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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아버지들

아들과 서로 공경 대 이은 禮學의 사표

스승이자 친구이자 아버지 김장생

  • 백승종 |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아들과 서로 공경 대 이은 禮學의 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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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파도, 시대의 격랑

평화롭고 정겨운 연산서당 풍경과 달리, 김장생 부자의 삶은 불운의 연속이었다. 무엇보다도 16~17세기 조선의 파행적인 정치 상황 탓이었다.

김장생은 본래 병약했다. 1558년(명종 14), 11세의 김장생은 어머니를 잃었다. 아버지 김계휘(金繼輝)는 명종의 외삼촌, 곧 윤원형 일파의 미움을 받아 시골로 쫓겨났다. 그래서 할아버지 김호(金鎬)의 슬하에서 외롭게 자랐다.

청년 김장생은 뜻을 세워, 스승을 발견하고 학문에 정진했다. 그러나 세상사는 그의 편이 아니었다. 당파 싸움이 크게 일어나 그의 스승 이이(李珥), 성혼(成渾), 송익필(宋翼弼) 등이 서인의 우두머리로 낙인찍혔다. 동인들은 김장생의 스승들을 거세게 비판했다. 1586년(선조 19), 스승 송익필 일가는 혹심한 고난에 빠졌다. 일족 70명이 한꺼번에 노비 신분으로 떨어졌다. 젊은 김장생은 송익필에게 피신처를 제공하고 종신토록 봉양했다.

반대파는 이미 작고한 김장생의 아버지마저 탄핵했다. 그는 참혹한 정치 현실에 좌절한 나머지 현실정치에 대한 희망을 잃었다. 이후 몇 차례 지방관으로 부임했지만 생계를 꾸리기 위한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설상가상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미처 난을 피하지 못한 김장생의 장남 김은(金檃) 내외와 손자가 실종됐다. 서제(庶弟) 김연손(金燕孫)은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다. 둘째 아들 김집이 곁에 머물렀지만, 아들에겐 말 못할 고충이 있었다. 김집의 아내는 병이 심해 대소사를 전혀 돌보지 못했다. 후사도 못 남겼다. 아내는 마침내 세상을 떴다. 김장생은 이미 큰아들과 큰손자를 잃었기에 김집이 새장가를 들었으면 했다.



하지만 아들의 생각은 달랐다. “사람은 저마다 운명을 타고나기 마련일 것입니다. 저는 운수가 나빠 첫 결혼에서 큰 곤욕을 치렀습니다. 이제 다시 장가를 들더라도 전보다 나은 결혼생활이 보장될 리 없을 것입니다.” 김집은 재혼을 거부하고, 앞서 첩으로 맞이한 이씨(이이의 서녀)와 해로할 마음이었다. 김장생은 아들의 마음을 헤아렸다. 그들 부자는 적장손(嫡長孫)에 대한 열망마저 분에 넘친 사욕으로 간주했다.



이심전심

광해군 시절 김장생 일가는 더한 위기를 맞았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 癸丑禍獄) 때였다. 집권층인 대북파는 7명의 서자를 강도 혐의로 체포해 고문했다. 이들이 영창대군을 추대할 계획이었다며 역모죄로 몰았다. 김장생의 서제 김경손(金慶孫)과 김평손(金平孫)도 이 사건에 연좌돼 옥중에서 죽었다. 김장생에게도 역모 혐의가 씌워졌다.

김장생은 천신만고 끝에 풀려났다. 그는 연산으로 내려갔다. “(그는) 시골집에 숨어 살았다. 문을 닫아걸고 외부 인사의 방문을 사절하고, 오직 경서(經書)만 쌓아두고 읽었다.”(‘연보’, ‘사계전서’)

김집은 아버지 곁을 지켰다. “그때는 천지가 암흑이었고, 인간의 윤리도 말살됐다. 선생(김집)은 세상에서 자취를 숨기고 어버이를 봉양하며 그대로 일생을 마치기로 결심했다.”(송준길, ‘시장(諡狀)’, ‘신독재전서’, 제19권)

인조반정(1623년)이 일어나 서인이 재집권하자 사정은 좀 달라졌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 인조는 공주까지 피난길에 올랐다. 고령의 김장생은 나아가 인조를 뵈었다. 김장생의 나이 어언 75세, 아들 김집도 50세였다. 얼마 뒤 인조는 김장생 부자에게 관직을 내렸다. 김장생은 학자로서 고명했기에 실권은 없지만 명예로운 자리에 등용됐다. 김집에게도 부여현감 자리가 주어졌다.

서울로 간 김장생은 이따금 시골의 아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아버지는 실권도 없이 집권세력에게서 은근히 따돌림을 받고 있었다. 자신의 울적한 신세를 아들에게 털어놓았다.



조정에는 특별히 긴요한 일이 없다. (…) 요즈음 사대부들을 보면, 견고한 뜻은 없고 물러날 생각들만 한다. 반정을 일으킨 사람들끼리만 마음을 함께하니, 한 나라의 일을 과연 두서너 사람끼리 다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김장생, ‘아들 집(集)에게 부침’, ‘사계전서’, 제4권



이렇게 근심하면서도, 아버지는 아들이 지방관 노릇을 잘한다는 풍문에 기뻐했다. 편지 끝에서 “네가 고을을 잘 다스렸다는 명성이 있으니 기쁘다”라고 칭찬의 말을 적었다. 아들도 아버지와 같은 심정이었다. 서인이 재집권했다지만, 세상은 반정 공신들의 차지였다. 뜻이 높은 아버지나 자신은 세상의 ‘을(乙)’에 불과했다. 팔 걷고 나섰댔자, 아무 일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처지였다. 1626년(인조 4) 2월 2일자 서한에서, 김집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고백했다.



(제가) 서울 가는 일에 관해 말씀드립니다. (올라오라는) 혹자의 말에도 일리가 있지만, 제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간다 해도) 지금 가는 것은, 임금[君上]을 위로하기 위해서일 뿐입니다. (…) 더구나 진언(進言)하는 도리는 자기 생각을 그대로 아뢰는 것뿐일 터입니다. (…) 형편을 봐서 진퇴를 결정하려 합니다. (2월) 7, 8일 사이에 그리(집) 가서 (아버님을) 모시고 갈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방백(方伯, 관찰사)의 회신이 아직 오지 않았고, 관청 사무 또한 너무 많습니다. 9일 전에는 이곳을 떠날 수 없을 듯합니다. (아버님) 말씀대로 여기서 하회를 기다리겠습니다. 혹시 중간에 상황이 달라지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김집, ‘부모님께 올리다’, ‘신독재전서’, 제4권



1627년(인조 5) 가을, 김집은 벼슬을 내려놓았다. 그 뒤 전라도 임피현령에 임명됐으나 금방 사직했고, 전라도사로 임명됐을 땐 부임조차 하지 않았다.

김장생 부자는 인조 초기부터 반정 공신들과는 정치적 견해가 달랐다. 뿌리는 동일한 서인이라도 사람들은 김장생 등 고매한 선비들을 ‘청서(淸西)’라고 불러, 공신 집단인 ‘훈서(勳西)’와 구별했다. 재야세력의 대표로서 김장생은 인조와도 정면충돌했다. 1631년(인조 9), 인조는 자신의 생부 정원대원군을 추숭(追崇)하려 했다. 공신 상당수는 물론 찬성했다. 그러나 예학의 태두 김장생은 반대했다. 격노한 인조는 교서를 내려 김장생을 꾸짖을 정도로 관계가 악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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