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엄 산(SAN) 본관 풍경.[뮤지엄 산 제공]
안도 다다오(1995년 프리츠커상 수상) 하면 떠오르는 건축 소재가 노출콘크리트다. 콘크리트 본연의 질감과 색감을 그대로 살리면서 날카로운 직선과 부드러운 곡면을 함께 빚어내 일종의 신성함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프리츠커 프로젝트에 소개된 건축 중 상당수가 노출콘크리트 공법으로 지어졌다는 것에서도 그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 강원도 원주 오크밸리 리조트 내에 지어진 ‘뮤지엄 산(SAN)’은 그런 안도 다다오 건축의 정수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노출콘크리트로 빚어진 본관 내부 복도. 빛이 들어오면 신성함까지 느껴진다.(왼쪽)
뮤지엄 산의 건축 과정을 소개한 안도 다다오관.(오른쪽)[뮤지엄 산 제공]
SAN은 Space Art Nature의 약자다. Nature는 치악산 줄기인 구룡산 계곡의 수려한 자연풍광을 대변한다. Art는 국내 최초의 종이 박물관인 ‘페이퍼 갤러리’와 미술 작품 전시 공간으로서 ‘청조 갤러리’를 품에 안고 있기에 붙은 이름이다. 그럼 맨 앞 Space는 왜 붙었을까. 안도 다다오의 건축 그리고 ‘빛과 공간의 예술가’로 불리는 제임스 터렐의 작품을 전시하는 제임스 터렐관(뮤지엄이 끝나는 지점에 설치)을 염두에 둔 명명이다. 그만큼 이 뮤지엄에서 새로운 ‘공간의 창출’이 중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700m나 되는 이 공간의 대부분을 연출한 사람이 안도 다다오다. 그의 건축에선 노출콘크리트 말고도 돌과 물이 빠지지 않는다. 실제 지상 2층으로 이뤄진 4개 전시동을 연결한 뮤지엄 본관은 일본의 오사카 성이나 구마모토 성을 연상시키는, 자연석을 이용한 거대한 성벽 구조로 돼 있다. 그 주변으로 언뜻 해자(垓字)를 연상시키는 ‘워터가든’이 펼쳐진다.
본관 뒤편에서 바라본 워터가든. 끄트머리 파라솔이 설치된 공간이 카페 테라스다.[뮤지엄 산 제공]
공중에서 촬영한 본관 뒤쪽의 스톤가든. 경주 고분을 돌로 형상화한 9개의 스톤마운드로 구성돼 있다.[뮤지엄 산 제공]
성벽 구조를 이루는 주황빛 돌은 경기 파주에서 가져온 파주석이고 워터가든에 깔린 검은색 자갈은 충남 서산에서 가져온 해미석이다. 본관 뒤 ‘스톤가든’은 신라 고분을 연상시키는 둔덕(스톤마운드) 9개로 구성된 정원이다. 스톤마운드를 빚은 흰 돌은 원주에서 나는 귀래석이다. 파주석, 해미석, 귀래석이라는 3종의 자연석은 박물관 내부를 감싸는 노출콘크리트와 묘한 대비를 이룬다. 본관의 경우 파주석으로 외관을 짓고 그 안에 박스를 쳐서 콘크리트 건물을 지은 효과다. 전자가 조물주가 빚은 돌이라면 후자는 건축가가 빚은 돌이다.
워터가든을 채운 잔잔한 물은 이 둘을 가르는 동시에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거칠면서도 파격적인 자연석을 씻어내 매끈하면서 세련된 콘크리트를 빚어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물은 본관 건물 오른편에 휴식 공간으로 마련된 카페 테라스를 우회하면서 계단을 이루며 잔잔히 고여 있다. 그 물에 단풍으로 붉게 물든 주변 풍광이 비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깊은 사색에 절로 빠지게 된다.
안도 다다오 건축에서 물은 이런 성스러운 씻김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뮤지엄 안쪽 통로 양옆으로 길게 늘어선 노출콘크리트 벽면은 고대 그리스 신전의 열주와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 마치 ‘자연의 신전’에 온 것 같은 신성함마저 느껴진다.
1 페이퍼 갤러리 전시관 초입의 파피루스관. 네모난 천장을 확인할 수 있다.
2 트라이앵글관에서 바라본 하늘. 세모를 찾을 수 있다. 3 백남준관의 동그란 천장.[뮤지엄 산 제공]
뮤지엄 산의 본관에는 그런 신성함의 징표 3가지가 숨어 있다. 네모, 세모, 동그라미라는 3개의 기하학적 기호다. 네모부터 찾아보자. 본관 왼편에 위치한 ‘페이퍼 갤러리’의 첫 전시 공간은 종이가 등장하기 전 그를 대신하던 파피루스를 이집트 나일 강 유역에서 옮겨 심은 파피루스 온실이다. 2층에 설치된 이 온실은 천장이 뻥 뚫린 중정(中庭)에 설치돼 있다. 푸른색 하늘이 쏟아져 내리는 그 중정의 천장이 네모나다. 다음은 동그라미다. 본관 오른편 청조 갤러리 마지막 전시관인 백남준관은 백남준의 비디오아트 작품 전용 전시 공간이다. 이 전시 공간의 높은 천장이 동그랗다. 세모가 가장 찾기 어렵다. 페이퍼 갤러리와 청조 갤러리가 만나는 중간 지점에 갤러리 산의 건축 과정을 기록한 전시 공간이 있다. 이 공간 뒤편으로 물이 흐르는 비석 형태의 조각 작품이 설치된 중정이 보인다. 대부분의 관객이 그냥 지나치는 이곳의 천장이 세모다. 이 중정으로 나가는 입구에 이 공간의 이름이 적혀 있다. 트라이앵글관이라고.
2층 평면도를 보면 건물 위에서 볼 때 앞부분에 네모, 배꼽 부분에 세모, 뒷부분에 동그라미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동양적 전통에서 동그라미는 하늘, 네모는 땅, 세모는 인간을 상징한다. 안도가 이를 의식하고 일부러 이 3가지 기호를 새겨 넣은 것일까. 이영훈 홍보팀장은 “그런 의미 부여를 하진 않았다”고 말했다. 다만 뮤지엄 내부적으로 네모는 파피루스, 세모는 안도 다다오, 동그라미는 백남준의 상징 기호로 활용하고 있을 뿐이다.
노출콘크리트의 부드러움과 날카로움이 교차하는 본관 내부 공간.[뮤지엄 산 제공]
숫자 3은 뮤지엄 산을 구성하는 주요 원리다. 그래서 가든도 셋이다. 워터가든과 스톤가든 가기 전에 ‘플라워 가든’이 더 있다. 방문객 접수 절차가 이뤄지는 ‘웰컴센터’(역시 파주석으로 지어진 단층 건물)를 지나 돌담을 따라가다 보면 폐건축자재로 황조롱이를 형상화한 15m 높이의 모빌조각 ‘제럴드 맨리 홉킨스를 위하여’가 등장한다. 미국 작가 마크 디 슈베르의 작품이다. 이 모빌조각을 중심으로 80만 본의 패랭이꽃이 심어진 드넓은 꽃밭과 하얀 자작나무 숲이 펼쳐진다. 아쉽게도 지난해부터 돌림병이 돌아 이 패랭이꽃 대부분이 폐사하는 바람에 그 화려함은 감퇴했지만 시각적 시원함은 여전하다. 이 드넓은 공간 한편의 잔디밭에 설치된 아기자기한 조각품으로 그 아쉬움을 달랠 수 있다.
패랭이꽃밭 한가운데 위치한 마크 디 슈베르의 대형 모빌조각. 영국 시인 제럴드 맨리 홉킨스의 시 ‘황조롱이’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됐다.(왼쪽) 공중에서 촬영한 워터가든과 본관. 본관 중심부의 네모와 세모 그리고 뒤편의 동그라미 형상을 확인할 수 있다.(오른쪽)[뮤지엄 산 제공]
플라워가든의 자작나무 길을 따라가다 돌담을 끼고 살짝 돌아서면 그제야 워터가든과 뮤지엄 본관의 위용이 드러난다. 건축가의 대단한 시각적 연출 효과를 체험할 수 있는 순간이다. 이때 관람객의 경탄을 자아내는 요소 중 하나가 워터가든을 관통해 뮤지엄으로 들어가는 돌다리 위에 설치된 붉은색 설치조각품이다. 대형 금속파이프를 연결해 사람 인(人)자를 연상시키는 형상을 구현한 러시아 출신 미국 작가 알렉산더 리버만의 대형 금속설치미술품 ‘아치웨이(Archway)’다.
흥미로운 점은 이 ‘아치웨이’나 ‘제럴드 맨리 홉킨스’ 같은 대형 조각품은 안도 다다오의 설계상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형 설치미술이 관객의 눈길을 한눈에 사로잡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조각품들을 지운 건축을 상상해보니 이 공간이 좀 더 침묵과 명상을 유도하는 수도원 같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든다.
이는 현실적 고민으로 이어진다. 이 뮤지엄의 하루 평균 방문객은 500여 명 선. 점차 입소문이 나면서 지난 추석 연휴 때는 2300여 명까지 늘어나 뮤지엄 측은 방문객 숫자를 제한해야 하나 하는 고민에 빠졌다. 안도 다다오 건축의 진가를 만끽하려면 주말보다 평일에 이곳을 찾기를 권한다.
세계적 건축가들이 직접 디자인한 의자들. 중국에서 시작된 종이 제조 기술의 전파 과정을 소개한 페이퍼 갤러리 전시 공간.
노출콘크리트 벽면을 스크린 삼은 페이퍼갤러리 제1전시관의 표제.(왼쪽부터)[뮤지엄 산 제공]
청조 갤러리 전시품 중 페이퍼맨이 끊임없이 종이를 토해내는 모습을 형상화한 이주연 작가의 ‘엔트로피컬’(2008). 청조 갤러리 전시품 중 ‘폭풍의 언덕’과 ‘춘희’ 등의 책을 난도질해 해체한 뒤 재구성한 이지현 작가의 작품들(2017).(왼쪽부터)[뮤지엄 산 제공]
건축에 관심이 많은 사람을 위한 깜짝 선물도 숨어 있다. 청조 갤러리 외곽 1, 2층에 설치된, 건축가들이 직접 디자인한 의자들이다. 찰스 레니 매킨토시의 ‘힐 하우스 체어’(1902), 게리트 리트벨트의 ‘레드 앤 블루 체어’(1918),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배럴 체어’(1937), 미스 반 데 로에의 ‘바르셀로나 체어’(1939) 등을 비교해 살펴볼 수 있다. 편안하게 누울 수 있는 르 코르뷔지에의 LC4체어(1927)는 직접 체험해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