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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 | 사기(史記)에 길을 묻다

“못난 통치자 밑에 명재상 없다”

재상의 힘은 곧 국력

  • 김영수 | 사학자·‘史記’전문가

“못난 통치자 밑에 명재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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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통치자 밑에 명재상 없다”

당 태종 때의 명재상 위징(초상화)은 직간의 대명사였다. 그가 죽자 태종은 자신의 언행을 바로잡아주던 거울 하나를 잃었다며 통곡했다.

이 밖에 춘추시대 제나라를 부국강병으로 이끈 관중(管仲) 같은 재상은 경륜이 뛰어난 유형으로 볼 수 있다. 관중은 제나라 군대를 최강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제나라 백성을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만드는 부민(富民)을 실현해 역대 모든 재상 중에서도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다.

관중이 남긴 “창고가 넉넉해야 예절을 알고, 입고 먹는 것이 넉넉해야 명예와 치욕을 안다(衣食足卽知榮辱)”는 명언은 26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인구에 회자된다. 관중은 그 자신도 대단히 부유해 임금 환공(桓公)을 능가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공자(孔子)는 관중의 호화로운 생활을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제나라 백성 누구도 관중을 비난하거나 욕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만한 자격이 있다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백성을 모두 부유하게 만드느라 죽을 때까지 40년 이상을 나라에 봉사한 관중을 누가 나무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제갈량은 중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명재상이다. 재상으로서 제갈량은 ‘삼공(三公)’으로 대변되는데, 공개(公開), 공평(公平), 공정(公正)이 바로 그것이다. 제갈량은 모든 정책을 공개적으로 논의했다. 공개한 이상 공정하게 처리할 수밖에 없고, 공정하게 처리했으니 공평해질 수밖에 없었다. 제갈량은 법가(法家)사상의 영향을 받아 상벌을 엄격하게 집행했다. 하지만 그의 법집행 역시 삼공의 원칙에 입각해 처리됐다. 이 때문에 제갈량이 상을 내리면 어느 누구도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았으며, 그가 벌을 내려도 누구 하나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고 한다.

국궁진력(鞠躬盡力)

“못난 통치자 밑에 명재상 없다”

제갈량은 재상 중의 재상으로 길이 이름을 남겼다. 말하자면 명재상의 전형(典型)이었다.

현대 중국인은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또 한 사람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총리가 죽자 ‘국궁진력(鞠躬盡力)’이란 네 글자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것은 제갈량이 출정에 앞서 유선에게 바친 저 유명한 ‘후출사표(後出師表)’에 나오는 말이다. 제갈량은 이 글에서 “신은 죽을 때까지 있는 힘을 다할 것입니다”라며 비장한 결의를 표시했다. 전·후 2편의 ‘출사표’는 역대 수많은 뛰어난 문장 가운데서도 명문으로 꼽히는데, 제갈량의 인간됨을 이보다 더 잘 나타내주는 글은 없다는 평가가 많다.



제갈량은 또 북벌에 앞서 유선에게 올린 글에서 재산을 공개했다. 얼마 되지 않은 재산이나마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기에 부족함이 없다며 자신은 오로지 촉과 백성들을 위해 있는 힘을 다할 뿐이라고 했다. 그가 죽은 뒤 집안을 정리하려고 보니 당초 제갈량 자신이 밝힌 재산에서 한 뼘의 땅도, 한 푼의 돈도 늘지 않았다고 한다.

제갈량은 위나라를 정벌하기 위한 북벌에 나섰다가 오장원(五丈原)에서 병사했다. 말하자면 과로사였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뒷일까지 대비한 다음 촉나라 군대를 철수시켰다. 제갈량의 충정과 청렴 정신은 후손에게도 유전됐다. 아들 제갈첨(諸葛瞻)은 후주(后主) 유선(劉禪)의 딸과 결혼한 부마라는 귀한 신분이었지만 위나라 장수 등애(鄧艾)와의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 고관대작의 회유를 받았으나 이를 거부하고 자결했다. 제갈첨의 아들 제갈상(諸葛尙)도 면죽관(綿竹關) 전투에서 전사했다.

“어진 신하를 가까이 하여 중용하고 소인들을 멀리하여 내친 일, 이것은 바로 전한의 고조·문제·경제·무제 때에 한창 흥성해 잘 다스려졌던 까닭입니다. 소인배를 가까이하여 등용하고 어진 신하들을 멀리하여 내친 일, 이것은 바로 후한의 환제와 영제가 천하를 망하게 한 까닭으로 이를 논하면서 일찍이 환제와 영제를 두고 탄식하며 가슴 아파하지 아니한 적이 없었습니다.”

-제갈량의 ‘출사표’ 중에서

무능한 통치 5가지

1000명이 넘는 역대 재상 중 제갈량같은 명재상은 손으로 꼽을 정도다. 대부분 최고 통치자의 눈치나 보는 복지부동(伏地不動)형이었고, 무능한 재상도 많았다. 또 간신 유형의 재상도 수두룩했다. 송나라 때 황제와 짜고 명장 악비(岳飛)를 모함해서 죽인 것은 물론 금나라에 나라를 송두리째 팔아넘기려 한 진회(秦檜) 같은 재상은 매국형 재상, 명나라 때 환관으로서 실질적인 재상 노릇을 했던 위충현(魏忠賢)은 공안통치로 백성을 잔인하게 탄압한 잔혹형 재상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청나라 건륭제 때의 재상 화신(和?)은 탐욕의 화신이었다. 그는 재상으로 있으면서 무지막지한 부정부패로 자신의 배를 불린 탐관오리였다. 가경제가 즉위해 그의 재산을 몰수해 조사해보니 청나라 18년간의 재정과 맞먹었다고 하니 그의 부정축재가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이 안 갈 정도다. 그가 죽자 항간에서는 ‘화신이 쓰러지자 가경제가 배불리 먹었다’는 말이 유행했다고 한다.

춘추시대 진(晉·지금의 산시성 지역)나라에는 음악에 정통한 사광(師曠)이란 악사(樂師)가 있었다. 기원전 6세기 무렵에 활동한 사광은 맹인이었다. 그에 얽힌 전설을 보면 태어나면서부터 맹인이었다는 설에서 음악에만 전념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눈을 멀게 했다는 설까지 다양하다. 여기서 ‘사광의 귀밝음’을 뜻하는 ‘사광지총(師曠之聰)’이란 고사성어가 나왔다. 또 사광이 천리 밖의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고 해서 순풍이(順風耳)란 단어도 파생됐다. 역사에서는 2500년 넘게 사광을 악성(樂聖)이라 부르며 존중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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