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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아버지들

자신에겐 석벽(石壁) 자식에겐 자부(慈父)

다정다감한 아버지 이순신

  • 백승종 |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자신에겐 석벽(石壁) 자식에겐 자부(慈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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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순신에게도 흠잡을 점이 없지는 않았다. 부안댁이 몇 차례 다녀갔고, 공무상 고을을 순행할 때는 기생과 어울리거나 지방관의 딸과 동침하기도 했다. 가령 1596년 9월 영광(전남)에선 기생 내산월과 만났고, 무장(전북 고창)에선 여러 밤을 여진과 동침했다. 또 광주목사 최철견의 딸 최귀지와도 함께 잤다. 이순신에게도 상당한 일탈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이순신은 두고 온 아내 생각을 할 때가 많았다. “밤 열 시에 집에 편지를 썼다”(난중일기, 1597년 12월 24일)고 했다. 또한 서남해안을 누비고 다니는 ‘탐후선’(정탐선)이 며칠이 멀다하고 아산 본가와 이순신의 진중을 왕래했다. 이와 별도로 방씨는 번갈아가며 남녀 노복을 보내 이순신의 진중생활을 보살폈다.  

7년의 전쟁 기간 중 이순신은 한 번도 휴가를 얻지 못했다. 아내를 만나 회포를 풀 기회는 사실상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여러 경로를 통해 아내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아내의 편지에는 면(葂, 셋째 아들)이 더위를 먹어 심하게 앓았다고 했다. 괴롭고 답답하다.”(난중일기, 1594년 6월 15일) 이런 식으로 부부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희로애락을 나눴다.



끊임없는 아내 생각

이순신의 한 가지 걱정은 아내의 건강이었다. “아들 울의 편지를 보니 아내의 병이 위중하다고 했다. 그래서 아들 회를 내보냈다.”(난중일기, 1594년 8월 27일) 사흘 뒤 이순신은 또 이렇게 기록했다.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이 몹시 위독하다고 한다. 벌써 죽고 사는 것이 결딴나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일은 생각이 미칠 수 없다. 한데 (아내가 죽는다면) 아들 셋, 딸 하나는 장차 어떻게 살까. 마음이 쓰리고 아프다. (…) 마음이 어지러워 잠을 못 잤다.”(난중일기, 1594년 8월 30일)



그 무렵 그는 조정의 비판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아내의 병환에 더 마음이 쓰였다.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촛불을 밝힌 채 밤새 뒤척였다. 이른 아침 손을 씻고 조용히 앉아 아내의 병세를 점쳐보았다. ‘중이 환속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다시 점을 쳤더니, ‘의심이 풀려 기쁨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아주 좋다! 또 병세가 나아질지 점쳤다. ‘유배지에서 친척을 만난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이 역시 오늘 중 좋은 소식이 들려올 조짐이었다.”(난중일기, 1594년 9월 초1일)

다음 날 이순신은 탐후선을 통해 기쁜 소식을 들었다. “아내의 병이 좀 나아졌으나, 원기가 몹시 약하다고 하니 염려스럽다.”(난중일기, 1593년 9월 2일) 이처럼 소상히 기록한 것만 봐도 아내를 향한 그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순신은 매사에 엄격하며 까다로웠다. 그는 군법을 어긴 부하들의 목을 가차없이 벴다. 전쟁터의 실상을 모르는 조정 대신들의 명령에도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족을 대하는 이순신의 모습은 완전히 달랐다. 1592년 초 동생 이여필(이우신)이 진중으로 찾아와 넉 달이나 함께 지내다 귀향했다. 아우가 떠나자 이순신의 마음은 한없이 쓸쓸했다. “아침에 어머님께 보내드릴 물건을 쌌다. 저녁나절 여필이 돌아갔다. 객창에 홀로 앉으니, 만 가지 회포가 어린다.”(난중일기, 1592년 4월 8일)
오래전에 작고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도 컸다. “오늘은 아버님의 제삿날이라 관청에 나가지 않고, 홀로 앉아 있었다. 이 슬픈 회포를 어찌 다 말로 하랴!”(난중일기, 1593년 11월 15일) 이순신에게 아버지는 현존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꿈을 꿨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내게 분부하셨다. ‘13일에 회(이순신의 맏아들)의 초례(혼례)를 치른다는데, 날이 좋지 않다. 4일 뒤로 미루면 좋겠다.’ 평소와 똑같은 모습이셨다. 그 모습을 생각하며 홀로 앉아 있었더니, 그리움이 사무쳐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난중일기, 1595년 정월 12일) 그런 이순신이었다.



진정한 ‘아들바보’  

자신에겐 석벽(石壁) 자식에겐 자부(慈父)

이 충무공 영정. 동아일보

그는 아내와의 사이에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뒀다. 딸은 자라서 홍비라는 선비에게 시집갔다. 진중의 이순신은 단 하루라도 자식들을 곁에 두고 있지 못하면 견딜 수 없어 했다. “홀로 배 위에 앉아 있었다. 그리운 생각에 눈물이 흘렀다. 세상에 어찌 나 같은 사람이 있겠는가! 아들 회(薈)는 내 심정을 알고 심히 언짢아하였다.”(난중일기, 1597년 9월 11일)

아버지의 이런 마음을 잘 아는 큰아들 회는 줄곧 진중에 머물렀다. 회는 아버지를 따라 한산도대첩 등 여러 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웠다. 나중에 그는 선무원종공신에 봉해졌고, 첨정 벼슬을 지냈다. 둘째 아들 예(䓲)도 아산과 진중을 오갔다. 훗날 정랑 벼슬을 지냈는데, 난중일기에 이름이 60번이나 등장할 정도로 아버지의 사랑이 컸다. 셋째 아들 면은 정유재란 때 아산의 본가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다. 그는 아버지를 많이 닮아 이순신의 사랑과 기대가 특별했으나, 젊은 나이에 숨지고 말았다.

아들의 부음이 도착하기 전, 이순신은 꿈에서 비극의 전조를 봤다. “밤 두 시쯤 꿈속에서 말을 타고 언덕 위로 올라가는데, 말이 발을 헛디뎌 냇물 속으로 떨어졌다. 쓰러지지는 않았으나, 막내아들 면이 끌어안은 것 같았다. 이게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 저녁 때 천안에서 온 사람이 집안 편지를 가져왔다. 봉투를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떨리고 정신이 아찔하며 어지러웠다. 대강 겉봉을 뜯고 열(예와 동일인)의 편지를 꺼냈다. 겉면에 ‘통곡’ 두 글자가 있었다. 면이 전사했음을 직감했다.”(난중일기, 1597년 10월 14일)

아들을 여읜 슬픔은 걷잡을 수 없이 컸다. “새벽꿈에 고향의 남자 종 진이가 왔다. 나는 죽은 아들을 생각하여 통곡하였다. (…) 저녁 때 코피를 한 되가량 쏟았다. 밤에 앉아서 생각하다 눈물이 절로 났다. 이 아픔을 어찌 말로 다하랴! (…) 비통한 가슴 찢어질 듯하여 참지 못하겠다.”(난중일기, 1597년 10월 19일) 슬픔은 그의 꿈속까지 자주 따라다녔다. “꿈속에서 면이 죽는 광경을 보고 구슬프게 울었다.”(난중일기, 1597년 11월 7일)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이순신은 다정다감한 아버지였다. “어느새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고 또 통곡했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신가. (…)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일이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이런 어그러진 일이 어디 있느냐. 천지가 깜깜하고 태양조차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 너를 따라가 지하에서라도 같이 지내며 같이 울고 싶구나. 그리하면 네 형들과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을 테지. 아직 참고 살기야 한다마는 마음으로는 이미 죽고 껍데기만 이렇게 남아 울부짖는다. 이렇게 울부짖는다. 오늘 하룻밤을 보내기가 1년 같구나.”(난중일기, 1597년 10월 14일)

아들을 잃은 슬픔에 애태우던 그는 1년여 만에 유명을 달리했다. 부모라면 누구든 제 나름으로 자식을 사랑한다지만, 이순신처럼 정 깊은 이는 흔치 않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은 돌아보지도 않고 자식을 가르치려고 들다 낭패하는 일이 적지 않다. 이순신은 결코 그런 적이 없다. “절조를 지키며 몸가짐을 꼿꼿하게 견지한 것을 보면, 마치 석벽(石壁)이 높다랗게 우뚝 서 있는 것 같았다”(이식, ‘통제사증좌의정이공시장’, ‘택당선생별집’ 제10권)는 표현처럼, 그는 스스로에겐 한없이 엄격했다. 그러나 호랑이 같은 엄부(嚴父)가 아니라, 너그러운 자부(慈父)였다. 깊고 은은한 그 사랑 덕분이겠지만, 이순신의 자손 가운데서는 나라의 동량(棟梁)이 여럿 나왔다.  

백 승 종


자신에겐 석벽(石壁) 자식에겐 자부(慈父)


● 1957년 전북 전주 출생
● 독일 튀빙겐대 철학박사
● 서강대 사학과 교수, 독일 튀빙겐대 한국 및 중국학과 교수, 독일 막스플랑크 역사연구소 초빙교수, 프랑스 국립고등사회과학원 초빙교수
● 現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  저서 : ‘백승종의 역설’ ‘마흔 역사를 알아야 할 시간’ ‘금서, 시대를 읽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등





신동아 2016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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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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