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F 케네디와 재클린 부부, 영화 ‘JFK’ 스틸컷, 영화 ‘재키’ 스틸컷(왼쪽부터). [GettyImage, Warner Bros 제공, Fox Searchlight Pictures 제공]
정치인의 언행 하나하나는 쉴 새 없이 언론에 오르내리며 국민의 관심을 집중시킨다. 정치인들은 상대를 압도하는 매력적인 ‘이미지메이킹’에 신경 쓴다. 정치인들은 종종 조작된 ‘쇼정치’로 국민을 속이곤 하지만, 진정성 없는 쇼는 언젠가 발각되기 마련이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선거부터 후보자 간 합동 TV토론이 도입된 이래, 우리나라 정치인들도 ‘이미지 전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연예인 못지않은 물밑 작업에 공을 들인다. 전 세계를 통틀어 이미지 정치의 최고봉은 미국의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1917~1963) 부부가 꼽힌다. 당시 그 어느 할리우드 스타 커플도 케네디 부부만큼 조명받지 못했다. 대통령 케네디를 죽인 배후를 쫓는 영화 ‘JFK’와 동화 속 대통령 부부의 이면을 마주하는 영화 ‘재키’ 두 편을 소개한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선거부터 후보자 간 합동 TV토론이 도입된 이래, 우리나라 정치인들도 ‘이미지 전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연예인 못지않은 물밑 작업에 공을 들인다. 전 세계를 통틀어 이미지 정치의 최고봉은 미국의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1917~1963) 부부가 꼽힌다. 당시 그 어느 할리우드 스타 커플도 케네디 부부만큼 조명받지 못했다. 대통령 케네디를 죽인 배후를 쫓는 영화 ‘JFK’와 동화 속 대통령 부부의 이면을 마주하는 영화 ‘재키’ 두 편을 소개한다.
과학적 분석이 불 지핀 음모론
영화 ‘JFK’ 스틸컷. [Warner Bros 제공]
실존 인물을 다룬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은 감독이 던지는 메시지를 진실로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모든 예술처럼 영화도 감독 입맛대로 가공됐기 때문에 실화라고 할 수 없다. 올리버 스톤(74) 감독은 각색상(1979년 ‘미드나잇 익스프레스’)과 두 차례 감독상(1987년 ‘플래툰’, 1990년 ‘7월4일생’)으로 아카데미상 트로피를 거머쥔 세계적 감독이다. 베트남전의 허상과 망상을 날카롭게 비판하며 아카데미상을 재패한 그는 이후 미국 국내로 시선을 돌린다. 두 번째 아카데미상 수상 직후 그가 물색한 신작은 바로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이었다.
취임 3년째 되던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 대통령과 영부인 재클린은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텍사스주 댈러스로 이동했다. 지난 대선에서 케네디는 근소한 차이로 닉슨을 누르고 승리했다. 취임 이후 최연소 대통령 케네디의 국내외 인기는 하늘 높이 치솟았다. 패션 아이콘인 아내 재클린도 전 세계의 이목을 한 몸에 받으며 케네디 신화에 한몫했다. 그들은 TV시대에 가장 큰 혜택을 입은 최초의 ‘셀럽’이었다. 케네디는 시선, 손짓, 말투, 표정까지 완벽하게 자신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케네디의 인기는 높았지만 모든 이가 케네디에게 열광하지는 않았다. 그를 좋아하는 열성팬만큼 안티 팬도 많았다. 코앞에 다가온 재선 고지에 안착하기 위해 케네디는 남부 유권자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정치적인 선택의 기로에서 그는 유권자와의 정면승부를 택했다. 대통령 부부는 서슴지 않고 시민들과 악수했고, 그때마다 주변을 경계하며 경호원들은 간담을 쓸어내렸다. 케네디는 임기 내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대통령’이라는 콘셉트를 고수했고, 댈러스에서 링컨 컨버터블 리무진의 지붕을 열고 카퍼레이드를 하다가 암살당했다.
세 번째 총성 이후 그가 쓰러지는 그 몇 초간은 아직까지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수많은 음모론도 꼬리를 문다. 현장 증거 보존이나 수사 진행 방식이 허술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응급실에서 사투를 벌이는 동안 살점이 낭자한 피투성이 리무진을 말끔하게 청소하는 등 범죄 현장 보존 법칙이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총알의 궤도를 짐작할 수 있는 케네디의 뇌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2시간 만에 오스왈드를 체포한 것 이외에는 모든 것이 대통령 시해사건이라 믿기지 않을 엉성한 절차였다.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JFK’는 그 논란의 중심에서 설득력 있는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음모론에 불을 지폈다. 영화는 JFK 암살에서 1968년 클레이 쇼의 재판까지 한 검사의 끈질긴 수사 과정을 다룬다. 암살 당일로 돌아가 보자.
취임 3년째 되던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 대통령과 영부인 재클린은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텍사스주 댈러스로 이동했다. 지난 대선에서 케네디는 근소한 차이로 닉슨을 누르고 승리했다. 취임 이후 최연소 대통령 케네디의 국내외 인기는 하늘 높이 치솟았다. 패션 아이콘인 아내 재클린도 전 세계의 이목을 한 몸에 받으며 케네디 신화에 한몫했다. 그들은 TV시대에 가장 큰 혜택을 입은 최초의 ‘셀럽’이었다. 케네디는 시선, 손짓, 말투, 표정까지 완벽하게 자신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케네디의 인기는 높았지만 모든 이가 케네디에게 열광하지는 않았다. 그를 좋아하는 열성팬만큼 안티 팬도 많았다. 코앞에 다가온 재선 고지에 안착하기 위해 케네디는 남부 유권자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정치적인 선택의 기로에서 그는 유권자와의 정면승부를 택했다. 대통령 부부는 서슴지 않고 시민들과 악수했고, 그때마다 주변을 경계하며 경호원들은 간담을 쓸어내렸다. 케네디는 임기 내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대통령’이라는 콘셉트를 고수했고, 댈러스에서 링컨 컨버터블 리무진의 지붕을 열고 카퍼레이드를 하다가 암살당했다.
세 번째 총성 이후 그가 쓰러지는 그 몇 초간은 아직까지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수많은 음모론도 꼬리를 문다. 현장 증거 보존이나 수사 진행 방식이 허술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응급실에서 사투를 벌이는 동안 살점이 낭자한 피투성이 리무진을 말끔하게 청소하는 등 범죄 현장 보존 법칙이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총알의 궤도를 짐작할 수 있는 케네디의 뇌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2시간 만에 오스왈드를 체포한 것 이외에는 모든 것이 대통령 시해사건이라 믿기지 않을 엉성한 절차였다.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JFK’는 그 논란의 중심에서 설득력 있는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음모론에 불을 지폈다. 영화는 JFK 암살에서 1968년 클레이 쇼의 재판까지 한 검사의 끈질긴 수사 과정을 다룬다. 암살 당일로 돌아가 보자.
광장에 울린 세 발의 총성
영화 ‘JFK’ 포스터와 영화 ‘JFK’ 중 1963년 11월 22일 당시 퍼레이드를 재현한 스틸컷 , 케네디 암살 장면이 담긴 필름을 확대한 영화 장면(왼쪽부터).
댈러스는 전날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려 잔뜩 흐린 날씨였다. 16km 카퍼레이드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전 10시 반부터 거짓말처럼 날이 개기 시작했고, 댈러스 시민들은 대통령을 보기 위해 발 디딜 틈 없이 집결했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려 영부인의 표정이 어두워질 것을 대비해 핑크색 필박스 모자를 의상과 세트로 준비했다. 케네디 부부는 10만 명 이상 되는 시민의 환호를 받으며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인사했다. 낮 12시 30분, 인파로 빼곡한 시내 중심을 막 벗어난 차량은 비교적 한산한 딜리 플라자 광장에 당도했다. 그리고 어디선가 세 발의 총성이 광장에 울려 퍼쳤다.
그날의 증거 자료는 3000여 점이나 된다. 하지만 결정적인 한 방이 없다. 더구나 풀리지 않는 의문을 뒤로한 채, 일부 미공개 자료는 아직 봉인돼 메릴랜드 국립문서보관소에 있다.
사건 10개월 후, 대법원의 얼 워런 판사가 의장을 맡은 진상규명위원회는 24세의 백인 청년이자 가장인 하비 오스왈드(게리 올드만 분) 단독범행으로 결론 내리고 수사를 종결했다. 그는 소련으로 망명한 전력이 있었고, 반(反)케네디 정서를 가진 인물이었다. 피델 카스트로 당시 쿠바 사회주의혁명통일당 서기를 적극 지지하기도 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오스왈드는 텍사스 교과서 창고 6층에서 만리허-카르카노 소총으로 3발의 실탄을 발사했다. 첫 번째 총알은 인도에 맞아 시민을 다치게 했고, 두 번째 총알은 케네디와 앞좌석에 동승한 존 코너리 텍사스 주지사를 관통했고, 마지막 총알은 대통령의 머리를 명중해 치명상을 입혔다고 발표했다. 대낮에 그것도 미국 대통령이 이렇게 허무하게 생을 마감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스톤 감독은 영화 ‘JFK’를 통해 공항에 내린 대통령이 암살돼 관에 실려 다시 워싱턴으로 향하는 데 15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한다. 감독은 케네디 암살 배후 규명 수사를 진두지휘했던 실존 인물 짐 게리슨 검사(케빈 코스트너 분)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영화를 전개한다. 게리슨 검사는 적극적으로 영화 제작에 참여했다. 자신의 저서 ‘케네디 대통령 암살의 진상’을 적극 영화에 인용토록 했으며, 판사 역을 맡아 법정에서 배우로 출연하기도 한다. 그는 1969년 유일하게 JFK 암살 배후로 경제인 클레이 쇼(토미 리 존슨 분)를 기소하며 중앙정보국(CIA)과 모종의 연결선을 의심케 만들었다. 영화를 그대로 따라가면, 관객은 케네디의 평화적인 외교·국방 정책으로 괴멸할 위기에 처한 거대 조직(군수기업, 정보기관, 마피아 등)이 치밀하게 계획해 저지른 암살이라는 걸 깨닫는다. 다만 증거는 없고 증언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실제 재판에서 배심원들은 1시간도 안 돼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인 클레이 쇼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스톤 감독은 참혹한 케네디 암살 장면이 적나라하게 담긴 8mm 필름을 35mm로 확대해 영화에 삽입하며 차근차근 당시 상황을 설명한다. 영화는 케네디가 한 방향이 아닌 여러 방향에서 교차 사격당했다는 가설을 소개한다. 스톤 감독은 게리슨 검사를 통해 오스왈드의 단독범행이라고 결론 내린 워런위원회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또한 ‘마술탄환’이라고 이름 붙은 총알을 주목한다. 검사는 하나의 총알이 케네디를 관통해 앞좌석의 코너리 주지사의 등과 가슴, 손바닥, 손등, 허벅지까지 총상을 남길 수 있는 각도가 되려면 총알이 마법처럼 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법총알은 과학적으로 가능하다고 입증됐지만, 반박 의혹을 단번에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다.
영화에서 게리슨 검사는 히틀러의 “큰 거짓말일수록 대중은 쉽게 믿는다”를 인용하며 암살 이면에 도사리는 거대 조직을 연상케 한다. 그런데 이는 무언가를 숨기는 정부와 거대 조직뿐 아니라 감독 자신도 가리킨다.
영화 JFK는 관객에 신뢰를 주는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찍어 영화를 보는 관객은 깜빡 속는다. 영화 속 암살 영상은 사실 교묘하게 뉴스 영상과 짜깁기돼 관객을 혼란스럽게 한다. 스톤 감독 스스로도 영화 개봉 전 “암살에 가능한 모든 시나리오를 연구했을 뿐”이라며 영화에 나오는 장면은 기존 영상을 잘라 맞춰 편집한 사실을 인정했다. 영화는 실제로 자연사한 다른 용의자 데이비드 페리가 의문사당하는 것으로 설정해 음모론을 증폭시켰다. 아이러니하게도 진실을 규명한다고 항변하는 영화조차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 명쾌하게 밝혀줄 증거들이 보존되거나 공개되지 않았기에 지금은 그 누구도 명확하게 진실을 규명할 수 없다. 50년이 지나도 케네디라는 전설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그의 암살에 대한 의혹의 눈초리 또한 끊이지 않을 것이다.
그날의 증거 자료는 3000여 점이나 된다. 하지만 결정적인 한 방이 없다. 더구나 풀리지 않는 의문을 뒤로한 채, 일부 미공개 자료는 아직 봉인돼 메릴랜드 국립문서보관소에 있다.
사건 10개월 후, 대법원의 얼 워런 판사가 의장을 맡은 진상규명위원회는 24세의 백인 청년이자 가장인 하비 오스왈드(게리 올드만 분) 단독범행으로 결론 내리고 수사를 종결했다. 그는 소련으로 망명한 전력이 있었고, 반(反)케네디 정서를 가진 인물이었다. 피델 카스트로 당시 쿠바 사회주의혁명통일당 서기를 적극 지지하기도 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오스왈드는 텍사스 교과서 창고 6층에서 만리허-카르카노 소총으로 3발의 실탄을 발사했다. 첫 번째 총알은 인도에 맞아 시민을 다치게 했고, 두 번째 총알은 케네디와 앞좌석에 동승한 존 코너리 텍사스 주지사를 관통했고, 마지막 총알은 대통령의 머리를 명중해 치명상을 입혔다고 발표했다. 대낮에 그것도 미국 대통령이 이렇게 허무하게 생을 마감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스톤 감독은 영화 ‘JFK’를 통해 공항에 내린 대통령이 암살돼 관에 실려 다시 워싱턴으로 향하는 데 15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한다. 감독은 케네디 암살 배후 규명 수사를 진두지휘했던 실존 인물 짐 게리슨 검사(케빈 코스트너 분)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영화를 전개한다. 게리슨 검사는 적극적으로 영화 제작에 참여했다. 자신의 저서 ‘케네디 대통령 암살의 진상’을 적극 영화에 인용토록 했으며, 판사 역을 맡아 법정에서 배우로 출연하기도 한다. 그는 1969년 유일하게 JFK 암살 배후로 경제인 클레이 쇼(토미 리 존슨 분)를 기소하며 중앙정보국(CIA)과 모종의 연결선을 의심케 만들었다. 영화를 그대로 따라가면, 관객은 케네디의 평화적인 외교·국방 정책으로 괴멸할 위기에 처한 거대 조직(군수기업, 정보기관, 마피아 등)이 치밀하게 계획해 저지른 암살이라는 걸 깨닫는다. 다만 증거는 없고 증언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실제 재판에서 배심원들은 1시간도 안 돼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인 클레이 쇼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스톤 감독은 참혹한 케네디 암살 장면이 적나라하게 담긴 8mm 필름을 35mm로 확대해 영화에 삽입하며 차근차근 당시 상황을 설명한다. 영화는 케네디가 한 방향이 아닌 여러 방향에서 교차 사격당했다는 가설을 소개한다. 스톤 감독은 게리슨 검사를 통해 오스왈드의 단독범행이라고 결론 내린 워런위원회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또한 ‘마술탄환’이라고 이름 붙은 총알을 주목한다. 검사는 하나의 총알이 케네디를 관통해 앞좌석의 코너리 주지사의 등과 가슴, 손바닥, 손등, 허벅지까지 총상을 남길 수 있는 각도가 되려면 총알이 마법처럼 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법총알은 과학적으로 가능하다고 입증됐지만, 반박 의혹을 단번에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다.
영화에서 게리슨 검사는 히틀러의 “큰 거짓말일수록 대중은 쉽게 믿는다”를 인용하며 암살 이면에 도사리는 거대 조직을 연상케 한다. 그런데 이는 무언가를 숨기는 정부와 거대 조직뿐 아니라 감독 자신도 가리킨다.
영화 JFK는 관객에 신뢰를 주는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찍어 영화를 보는 관객은 깜빡 속는다. 영화 속 암살 영상은 사실 교묘하게 뉴스 영상과 짜깁기돼 관객을 혼란스럽게 한다. 스톤 감독 스스로도 영화 개봉 전 “암살에 가능한 모든 시나리오를 연구했을 뿐”이라며 영화에 나오는 장면은 기존 영상을 잘라 맞춰 편집한 사실을 인정했다. 영화는 실제로 자연사한 다른 용의자 데이비드 페리가 의문사당하는 것으로 설정해 음모론을 증폭시켰다. 아이러니하게도 진실을 규명한다고 항변하는 영화조차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 명쾌하게 밝혀줄 증거들이 보존되거나 공개되지 않았기에 지금은 그 누구도 명확하게 진실을 규명할 수 없다. 50년이 지나도 케네디라는 전설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그의 암살에 대한 의혹의 눈초리 또한 끊이지 않을 것이다.
이미지 정치의 달인은 재클린
영화 ‘재키’ 스틸컷. [Fox Searchlight Pictures 제공]
영화 ‘재키’(재클린의 애칭)도 존 F 케네디의 암살을 다루지만 영화는 순전히 영부인 재클린(1929~1994)의 심리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는 암살 며칠 후 백악관에서 진행된 월간지 ‘라이프’의 테오도르 화이트(빌리 크루덥 분)와 나눈 재클린(내털리 포트먼 분)의 인터뷰를 기점으로 현재와 과거를 오간다. 댈러스에서의 일정은 8월 조산아로 태어나 2일 만에 사망한 차남 패드릭 출산 이후 3개월 만에 대중 앞에 서는 자리였다. 재클린은 남편의 두개골이 산산조각 나는 현장을 목격했지만 기품을 유지했다. 이후 그녀는 케네디가 미국인에게 영원히 ‘신화 속의 영웅’으로 기억될 수 있는 마지막 행로를 기획했다. 그녀는 추모 행진을 비롯한 장례 절차의 소소한 부분 하나하나를 살피며 남편이 위대한 대통령으로 영원히 각인되는 기록을 남겼다. 진실보다 기록이 역사가 돼 후세에게는 사실로 알려질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문학을 전공한 23세의 재클린 부비에(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의 결혼 전 이름)는 워싱턴타임스-헤럴드 신문기자로 일하던 중 케네디 당시 상원의원을 모임에서 만난다. 띠동갑 나이 차이를 넘어 다음해 케네디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 재클린은 케네디의 정치 행보를 적극 내조한다. 퍼스트레이디 시절의 재클린은 심플하고 우아한 ‘재키룩’으로 세계인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여성들은 재클린을 스타일 ‘롤모델’로 삼았고, 그녀의 패션은 출시 즉시 ‘완판’됐다. 재클린은 대중을 사로잡는 법을 알고 있었다. 역사와 예술이 가진 파워를 잘 아는 그녀는 백악관에 입성하자마자 전임자들이 등한시했던 백악관 초기 유물 복원 작업에 박차를 가한다. 백악관 내부를 공개하고 직접 TV에 출연해 백악관의 역사에 대해 국민에게 설명했다. 재클린의 예상은 적중했다. 링컨, 루스벨트 등 전임 대통령들이 실제 살았을 시대의 가구와 유물을 복원하자, 위인전으로만 읽혀지던 위인들은 살아 있는 역사가 돼 국민에게 기억됐다. 그녀 덕분에 백악관은 미국인이 역사를 탐방하고 자부심을 고취시키는 명소로 탈바꿈했다.
프랑스문학을 전공한 23세의 재클린 부비에(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의 결혼 전 이름)는 워싱턴타임스-헤럴드 신문기자로 일하던 중 케네디 당시 상원의원을 모임에서 만난다. 띠동갑 나이 차이를 넘어 다음해 케네디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 재클린은 케네디의 정치 행보를 적극 내조한다. 퍼스트레이디 시절의 재클린은 심플하고 우아한 ‘재키룩’으로 세계인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여성들은 재클린을 스타일 ‘롤모델’로 삼았고, 그녀의 패션은 출시 즉시 ‘완판’됐다. 재클린은 대중을 사로잡는 법을 알고 있었다. 역사와 예술이 가진 파워를 잘 아는 그녀는 백악관에 입성하자마자 전임자들이 등한시했던 백악관 초기 유물 복원 작업에 박차를 가한다. 백악관 내부를 공개하고 직접 TV에 출연해 백악관의 역사에 대해 국민에게 설명했다. 재클린의 예상은 적중했다. 링컨, 루스벨트 등 전임 대통령들이 실제 살았을 시대의 가구와 유물을 복원하자, 위인전으로만 읽혀지던 위인들은 살아 있는 역사가 돼 국민에게 기억됐다. 그녀 덕분에 백악관은 미국인이 역사를 탐방하고 자부심을 고취시키는 명소로 탈바꿈했다.
영화 ‘재키’ 포스터.
영화 ‘재키’는 케네디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재클린이 얼마나 진취적으로 이미지메이킹에 열과 성을 쏟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케네디의 여성편력으로 원만하지 못한 부부관계를 영위했다고 세간에 알려져 있지만, 행복이 넘치는 케네디 부부의 공개 사진들만 봐도 이들이 얼마나 천생연분이었는지를 잘 말해준다.
‘이미지메이킹’은 자신이 가진 긍정적인 장점을 최대한 부각하는 작업이다. 흥미진진한 오락적인 구경거리로 선동과 선전을 일삼는 ‘쇼’와는 다르다. 우리나라 정치사에서 케네디처럼 진정한 이미지를 기록할 정치인은 언제쯤 만나볼 수 있을까.
#JFK #재키 #영화 #신동아
‘이미지메이킹’은 자신이 가진 긍정적인 장점을 최대한 부각하는 작업이다. 흥미진진한 오락적인 구경거리로 선동과 선전을 일삼는 ‘쇼’와는 다르다. 우리나라 정치사에서 케네디처럼 진정한 이미지를 기록할 정치인은 언제쯤 만나볼 수 있을까.
#JFK #재키 #영화 #신동아
황승경
● 1976년 서울 출생
● 이탈리아 레피체국립음악원 디플럼,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성균관대 공연예술학 박사
● 국제오페라단 단장
● 前 이탈리아 노베 방송국 리포터, 월간 ‘영카페’ 편집장
● 저서 : ‘3S 보컬트레이닝’ ‘무한한 상상과 놀이의 변주’
● 1976년 서울 출생
● 이탈리아 레피체국립음악원 디플럼,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성균관대 공연예술학 박사
● 국제오페라단 단장
● 前 이탈리아 노베 방송국 리포터, 월간 ‘영카페’ 편집장
● 저서 : ‘3S 보컬트레이닝’ ‘무한한 상상과 놀이의 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