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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기적으로 다시 얻은 삶… 사람 살리는 일이 가장 가치 있어”

황선엽 구세군역사박물관장

  • 최창근 에포크타임스코리아 국내뉴스 에디터 caesare21@hanmail.net

“두 번의 기적으로 다시 얻은 삶… 사람 살리는 일이 가장 가치 있어”

  • ● 세상을 구하는 군대, 구세군
    ● 마음은 하나님께 손길은 이웃에게
    ● ‘아들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
    ● 한국 근·현대사 응축된 貞洞 가치
10월 25일 황선엽 구세군역사박물관장은 ‘신동아’와 인터뷰하면서 “사람의 영혼과 육체를 살리는 일이 가장 가치있다”고 말했다. [지호영 기자]

10월 25일 황선엽 구세군역사박물관장은 ‘신동아’와 인터뷰하면서 “사람의 영혼과 육체를 살리는 일이 가장 가치있다”고 말했다. [지호영 기자]

연말연시(年末年始). 빨간색 자선냄비가 상징인 구세군이 한국 땅에서 복음을 전한 지 110년이 훌쩍 넘었다. 서울 중구 정동 1-23번지에 자리한 고색창연한 벽돌 건물은 1928년 완공된 구(舊) 구세군사관학교다. 현존하는 최고(最古) 개신교 신학교 건물로 꼽힌다. 1926년 미국 구세군이 한반도에서 구세군 사관(士官·목회자)을 양성하려고 모금한 돈으로 건립됐다. 교사(校舍)로 쓰이던 건물은 1955년부터 1981년까지는 구세군 대한본영으로 함께 사용돼 ‘구세군중앙회관’으로도 불렸다. 2019년 복합문화공간으로 리모델링돼 ‘정동 1928 아트센터’로 거듭났다.

정동 1928 아트센터 좌측 동(棟)에는 구세군역사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구세군이 1908년부터 한국에서 펼쳐온 사랑과 봉사, 섬김과 나눔의 발자취를 돌아볼 수 있는 공간이다. 관장을 맡고 있는 황선엽 부정령(副正領)은 한국 구세군 역사의 산증인이다. 구세군 100주년 사업 준비위원장, 구세군사관학교 교장 등으로 구세군 발전에 발자취를 남겼다. 10월 25일 황선엽 구세군역사박물관장을 만나 구세군의 의미와 발자취, 서울 정동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구세군은 자선냄비, 제복 외엔 익숙한 이미지가 없는 듯합니다. 구세군에 대해 더 소개하자면.

“구세군(救世軍·The Salvation Army)은 1865년 영국 런던에서 창설됐습니다. 설립자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는 본래 감리회 목회자였죠. 그가 살던 빅토리아 시대는 대영제국(大英帝國) 최전성기입니다. 산업혁명 결과 고도 경제성장을 이뤘고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을 건설한 시기였죠. 하지만 그 시절 대도시 노동자, 도시빈민의 삶은 비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윌리엄 부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빵과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아내이자 동료 사역자였던 캐서린 부스(Catherine Booth)와 더불어 이스트 런던(East London) 빈민촌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속적 공간을 성스러운 공간으로

구세군역사박물관에 전시물이 시대순으로 배치돼 있다. [지호영 기자]

구세군역사박물관에 전시물이 시대순으로 배치돼 있다. [지호영 기자]

초창기 구세군은 어땠습니까.

“원래 윌리엄 부스는 교단을 만들 계획까진 없었습니다. 범(汎)개신교 테두리 내에서 초(超)교파적 선교활동을 벌였죠. 회심(回心)한 신자는 각 지역 교회로 보내 신앙생활을 이어가도록 했습니다. 성공회, 감리회, 장로회 등 종파를 가리지 않았고요. 문제는 돌아간 신자들이 교회에 정착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독립 교단을 설립하게 된 거죠. 처음엔 ‘기독교선교회(The Christian Mission)’라고 불리다 1878년부터 공식적으로 구세군이란 명칭을 사용하게 됐습니다. 규모가 커져 신속한 의사결정에 문제가 발생하자 군대식 조직을 채택하고 계급제도를 차용했습니다. 빅토리아식 제복도 입게 됐고요.

각 나라에 본영(本營)을 뒀습니다. 또 목회자를 ‘사관(士官)’이라고 부르는데, 조직 구성 원리가 어떻게 됩니까.

“영국 런던에 국제본부(IHQ)를 두고 전 세계를 5개 부(Zone)로 나누어 운영하고 있습니다. ‘구세군한국군국’은 아시아·태평양부에 속합니다. 국제본부에는 수장(首長)인 ‘대장(General)’이 있고, 1인의 ‘참모총장(Chief of the Staff)’이 있습니다. 각 부(部)엔 국가를 관장하는 ‘부장(Commissioner)’을 두고 있습니다. 각 지역 교회·성당에 해당하는 것이 ‘영문(營門·Corps)’이고 한국 전체를 관장하는 한국군국(韓國軍國) 산하에 대한본영과 각 지방본영이 있습니다. 구세군 목회자는 통칭해서 ‘사관(Officer)’이라고 합니다.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목회신학과 졸업 후 부위(Lieutenant)로 임관(목사 안수)하죠. 이후 만 5년 사역하면 정위(Captain)로 승진합니다. 다시 만 10년이 지나면 참령(Major)으로 진급합니다.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 구세군 사관의 97% 정도가 참령에서 은퇴합니다. 정년은 65세예요. 그 외에 특별한 직책을 맡을 경우 부정령(Lieutenant-Colonel), 정령(Colonel)으로 진급하기도 합니다. 이해하기 쉽게 가톨릭에 비유하자면 세계 구세군 대장은 교황, 참모총장은 교황청 국무원장 추기경, 부장은 추기경, 정령은 대주교, 부정령은 주교나 몬시뇰(Monsignor·명예 고위성직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원수’는 예수 그리스도시고요(웃음).”



구세군의 선교 정신은 무엇입니까.

“‘3S’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수프(Soup)’입니다. 가난한 신자들을 찾아가 따뜻한 수프로 배를 채워주는 것이죠. 두 번째는 ‘소프(Soap)’입니다. 비누로 가난, 무지를 씻겨 삶을 거듭나게 한다는 뜻입니다. 세 번째는 ‘샐베이션(Salvation)’입니다. ‘성화(聖化·Sanctification)’라고도 하는데 정신과 육신의 총체적 변화와 구원을 의미합니다. 창립자 윌리엄 부스·캐서린 부스 부부는 선교활동을 시작할 때부터 거리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이 필요한 이들에게 찾아가는 교회를 지향했죠. 성공회가 대영제국 국교회이던 시절엔 각 교구(敎區) 중심으로 종교 사역이 이뤄졌습니다. 그 중심에는 고딕 양식의 ‘교회당’이 있었고요. 구세군은 이를 탈피했습니다. 극장, 묘지, 퍼브(Pub·영국 선술집) 등을 찾아가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죠. 세속적 공간을 성스러운 공간으로 바꾼 것입니다. 오늘날 영국 런던 구세군 국제본부도 원래 대형 당구장이었습니다.”

두 번의 기적, 바뀐 삶

구세군역사박물관이 자리한 서울 중구 정동의 ‘정동 1928 아트센터’. [지호영 기자]

구세군역사박물관이 자리한 서울 중구 정동의 ‘정동 1928 아트센터’. [지호영 기자]

구세군역사박물관은 서울 중구 정동에 자리하고 있다. 황선엽 관장은 “개인적으로 정동과 인연이 깊다”고 했다.

인연이 깊다?

“제가 경복고 2학년이던 1972년 가을,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구세군 아현교회 담임사관께서 집례(執禮)해 주셨고 이일을 계기로 온 가족이 구세군 교인이 됐죠. 돌이켜 보면 아버지의 때 이른 죽음은 ‘교회로 나가라’는 지상명령(至上命令)이었던 셈입니다. 이후 구세군 아현교회 학생회에서 활동했습니다. 1973년엔 성탄절을 맞이해 ‘기나긴 크리스마스 정찬’ 연극을 공연하기도 했죠. 오늘날 제가 근무하는 구세군중앙회관에서요. 그 시절부터 헤아리면 50년째 정동과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셈입니다.”

구세군 사관이 된 이유가 있습니까.

“아버지의 죽음 이후 방황했습니다.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고민했죠. 잠시 염세주의에 빠지기도 했고요. 제 사정을 아신 아현교회 담임사관님이 고등학교 3학년 때 신학교 진학을 권하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따라 중앙신학교(현 강남대학교)에 입학했죠. 그때는 반드시 목회자가 돼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해야겠다’는 소명 의식은 있었지만요. 그러다 1978년 충남 대천에서 수양회에 참석했는데, 이때 훗날 구세군 세계대장이 되는 폴 레이더(Paul A. Rader) 사관이 설교를 했습니다. ‘청년들아 도전하라! 인생을 하나님께 바쳐라! 헌신해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정의로운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라!’고 역설했죠. ‘감동이 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와 기도하라’고도 하셨는데 어느새 제가 앞에서 기도하고 있더군요.”
이 일을 계기로 황선엽 관장은 구세군사관학교에 진학해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된다. 문제는 가족의 반대, 그중에서도 어머니가 완강하게 반대했다.

“구세군 사관이 되겠다고 하니 어머니는 1주일 째 안방에서 두문불출하시며 금식 기도를 하셨죠. 1주일째 되는 날 입술이 부르트신 상태로 저를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너 정말 할 수 있겠니?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길을 걸을 수 있겠니? 성직(聖職)에 선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른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 하려면 제대로 끝까지 해야 한다’고요. 어머니는 막내인 제가 어렵고 힘든 길을 가려 하니 가거들랑 포기하지 말고 제대로 가길 원하신 겁니다.”

1982년 정동의 구세군사관학교에 입학한 황선엽 관장은 유학길에 올라 1985년 호주 멜버른의 에바 버로스 대학(Eva Burrows College)을 졸업하고 구세군사관으로 임관했다. 이후 한국, 영국, 미국에서 목회자, 선교사, 교수, 선교 행정 책임자 등으로 치열하게 사역했다. ‘에너자이저’라는 별칭이 붙었을 정도다. 이토록 불철주야(不撤晝夜) 일하다 병마(病魔)에 쓰러져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병으로 삶과 죽음의 고비를 넘나들었다고요.

“구세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일하던 2010년 가을이었습니다. 분당 서울대병원에서 ‘급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습니다. 정상 백혈구가 100이라면 78인 비정상의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시한부 삶’을 선고받았죠. 당시 ‘구세군 통신망’에 다음과 같이 남기기도 했습니다. ‘의사는 의학적으로 남은 마지막 방법을 동원하겠다고 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살려주시면 사역 현장에서 아니면 하늘나라에서 뵙기를 기도합니다.’ 이후 전국 각지에서 ‘중보(仲保)기도’가 이어졌습니다. 의학적 치료도 효과를 나타내 2011년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6월 재발해 다시 한번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섰죠. 그러다 다시 한번 기적이 발생했습니다. 골수 기증자와 환자의 상태가 일치하지 않아도 골수를 이식할 수 있다는 소식을 접한 아내(최명순 부정령)의 권유로 아들의 골수를 이식받았어요.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만 5년이 경과한 2017년 연말 완치 판정을 받았습니다.”

당시 일을 회고하던 황선엽 관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웃음 지었다.

“골수이식을 받아서 혈액형도 아들의 것으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저는 ‘아들의 아들’이 된 거죠. 제 생일은 원래 12월 28일인데 이식받은 11월 28일로 바꾸기로 했답니다.”

기적적으로 두 번에 걸친 죽음의 고비를 넘긴 황선엽 관장은 이를 계기로 삶에 대한 자세가 완전히 바뀌었다고 고백했다.

“사람 살리는 일이 가장 가치 있다 새삼 깨달았습니다. 한 사람의 영혼이나 육체를 살리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알게 된 것이죠.”

帝國·民國 모두 담은 貞洞

구세군역사박물관엔 구세군 사역 관련 물품이 전시돼 있다. [지호영 기자]

구세군역사박물관엔 구세군 사역 관련 물품이 전시돼 있다. [지호영 기자]

구세군중앙회관 건물 설명 표지. 구세군 설립자 윌리엄 부스의 장남이자 구세군 세계대장이던 브람웰 부스의 칠순 기념으로 건축한 것이라고 적혀 있다. [지호영 기자]

구세군중앙회관 건물 설명 표지. 구세군 설립자 윌리엄 부스의 장남이자 구세군 세계대장이던 브람웰 부스의 칠순 기념으로 건축한 것이라고 적혀 있다. [지호영 기자]

구세군 사관으로 지내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습니까.

“2008년은 한국 구세군 선교 100주년이었습니다. ‘한국 구세군 100주년 기념대회’를 개최했는데, 저는 조직위원장으로서 총괄했습니다. 한국에서 사역한 선교사관 가운데 생존자 전원을 초청했죠. 미국, 영국, 호주, 뉴질랜드 등에서 24명의 선교사관이 참석했어요. 그간 공로를 기려 ‘공로 메달’을 수여하는데, 제프리 페리(Geoffrey T. Perry) 사관이 홀연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습니다. 100년도 더 돼 빛이 바랜 태극기였죠. 고이 간직해 오던 그것을 한국 구세군에 기증했는데 사연은 이러합니다. 1910년 찰스 실베스터(Charles E. Sylvester), 한국식 이름 ‘설보덕(薛寶德)’ 사관이 한국 땅을 밟습니다. 그는 새문안(신문로) 근처에서 태극기를 구해 선교 기간 내내 품고 살았습니다. 실베스터 사관은 일제강점기 동안 한민족과 동고동락하다 조선총독부의 추방령으로 1939년 한국 땅을 떠나게 됐습니다. 늘 한국을 그리워한 그는 1953년 소천(召天)하기 전 딸 조앤 실베스터(Joan Sylvester)에게 유품으로 태극기를 남겼습니다. 이후 아들 브람웰 실베스터(Bramwell Sylvester)가 선교사관이 돼 1954년 한국으로 파송됐죠. 이어 제프리 페리와 결혼한 딸 조앤도 남편과 함께 1956년 선교사관이 돼 한국을 찾았고요. 페리-조앤 사관 부부는 1960년 사역을 마치고 한국을 떠나게 됩니다. 이후 가보(家寶)로 태극기를 간직하고 있었는데 자녀 중에 구세군 사관이 배출되지 않아 한국을 찾을 일이 없어졌고, ‘이제 한국에 돌려드리겠다’며 몸소 가지고 온 것이죠. 제가 당시 통역으로 배석해 이런 사연을 전했는데 저를 비롯해 600여 명의 청중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벽안(碧眼)의 선교사 가족이 2대에 걸쳐 한평생 가슴에 품고 살던 귀중한 태극기를 한국에 다시 돌려줬으니까요. 태극기는 구세군역사박물관에 전시하고 있습니다.”

황선엽 관장이 전시된 태극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지호영 기자]

황선엽 관장이 전시된 태극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지호영 기자]

구세군역사박물관장으로서 구세군이 한국 땅에서 남긴 발자취를 돌아볼 수 있도록 돕는 도슨트(Docent) 역할도 수행하고 있는 황선엽 관장의 또 다른 직책은 ‘서울정동협의체 위원장’이다. 협의체는 정동 일대에 근거지를 둔 26개 정회원 단체와 8개 협력회원 단체가 참여해 2016년 출범했다. 문화예술기관, 종교단체, 기업, 공익기관, 학교, 언론사, 주한 외국 대사관 등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정동에 애착을 갖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정동은 조선-대한제국-일제강점기-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한국 근·현대사가 응축된 공간입니다. 문명 전환의 핵심 요소가 한데 모인, 세계적으로 봐도 유사 사례를 찾기 어려운 장소이기도 합니다. 한국 역사 발전 측면에서 보면 정동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 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탄생한 신생·독립국 중 후진국·개발도상국을 거쳐 선진국 반열에 오른 사례는 한국이 유일합니다. 이를 정동으로 축약해서 보면 한국이 봉건왕조 국가에서 근대국가로 발전하고, 일제강점기를 거쳐 정치·경제적으로 고도 발전을 이뤄 선진국의 일원이 돼온 과정이 정동에 ‘타임라인’처럼 남아 있습니다. ‘제국(帝國)’에서 ‘민국(民國)’으로 변신한, 다시 말해 정동은 문명사적 패러다임 전환이 이뤄진 역사적 유산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장소입니다. ‘정동르네상스’ 역사문화 프로젝트로 한국의 과거·현재·미래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하는 공간으로 기억되길 소망합니다.”



신동아 2022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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