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호

“유럽의 중국관은 후기 계몽주의자들이 바꿔놓았다”

‘황홀한 도자기의 나라’에서 ‘황색 위협’으로

  • 안성찬 │ 서울대 HK연구교수·독문학 story@snu.ac.kr

    입력2011-06-22 10: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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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누아즈리(Chinoiserie·프랑스에서 유행한 ‘중국풍’)라는 문화양식이 생길 정도로 18세기 유럽에선 ‘중국 따라잡기’가 한창이었다. 하지만 ‘아래로부터의 계몽’을 요구하는 후기 계몽주의로 넘어가면서 중국의 이미지는 급전직하한다.
    • 초기 계몽주의자들에게 중국은 계몽군주제의 모델과 모범이었지만, 후기 계몽주의자들에게 중국은 단지 전제정치의 악몽에 불과했다. 몽테스키외와 루소가 꿈꾸었던 정치적 이상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민주적 공화제였던 것이다.
    “유럽의 중국관은 후기 계몽주의자들이 바꿔놓았다”
    문명의 순환적 발전과 쇠퇴를 분석한 방대한 저서 ‘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로 유명한 문명사가 아놀드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는 20세기 이후 세계사의 중심이 서양에서 동양으로 옮겨갈 것이라고 예견한 바 있다. 대항해 시대와 신대륙의 발견에 의해 열린 대서양권 중심 시대는 미국과 동양을 두 축으로 하는 태평양권에 자리를 내줄 것이며, 이후로는 동양이 세계사의 중심으로 부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토인비는 유럽이 세계사의 중심 역할을 한 대서양권 중심시대를 ‘모던 시대’라고 부르고 뒤이을 태평양권 중심시대를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불렀다.

    토인비가 아직 살아 있다면(그는 20세기 마지막 사반세기를 보지 못하고 죽었다) 그는 자신의 예견이 현실로 입증되고 있다고 주장할 것이며, 대다수 사람도 그의 주장에 동의할 것이다.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 근거는 물론 중국이 경제개방 이후 이룩한 놀라운 성과와 이를 바탕으로 국제무대에서 차지하게 된 새로운 위상에 있다. 지난 2001년 이후 중국은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독일을 차례로 제치고, 지난해에는 일본마저 추월해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부상했다. 최근 중국 사회과학원은 10년 내에 중국이 실질경제규모에서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의 경제대국으로 올라설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또 세계은행은 15년 내에 위안화가 달러, 유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통화의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미국 헤게모니가 쇠퇴하는 상황에서 중국의 급속한 부상은 향후 국제질서의 가장 중요한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토인비, “20세기 이후 세계사 중심은 동양”

    이에 따라 중국의 미래가 오늘날 세계 여러 나라에서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인해 생겨난 빈부격차, 관료주의적인 일당지배체제의 변화를 요구하는 정치적 민주화운동, 한족과 소수민족 사이의 갈등 등 수많은 난제를 안고 있는 중국 국내정치의 미래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것인가? 머지않은 장래에 현실로 나타날 중국과 미국의 패권투쟁은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 것인가? 그 끝에서 동양과 서양의 관계, 그리고 세계의 질서는 어떻게 재편될 것인가?

    세계사의 패권을 쥔 19세기 이래로 자신의 잣대를 가지고 동양을 규정해온 서양이 이러한 새로운 상황을 바라보는 심정과 시각은 매우 착잡하고 복잡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착잡한 심정과 복잡한 시각의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두려움이 아닐까 싶다. 이미 19세기 말 제국주의 시기에 서양은 이른바 ‘황색 위협(yellow peril)’이라는 표현으로 이 두려움을 표현한 바 있다. 당시 유럽에서는 백인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인구를 지닌 황인종이 백인의 존재와 서양의 문명을 위협할지 모른다는 인종이데올로기로 동양의 식민화를 부추겼었다. 20세기 후반에 서양은 일본과 한국의 경제성장을 경이로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뒤이어 이제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 중국이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오늘날의 상황 앞에서 서양은 ‘황색 위협’이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근래 미국과 유럽에서 중국학이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은 이러한 상황의 반영일 것이다. 중국학과와 중국연구소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이미 학과와 연구소를 보유하고 있는 대학에서도 그 규모가 크게 확장되고 있다. 이러한 열기의 주된 이유는 경제적 동기에 있을 것이다. 그 외에 중국의 과거와 현실을 분석해 미래를 진단하려는 것도 중요한 동기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동기와 관련된 중요한 테마 중 하나는 동서양 사이의 관계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재정립하기 위한 학문적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 해답은 이미 나와 있다. 평등하고 호혜적인 관계가 그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서양이 제국주의 세력으로 등장한 19세기 전까지 동서양이 평등하고 호혜적인 입장에서 교류했던 역사에 대한 연구가 요즘 관심을 끌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 번역돼 소개된 데이비드 먼젤로의 저서 ‘진기한 나라 중국: 예수회 적응주의와 중국학의 기원’과 ‘동양과 서양의 위대한 만남 1500~ 1800’은 이런 관점에서 서술된 것이다. 이 두 저서에서 먼젤로는 동서양 사이에 직접적인 접촉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근대 초에서 제국주의가 발호하기 직전인 18세기 말까지의 상호교류사를 살펴보고, “이제 동서양이 중화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21세기에는 진정한 호혜적 만남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기대를 피력하고 있다.

    “유럽의 중국관은 후기 계몽주의자들이 바꿔놓았다”

    중국 상하이의 야경.



    진기한 나라, 중국

    “유럽의 중국관은 후기 계몽주의자들이 바꿔놓았다”

    유럽인에게 중국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한 동방견문록.

    ‘진기한 나라 중국’은 17세기에 예수회 선교사들이 사용했던 표현으로, 여기에서 ‘진기한 나라’란 ‘curious’의 어원인 라틴어 ‘curiosus’의 의미, 즉 ‘엄밀하고 상세하게 연구해야 할’ 나라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진기한 나라 중국’이란 표현은 당시 유럽인들에게 비친 중국의 모습은 방대한 영토와 오랜 역사, 경제적 풍요와 위대한 정신문화를 두루 갖춘 나라였으며, 따라서 진지한 연구를 통해 많은 것을 받아들일 가치가 있는 나라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미 고대부터 중국은 실크로드를 통해 서양으로 전해진 비단, 도자기, 차 등 진귀한 물품으로 서양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진기한 나라’였다. 이러한 이미지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통해 더욱 증폭되었다. 당시 성서 다음으로 많이 팔린 이 책은 신비하고 풍요로운 이 진기한 나라에 직접 가보고 싶다는 욕망을 유럽인에게 불러일으켜, 대항해 시대의 개막과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에 일조했다. 대항해 시대의 개막 이후 동서양 사이에는 많은 직접적인 접촉이 이루어졌다. 이 접촉은 선교와 교역이라는 서양의 욕구에서 주로 생겨났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 시기의 접촉은 서방의 일방적인 구애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러한 관계는 18세기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19세기에 들어와 구애는 정복의 욕구로 바뀌게 된다.

    동서양 사이의 관계와 교류 역사에서 18세기는 매우 흥미로운 세기다. 계몽의 세기로 불리는 이 시기에 서양은 절대왕정 체제에서 계몽군주의 시대를 거쳐 시민국가로 나아가는 커다란 변혁을 겪었다. 이 시기까지 서양은 중국의 문화가 자신들의 문화보다 우월하다고 인정했으며, 당시 서양으로 흘러들어간 중국 문화는 시누아즈리(Chinoiserie·18세기 프랑스에서 유행하던 ‘중국풍’)라는 문화양식을 탄생시키고 계몽사상에 영향을 미치는 등 서양의 생활·정신문화의 발전에 직간접적으로 공헌했다. 그러나 계몽주의 말기에 중국은 한순간에 이미지 추락을 겪는다. 이때부터 서양은 우월감과 두려움이 묘하게 뒤섞인 감정과 시선으로 동양을 바라보게 된다. 이러한 시선으로부터 생겨난 오리엔탈리즘은 이후 서양이 동양에 자행한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적 침탈의 이데올로기적 토대가 되었다.

    이하에서는 18세기에 중국문화가 유럽문화에 미친 영향을 도자기와 정원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이어서 중국관(觀)의 급격한 변화가 생겨난 배경과 상황을 간략하게 그려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상호이해뿐만 아니라 오해도 문화교류의 중요한 요소라는 점이다. 문화교류에서 오해는 필연적인 것으로 무해한 것일 수도 있고, 심지어 생산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타문화에 대한 우월감에서 비롯된 오해는 타자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어, 치명적인 갈등을 빚어내고 나아가 커다란 환란을 야기할 수도 있다. 18세기 말 유럽에서 있었던 중국관의 변화는 이에 대한 흥미로운 예증을 보여준다.

    “유럽의 중국관은 후기 계몽주의자들이 바꿔놓았다”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의 오랑제리 정원.

    근대 이래로 유럽인에게 자기(瓷器)는 곧 중국을 의미했다. 이러한 사실은 영국 자기의 대명사인 본차이나라는 이름에 그대로 남아 있다. 영국 자기에 왜 중국을 뜻하는 차이나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지 의아해하는 사람이 적지 않고, 자기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 중에는 본차이나가 ‘born china’, 즉 중국산을 뜻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 본차이나(bone china)는 동물뼈(bone)를 재료의 중요한 성분으로 사용한 자기(china)를 뜻한다. 자기 하면 곧 중국을 떠올린 데서 생겨난 단어용법인 것이다. 일본을 통해 서양에 흘러들어간 칠기가 ‘japan’이라는 단어로 불리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a japan table’은 ‘일본식 탁자’가 아니라 ‘옻칠한 탁자’를 의미한다. 본차이나는 중국의 자기를 직접 생산하기를 열망했던 유럽인의 오랜 노력이 맺은 열매 중 하나다.

    아름답고 신비한 자태에 동양적 문양이 새겨진 중국 자기는 비단과 더불어 유럽인들이 가장 선망한 동양의 보물이었다. 토기와 도기는 만들기가 쉬워 이미 고대 이래로 세계 전역에 걸쳐 만들어져왔다. 그러나 투명하고 밝은 빛을 내는 데다가, 두드리면 맑은 소리가 나고, 얇으면서도 단단해 도자기의 백미로 꼽히는 자기의 제조방법은 근대 초까지도 동양, 그중에서도 특히 중국과 한국이 독점하고 있던 최첨단 소재의 제조기술이었다. 같은 동양권 안에서도 일본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끌고 간 도공들 덕분에 16세기에 들어서야 처음으로 자기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서양 자기의 역사는 이보다 두 세기나 더 늦은 18세기에 처음으로 시작된다.

    유럽 최초의 도자기 ‘마이센 자기’

    유럽에서 생산되는 도기와는 품질과 아름다움에서 비교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국적 정취의 신비감까지 지닌 중국의 자기는 유럽의 귀족과 부호들이면 누구나 소유하고 싶어하는 동양의 보물이었다. 절대주의 왕정 시대에 중국 자기는 유럽의 모든 왕가가 궁정을 화려하게 치장하고, 호화로운 다기와 식기로 성찬을 즐기기 위한 필수품이었다. 프랑스 부르봉왕가의 베르사유 궁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왕가의 쉔브룬 궁전, 독일 호엔촐레른왕가의 상수시 궁전 등 근대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지녔던 왕가의 궁전들에는 예외 없이 중국 도자기들로 장식된 ‘중국의 방’이 있다. 귀한 중국 도자기들로 가득 찬 방을 갖고 있다는 것은 최고의 권력과 부를 지닌 왕가에서나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중국 비단으로 만든 화려한 옷을 입고, 중국 다기로 중국차를 마시고, 중국 자기그릇에 식사를 하는 것은 이 시대 왕가들이 누리던 최고의 호사 중 하나였다. 상수시 궁전 숲 속의 중국 다원에는 중국 황제의 호사를 모방하고 싶어하던 유럽 군주들의 소망의 흔적이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유럽의 중국관은 후기 계몽주의자들이 바꿔놓았다”

    중국을 예찬한 계몽주의자 볼테르.

    오랫동안 중국 자기는 수요에 비해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귀한 수입품일 수밖에 없었다. 대항해 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동서양 간의 교역이 크게 확대되면서 중국 자기는 비단, 차와 더불어 유럽이 중국에서 수입하는 가장 중요한 물품이 되었다. 17세기부터 중국 자기는 대량으로 유럽에 수출되기 시작해, 18세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200여 척의 배로 1000만 점에 달하는 중국 자기를 유럽으로 실어 날랐다. 유럽의 모든 국가는 이 최첨단 소재의 비밀을 밝혀내 중국이 독차지하고 있는 엄청난 수익을 나눠 갖고 싶어했다. 이탈리아, 네덜란드, 영국 등 당시 유럽 과학기술의 선두국가들이 자기 제작에 도전했지만, 점토와 장석과 카오리나이트(고령토)를 적절한 비율로 섞어 만든 재료로 아름다운 형체를 빚어내 1200℃ 이상의 고온에서 구워내는 작업은 매번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굽는 과정에서 금이 가거나 깨져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유럽의 숙원은 뜻밖에도 근대 유럽의 후진국 독일에서 성취되었다. 그 주인공은 기상천외한 발상과 경이로운 행동력으로 수많은 일화를 남긴 작센의 아우구스트 강건왕(August der Starke)이었다. 그는 부국강병책의 일환으로 국고를 늘리기 위해 처음에는 연금술에 관심과 열정을 쏟았다. 그러나 합금으로 금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금 이상 귀한 가치를 지닌 중국 자기로 관심의 방향을 돌렸다. 그는 연금술사 뵈트거에게 중국 자기의 비밀을 밝혀내 생산하라는 명을 내렸다. 수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은 후 뵈트거는 마침내 1709년 카오리나이트를 주성분으로 하는 경질자기를 만들어 왕 앞에 내놓았다. 유럽에 자기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1710년 아우구스트 강건왕은 수도 드레스덴에서 30㎞ 떨어진 마이센의 알브레히츠부르크 성 안에 왕립자기제작원을 설립해 자기 생산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독일이 자랑하는 마이센 자기의 기원이다. 마이센 자기를 영어로는 드레스덴 차이나라고 한다.

    작센왕국에서 중국식 자기 제작에 성공했다는 소식은 즉시 유럽 모든 궁정의 빅뉴스가 되었다. 작센에서는 마이센 자기를 ‘백색 금(Weisses Gold)’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는데, 이 연금술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작센왕가는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뵈트거가 자기를 만들어낸 지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두 명의 도공이 마이센에서 탈출해 합스부르크왕가에 넘어감으로써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도 자기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는 루이 15세의 애첩 마담 퐁파두르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1768년 세브르에서 처음으로 경질자기 제작에 성공했다. 오랫동안 카오리나이트를 구할 수 없었던 영국에서는 그 대신 18세기 중반에 소뼈를 사용해 경질자기와 연질자기의 중간에 해당하는 자기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 후 오랜 세월에 걸쳐 뼛가루와 장석과 카오리나이트를 일정한 비율로 섞어 만드는 공정과정이 확립됨으로써 영국 도자기의 대명사 본차이나가 생겨나게 되었다.

    작센 주의 수도 드레스덴은 엘베 강의 아름다운 정취와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이 잘 어우러진 매력적인 도시로서 엘베 강가의 피렌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작센왕가의 영화를 보여주는 수많은 유적 중에서도 이 도시가 가장 자랑하는 것은 독일 바로크건축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츠빙거 궁전이다. 그리고 이 츠빙거 궁전이 자랑하는 가장 중요한 볼거리는 마이센 자기 박물관이다. 마이센 자기의 발전과정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전시되어 있는 이 박물관을 관람하다 보면, 가치 있는 외래문화를 처음에는 일방적으로 수입하다가 단순한 모방의 단계를 거쳐, 마침내 이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문화수용의 일반적인 과정이 한눈에 들어온다. 초기에는 형태, 색채, 문양 등 모든 면에서 중국 자기를 모방하다가, 점차로 고유한 자기가 제작되어, 유럽적인 형태와 색채를 지닌 화병과 자기인형이 생겨나는 과정은 매우 흥미롭다. 중국 자기를 모방하던 초기단계에 만들어져 오늘날 독일의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손님을 대접할 때 주로 사용하는 귀한 집기(什器)의 대명사가 된 양파문양(Zwiebel-muster) 식기와 다기세트는 외국문화 수용과정에서 흔히 생겨나는 흥미로운 사례를 보여준다.

    양파 없는 양파문양 ‘츠비벨무스터’

    자기 제작에 성공한 후 마이센 왕립자기제작원은 자기의 품질 향상과 함께 중국 문양, 특히 중국 백자의 대표적 문양인 청화문양을 모방하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마이센 왕립자기제작원이 설립된 지 20년이 지난 1730년에 마침내 중국의 청화백자를 모방한 자기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 이때 만들어진 첫 청화문양 중 하나가 양파문양이다. 이 문양이 들어간 자기는 작센왕실에서 사용하는 식기와 다기로 진상되었을 뿐 아니라, 독일과 유럽의 여러 도자기 제조업체에 의해 상품화돼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러나 유럽적인 문양의 자기가 다양하게 개발되면서,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에 들어와 다시 생산되기 시작한 이 문양의 식기와 다기는 독일 시민계층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양파문양은 삽시간에 독일 고급 주방용품에 사용되는 대표적 문양이 되었다. 19세기 후반은 독일에 본격적인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이를 통해 부를 획득한 시민계층이 사회의 새로운 주도세력으로 부상하던 시기였다. 이 신흥계급은 과거에 그들이 선망하던 왕족과 귀족들의 생활양식을 모방함으로써 그들이 획득한 경제적 부와 사회적 권위를 과시하려 했다. ‘진기한 나라’ 중국의 이국적인 모티프와 작센왕가의 후광이 결합된 청화문양 다기와 식기는 이 신흥계급의 눈길과 관심을 끄는 커다란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19세기에만 해도 이 문양이 들어간 상품이 1000여 종이나 생산되기에 이른다.

    정체불명의 식물이 생겨나기도 했다.

    “유럽의 중국관은 후기 계몽주의자들이 바꿔놓았다”

    유럽에서 유행한 양파문양 접시와 다기.

    오늘날 대체로 의견이 일치하는 것은 여기에 그려진 꽃은 연꽃, 국화, 모란 혹은 작약 등이고 과일은 석류와 멜론(참외) 그리고 복숭아 혹은 자두이며, 이들을 연결하는 것은 대나무 줄기와 덩굴식물이라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여기에 양파는 그려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석류 혹은 멜론을 알지 못하던 독일인들이 이것을 자신들에게 가장 익숙한 양파로 오인한 데에서 양파문양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이 양파 없는 양파문양은 이제는 식기와 다기뿐만 아니라 음식용기, 식탁보, 요리기구, 달걀 삶는 기계 등 주방집기와 주방기구 그리고 시계, 수건, 편지지 등에까지 문양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심지어 독일 연방우체국에서도 양파문양 우표를 발행한 적이 있다. 또한 이 문양은 마이센 자기 외에도 타이헤르트, 후첸로이터 등 수십 개에 달하는 유명 주방용기 제조업체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독일의 국경을 넘어 스페인, 체코, 루마니아 등에서도 이 문양을 넣은 자기와 가정용품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오늘날 독일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파티를 열면 양파문양 다기와 접시로 손님들을 대접하곤 한다. 과거 유럽의 왕족과 귀족들이 중국 청화백자 다기와 식기 세트를 손에 넣으면 파티를 열어 이 진귀한 자기로 손님들을 대접했듯이.

    계몽주의 시대 유럽이 중국에서 받아들인 또 하나의 중요한 수입문화는 동양의 정원문화다. 중국식 정원은 18세기 유럽에 새로운 정원문화가 생겨나 정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7세기까지 유럽의 정원문화를 지배한 것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프랑스에서 완성된 건축학적이고 기하학적인 양식의 정원이었다. 루이 14세가 깊은 관심과 애정을 기울여 만든 베르사유 궁전정원은 이탈리아-프랑스식 정원의 모범이자 최고봉으로 꼽힌다. 베르사유 궁전의 창가에서 정원을 내려다보면, 좌우대칭, 규칙과 비례, 원근법적 조망 등 기하학적 질서를 기본원리로 하는 프랑스식 정원의 특징이 한눈에 들어온다. 전체적인 배치에서부터 각 부분의 형태와 관상수 한 그루에 이르기까지 인위적 구상에 맞춰 손길을 가함으로써 기하학적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 이 정원 양식의 특징이다.

    프랑스식 정원을 때려 부순 포프

    태양왕 루이 14세와 베르사유 정원의 위광을 등에 업은 프랑스식 정원은 17세기 유럽의 정원문화를 지배했다. 이는 섬나라 영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8세기 초에 들어와 샤프츠버리, 애디슨, 포프 등 당대의 대표적 문필가들이 프랑스식 정원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기하학적 규칙이 지배하는 프랑스식 정원은 겉보기에만 화려할 뿐, 실제로는 공허하고 단조롭고 지루하기 이를 데 없다는 것. 이들은 인위적인 정원보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야생의 자연이나 전원적 풍경이 더 매력적이라고 주장했다. 포프와 애디슨은 자신들의 주장을 즉시 실천에 옮겼다. 포프는 트위켄햄에 있는 자신의 프랑스식 정원을 때려 부수고, 버드나무와 인공동굴과 거친 바위들이 제멋대로 어우러져 거의 폐허처럼 보이는 정원을 만들었다. 애디슨도 자신의 정원을 개조해 과일나무, 참나무, 느릅나무, 꽃, 채소 등을 마구 뒤섞어 심고 그 한가운데로 실개천이 흐르게 만들었다. 이에서 더 나아가 애디슨과 포프는 프랑스식 정원을 모방하려 애쓰는 사람들을 풍자하고 조소하는 글을 발표했는데, 폭넓은 독자층을 거느린 이 문필가들의 영향력으로 인해 당시까지 프랑스식 정원이 누리고 있던 절대적인 권위는 순식간에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몇몇 영국 문필가의 펜 끝과 정원에서 시작된 이 작은 문화적 반란은 삽시간에 널리 확산되어, 어떤 정원 양식이 더 나은지를 둘러싸고 유럽 전역에서 일대 논쟁이 벌어졌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주요 국가의 저명한 문필가들이 평론, 시, 드라마, 풍자 등 문학의 거의 모든 장르를 동원해 이 논쟁에 참여했다. 이는 정원 양식을 선택하는 것이 단지 자기 집 뒷마당을 어떻게 가꿀 것인지에 국한되지 않는 중대한 함의를 지닌 문제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실제로 18세기 내내 지속된 정원 양식을 둘러싼 논쟁은 기존의 세계관과 새로운 세계관이 충돌하면서 생겨난 문화사적, 문명사적 의미를 지닌 사건이었다. 프랑스의 기하학적 정원에 대한 비판과 영국의 전원적 풍경에 대한 예찬은 이제 고전주의적 궁정문화가 낭만주의적 시민문화에 의해 대체되고, 군주의 절대적 권력이 지배하던 정치체제가 시민계급의 민주적 정치체제로 옮아가게 될 것임을 예고한 신호탄이었다.

    엄격한 기하학적 규칙과 질서를 원리로 하는 프랑스식 정원은 사회가 군주의 뜻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것을 요구하는 바로크 시대 절대왕정의 보수적 세계관을 표현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불규칙하고 무질서하게 보이는 영국의 새로운 정원 취향은 개별 존재들이 서로 갈등하고 어우러지는 것이야말로 자연의 참모습이라고 하는 시민계급의 자연관과 개인주의적이고 역동적인 세계관을 함축하고 있었다. 포프와 애디슨이 기존의 기하학적 정원을 갈아엎고 무질서한 자연적 정원을 만든 일은 18세기 유럽에서 절대왕정이 붕괴하고 공화정이 들어서는 대변혁이 일어날 것임을 예시한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제 곧 이들의 뒤를 이어 프랑스에서는 루소가 나타나,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치며 절대왕정의 인위적 질서를 질타해 프랑스 대혁명을 예비할 것이었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헤르더, 괴테, 실러 등 루소의 외침에 깊이 공명한 젊은이들이 질풍노도 문예운동을 일으켜 봉건적 질서에 대한 격렬한 분노를 쏟아낼 것이었다.

    영국에서 시작된 신정원운동은 낭만적 자연관의 표현으로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지만, 그것이 거둔 성공은 주로 미학적·문학적인 것이었으며, 새로운 정원 양식으로서는 그리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새로운 자연관이 정원 디자인에 받아들여져 윌리엄 켄트, 랜슬롯 브라운 등의 이름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정원 양식이 생겨나기까지는 수십 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이들은 풍경화적 자연정원 안에 고대 양식의 건축물을 배치해 자연 안에서 느끼는 자유와 정치적 자유를 결합한 새로운 정원 양식을 만들어냈다. 낭만적 자연에 대한 동경과 고전적 고대에 대한 동경이 결합한 이런 정원 양식은 영국에서는 어느 정도 호응을 얻었지만, 유럽대륙에서는 그리 커다란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다가 영국의 풍경화적 정원에 중국식 자연정원이 결합한 이른바 앵글로 차이나 정원(Jardin anglo-chinois)이 생겨나면서 이 새로운 정원 양식은 삽시간에 유럽대륙을 점령했다.

    서양과 전혀 다른 동양적 정원 양식은 18세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서구에 알려져 있었다. 중국의 정원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도 소개되어 있었고, 그 이후에도 선교사들과 무역상들의 보고를 통해 서구의 지식인들은 아름답고 신비한 정취를 지닌 중국의 자연정원에 대해 알고 있었다. 특히 대항해 시대를 주도하고 있던 영국은 당시 중국의 문화와 다양한 통로로 접촉하고 있어 중국의 정원에 대해서도 상당한 정보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정원은 단지 ‘진기한 나라’ 중국의 이국적 풍물을 보여주는 한 요소로서 이야기되었을 뿐 현실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18세기에 들어와 서구의 정원문화가 변화를 겪는 과정에서 중국의 자연정원은 새로운 정원 양식의 모델로서 진지한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앵글로 차이나 정원의 탄생

    “유럽의 중국관은 후기 계몽주의자들이 바꿔놓았다”

    영국 런던 큐가든의 중국탑.

    애디슨은 프랑스식 정원을 비판하면서, 이에 반대되는 예증을 중국 정원에서 찾았다. 중국인들은 규칙과 선이 지배하는 조경과 유니폼을 입은 것처럼 같은 높이와 같은 형태를 하고 있는 나무들을 보며 비웃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중국인들은 자연의 영(靈)이 스스로 정원을 감독하게 만드는 은밀한 예술을 알고 있으며, 나무 하나 하나의 개별적인 아름다움이 한눈에 우리의 상상력을 일깨우도록 하는 내면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고 예찬했다. 또한 1747년 프랑스의 신부 아티레는 건륭제의 여름궁전을 묘사한 글을 발표했는데, 여기에서 그가 예찬한 중국 정원의 아름다움은 유럽에서 커다란 화제가 되었다.

    중국식 정원이 유럽의 새로운 정원모델로 등장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은 영국왕실의 궁정정원사였던 건축가 윌리엄 체임버스였다. 그는 젊은 시절에 중국 광둥지방을 방문해 오랜 기간 체류했으며, 이때 관찰한 중국의 건축, 가구, 의복, 기계와 기구 등을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과 함께 1757년에 책으로 펴내 중국 전문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가 1772년 발표한 ‘동양의 조경에 대한 논문’은 중국식 정원 조경의 교과서가 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샤프츠버리, 애디슨, 포프에 의해 촉발되어 윌리엄 켄트, 랜슬롯 브라운에 의해 정착된 새로운 정원 양식이 자연을 노예적으로 모방해 황량하고 지루하며 단순할 뿐이라고 비판하고, 중국의 이국적인 정원 양식이 지닌 매력을 역설했다. 이 글을 발표하기에 앞서 그는 이미 영국의 왕립식물원 큐가든(Kew Gardens)을 개조하면서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중국식 자연정원의 요소를 도입하고, 여기에 이국적인 중국의 건축물들을 배치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실천한 바 있었다. 이를 통해 체임버스는 앵글로 차이나 정원의 창시자가 되었고, 큐가든의 중국식 정원은 삽시간에 유럽대륙으로 퍼져나가 이 새로운 정원 양식의 기본모델이 되었다.

    체임버스의 중국식 정원 양식은 특히 독일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독일의 항구도시 킬의 예술사가이자 조경이론가인 히르슈펠트는 체임버스가 조경한 큐가든의 새로운 매력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체임버스는 직선 대신에 곡선의 길을 택하고, 시냇물을 굽이굽이 흐르도록 만들었으며. 높이를 맞추지 않은 커다란 나무를 심었다. 그는 수풀을 없애버리지 않고 아름답게 단장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눈길을 끄는 매력적인 경관을 펼쳐낸다.”

    체임버스는 이런 형태의 정원에 인공폭포를 조성하고, 시내 위에 아름다운 다리를 걸치고, 중국식 탑과 공자의 사당을 세웠다. 그 이래로 이런 조경물과 건축물들은 앵글로 차이나 가든의 기본요소가 되었으며, 특히 중국탑은 이 정원 양식의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19세기 말부터는 일본의 전통건축이 여기에 추가되었다. 기존의 기하학적 정원 양식과 전혀 다르면서도 아름답고 이국적인 이 새로운 공원 양식에 독일의 군주들은 매료되었다. 그리하여 18세기 후반 이후 중국식 정원이 독일 곳곳에 조성되었다. 그러나 독일인은 이 정원을 중국식 정원이 아니라 ‘영국식 정원’이라고 부른다. 영국에서 도입된 것이기 때문이다.

    백인에서 황인종으로 ‘강등’된 중국인

    독일의 영국식 정원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18세기 말에 조성되어 오늘날 뮌헨의 센트럴 파크 역할을 하고 있는 엥글리셔 가르텐(영국식 정원)이다. 엥글리셔 가르텐은 군주의 향락을 위한 궁정정원으로 조성된 것이 아니라, 시민들을 위해 만들어진 최초의 개방공원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이 공원은 또한 나체문화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날씨 화창한 날 이 공원을 산책하다 보면, 갑자기 한 무리의 벌거벗은 사람들 속에 서 있게 된다. 도심 공원 중에서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이 공원의 중앙에는 커다란 중국탑이 서 있다. 이 탑은 체임버스가 큐가든에 세운 중국탑을 모방한 것이다. 그리고 큐가든의 중국탑은 베이징 향산공원에 있는 다층탑을 모방한 것이다.

    “유럽의 중국관은 후기 계몽주의자들이 바꿔놓았다”

    중국 도자기로 장식된 베르사유 궁전의 방.

    도자기문화, 정원문화와 더불어 18세기 서구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중국문화로 유교사상을 들 수 있다. 지면의 제약 때문에 여기에서 이에 관해 자세한 이야기는 할 수 없고, 다만 프랑스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인물 볼테르에게 있어 중국은 그의 계몽 정치사상이 지향하는 이상국이었다는 사실만 간략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볼테르를 위시한 여러 계몽주의자가 중국의 정치체제를 이상적이라고 보았던 이유는 세습적 귀족이 아니라 문학, 역사, 철학을 공부한 학자들이 과거시험을 통해 발탁되어, 중앙에서는 천자와 국사를 의논하고 지방에서는 천자를 대리해 통치하는 정치체제라는 것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계몽주의자들에게 중국은 철학적으로 계몽된 군주가 신분에 관계없이 우수한 인재를 발탁해 함께 국사를 의논함으로써 나라를 이끌어나가는 계몽군주체제의 모델로 받아들여졌다. 볼테르는 중국의 강희제를 계몽군주의 모범으로 제시하면서, “이런 예를 보면서 우리 유럽의 군주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칭송하라! 부끄러워하라! 그리고 모방하라!”고 외쳤다. 계몽주의자들에게 중국은 심지어 철인이 통치하는 플라톤의 이상국에 가장 가까운 정치체제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볼테르는 유교사상의 윤리성과 합리성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숙적 가톨릭의 비합리성을 공격하기도 했다. 중국과 유교에 대한 그의 지식은 대부분 예수회 신부들의 저서에서 나온 것이었다.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의 전위부대 역할을 해온 예수회가 제공한 지식이 가톨릭을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계몽군주와 계몽지식인의 결탁에 의한 ‘위로부터의 계몽’을 지향한 초기 계몽주의가 ‘아래로부터의 계몽’을 요구하는 후기 계몽주의로 넘어가면서 중국의 이미지는 급격히 추락한다. 그 대표적 인물인 몽테스키외와 루소가 꿈꾸었던 정치적 이상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민주적 공화제였다. 이들에게서 중국은 계몽군주제의 모델과 모범이 아니라, 단지 전제정치의 악몽에 불과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 더불어 중국의 역사 역시 전제정치로 인한 정체와 반복의 역사에 불과한 것으로 폄하된다. 이러한 사상은 독일로 건너가 루소의 후예인 헤르더에게서 중국은 ‘부패방지 처리된 미라’로 불리게 되고, 헤르더의 후예인 헤겔에게서 중국의 역사는 ‘동일한 것의 영원한 반복’이라고 규정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예수회 선교사들에서부터 초기 계몽주의자들에게까지 백인으로 분류되었던 중국인이 이 시기에 황인종으로 ‘강등’된다는 것이다. 계몽주의의 완성자로 불리는 철학자 칸트는 중국인을 황인종으로 분류한 초기의 인물 중 하나다. 문제는 인종의 분류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양의 인종 분류가 애초부터 인종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는 데 있다. ‘황색 위협’은 그러한 인종이데올로기가 낳은 프로파간다의 하나였다.

    ‘황색 위협’은 프로파간다

    볼테르의 우호적 중국관이나 루소의 혐오적 중국관은 모두 자신들의 정치적 관점에서 생겨난 것으로서, 중국에 대한 나름의 이해와 오해의 측면을 지니고 있다. 오해는 문화교류의 변수가 아니라 상수다. 이는 개인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자신의 관점과 입장이라는 안경을 벗고 세상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과 입장은 양파 없는 양파문양이나 영국식 중국정원처럼 무해할 뿐만 아니라, 새롭고 흥미로운 문화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근대사를 통해 입증되듯이 인종이데올로기와 같은 안경은 매우 심각하고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동양의 관점에서 볼 때 동서양의 교류사는 배은망덕이 아닐 수 없다. 중국의 3대 발명이라고 일컬어지는 종이, 화약, 나침반은 서구가 봉건체제에서 벗어나 근대국가체제로 발돋움해 세계의 패권을 차지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그 결과로 중국은 19세기 이래로 아편 수입을 강요당하고, 원명원 등 주요 문화유산을 파괴당하고, 국토를 조차당하고, 동양 안의 서양 일본에 의해 수많은 국민이 참살당하는 대가를 치렀다. 특히 이러한 능욕의 역사의 시발점인 아편전쟁의 원인과 결과는 전형적인 배은망덕이다. 다기로 차를 마시는 중국의 문화가 유럽의 왕가와 귀족들에게 전해지고, 이것이 다시 시민계급으로 확산되면서 중국의 차와 다기문화는 서구의 생활을 풍요롭게 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차 수입이 폭증해, 심각해진 무역역조를 아편 수출로 메우려 한 것이 아편전쟁의 중요한 원인이었다.

    그 후 오랜 기간에 걸쳐 모멸의 역사를 겪은 끝에 이제 중국은 다시 국호의 원래 의미대로 동양과 세계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와 더불어 중화주의라는 이름의 민족주의가 중국인들의 주된 감성으로 나타나는 사례가 자주 목격된다. 물론 이는 지난 두 세기 동안 능욕당한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일 것이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서구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적 토대였으며, 특히 독일의 경우처럼 방어적 민족주의가 공격적 민족주의로 전환할 경우 인류사에 커다란 환란을 초래할 수도 있다. 이 점에서 중국의 중화주의 또한 커다란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민족주의라는 ‘안경’은 항상 타자를 폄훼해 자신의 우월성을 돋보이게 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이 우월감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동양은 지난 두 세기 동안 톡톡히 경험했다.

    앞으로의 세계에서도 오해는 국가와 문명 간의 교류에서 상수로 남을 것이다. 이 오해가 평등하고 호혜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 새롭고 흥미로운 문화만을 창출해내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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