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7월호

미국 방조와 소련 동조의 합작품, 6·25는 내전 아닌 국제전

  •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정치학 wblee@aks.ac.kr

    입력2006-07-21 10: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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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방조와 소련 동조의 합작품, 6·25는 내전 아닌 국제전

    1950년 6월17일 애치슨 미 국무장관 특사로 방한한 덜레스(가운데 양복 입은 키 큰 사람)가 38선을 시찰하고 있다. 오른쪽 옆은 신성모 국방장관.

    수정주의자들은 1950년 6월25일 발발한 전쟁이 남북한의 대결적 정부수립 이후 조성된 내전적 상황의 연장선에서 일어났다는 이른바 내전론을 1980년대 이래 제기해왔다. 1946년 10월 대구에서 폭동이 일어났으며 1948년부터 1950년 초까지 제주도 4·3사건과 여수·순천 10·19사건 같은 비정규전이 이어졌다. 특히 1949년 여름에는 38선 근처에서 소규모의 정규전이 빈발했으며 지리산 일대에서 좌익 유격대가 대규모 공세를 감행하기도 했다.

    1949년 1월부터 7월까지 남한은 38선에서 주도적으로 공격했으며 북한은 비교적 소극적으로 응전했다. 1월부터 4월까지는 소규모 병력이 충돌했으나 5월부터 7월 사이에는 연대급 전투도 발생했다. 이 시기 공세의 바탕이 된 것은 대한민국 정부의 자신감이었다.

    1949년 6월 미군이 철수하자 북한은 같은 해 7월 남조선인민유격대를 조직해 7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이른바 7월 공세와 9월 공세라는 대규모 무장유격전을 전개했다. 이러한 무장유격전은 민중봉기를 유도하는 한편 정부병력을 공비 준동 지역에 고정 배치함으로써 38선지역의 국군병력을 약화하려는 목적을 띠고 있었다.

    1949년 8월 병력 및 장비 면에서 대한민국과 대등한 수준에 이른 북한은 38선 부근에서 주도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8월4일 북한은 3개 대대 병력을 동원해 옹진을 공격했다. 대한민국 국군은 이 전투에서 궤멸 직전까지 몰렸다.

    소련은 슈티코프 대사를 통한 김일성의 8월12일자 개전(開戰) 동의 요청에 대해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차원에서 심각하게 검토했다. 9월24일 소련공산당 중앙위 정치국은 현 시점에서 남침을 승낙하지 않으면서 북한 인민군을 강화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평양 주재 소련대사 슈티코프는 10월4일 김일성과 박헌영에게 전면적 대남전쟁 불가 결정을 통보했으며 이들은 공식적으로는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은 은파산 탈환에 나서는 등 이 지시에 완전히 복종하지는 않았으나 1949년 12월부터 1950년 5월까지 중대급 이상이 동원된 충돌은 없었다.

    중대급 이상의 38선 충돌이 잠시 주춤해 전쟁으로 직결되지는 않았지만, 북한은 소규모의 38선 충돌을 지속함으로써 병력 증강, 실전급 훈련, 무장 강화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며 옹진반도에서 쌓은 전투 경험을 토대로 ‘도발받은 정의의 반공격전’이라는 개전형식을 창출하는 등 핵심적인 전쟁계획과 전쟁관(觀)을 수립했다. 따라서 6월25일 북의 공격은 38선 충돌과 관련돼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내전론자들은 1950년 6월25일 북한의 남침은 전쟁의 시작이 아니라 이전에 지속된 남북갈등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새로운 상황으로 국면이 전환되는 계기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연 6·25 이전 남북갈등은 전쟁의 서막이었나.

    내전이 격화돼 6·25전쟁으로 상승된 측면도 있지만 1949년 말부터 1950년 6·25 직전까지 ‘정찰시 발생한 소규모의 충돌’이 아닌 대규모의 국경 분쟁이 없었던 점에 비추어 보면 국경출동이 6·25전쟁으로 직접 비화한 것은 아니다. 스탈린이 1949년 말 이후 국경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김일성을 통제한 것이 그 원인이다.

    내전적 상황은 작은 배경일 뿐

    또한 1949년 9월 공세가 실패한 이후 북의 유격투쟁 전략은 북로당 빨치산 출신들이 주장하는 국지전 전략으로 바뀌었다. 정규군 수준의 대규모 유격대를 남파했으나 대부분 강원도 태백산 지구에서 한국군의 포위망을 뚫지 못해 실패했다. 게다가 북이 예상했던 남한 내 자생적 유격대 투쟁 및 남로당원 봉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으므로 전쟁을 외부 지원 없이 할 수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스탈린이 1950년 1월30일 김일성의 남침에 동의했기에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동의하지 않았다면 국경충돌에 그쳤을 뿐 대량살상의 전면전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므로 내전적 상황은 전면전 발발의 종속변수에 지나지 않는다. 전쟁 발발의 직접적인 원인은 북방 3국, 즉 소련·중국·북한 국제공산주의자들의 공모에 있었으며 남북 간 갈등은 부차적 변수였다. 분할점령이 없었다면 좌우 갈등은 있었을지라도 전면전은 물론 내전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므로 전쟁의 근본 책임은 미·소에 있다.

    따라서 국제적 규모의 갈등과 관련해 볼 때 내전적 상황은 하나의 작은 배경일 뿐이다. 이렇게 국제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한 전쟁이었으므로 6·25전쟁은 ‘국제전적 내전’이 아니라 ‘내전적 상황을 이용한 국제전’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즉 남한의 내전상황에 북한과 소련, 중국이 개입해 결국 남북 간의 전면적인 정규전이 일어난 것이다. 미·소의 세계적 대립인 냉전체제가 한반도에도 침투해 내전적 상황으로 상승된 국면에서 국제적 전쟁으로 전화되기 위해서는 외세의 개입이 필수적이었다.

    처음에는 내전으로 출발한 것처럼 보이지만 국제적 성격이 짙은 분단이 근본적 배경이었고 스탈린의 승인이라는 외적 요인이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친 복합적인 전쟁이었다. 초기에는 내전과 국제전이 복잡하게 얽힌 복합전쟁이었고 미국과 중국의 개입으로 국제전적인 성격이 강화됐으므로 국제전적 요소는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역사에는 여러 요인이 있으며 그 요인들은 복합적으로 상호관계를 맺고 있다. 그런데 여러 요인 중에는 직접적 원인이 있고, 나머지는 배경적 요인으로 간주할 수 있다. 암처럼 원인과 배경을 분간하지 못할 때 그 요인들의 가중치를 매길 수는 있다. 이를테면 미·소의 한반도 분할점령이 한반도 분열의 외적 요인임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독립운동 시기에 이미 부각된 좌우 양 진영의 분열이 분단의 내적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독립운동 시기의 좌우분열은 분단의 배경이었을 뿐이다. 분단의 직접적 원인은 분할점령이었다. 민족 내부의 좌우대립(내적 요인)은 외적 규정력(외적 요인)을 강화한 배경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외적 요인이 없었다면 프랑스나 이탈리아처럼 극심한 이데올로기 투쟁은 거쳤을지언정 분단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좌우대립이 그토록 치명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좌우분열은 분단의 부차적 요인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고 내적 요인을 무시할 수는 없다. 만약 내적 요인이 없었다면, 즉 좌우가 똘똘 뭉쳤다면 오스트리아처럼 통일됐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인(外因)과 내인(內因)은 분단의 필요충분조건이었다. 그렇지만 외인이 없었다면 무조건 통일됐을 것이며 내인이 없었다면 통일이 될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외인이 내인보다 훨씬 압도적이고 중요했다는 말이다. 만약 내인이 없었고 미·소가 우리를 강압적으로 분단하려는 의지가 강하지 않았다면 통일이 됐을 것이다.

    스탈린의 동의가 가장 중요

    6·25전쟁의 개전에 관해서도 복합론을 인정하는 동시에 가중치를 두는 해석이 가능하다. 탈(脫)냉전시대 북한의 남침 사실을 확인해주는 소련의 자료가 공개돼 6·25는 김일성이 시작한 전쟁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6·25 전쟁은 개전을 주장하는 김일성의 의지에 스탈린이 동의해 일어났다. 전쟁 발발 국면에서 결정적 요인인 김일성의 개전의지를 제외한다면 국제적 요인이 국내적 요인보다 중요했다. 국제적 요인 중 스탈린의 동의가 가장 중요하며 다음으로는 중국 공산화와 이에 따른 무력지원, 그리고 마오쩌둥(毛澤東)의 개전 동의다. 미·소 냉전체제 형성에 따른 한반도 분단체제 구축이 6·25전쟁의 근원적 기원이었으며,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벌어진 남한에서의 게릴라전과 38선 근처에서의 무력충돌은 ‘내전적 기원’이고 ‘발발 국면에서의 국내적 배경’이다.

    미국 방조와 소련 동조의 합작품, 6·25는 내전 아닌 국제전

    6·25전쟁 당시의 미 트루먼 대통령(가운데)과 국무장관 애치슨(오른쪽). ‘애치슨 라인’은 6·25전쟁 발발의 한 배경이 됐다.

    그렇지만 이는 배경일 뿐 발발의 직접적 원인은 아니다. 모든 것이 발발의 배경은 될 수 있으나 이중 가장 중요한 인과적 요인이 발발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원인을 직접적 원인과 간접적 원인으로 나누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간접적 원인을 배경으로 간주한다면 명실상부한 인과적 원인(cause)은 직접적 원인밖에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 기원(起源, origin)은 배경의 하나이며 말 그대로 근원적 배경이다.

    김일성이 중국 공산화와 미군철수 등 국제적 역학관계 변화 속에 스탈린의 동의와 지원, 모택동의 동의를 얻어 전쟁 발발을 주도했으므로, 전쟁의 직접적 원인은 국제적 상황인 북한-중국-소련 북방 3각관계라고 할 수 있다. 6·25전쟁은 내전이 아니라 국제전인 것이다.

    그렇다면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미국이 김일성의 도발을 유도했는지가 다음으로 중요한 문제다. 한국과 미국의 진보적 연구자들(브루스 커밍스 등의 수정주의자 그룹) 중에는 미국이 고의적으로 남침을 유발(provoke)했다고 보는 인사들이 있다. 이에 비해 정통 연구자(전통주의자)들 중에서도 미국의 정책적 비일관성이 북한의 오판을 야기했다(공격의 푸른 신호를 보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수정주의자들은 미국의 ‘음모’가 개재됐다고 파악하는 데 비해 전통주의자들은 미국의 ‘실수’가 남침을 불렀다고 주장한다. 이에 비해 매트레이는 ‘실수’나 ‘오판,’ ‘일방적 음모’ 등이 있었다기보다는 미·북한의 치밀한 계산과 일관된 행동이 엮어져 전쟁이 발발했다고 주장했다.

    수정주의자들은 1949년의 미군 철군, 1950년 1월12일 애치슨(Dean Acheson) 미 국무장관의 한반도를 제외한 극동방위선(Acheson Line) 설정 등과 1950년 6·25 직후 미국의 즉각적 개입(rollback)이란 일련의 정책간 비일관성에 심상치 않은 계산이 개재돼 있다고 주장했다. 힘의 공백이 생긴 것처럼 북한이 느끼게 해 남침을 유도했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미국의 고의적 음모라는 설명이다.

    음모의 증거는 미국의 개입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말고는 거의 없다. 음모론(conspiracy theory)은 모든 상황을 확실한 증거로 분석하는 게 아니라 추론으로 분석함으로써 반증하기 어려운 결론을 이끌어낸다고 비판받는다. 즉각적인 개입이 어떻게 음모의 유일한 증거가 될 수 있을까? 미국의 즉각 개입은 단순한 정책전환이거나(전통주의자), 신중한 계산에 따른 일관성 있는 예견된 행동(매트레이)으로 볼 수 있다.

    ‘미국의 불개입’ 함정(?)

    1949년 6월의 미군 철수를 ‘미국의 한국 포기’로 간주하는 시각이 있지만 이는 피상적인 해석이다. 미 군부가 원한 철군은 무조건적인 즉각 철수였으나 국무부의 시각은 달랐다. 그에 따라 철군은 군부와 국무부의 타협 속에 여러 보완조치가 선행된 다음 진행됐다.

    군부는 1945년 9월 한반도에 진주할 때부터 가용병력 부족과 전략적 가치의 저평가(低評價), 전쟁이 이미 끝났음을 들어 진주 자체에 반대했으며 이후로도 계속 철군을 주장했다. 하지(John R. Hodge) 사령관의 경우 초기에는 철군을 주장했지만, 북의 위협을 현장에서 감지하고 나서는 국무부의 시각에 동조했다. 즉 철수일정을 연기하고 남한의 군사적 안정을 꾀하려는 계획을 지지하면서, 외부침략에 대처하기 위해 남한에 더욱 적극적으로 군사원조를 제공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특히 1949년 중국 공산화 이후 미 국무부는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한층 적극적으로 인식하게 됐다.

    물론 1950년 1월 애치슨라인을 설정함으로써 ‘미국의 불개입’이란 함정을 파놓았다는 가설에 설득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후일 애치슨은 한국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었을 뿐 한국을 포기한다는 공약을 한 적은 없다고 주장했다. 애치슨의 연설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미국의 극동방위선은 알류샨 열도, 일본 본토를 거쳐 류큐(오키나와 섬)로 이어진다. …방위선은 류큐에서 필리핀으로 연결된다. …이 방위선밖에 위치한 나라의 안보를 위협하는 군사적 공격에 대해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다. 만약 공격이 있을 때에는 …제1차 조치는 공격을 받은 국민이 이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방위선 바깥 지역이 공격을 받는다면”이라는 말 뒤엔 “우선은 공격받은 국민이 그에 저항해야 하지만, 그 다음에는 유엔헌장 아래에서 전체 문명세계가 개입”할 것이라는 내용이 이어진다. 한국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애치슨의 사후 설명은 실제로는 남침을 유도했으면서도 ‘발뺌’하기 위해 거짓을 얘기했거나, 아니면 애치슨라인 설정이 남침의 한 원인이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변명’일 수 있다.

    애치슨의 의도는 미국이 대륙에서의 군사충돌을 회피하고 중국 내전에 개입하지 않으며 남한과 국민당이 유엔의 지원으로 자체 안보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표현에 주의하지 않았다. 스탈린과 마오쩌뚱은 우회화법을 읽지 못했다.

    그런데 실제로 5월초 상원 외교위원장 톰 코널리(Tom Connally)는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리포트’와의 회견에서 “한국의 위치는 중요하지 않고” 애치슨라인 이외의 한반도에 관련된 라인은 필요하지 않다고 명백히 말했다. 즉 오키나와와 필리핀을 연결하는 미국의 방위선에서 한국은 제외되며 한국을 포기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고 말했다. 또한 소련이 마음만 먹으면 쉽게 한국을 정복할 수 있다고 부기했다.

    ‘공격에의 초대’

    코널리는 “워싱턴의 정책결정자들이 이러저러한 일이 일어나면서 우리를 전쟁에 참여하게 만들 사건이 교묘히 만들어질 것이라고 믿고 있다(They believe that events will transpire which will maneuver around and present an incident which will make us fight)”는, 유도설을 연상시키는 언어도 구사했다. 이에 대해 애치슨은 5월3일 기자회견을 통해 코널리의 견해를 정정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거절했으므로 애치슨의 후일 주장은 발뺌일 가능성이 있다.

    코널리의 회견내용이 전해지자 한국 언론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5월9일 이승만은 코널리의 회견이 “공산주의자들에게 남한으로 쳐들어와서 점령해버리라고 노골적으로 청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an open invitation to the Communists to come down and take over South Korea)”고 비난했다.

    따라서 애치슨라인이 북의 오판을 어느 정도 야기했을 가능성은 있다. 리처드 닉슨은 1980년에 펴낸 책에서 “북한이 애치슨의 의도된 왜곡 발언에 오판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애치슨은 1951년 맥아더청문회에서 버드(Byrd) 상원의원이 “훈련도 안 돼 있고 장비도 형편없는 군대를 그곳에 남겨둔 것은 한마디로 공격에의 초대(an invitation for an attack)가 아니었는가”라고 질문했을 때, “그 점은 당신의 말이 맞는 것 같다(You may be right about that)”고 대답했다.

    물론 애치슨라인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철군 이후의 상황에 대한 언급이었지만, 이 발언은 남침 야기에 대한 애치슨의 ‘최대한 인정’이었다. 애치슨은 1970년에 발간한 회고록에서 “이것이 내가 1950년 1월에 던진 경고였고 침략자가 소홀히 한 경고였다”고 말해 자신은 침략을 하지 말라고 경고했을 뿐 침략을 유도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런데 위의 증언을 심층적으로 볼 때 애치슨라인은 커밍스의 주장처럼 대만 제외에 따른 대중(對中) 화해 제스처와 중-소를 이간하려는 의도에서 발표된 것이 아니라 분명 ‘북한에 대해 어떤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 발표된 면이 있었다. 그 메시지가 침략하지 말라는 경고이건 침략 유도이건 말이다.

    그런데 침략하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알류샨열도,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을 잇는 명시적 방위선에서는 빼고 태평양의 다른 지역(물론 한국을 이 지역으로 분류한다는 명시적인 구절은 없다)으로 분류한 것은 심상치 않다. 이 지역의 군사적 공격에 대한 저항은 일차로 공격받는 주민들에게 의존해야 하며 그런 연후에 상황이 재평가돼 유엔에 의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소극적으로 언급했다. 이것은 ‘롤백’보다는 ‘봉쇄’를 선호한 애치슨이 봉쇄의 원칙을 언술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런데 경고라면 ‘한국을 방위할 테니 침략하지 말라’는 명시적인 구절을 넣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을까? 그러나 애치슨은 경고의 특성에서 보이는 ‘과장되고 높은 톤’의 목소리를 배제하고 오히려 ‘남한은 유엔이 방위할 수 있다’는 소극적인 언사를 구사했다. 이를 두고 남한의 도발을 막기 위한 소극성의 발로라는 해석도 있지만 그보다는 ‘침략을 초대하려는’ 숨은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을 품게 한다. 후일 애치슨의 공화당 정적(政敵)들, 특히 매카시(Joseph McCarthy)는 애치슨이 공산주의자들에게 ‘공격하라는 파란 불(a green light for aggression)’을 보냈다고 비난했다.

    1950년 1월6일 대한민국 국무회의 내용을 통해서 드러난 바와 같이 미국은 한반도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정치지도자들의 우려 섞인 관측이었다. 그런데 1950년 1월25일자 북한 ‘로동신문’은 애치슨라인에 남한이 포함된다고 적고 있다.

    이것은 ‘뉴욕타임스’의 오보(誤報) 탓이었다. 애치슨은 1월12일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연설하면서 연설문 사본을 배포하지 않았으며 기자들은 메모에 의존해 기사를 작성했기 때문에 정확히 쓸 수 없었다. ‘뉴욕타임스’ 1월13일자는 한국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1월15일자에는 미군 점령하의 일본, 한국, 오키나와, 필리핀이 방위선에 포함된다고 명시했으며 자국민의 직접적 책임하에 있는 지역은 동남아시아라고 적었다. 이는 명백히 오보였다.

    이에 장면 대사는 애치슨 연설에 대한 이승만의 감사를 전했다. 그런데 북한은 ‘로동신문’ 2월10일자를 통해 “미국은 일본, 필리핀, 그리고 류큐열도를 통제할 것”이라고 언급하면서도 남한이 방위선 바깥에 위치하고 있음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애치슨방위선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 개입 막기 위해 선제공격”

    그런데 ‘로동신문’ 1950년 3월3일자와 10일자에는 “애치슨 연설은 거짓말과 선동으로 가득 차 있어 아시아의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전쟁을 준비한 의도를 숨기는 시끄러운 합창”이라고 비난해 일견 미국의 개입을 예견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으나 이는 북한 특유의 반미적 태도를 보인 것에 지나지 않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때 김일성의 ‘직속기자’였던 한재덕에 따르면 북한의 중앙통신사가 미국 뉴스통신사의 전문을 정기적으로 녹음했는데 애치슨 연설도 유선통신문으로 채록해 자신이 직접 김일성에게 전달했다는 것이다. 이에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의 지도자들이 크게 흥분했다는 증언인데, 한국이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된다는 것에 고무됐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런데 ‘야기한 행위’는 음모라기보다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unintentional result)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필자의 해석은 닉슨의 평가와 다르다. 또한 전쟁을 유발해서 바람직한 결과가 조성됐다면 음모를 꾸몄을 가능성도 있으나 전쟁이라는 부정적인 분란만을 일으켰을 뿐이므로 음모가 있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 것이다.

    물론 유발했다는 결정적 증거는 없으며 그럼직한 정황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애치슨라인은 6·25전쟁의 직접적 원인이 아니고 국제적 배경요인 중의 하나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김일성의 단정도 중요한 변수임에는 분명하나 전쟁을 일으킨 것은 그보다는 북한의 압도적 공격능력으로 신속하게 전쟁을 전개할 경우 미국의 개입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남한의 대중이 봉기한다면 미국에 준비할 시간과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고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내부적 요인이 결정의 1차적 변수이고 미국은 중요한 변수 중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매트레이는 북한이 미국의 불개입을 예상했기보다는 오히려 개입의 정도가 깊어질 것을 우려해 더 깊어지기 전에 남침을 도발했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군사원조가 성공해 남한이 확고하게 안정될 것(미국의 개입 전술 성공)을 두려워해 그것이 현실화되기 전에 전쟁을 개시했다는 추론이다. 즉 철군으로 조성된 힘의 공백이 장래의 더 큰 개입을 막기 위한 호기를 제공했다는 것.

    덜레스의 38선 시찰

    북한은 미국의 직접적 무력개입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군사비 지원 등의 간접개입은 예상했다고 매트레이는 해석했다. 한편 1950년 5월 중순 애치슨 국무장관의 개인 특사 덜레스(John Foster Dulles)의 남한 국회 연설과 이승만과의 회담, 38도선 시찰 등 일련의 행위에 대해 북한 지도부는 미국의 대한(對韓)정책이 바뀌어 개입 쪽으로 기울고 있다고 판단하고 이를 막기 위해 선제공격을 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미 국무부는 모든 위험상태를 계산에 넣고 정책을 시행했으며 북한의 위협을 의식해 남한을 안정시키려는 목표 아래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 간접개입 방침을 확대했다. 트루먼은 1949년 6월19일 의회가 대한(對韓) 원조를 승인한다면 미국은 아시아 전역에 평화와 민주주의를 실천할 주요 조치들을 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있게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반도는 공화국(한국)이 실천에 옮기고 있는 민주주의 이념과 원칙들이 북한 주민들에게 부과되고 있는 공산주의 통치와 서로 맞붙어 경쟁을 벌이고 있는 하나의 시험장이다. 공화국의 생존과 자립적이며 안정된 경제 발전은 전체 아시아인에게 지대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다. 미천한 공화국의 이러한 발전은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그리고 태평양 도서민들을 고무시켜 자신들을 에워싸고 있는 공산주의 선전에 대항해 이를 물리칠 수 있게 할 것이다. 나아가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의 성공과 더불어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민주주의의 저력을 보여줌으로써 자신들을 유린한 공산세력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려는 동아시아인의 등대가 될 것이다.”

    즉 한반도는 무력에 의존하지 않고 봉쇄를 실행하는 봉쇄정책(containment policy)의 시험장(test case)이었다. 실제로 1950년 선거가 민주적으로 치러져 정치적 안정이 달성될 수 있었고 재정위기도 호전되고 있었다. 또한 1950년 6월1일 트루먼은 미 의회가 예정된 군사원조를 승인하기만 하면 “이승만 정부가 북에서 감히 침략할 엄두조차 못 낼 만큼 강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공격받는다면 한국 방위할 것”

    나아가 6월17일 38선을 시찰한 덜레스는 6월19일 한국 국회에서 “만일 공격을 받는다면 미국은 한국을 방위할 것”이라고 다소 도전적인 어투로 공언했다. 이것이 이승만과의 북침 공모나 즉각적 개입을 위한 시나리오, 북침 혹은 남침유도 음모를 은폐하기 위한 위장예측, 공격할 자의 덮어씌우기 예언 등으로 해석되곤 하는데, 증거가 부족하다. 단순한 허풍이었을지도 모르는 덜레스의 방위공약이 ‘예상하지 못한 적중’이 돼버린 것.

    만약 김일성이 덜레스의 발언을 주목했다면 남침시 미국이 적극 개입하리라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이 이에 주목했다는 증거는 없다. NSC(국가안전보장회의) 8(철군주장; 1948년 4월2일)이 초래한 공백이 NSC 68(방위비 증가와 주변지역에서의 되돌림(Rollback); 1950년 4월14일)의 등장으로 메워지려 했을 때 전쟁이 일어났다.

    덜레스공약과 NSC 68에 따라 미국은 예견된 ‘즉각 개입’의 시나리오대로 움직였다. 애치슨라인을 상기하면 6월19일의 덜레스공약과 즉각 개입은 정책의 역전을 보여준 것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롤백을 주장하는 강경론자 덜레스와 봉쇄주의와 국제주의를 교묘히 섞어 공화당의 차이나로비에 맞선 애치슨은 물론 대비되는 면도 있다.

    그러나 미국은 철수와 무력개입이라는 양극적인 정책대안을 모두 고려하면서 어느 중간지점에서 정책을 수행했으며 한 번도 ‘포기’한 적은 없었다. 방위선에서는 제외했지만 대한민국에 대한 ‘유엔의 보호’를 암시적으로 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중국 공산화 이후 무력개입 쪽으로 기울었으며, 6·19(덜레스공약)는 그러한 무력개입 전략의 신호탄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미국의 철군과 불개입 선언’(수정주의적 유발설), ‘적극 개입에 대한 우려(매트레이)’ 둘 중 어느 것이 북의 행동을 유발했을까? 지금으로선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다만 둘 중 하나, 혹은 양자가 조장한 복합적인 불확실성을 타개하려는 북한의 시도가 전쟁으로 나타났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결론적으로 미국의 불분명한 한반도정책이 김일성의 도발을 가능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미국의 행동에 대한 북의 해석이 무력사용을 야기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즉 북한은 미국의 개입이 한층 확고해지기 전에 틈을 비집고 도발을 감행한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그것이 실수였건, 의도하지 않은 결과의 부산물이었건, 의도적 음모였건 간에, 힘의 공백, 즉 철군이 북의 도발과 오판을 유발한 정책이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북한은 전쟁을 도발하기 전 미국의 행동을 철저히 주시했으며, 도발 후에도 미국의 행동을 의식했다. 그런 점에서 미국은 소련과 더불어 김일성을 전쟁으로 몰고가는 데 가장 중요한 국제적 배경을 제공한 것이다.

    미국 방조와 소련 동조의 합작품, 6·25는 내전 아닌 국제전
    李完範

    1961년 출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동 대학 석·박사(한국정치 전공)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연구위원, 미국 조지타운대 및 하버드대 방문학자

    現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 교수(남북한 현대사)

    저서: ‘38선 획정의 진실’ ‘한국전쟁: 국제전적 조망’ ‘1980년대 한국사회 연구’


    애초부터 미·소는 남과 북의 정치인들에게 대결구도의 한 편에 설 것을 어느 정도 강요했으며 각각 쌍방의 후원세력에 물적·정신적 지원을 베풀었다. 양군의 철수는 김일성의 도발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만약 미군만이 철수하지 않았다면 김일성이 세계 최강의 미군과 직접 대결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소련만이 철군하지 않았더라면 소련은 김일성의 남침에 자동 개입하게 되는 상황을 제어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미·소 양군이 다 주둔했다면 미·소의 직접대결, 즉 3차대전을 의미하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남북한 양쪽을 통제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미·소 양군의 진주가 전쟁의 원초적 배경을 조성함과 동시에 미·소 양군의 철수가 그 중요한 배경을 제공한 셈이다. 그렇다면 6·25전쟁 발발에는 내전적 요인보다 국제정치적 상황이 훨씬 더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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