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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에 길을 묻다

상병벌모(上兵伐謀)! 적의 모략을 분쇄하라

외교는 생존수단이자 불패전략

  • 김영수 | 사학자, 중국 史記 전문가

상병벌모(上兵伐謀)! 적의 모략을 분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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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2세의 한탄

기원전 204년 한신(韓信)은 조(趙)를 멸망시킨 다음 조나라 광무군(廣武君)의 건의를 받아들여 군대를 쉬게 하고 조나라 백성을 안심시켰다. 그러고는 말 잘하는 변사(辯士)를 연(燕)나라에 보내 곧 연나라를 치겠다는 의사를 전달하는 한편, 군의 위세를 한껏 떨쳐 보임으로써 힘들이지 않고 연을 굴복시켰다.

‘구당서(舊唐書)’ 곽자의열전(郭子儀列傳)에 보면 715년 토번(吐蕃), 회흘(回紇), 당항(黨項), 강혼(羌渾), 노자(奴刺) 등 변방 민족과 산적 임부(任敷), 정정(鄭庭), 학덕(학德), 유개원(劉開元) 등이 30만이 넘는 군사를 이끌고 당을 공격한 기록이 나온다. 당나라 수도는 초긴장 상태로 돌입했다.

조정에서는 황급히 곽자의를 불러 군대를 맡겼다. 곽자의는 지금 병력으로는 도저히 싸워 이길 수 없음을 알았다. 그러나 곽자의는 상대가 대부분 자신의 옛 부곡(部曲 · 주로 수공업자나 범죄자들을 따로 모아 살게 한 정치 · 행정 단위)과 관련이 있고, 또 평소 자신에게 은혜를 입은 자가 많기 때문에 저들이 차마 자신에게 칼날을 겨누지는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곽자의는 몸소 몇 명만 거느린 채 회흘 진영으로 달려갔다. 회흘의 추장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말에서 내려 곽자의에게 절을 올렸다. 곽자의는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은 태도로 솔직 담백하게 약속을 어긴 그들을 나무랐다. 추장들은 사과했고, 곽자의는 곧 그들을 불러 연회를 베푸는 한편, 비단과 같은 재물을 줘 환심을 사고 애당초 맺은 동맹을 회복했다. 회흘과 토번 사이의 알력을 이용해 회흘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토번을 고립시켜 물러갈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이다. 당나라 전역을 공포로 몰아넣은 위기는 해소됐다.



손자의 ‘상병벌모’ 사상은 중국 수천 년 역사상 정치 · 군사 영역의 투쟁에 엄청난 영향을 줬을 뿐만 아니라, 근대의 여러 나라에도 상당한 파급력을 미쳤다. ‘손자신연구(孫子新硏究)’ 총론편에는, 독일의 빌헬름 2세가 실각해 네덜란드로 망명했다가 손자병법을 읽은 후 왜 좀 더 일찍 이 책을 못 봤는지 한탄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현대 전쟁이 어떻게 발전하든 ‘상병벌모’의 중요성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욕심엔 끝이 없다”

상대의 모략, 즉 전략을 분쇄하지 못했다면 그다음 차선책은 ‘벌교(伐交)’다. 적의 외교를 파괴한다는 뜻이다. 손자는 무기로 정복하는 ‘벌병(伐兵)’이나 성을 공격하는 ‘공성(攻城)’보다 벌교를 우위에 뒀다.

기원전 630년, 진(晉)의 문공(文公)과 진(秦)의 목공(穆公)은 군사를 이끌고 정(鄭)을 포위했다. 대군이 국경을 압박하는 위급한 상황에서 정나라의 문공(文公)은 일지호(佚之狐)의 건의를 받아들여, 말을 잘하는 촉지무(燭之武)를 보내 두 나라 사이의 관계를 갈라놓기로 했다. 촉지무는 야밤을 틈타 정나라 성 아래로 밧줄을 타고 내려와 두 군대의 포위망을 뚫고 목공의 군영으로 달려가 대성통곡하며 목공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목공을 만난 촉지무는 이렇게 말했다.

“이웃나라 진(晉)을 넘어 정나라 땅 한 덩어리를 차지해서 자기 읍으로 삼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아는가. 어째서 정나라를 멸망시켜 진(晉)의 강역을 넓혀주려 하는가. 진(晉)의 힘이 증대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진(秦)의 세력이 약해진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정나라를 동쪽 지역의 주인으로 그대로 남겨둬 당신네 사신들이 왕래하면서 쉬어 갈 땅이라도 있다면 그것이 좋지 않은가.

과거 진(晉) 혜공(惠公)은 진(秦)의 힘을 빌려 귀국해 군주가 됐고, 일찍이 허(許)나라는 초(焦), 하(瑕)의 땅으로 혜공에게 보답했는데도 귀국 후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잊었단 말인가. 진(晉)의 욕심에 끝이 있을 것 같은가. 동쪽으로 우리 정나라를 차지하면 서쪽으로 확장하려 할 것이 분명한데, 그렇게 되면 가장 먼저 피해를 보는 쪽은 다름 아닌 진(秦)이다. 그러니 두루두루 잘 살피기 바란다.”

진 목공은 촉지무의 얘기를 듣고는 꿈에서 깨어난 듯 즉시 정나라와 동맹을 맺는 한편, 세 사람의 대장군을 정나라에 남게 해서 정나라 방위를 돕게 하고는 자신은 친히 주력 부대를 이끌고 철수했다. 진(晉)에 이 소식이 전해지자 자범(子犯)은 진(秦)나라 군대를 추격하자고 주장했다. 진 문공은 이에 이렇게 답했다.

“그건 안 된다. 당초 진 목공이 나를 도운 것은 남의 힘을 빌려 남을 치자는 것으로, 그것은 바르지 못한 것이었다. 우리 쪽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해서 동맹국을 잃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우리 두 나라는 본래 동맹국이다. 진을 공격하는 것은 전쟁과 동맹을 맞바꾸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것은 진정한 무력의 덕이 아니다. 그러니 철수하는 것이 좋겠다.”

‘구주의 목구멍’

전쟁이 발발했다고 해서 ‘벌교’의 중요성이 감소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강대한 군사 · 정치력 뒤에 탄탄한 외교적 역량이 도사리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현대 전략가들도 소홀히 해선 안 된다.

춘추시대 중원에 위치한 정나라는 춘추 초기 장공(莊公, 기원전 8세기 중반) 때만 해도 강대국으로 행세했으나 그 뒤 정변 등으로 국력이 쇠퇴해 주변 강대국들에 시달림을 받는 신세로 전락했다. 특히 7세기 중반 목공(穆公) 이후 70년 동안 기록에만 30차례 이상 타국의 침공에 시달릴 정도로 쇠약해졌다.

정나라는 지리적으로 중국의 중심에 해당하는 중원에 위치해 국력이 강할 때는 주변국들을 두루 잘 아우를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는 수시로 주변 강대국들에 시달려야 했다. 오죽했으면 ‘구주의 목구멍’이란 별명까지 붙었겠는가.

특히 당시 북방의 강대국인 진(晉)과 남방의 강국인 초(楚)의 눈치를 많이 보았는데, 이 때문에 ‘조진모초(朝晉暮楚)’라는 고사성어까지 나올 정도였다. ‘아침에는 진나라로 달려갔다가, 저녁에는 초나라로 달려가야 하는’ 고달픈 신세에 비유한 것. 강대국 틈에 끼어 이들의 눈치를 보고 그 간섭에 시달려야 하는 약소국의 상황을 대변하는 말이다.

정나라 최고의 정치가이자 ‘춘추일인(春秋一人)’이라는 극찬을 받은 정자산은 이런 상황에서 정나라의 정치와 외교를 맡았다. 외교 방면에서 자산은 약소국의 권익을 단호하게 지키는 원칙을 고수했는데, 이는 철저한 준비와 외교전략에서 비롯됐다. ‘좌전’은 자산이 어떤 정치와 외교를 행했는지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정나라가 제후국들의 일에 나설 때면 자산은 여러 나라가 정치를 어떻게 하는지 자우에게 물어 그에게 좋은 문장으로 공문을 만들게 하고, 비심과는 수레를 타고 교외로 나가 계획하고 있는 일의 성사 여부를 묻고, 돌아와 풍간자에게 판단하게 했다.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되면 자대숙을 불러 집행하게 했다. 이렇게 빈객들을 응대했기에 일을 그르치는 적이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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