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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외교관이 쓴 韓中 5000년

맹장 척준경, 두만강 건너가 여진軍 격파하다

고려-거란-송-서하 4國정립

  • 백범흠|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 정치학박사

맹장 척준경, 두만강 건너가 여진軍 격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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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보병학교(전남 장성군)에 세워진 여진 정벌의 명장 윤관(尹瓘·1040~1111) 동상.[사진제공·육군보병학교]

육군보병학교(전남 장성군)에 세워진 여진 정벌의 명장 윤관(尹瓘·1040~1111) 동상.[사진제공·육군보병학교]

거란 황제 야율아보기는 926년 상경(헤이룽장성 닝안)을 수도로 한 발해를 정복한 후 발해 고토(故土)에 ‘동쪽의 거란’이란 뜻의 동란국(東丹國)을 세우고 장남 야율배에게 통치를 맡겼다. 거란 수도 상경은 지금의 내몽골 츠펑(赤峯) 인근 빠린좌치로 홍산문화와 관계가 깊다.

압록강 유역서 봉기한 정안국

발해는 고구려와 고려를 이어주는 징검다리 구실을 다하고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졌다. 발해 유민 중 대광현(大光顯)을 비롯한 일부는 고려로 이주했으며, 남은 일부는 요(遼)나라에 대항해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압록강 유역에서 봉기한 정안국이 대표적이다. 

세종(야율배의 아들)과 목종(태종 야율덕광의 아들), 경종(세종의 아들) 시대 혼란을 극복한 거란은 성종 야율융서(耶律隆緖) 시기에 국력을 회복했다. 어머니 술율(소)씨의 보좌를 받은 성종은 내·외몽골을 아우르고, 간쑤-신장의 위구르를 정벌했다. 성종은 정안국을 토멸(討滅)하고, 여러 차례 이기고 진 끝에 고려도 복종시켰다. 

고려를 복종시키는 등 배후를 튼튼히 한 거란 성종은 송나라 정벌을 위해 20만 대군을 이끌고 허베이 방향으로 남진했다. 송나라 조정은 혼란에 빠졌다. 진종은 재상 구준(寇準)의 건의에 따라 30만 대군을 이끌고 황하를 건너 북상해 전주(邅州)로 향했다. 몇몇 전투에서 거란군이 승리했으나, 전쟁은 곧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요(遼), 송(宋) 두 나라는 타협했다. 요나라가 송나라를 형으로 부르는 대신 송은 매년 비단 20만 필, 은 10만 냥을 요에 바치기로 했다. ‘전연(澶淵)의 맹(盟)’이라 불리는 이 조약을 체결한 후 요·송 관계는 안정됐다. 이후 요나라는 송과 고려, 서하(西夏) 간 세력균형을 이용해 관제와 세제 개편, 법률 정비, 불교 장려 등 내정에 성공해 동아시아 최강국이 됐다. 거란은 유목민과 농경민을 각기 북면관(北面官)과 남면관(南面官)이라는 2원제에 따라 통치했다. 농경을 장려함에 따라 농지는 늘어난 반면, 초지(草地)는 부족해져 대다수가 유목민인 거란족 주민은 궁핍해졌다.



동여진 해적 울릉도 약탈

10세기 말~11세기 초 고려 서희(徐熙)와 강한찬(姜邯贊)은 요-송 적대관계를 이용해 고려 영토를 압록강 하구까지 넓혔다. 거란-발해 전쟁 시기 두만강 일대 말갈(여진)계 주민은 별도 세력(동여진)을 형성해나갔다.

고려-거란 전쟁이 벌어지던 시기 동여진 세력은 주로 바다를 통해 고려 동해안 지역을 침공했다. 동여진 세력은 1012년 경주, 강한찬의 귀주대첩이 있던 1018년에는 울진을 침공했다. 고려는 동여진 세력을 막고자 동해안에 대규모 축성과 함께 상당 규모의 해군을 배치했다. 그러자 동여진 세력은 공격목표를 일본과 울릉도(우산국)로 바꿨다. 

1019년 3월 3000여 명이 탑승한 동여진 해적선 50여 척이 쓰시마를 공략했다. 일본은 이들의 정체를 알 수 없어 ‘도이의 적’이라 했다. ‘도이’란 일본어로 오랑캐를 뜻한다. 동여진 해적선단은 쓰시마를 약탈한 뒤 퇴각했다. 쓰시마를 떠난 동여진 해적은 이키 섬에 상륙했다. 동여진 해적은 쓰시마와 이키 섬에서 잡은 포로를 태운 채 4월 초 후쿠오카 인근을 약탈하는가 하면, 하카다만 노코 섬도 공격해 주민 다수를 포로로 잡았다. 

일본의 지원 요청을 받은 고려 함대는 귀환하는 동여진 해적선단을 포착·격파하고, 일본인 포로 400여 명을 구출했다. 동여진 해적은 일본을 침공하는 과정에서 울릉도마저 약탈했다. 해적 침공으로 울릉도는 황무지가 됐고, 그때부터 사람이 거의 살지 않게 됐다. 

북만주는 고구려-발해 시대에도 변경에 속해 있었다. 금나라 발상지인 하얼빈 인근 야청(阿城)은 흑수말갈(黑水靺鞨) 등 퉁구스족의 땅으로 12세기에 이르러서도 야성을 유지했다. 흑수말갈 계통 15만 완안부족(完顔部族)이 거주하는 삼림·호수 지역은 여름철에는 몹시 덮고 겨울철에는 몹시 추운(酷暑酷寒) 땅이었다. 완안부를 포함한 여진족은 사냥을 생업으로 했으며 뛰어난 전투기술을 갖고 있었다. ‘여진족 1만 명이 차면 상대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만큼 용맹했다.

윤관, 동북 9성을 쌓다

여진족은 발해가 멸망한 후 요나라에 예속돼 공물(供物) 납부 등 각종 부담을 졌다. 완안부가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한 것으로 볼 때 여진족은 동족 의식을 갖고 고려를 대한 것으로 보인다. 금사(金史)에 따르면 금나라 시조 완안 아골타의 조상 함보(函普)는 고려(또는 신라) 출신이라 한다. 

12세기 들어 영가, 우야소 등이 이끄는 완안부족 침입이 잦아지자 고려는 1107년 윤관을 총사령관으로 해 여진 정벌을 시작했다. 여진 정벌에 동원된 병사는 총 20만 명에 달했다. 맹장 척준경을 선봉으로 한 윤관의 군대는 여진군을 격파하고 함흥평야로부터 두만강 이북 280㎞(700리)의 지린성 옌볜자치주 둔화에 위치한 선춘령에 이르는 점령지역에 아홉 개 성(윤관의 9성)을 축조했다. 20만 대군을 동원해 함흥평야와 그 부근만을 빼앗았다는 일부의 주장은 논리적 모순이다. 고려는 이 ‘동북 9성’을 오래 지키지 못했다. 완안부 세력이 날로 강성해졌기 때문이다. 완안부에는 영가, 우야소, 아골타, 오걸매 등 영걸(英傑)이 잇달아 출현했으며, 이들은 요나라와 고려의 행정력이 제대로 미치지 않는 지린성 동남부와 두만강 유역에 이르는 지역의 퉁구스계 부족을 결집해나갔다. 

거란(契丹), 서하(西夏), 윈난의 대리(大理) 등 새외민족 국가의 흥기(興起)로 인해 송나라 영토는 당나라 전성기에 비해 절반가량 축소됐다. 서하(탕구트) 민족주의자 경종 이원호(1003~1048)는 서하문자를 창제케 했으며, 1038년 송나라에 대한 조공을 중지하고, 황제를 칭했다. 그러자 송(宋) 인종은 50만 대군을 동원해 서하(西夏) 정벌을 시도했다. 1040년부터 3년간 서하와 송나라 간 여러 차례 전쟁이 벌어졌다. 1040년 서하는 산시성 옌안(延安)을 공격했으며, 싼촨커우(三川口) 전투에서 송군(宋軍)을 전멸시켰다. 인종은 범중엄(范仲淹)과 한기(韓琦) 등을 서하 전선에 파견해 서하의 장안(시안) 공격을 저지하게 했다. 그러나 송군(宋軍)은 다음 해 벌어진 하오수이촨(好水川) 전투와 이어 벌어진 딩촨(定川) 전투에서도 패배했다. 범중엄과 한기는 결국 방어에 치중하는 전술을 채택해 서하의 공세를 겨우 막아냈다.

왕안석 신법과 宋 당파싸움

서하도 송과의 전쟁이 계속되면서 경제교류 단절로 어려움을 겪었다. 1042년 서하가 강화를 요청했으며 송나라는 이를 받아들였다. 1044년 양국은 ‘경력(慶曆)의 조약’을 체결했다. 서하가 송에 신하의 예를 취하는 대신 송은 매년 은 7만2000냥, 비단 15만3000필, 차 5만 근을 서하에 바친다는 것이 요지였다. 서하는 비단길을 통한 동서교역을 매개하는 한편, 한때 간쑤와 신장 지역으로까지 세력을 넓혔다. 닝샤(寧夏)의 인촨(銀川)을 중심으로 농경과 유목 문화가 결합된 수준 높은 서하문화가 탄생했다. 

송나라는 군사적으로는 취약했으나 경제적으로는 활력이 넘쳤다. 송은 거란과 서하에 매년 막대한 조공을 바치고 평화를 샀다. 돈을 주고 산 평화는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송나라는 조공을 내고도 거란과의 북부전선 및 서하와의 서부전선에 엄청난 수의 수비병을 주둔시켜야 했다. 엄청난 액수의 조공과 군비 부담으로 인해 경제가 쇠퇴하기 시작했다. 경제를 회복시키려면 새로운 정책 도입이 필요했다. 

왕안석이 도입한 신법(新法)은 기울어가는 송나라 경제를 회복시키고자 고안된 정책이었다. 신법의 핵심은 정부가 영세민에게 저리(低利)로 융자하는 정책으로 청묘법(靑苗法)이라 불렸다. 신법은 빈농과 소상인에게 큰 도움이 됐다. 만성 적자를 보이던 재정이 흑자로 돌아섰으며 막대한 잉여까지 축적했다. 하지만 신법은 형세호(形勢戶)로 불린 호족(豪族)에게는 타격을 주었다. 정부가 저리로 융자해줌에 따라 더는 빈농과 소상인을 대상으로 고리(高利) 이자놀이를 못하게 됐기 때문이다. 신법은 호족 출신이 주류를 이루던 사마광, 구양수, 소식, 정호 등 구법파(舊法派) 관료의 거센 저항을 받았다. 이해관계 차이와 함께 나중에는 개인적 감정까지 개입돼 격심한 당파 싸움으로 변질됐다. 예술가 기질의 무능한 휘종(徽宗)이 행정능력은 뛰어나나 신념도 절조도 없는 인물인 재상 채경(蔡京)과 환관 동관(童貫) 등을 기용하면서 상황은 악화됐다. 채경은 구법파 고태후(高太后) 집권기에는 신법을 폐지했다가 휘종 등 신법파가 집권하자 이번에는 폐지된 신법을 기를 쓰고 부활시키는 등 무절조(無節操)의 극치를 보인 인물이다. 

당대 최강대국 거란에서도 당파싸움이 벌어졌다. 거란의 당파싸움은 정체성 문제에서 비롯해 감정 대립으로 비화했는데, 나라의 활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송나라에 휘종과 채경, 동관이 있었다면, 요나라에는 천조제(天祚帝)와 야율을신(耶律乙辛), 소봉선(蕭奉先)이 있었다.

여진(金), 거란(遼)을 멸하다

중국 허베이성 11세기 묘에서 발굴된 벽화로 거란족이 세운 요(遼)나라 생활상을 묘사한 그림이다.

중국 허베이성 11세기 묘에서 발굴된 벽화로 거란족이 세운 요(遼)나라 생활상을 묘사한 그림이다.

이러한 시기에 여진족 영웅 완안 아골타는 1114년 요의 대(對)여진(對女眞) 전진기지인 지린성 납림하를 공격해 대승을 거뒀다. 국가 존망에 위협을 느낀 천조제가 전국에서 끌어모은 40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의 근거지까지 진군해오자 아골타는 3만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내부 반란으로 갈팡질팡하던 요나라군을 대파했다. 이 전투를 계기로 만주 정세가 일변했다. 

아골타는 1115년 1월 발해 출신 양박(楊朴)의 건의를 받아들여 황제로 등극했다. 완안부는 퉁구스족 고유의 흰색을 숭상했으며 원거주지가 하얼빈 부근 안출호수(安出虎水)였던 관계로 국호를 금(金)이라 했다. 여진어로 ‘안출호’는 금이라는 뜻이다. 금나라는 베이징 인근의 연운 16주 회복을 꾀하던 송나라와 발해만(渤海灣) 해상에서 ‘해상(海上)의 맹(盟)’이라는 공수동맹조약(攻守同盟條約)을 체결해 함께 요나라를 공격했다. 금나라군은 1120년 요나라 수도 상경을 점령했다. 천조제는 서쪽으로 도주해 인산(陰山) 기슭에 숨어 서하의 지원을 기대했다.

요나라가 멸망하자 황족 야율대석(1087~1143)은 몽골을 거쳐 서역의 우루무치로 도망가 그곳에서 몽골 18부족을 규합했다. 그는 더 서진해 카자흐스탄 동남부 일리 지방을 손에 넣고 서요(카라키타이)를 세웠다. 러시아는 중국을 키타이(Cathay)라 부르는데, 이는 거란과 카라키타이의 이름이 초원의 길을 따라 중앙아시아와 남부 러시아(킵차크)에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항공사 캐세이 패시픽(Cathay Pacific Airways)에도 카라키타이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서요는 금나라에 위협이 됐다. 금나라 서부에 거주하는 거란족이 서요와 손을 잡고 금나라의 배후를 노릴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북핵 6자 회담 중국 수석대표로 오랫동안 일한 우다웨이(武大偉)는 다우르족(達斡爾族) 출신이다. 다우르족은 언어, 혈통, 습관으로 미루어 거란족의 후예로 보인다. 요나라 멸망 후 거란족의 한 갈래가 헤이룽장 유역까지 이동했는데, 이들이 다우르족의 선조다. 17세기 중엽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가 강성해지면서 다우르족은 청에 복속됐으며, 헤이룽장 상류에서 넌장(嫩江) 유역으로 남하해 만주팔기(청나라가 17세기 초부터 설치한 씨족제에 입각한 군사 ·행정제도)에 편입됐다.

항공사 캐세이 패시픽은 요(遼) 멸망 후 황족 야율대석이 카자흐스탄 동남부 지역에 세운 카라키타이(서요)에서 비롯한 명칭이다.[사진제공·캐세이 패시픽 항공]

항공사 캐세이 패시픽은 요(遼) 멸망 후 황족 야율대석이 카자흐스탄 동남부 지역에 세운 카라키타이(서요)에서 비롯한 명칭이다.[사진제공·캐세이 패시픽 항공]

宋, ‘고개 처박은 타조’ 되다

아골타는 군사조직인 맹안모극제(猛安謀克制)를 군사·행정기구로 재편하고 지방행정구획으로 로(路)를 설치했다. 금나라는 송나라와 체결한 ‘해상의 맹’에 따라 장성 이남으로 출병하지 않기로 약속했지만, 옌징(燕京)의 요나라 망명정부군에 밀려 패배를 거듭하던 송나라군의 요청에 따라 옌징도 점령했다. 아골타는 휘하 장군들과 한족을 포함한 옌징 주민의 반대에도 ‘해상의 맹’을 준수해 옌징을 송나라에 넘겨주었다. 아골타는 옌징 함락 직후인 1123년 북만주의 수도 야청(회령)으로 회군하는 길에 사망했다. 

금나라는 ‘해상의 맹’을 지켰으나 송나라는 금나라를 배신하고 서하 및 요나라 천조제 세력과 연결해 금나라 공격을 시도했다. 아골타를 계승한 동생 오걸매(태종)와 그의 막료들은 이러한 송나라를 용서하지 않았다. 1126년 초 금나라군은 다시 옌징을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해 송나라 수도 카이펑에 접근했다. 휘종은 태자에게 양위하고 황급히 남쪽으로 피신했다. 새 황제 흠종(欽宗)은 성리학자인 이강, 서처인 등 주전파와 채경 등 주화파 간 대립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카이펑을 포위한 금나라는 조공 액수를 올리고 중산(中山)과 하간(河間), 태원(太原) 등 3개 진(鎭), 20개 주(州) 할양과 왕족과 대신을 볼모로 보낼 것을 요구했다. 송나라 조정은 강적을 만나 고개를 처박은 타조와 같이 눈앞의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금나라의 요구를 수용했으며 금나라 군대는 포위망을 풀고 철군했다. 

금나라 군대가 철군한 후 카이펑에서는 서처인이 권력을 장악해 할양키로 약속한 3진의 군사들에게 금군(金軍)에 저항할 것을 명했다. 송나라의 거듭된 배신에 분노한 금나라는 다시 군사행동을 개시해 카이펑을 포위했다. 40여 일간의 공방전 끝에 카이펑이 함락됐다. 금나라는 휘종과 흠종을 포함한 황족과 궁녀, 관료, 기술자 등 3000여 명을 포로로 잡아 북만주로 끌고 갔다. 이 사건을 ‘정강(靖康)의 변(變)’이라 한다. 

제1차 카이펑 포위 시 금나라의 인질이 됐다가 인질 교체로 돌아온 휘종의 9남 조구(趙構)가 1127년 허난성 샹취(商邱)에서 즉위해 송나라(남송)를 이어갔다. 이듬해 금나라는 남벌군을 일으켰다. 금나라군은 쫓아가고 남송군은 정신없이 쫓기는 상황이 양저우(揚州)-진장(鎭江)-쑤저우(蘇州)-항저우(杭州)-딩하이(定海)-원저우(溫州)까지 이어졌다.

압록강 넘은 고려인들

아골타의 아들 완안종필(完顔宗弼)이 지휘하는 금나라군은 창장을 건너 닝보(寧派)까지 고종 일행을 추격했으나 보급선이 지나치게 길어지고 송나라 의용병이 반격할 기미를 보이자 철군했다. 창장과 화이허 유역에서 송나라 관군의 공백을 메운 것은 악비(岳飛), 한세충(韓世忠), 장준(張俊), 유광세(劉光世) 등이 거느린 의용군단이었다. 

1139년 금과 남송 두 나라는 남송이 금나라에 조공을 바치되 금나라는 점령한 영토를 남송에 반환한다는 내용의 조약을 체결했다. 금나라는 카이펑과 장안 등 점령한 영토 대부분을 일단 남송에 반환했으나 금나라 내부 의견 충돌로 조약이 무효가 됐다. 금나라 강경파는 조약을 파기하고, 군대를 동원해 카이펑과 장안을 다시 점령했다. 과거와 달리 금나라는 악비 등 군벌화된 남송(南宋) 의용군단의 저항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금나라는 만주 다싱안링 방면 거란족 동태도 감안해야 했다. 1142년 금나라 완안종필과 남송 진회(秦檜) 사이에 화의가 성립돼 동(東)의 화이허(淮河)와 서(西)의 대산관(大散關)을 국경선으로 정했다. 매년 남송이 금나라에 조공을 바치기로 한 것은 물론이다. 금나라는 38맹안, 즉 약 100만 명을 화북으로 이주시켜 점령한 영토를 지배해나갔다. 

서하는 금나라가 강성해지자 살아남기 위해 금나라에 칭신(稱臣)했다. 이에 대한 대가로 서하는 인산 이남의 땅을 할양받았다. 서하는 이제 더 이상 송나라와 국경을 접하지 않게 됐으며, 몽골의 침략을 받기 전까지 약 80년간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금나라가 고려를 부조(父祖)의 나라라고 생각한 데다 고려도 금을 자극하지 않은 까닭에 금과 고려 간에는 충돌이 거의 없었다. 이 시기 고려인들은 점차 압록강을 넘어가 거주하기 시작했다. 

금나라 3대 희종(熙宗) 완안단과 4대 해릉왕(海陵王) 완안량 시대에 대규모 살육이 벌어졌다. 희종은 집권 말기 황족과 중신을 대거 살육하고, 재상 완안량과 결탁하고 있다는 이유로 황후 배만씨(裵滿氏)도 죽였다. 완안량은 1149년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희종을 살해했다. 

발해 왕족 대씨(大氏)를 어머니로 둔 해릉왕은 즉위 후 희종보다 한 술 더 떠 완안종본을 포함한 수백 명의 황족과 중신을 죽였다. 해릉왕은 4세기 갈족(羯族)이 화북에 세운 후조(後趙) 천왕(天王) 석호(石虎) 이상으로 살인을 자행하고, 음란 또한 심했다. 끝없는 일탈로 해릉왕은 점차 금나라 지도층 내부에서 소외됐다.

장로합의제→황제독재체제

거란(요)이나 여진(금), 만주(청)와 같이 북방에서 기원한 나라의 경우 건국 초기에는 유목 전통에 따라 장로합의제로 국정을 운영한다. 태조 아골타의 유훈(遺訓)을 어겼다는 이유로 태종 오걸매가 종친 신하들에게 곤장을 맞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유목민족 국가의 경우 장로합의제에서 황제독재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희종이나 해릉왕과 같이 과격한 성격의 황제와 여타 권력자 간 권력투쟁이 발생하면 대규모 희생이 따르곤 했다. 해릉왕은 1153년 야청(회령)에서 옌징으로 천도했다. 

해릉왕은 남송을 정복해 중국의 천자가 되려 했다. 수·당 이후 중국의 경제중심지는 화이허 이남이었다. 금나라가 남쪽으로 팽창해 화이허를 남송과의 국경선으로 정했다고는 하나, 경제 중심지는 남송에 있었다. 이에 따라 금나라는 남송과의 교역에서 언제나 입초(入超·수입초과)를 보였다. 금나라는 남송의 쌀과 차(茶), 향료에 의존하는 상태가 됐다. 

해릉왕이 남정(南征)을 감행하려 한 데는 이와 같은 경제적 이유도 있었다. 1161년 해릉왕은 카이펑에 입성해 여진족, 거란족, 발해 유민 등으로 구성된 대규모 남벌군(南伐軍)을 일으켰다. 남벌군에 징집당한 거란족이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심정으로 서북 변경 도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거란족은 몽골족과 싸워왔으나, 장정이 남벌군에 대거 징집당하는 바람에 더 이상 몽골족을 막아낼 수 없었다. 요양 유수 완안포(完顔褒)가 옛 수도 회령에서 반란을 일으켜 일부 황족과 장군의 추대를 받아 황제로 즉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해릉왕은 남벌전을 멈추려 하지 않았다. 해로로 진출한 2군이 하이저우(장쑤성 롄윈강) 해전에서 남송군에 대패하고, 육로의 본진도 창장 남쪽 채석기에서 화포(火砲)를 사용한 남송군에 패배했다. 세종이 즉위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장군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야율원의(耶律元宜)가 해릉왕을 시해했다. 

금나라군이 철수하자 남송군은 금나라군의 뒤를 쫓아 화이허 이북까지 군사를 보냈다. 세종 완안포는 우선 거란족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힘을 쏟았다. 거란족 내부에서 카라키타이(서요)로 도망하자는 파와 금나라 영토 내에서 계속 싸우자는 파 간 갈등도 벌어져 곧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거란족 반란을 진압한 세종은 군대를 화이허 방면으로 이동해 남송군을 화이허 이남으로 몰아냈다.

거란족과 혼인케 했으나…

중국 네이멍구 츠펑에서 발견된 거란족 생활상을 담은 벽화. 거란족은 유목민으로 말타기에 능했다.

중국 네이멍구 츠펑에서 발견된 거란족 생활상을 담은 벽화. 거란족은 유목민으로 말타기에 능했다.

1161년 남송 고종은 대금(對金) 주전파와 화평파 간 당쟁에 시달리다 태조 조광윤의 7세손인 조신(효종)에게 양위했다. 이후 남송 황제는 모두 조광윤계가 차지했다. 효종은 주전론자인 장준(張浚)을 총사령관으로 기용해 북벌을 시도했다. 남송군은 처음엔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나가 화이허 이북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서북전선에 나가 있던 금나라 명장 복산충의(僕散忠宜)가 화이허 전선에 복귀하자 전세는 곧 혼전양상으로 변했다. 1165년 두 나라는 새로 조약을 체결해 동(東)의 화이허, 서(西)의 대산관을 국경선으로 재확인했다. 

남송과의 관계를 안정시킨 세종은 희종과 해릉왕이 강압적으로 실시해온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수정해 여진족 고유의 야성을 회복하려 했다. 세종은 여진 귀족들에게 일정 기간 내몽골 초원에 텐트를 치고, 기마술과 궁술(弓術)을 연마하도록 했다. 여진어와 여진문자 사용도 장려했다. 금나라 4400만 인구 중 여진족 인구는 620만 명에 불과했다. 세종의 노력에도 야성을 상실해가는 화북 거주 여진족의 한화(漢化) 경향을 되돌려놓을 수 없었다. 

세종은 중원에 거주하는 빈곤해진 여진족을 구제하고자 한족이 경작하던 관유지(官有地)를 몰수해 여진족에게 분배했다. 토지경작권을 빼앗긴 한족은 금나라 조정에 불만을 가졌다. 세종은 거란족을 감시하고자 거란족만으로 이뤄진 맹안·모극(금나라 때 군사 및 부족 조직에 대한 제도)을 해체해 여진족의 맹안·모극 안에 분산, 편입시켰다. 여진족과 거란족 간 혼인을 장려하기도 했다. 이는 카라키타이와 연락을 끊는 방법이기도 했다. 

세종을 계승한 손자 장종(章宗)은 거란문자 사용마저 금했으나 거란족은 결코 여진족에 동화되지 않았다. 거란족과의 갈등은 금나라가 쇠퇴하게 된 최대 원인 중 하나였다. 수렵과 어로(漁撈)로 정착 생활을 하던 여진족과 유목(遊牧)으로 늘 이동하는 생활을 한 거란족은 기질적으로 서로 맞지 않았다.

백범흠

● 1962년 경북 예천 출생
●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정치학박사
● 駐중국대사관 총영사
● 現 駐프랑크푸르트총영사관 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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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흠|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 정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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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장 척준경, 두만강 건너가 여진軍 격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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