히틀러가 완전히 접수하면서 독일인은 자신들의 손으로 나치에게 권력을 쥐어주고 말았다는 것이다.

美 대선 예측 실패하는 이유

비동시성의 동시성은 근대 이후 인류 사회의 보편적 현상이다. 심지어 산업혁명을 시작했고 의회민주주의의 첫 단추를 꽂은 영국이라고 해도 예외일 수 없다. 근대화 이후 빠르게 변하는 세상의 모습을 미처 쫓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과거’에 머물러 있으면서 벌어지는 일이다. 세상 그 어떤 국가에서도 비동시성의 동시성은 발생한다.

영국만 그런 것도 아니다. 왕이 없는 나라지만 미국은 한층 더 심하다. 뉴욕 맨해튼은 첨단을 달리는 세계의 문화 수도이지만 그런 선진 도시는 미국에도 몇 군데 없다. 디트로이트 같은 곳으로 가보면 쇠락해 시간이 멈춘 듯하다. 좀 더 내륙으로 들어가면 19세기의 생활을 짐작케 하는 농가도 있다. 심지어 그보다 더 예전 시대 청교도 양식대로 살아가는 소수 종교인도 만날 수 있다. 같은 시대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미국 선거, 특히 대통령 선거를 놓고 한국 같은 외국인뿐 아니라 미국인 스스로도 예측에 실패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미국의 선진적 대도시에서 태어난 후 그러한 문화권에서만 살아온 이들에게, 작은 마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미국의 내륙 지방은 사실상 외국이나 다를 바 없다. 미국 대륙의 동부, 서부 해안가에 사는 사람들과 내륙에 사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달력에는 모두 같은 날짜가 적혀 있지만 그들이 동일한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주 전형적인 비동시성의 동시성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비동시성의 동시성은 보편적 설명력을 지니는 개념이다. 다양한 국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사안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한국 역시 비동시성의 동시성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역사적 비극이 특별해서가 아니거늘

우리의 문제는 따로 있다.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근대화를 경험하는 모든 나라가 겪는 보편적인 현상으로 이해하는 대신, 마치 대한민국만의 특유한 문제인 것처럼 논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어서다.

근대화의 길을 스스로 걷지 못한 채 일본 식민지가 돼버린 나라. 전쟁을 벌인 것도 아닌데 외세 개입으로 분단됐고, 동족상잔의 비극까지 겪고 말았던,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비극을 겪은 나라. 전쟁이 끝나고 압축적 근대화의 길을 걷다보니 한 나라에 전근대와 근대, 탈근대가 어지럽게 뒤섞여버린 나라.

그러한 사고방식은 특히 진보로 분류되는 지식인이나 문화 창작자들 사이에서 더 흔히 발견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진보정당이나 사회운동을 지지하지 않는 이들을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 취급하기 위한 논거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북한의 핵 개발과 침략 위험을 강조하는 이들을 ‘아직도 6‧25가 끝나지 않은 사람들’로 취급하고, 견실한 경제 성장을 추구해야 한다는 이들을 ‘압축 성장 시대의 미몽에서 깨지 못한 이들’로 간주하는 식이다.

이러한 관점에 나름의 타당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옳다고 보기도 어렵다. 우리가 앞서 확인했다시피 비동시성의 동시성과 그로 인한 근본적인 사회 갈등은 세계 모든 나라가 겪는 보편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영국은 아직도 왕당파와 공화파가 투쟁을 한다. 낙태, 여성 인권, 성소수자 문제 등을 놓고 미국은 나라가 반으로 쪼개진 지 오래다. 모든 나라에는 각자의 문제가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외세에 의해 반으로 쪼개졌고, 압축성장과 근대화로 인해 비동시성의 동시성에 시달린다는 식의 자기비하와 자기연민의 관점에 반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그래서다.

20세기 한반도 거주민이 삶이 만만치 않았고,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지금까지 달려온 것 또한 분명하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이 현대 세계사의 ‘특이점’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겪은 역사적 비극이 특별해서가 아니다. 그 모든 비극을 경험한 세계 최빈국이 2022년 현재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는 그 성공담이야말로 특별한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 우리는 좀 더 떳떳하게 자부심을 느껴도 된다.

가난한 나라는 범죄의 소굴?

하정우(왼쪽)와 황정민이 주연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수리남’은 수리남 정부로부터 “국가 이미지를 훼손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넷플릭스]

하정우(왼쪽)와 황정민이 주연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수리남’은 수리남 정부로부터 “국가 이미지를 훼손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넷플릭스]

문제는 우리의 자기 인식이 스스로의 현재를 따라오지 못하는 데 있다.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수리남’, 얼마 전 개봉한 영화 ‘범죄도시2’ 등을 둘러싼 논란을 생각해보자. 우리보다 상대적으로 가난한 나라를 범죄 소굴처럼 묘사해 그 나라 정부와 시민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최근 한국 문화상품이 국내 시장을 넘어 세계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다는 점을 놓고 보면 이런 식의 제작 방향은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수리남을 마약 천국으로 묘사하는 ‘수리남’을 보면 수리남 사람들이 불쾌하리라는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 아닌가. 그런데 왜 그런 선택을 한 걸까.

언론 보도를 통해서는 알 수 없는 어떤 속사정이 있을 수 있지만 여기서는 지금까지 논의한 바에 따라 우리 스스로 내면을 짚어보도록 하자. 우리 사회의 역사 인식 수준은 아직 자기중심적이고, 자기연민에 빠져 있다. 우리가 세계사의 비극을 모두 다 떠안은 것처럼 그려내는 역사관에 함몰돼 있다.

우리는 다른 나라도 모두 각자의 비극을 끌어안고 있다는 것, 제아무리 선진국처럼 보이는 나라여도 비동시성의 동시성으로 인한 사회적 갈등을 품고 있다는 것,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나라라고 하더라도 그 나라의 국민과 정부에 자존심이 있다는 것 등을, 너무도 쉽게 간과하는 건 아닐까. 선진국이 된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이 여전히 후진국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소리다. 이 또한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낳는 문제다.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신동아 10월호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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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 2022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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