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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록, 그 진실과 왜곡 사이

너무도 익숙한 논쟁의 오류들

‘오항녕은 극우 파시스트다!’

  • 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hallimoh@hanmail.net

너무도 익숙한 논쟁의 오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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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항녕은 극우 파시스트다!’

토론할 때 가장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오류 중에 편견에 호소하는 오류(the fallacy of argument ad hominem)가 있다. 이것 역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핵심은 사람들의 주의를 토론 자체에서 토론자로 옮겨놓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필자 자신이 자주 겪는 일이라서 아예 그 사례를 놓고 설명하는 편이 편하겠다.

이태 전인가, 어느 날 같은 층에 연구실이 있던 교수 한 분이 내 연구실로 들어오시면서 “오 교수! 알고 보니 극우 파시스트던데?”라고 했다. 무슨 말인가 싶어 멀뚱히 쳐다보는 나를 보고는 낮에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내용은 이러했다.

시내 한 서점에 갔다가 신간 코너에서 책을 뒤적이는데, 목차에 내 이름이 나오는 책이 있더라는 것이었다. 그 목차에 ‘오항녕의 극우 파시즘’이라고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책을 사왔느냐고 물었더니, 그분 왈, “그런 책을 왜 사?” 그 뒤로도 가끔 나를 보고 장난 삼아 그런 얘기를 하는 분들이 있었다. 근원은 바로 그 책이었다.

이런 경우는 명예훼손으로 고발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분도 있었다. 하지만 책에 나온 이야기를 법정으로 끌고 가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공개 비판을 하자는 분도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토론이나 비판의 생산성에 대해 큰 신뢰를 갖고 있지 않다. 어지간한 소양이 없는 사람들 사이의 토론이나 비판은 불필요한 오해와 야유, 상처로 남기 쉽다는 게 내 경험이자 관찰 결과였기 때문이다. 피치 못해 나와 다른 견해를 논문에서 인용할 때도 최소한으로 그치고, 내 의견을 증명하는 데 주력하는 방향으로 글을 이끌어간다.



아무튼 그 이상한 책은 적어도 필자를 아는 분들에겐 별로 설득력이 없었던 듯하다. 내가 보수적인 데도 있고 좌파에 가까운 데도 있지만, 극우(또는 극좌) 쪽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결국 내 주변 분들은 내게 장난을 칠지언정 그 책을 사지는 않았다. 그 책은 나에 대한 콘셉트를 잘못 잡은 듯하다.

이번 논쟁의 오류를 쓰면서 그 책이 생각나서 인터넷 서점을 통해 목차를 확인해보니(나도 그 책은 사지 않았다), 내가 율곡의 십만양병설을 근거가 있다고 주장한 게 불쾌했나보다.(이 주제는 이미 우리가 다룬 적이 있다.) 논거는 논거로 비판해야지, 나를 극우 파시스트로 만들어선 내 논거를 깰 수가 없다. 설사 내가 극우 파시스트라도 바른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도 익숙한 논쟁의 오류들

‘광해군일기’의 초고 일부. 조선시대 실록(일기) 중에서 유일하게 간행되지 못하고 초고본으로 남은 광해군일기. 그 의미는 무엇일까? 광해군은 실록을 편찬하지 못할 정도로 나라 재정을 알뜰하게 탕진했다는 사실이다. 인조반정은 이런 바탕에서 일어났다.

‘네가 그럴 자격이 있어?’

이와 유사한 변종 논리들이 있다. 인조반정(1623) 이후 공신(功臣)들이 광해군 때 권세를 부린 자들의 가옥과 재산을 훈신(勳臣)들에게 나눠주면서 광해군 때 권신들이 도둑질했던 것도 점유하고 백성에게 돌려주지 않음으로써 원성을 사기도 했다.(‘인조실록’ 권2 1년 7월 19일) 종종 인조반정을 비판하는 연구자들은 이를 근거로 반정의 정당성을 비난하고, 광해군대를 합리화한다.

그런데 이런 일도 있었다. 인조 2년에 공신에게 주는 세곡(稅穀)을 중지했다. 사헌부에선 공신에게 세곡을 주도록 법전에 나와 있지만, “선조(宣祖) 때 광국(光國)·호성(扈聖) 등 여러 공신에게 세곡을 주지 않은 것은 시세를 참작해 어쩔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정사(靖社·사직을 안정시킴)의 공은 막대한 공적이기는 하나 공로를 보답하는 은전(恩典)은 나라의 재정 상황을 따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오늘날 공사(公私) 간에 재물이 바닥나고 세입(稅入)이 부족해 제향(祭享·제사 물품)과 어공(御供·국왕 품위유지비)도 모두 줄였습니다. 많은 공신에게 전례대로 세곡을 지급하는 것은 결코 이어갈 방도가 없습니다. 서쪽 변방의 일이 진정되고 나라의 저축이 조금 넉넉해질 때까지 선조 때의 옛 규례에 따라 세곡을 주는 일을 거행하지 마소서”라고 청했고, 인조는 3년 동안 세곡을 주지 말도록 조치했다.(‘인조실록’ 권5 2년 3월 27일) 공신들의 횡포를 근거로 인조반정의 정당성을 비난하는 연구자들은 공신들의 세곡을 3년간 중지한 이 사료는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반정에 성공했으니 공신들의 자만과 횡포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반정 직후, 광해군 재위 15년 이상 지속됐던 궁궐 공사를 즉시 중단했다. 그리고 궁궐을 짓기 위해 설치했던 영건도감을 비롯해, 나례도감(儺禮都監) 등 12개의 난립했던 도감도 혁파했다. 백성의 고혈을 짜던 조도성책(調度成冊·특별 세금 징수대장)을 소각하는 한편, 민간에 부과됐던 쌀과 포를 탕감해줬다. 인조 즉위 후 삭감한 양이 원곡(元穀) 11만 석이었는데, 당시 호조에서 거두던 1년 세금이었다.

세금을 거두지 않으면 나라를 어떻게 운영하나. 그런데도 삭감하지 않으면 안 됐던 게 현실이었다. 일단 백성이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삭감하지 않으면 백성이 살 수가 없었던 것이 반정 당시, 다시 말하면 광해군 정치의 결과였다는 사실이다. 쉽게 말해, 공신들의 폐단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이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昏政]를 합리화하지는 못한다는 것, 그 어지러운 정치를 바로잡고 민생을 정상으로 되돌리려던 반정세력의 지향과 노력이 비난받을 일은 아니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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