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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서울대 HK문명연구사업단 공동기획 - 문명의 교차로에서 ⑨

중세 암흑시기에 이슬람은 문명을 밝혔다

대수학, 눈 해부, 세계지도, 과학서적 번역 운동

  • 김능우│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아랍문학 aminkim@hanmail.net

중세 암흑시기에 이슬람은 문명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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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인의 광대한 지역에 걸친 정복 사업의 성공적인 결과 또한 학문 진작의 결정적인 요인이 됐다.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가 사망(632년)하고 나서 30년도 안돼 아랍 군대는 서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를 점령했으며, 당시 그 지역에서 동로마와 더불어 강대국이었던 페르시아 사산조 제국(224~651년)을 멸망시켰다. 이후 계속된 우마이야조와 압바스조의 정복사업으로 이슬람 제국의 영토는 732년 무렵 역사상 최대인 중앙아시아, 인도에서 스페인과 피레네 산맥에 이르는 지역으로 확대됐다. 아랍인이 정복한 영토는 일찍이 알렉산더 대왕이 차지했던 영토이며, 이후 로마인들과 비잔틴인들이 지배했던 곳이었다.

고대 문명이 존재했던 유프라테스 강 동부의 페르시아와 ‘비옥한 초승달 지역’, 그리고 이집트는 알렉산더 대왕의 통합으로 고도의 헬레니즘 문명이 만개했던 지역이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고대 이집트 문명, 고대 페르시아 문명, 헬레니즘 문명, 인도 문명 등 앞서 나타난 고대 문명들이 융합된 지역을 정복하고 통치하게 된 이슬람 제국은 이미 축적된 지식에 힘입어 제국을 발전시킬 꿈을 키울 수 있었다.

이슬람이 등장해 오늘날의 중동 일대를 통합하기 이전에 이 지역에는 동양을 대표하는 페르시아와 서양을 대표하는 그리스, 로마, 비잔틴 간에 여러 시대를 거쳐 늘 전쟁이 벌어졌다. 특히 비잔틴과 페르시아 간의 오랜 전쟁(570~630년)은 동서 문물의 교류와 교역을 막았고 이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그러나 이슬람의 광범위한 영토 점령으로 이집트-페르시아-인도를 잇는 길이 열리자 다시 ‘문명의 강’은 그 흐름을 되찾았고, 이를 통해 동서 간에 농산물, 원자재, 제조 물품, 용역, 기술, 사고와 사상 등의 문물이 자유로이 만나게 됐다.

이러한 ‘팍스 이슬라미카’(pax Islamica·이슬람 평화시대)에 이슬람 제국 안에서는 무역이 활기를 띠게 되었으며, 더욱이 농업 분야는 최대의 혜택을 받게 됐다. 이슬람권에 들어간 인도와 동부 지중해 지역 간 교류가 원활해지면서 서남아시아와 지중해권으로 많은 농산물이 수입되었고, 또한 농업 기술과 지식이 도입됐다. 활발한 무역을 통한 이익이 일부 상인 계급에 국한된 것에 반해 농업의 발전은 모든 계층 사람들에게 부와 식생활의 향상을 가져다주었고, 이는 이슬람 제국의 경제적 안정에 기여했다.

탈라스 전투 승리로 제지술 전파



아랍인의 정복사업이 인류문명 도약에 크게 기여한 대표적 예는 바로 종이의 도입이었다. 751년 압바스조의 이슬람 군대와 고구려 출신의 고선지 장군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가 맞붙은 탈라스 전투에서 승리는 이슬람 측에 돌아갔다. 이때 포로로 잡힌 약 2만명의 당나라 병사 중에는 제지술을 알고 있던 자들이 있었고, 이들에 의해 이슬람 세계에 처음으로 제지술이 도입됐다. 이후 제지술은 실크로드를 따라 사마르칸트와 바그다드를 거쳐 다마스쿠스까지 전파됐다. 압바스 시대 첫 수십 년간 종이는 파피루스 등과 같은 이전의 기록용 재료를 급속도로 대체했으며, 통치부 지도자들은 종이의 사용을 후원하라고 지시했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개발된 여러 종류의 종이에 압바스조 당시 외국문헌 번역 사업을 후원하던 사람들의 이름을 따서 자으파리, 딸히, 따히리 등의 명칭이 붙여졌다는 것. 이를 보더라도 종이의 전파는 8세기 중엽 바그다드에서 일어난 동서 문헌의 번역운동을 통한 지식의 확산과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랍인의 중동지역 정복으로 알렉산더 대왕 이래 1000년간 헬레니즘 영향권 하에 있던 지역과 그 안의 민족들이 통합됐던 반면, 비잔틴 로마(동로마) 제국은 여전히 존속하면서 이슬람 제국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비잔틴 제국 내 기독교 교회의 분열은 역설적으로 이슬람 제국의 학문 발전에 도움을 주는 결과로 나타났다.

311년 비잔틴 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한 뒤 신학상 교리에 대한 의견 차이로 교회는 분열되었다. 비잔틴 제국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통일성을 승인한 칼케도니아 공의회 결정을 정통파 교리로 채택하고, 거기에서 벗어난 네스토리우스 신학파(그리스도 양성론)나 알렉산드리아 신학파(그리스도 단성론-그리스도는 신성만 갖는다는 이론) 등을 배척했다. 비잔틴의 콘스탄티노플이 정통파 교리 정책을 실행함으로써 다른 기독교 분파들은 설 자리를 잃었다. 이로 인해 옛 시리아어를 말하는 네스토리아파 사람들이 페르시아 지역으로 옮겨가는 등, 비잔틴 제국 내에서 탄압받던 기독교도들은 종교 탄압이 없는 이슬람 제국으로 옮겨가 살면서 자신들의 언어인 그리스어나 옛 시리아어를 통해 이슬람 문명 발전의 협력자가 됐다. 비잔틴 제국이 7, 8세기에 헬레니즘에 반감을 갖게 되면서 기존 헬레니즘 사상을 접했던 기독교도들은 이슬람 제국으로 옮겨가 칼리프(Khali-fah·이슬람 제국의 통치자)의 보호를 받으며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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