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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외교관이 쓴 韓中 5000년

행성<行星> 거느린 항성<恒星> 고구려 132만 수나라 대군 무찌르다

  • 백범흠|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 정치학박사

행성<行星> 거느린 항성<恒星> 고구려 132만 수나라 대군 무찌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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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족 우문태(宇文泰)가 세운 북주(北周)는 삼국시대 위(魏)와 비슷한 형태로 멸망했다. 우문태는 정치·행정·군사적 재능을 포함한 여러 측면에서 조조(曹操)를 닮았다. 위나라가 권신 사마씨(氏) 일가에게 나라를 빼앗겼듯 북주도 권신 양견(양견은 동한 재상 양진의 후예라면서 보륙여씨에서 양씨로 성을 바꿨다) 일가에 의해 나라를 잃었다. 위나라가 촉나라를 멸했듯 북주도 북제를 멸했으며 위나라를 대체한 서진(西晉)이 강남의 오(吳)를 멸하고 중국을 일시적으로 통일한 것과 마찬가지로 북주를 대체한 수(隋)도 강남의 진(陳)을 멸해 중국을 통일했다. 서진이 30여 년 만에 멸망했듯 수나라도 30여 년 만에 멸망했다. 그만큼 위-서진과 북주-수는 유사한 점이 많다. 위-서진이 한족 왕조인 반면 북주-수는 선비족 왕조라는 점은 다르다. 

30대에 요절한 화북 통일의 영웅 무제 우문옹을 계승한 선제 우문윤은 폭군이었다. 580년 우문윤이 22세에 급서하자 양견은 외손자인 유소년 황제 우문천을 대신해 실권을 장악했다. 유방(劉昉)을 포함한 관중(陝西·산시)의 한족 호족(豪族)들이 우문윤의 유조(遺詔)라고 속이고 양견을 승상으로 밀어 올렸다. 양견이 반대파 숙청을 시작하자 황실 우문씨의 인척인 울지형(尉遲逈)이 북제의 수도이던 업(鄴)에서 봉기했다. 후베이 총관 사마소난(司馬消難)과 쓰촨 총관 왕겸(王謙) 등 유력자가 동조해 한때 국가의 절반이 울지형에게 복속됐다.



맹수의 등에 올라타다

양견은 위효관을 기용해 봉기군을 제압했다. 울지형은 580년 9월 토벌군에 패해 자결했다. 봉기를 평정하자 양견의 아내 독고씨(獨孤氏)는 양견에게 제위(帝位)를 차지하라고 종용했다. “일이 이미 이렇게 된바, 이미 맹수의 등에 올라탄 것과 같으니, 여기서 내릴 수 없습니다(大事已然, 騎獸之勢, 必不得下).” 여기에서 기호지세(騎虎之勢)라는 말이 나왔다. 양견은 그해 12월 수왕(隨王)에 책봉됐으며 이듬해(581년) 제위에 올랐다. 그는 수(隨)에서 급히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는 ‘착(辶)’을 빼고, 새로 만든 글자 수(隋)를 국호로 정했다.

양견은 우문천을 포함한 우문씨 일족을 이 잡듯 뒤져 모조리 죽였다. 우문씨는 인맥과 혼맥이 중첩된 무천진 군벌의 핵심이었다. 무천진 출신으로 북주 황실과 인척 관계인 대신, 장군이 많았다. 양견 일족은 무천진 출신 주국(柱國)과 대장군 집단으로부터 고립됐다. 훗날 당고조(唐高祖)가 되는 이연(李淵)의 처 두씨(竇氏)는 어릴 적 외삼촌인 무제 우문옹에 의해 양육됐는데, 문제가 우문씨 황족을 학살한다는 소식을 듣고 “여자로 태어나 우문씨 집안을 구해주지 못해 한스럽다”고 통곡했다.



양견은 무천진 집단을 대신할 지지 세력을 만들고자 과거제도를 도입해 군벌의 약화, 황권의 강화를 가져왔다. 또한 그는 율(형법)·령(행정법)·격(행정명령)·식(시행세칙)을 다듬었으며, 균전제에 기초한 부병제, 조·용·조(租庸調)라는 세(稅)·역(役) 체계, 지방행정 체계도 발전시켰다.

양견의 개혁으로 재정이 풍족해졌으며 군사력은 더욱 강해졌다. 양견은 585년경 돌궐을 신종(臣從·신하로서 따라 좇음)시켰으며, 587년 창강 중류 장링(江陵)을 수도로 하는 위성국 후량(後梁)을 병합했다. 588년에는 훗날 양제로 즉위하는 둘째 아들 양광(楊廣)과 대장군 양소(楊素)에게 52만 대군을 줘 진나라를 정벌케 했다. 589년 수나라군은 큰 저항 없이 진나라의 수도 건강(南京·난징)에 입성했다. 이로써 183년 황건군의 봉기로 분열된 지 무려 400년 만에 중국이 다시 완전히 통일됐다. 양견은 597년 장군 사만세(史萬歲)를 윈난(雲南·남만)에 파견해 찬씨(爨氏) 왕국을 토멸했다.

북주가 수나라로 대체될 무렵 동·서 돌궐 간 갈등이 격화했다. 부민 가한의 동생 이스테미(室點密)를 계승한 서돌궐의 타르두 야브구(가한 다음의 제2인자를 뜻한다)는 동돌궐의 우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외몽골 오르콘 강 유역을 근거로 하던 동돌궐과 키르기스의 탈라스 강 유역에 자리 잡은 서돌궐 사이의 갈등은 전쟁으로 비화했다.



돌궐의 동·서 분열

동돌궐 타파르 가한은 양견이 북주를 찬탈한 581년 사망했다. 가한의 자리를 두고 타파르의 동생 다로빈과 아들 안로가 분쟁을 벌였다. 타파르는 다로빈을 가한으로 지명했으나, 돌궐 의회(Toy)는 다로빈의 생모가 돌궐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다로빈의 가한 계승을 거부했다. 장로들이 안로를 후계자로 지명하자 이번에는 다로빈이 안로의 가한 계승을 반대하고 나섰다. 결국 안로는 삼촌 이쉬바라(沙鉢略)에게 양보하고 제2 가한 칭호에 만족한 채 정치에서 물러났다. 가한이 된 이쉬바라는 다로빈에게도 아파 가한이라는 칭호를 줘 내정의 안정을 기하고자 했다.

양견은 강남의 진(陳)을 정벌하려면 먼저 북방의 돌궐 세력을 꺾어놓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양견은 서돌궐의 타르두에게 접근해 그를 돌궐 가한으로 칭하고 동돌궐 이쉬바라 가한에 대항하는 동맹을 모색했다. 이쉬바라를 고립시키는 데 성공한 양견은 583년 양상(楊爽)을 총관으로 하는 대군을 동원해 동돌궐군을 격파했다. 유주총관 음수(陰壽)는 보기(步騎) 수만을 이끌고 유주의 호용새(虎龍塞)로 나가 북제의 유장(遺將)으로 다링허 중류 유성(柳城)을 근거로 하던 고보녕을 격파했다.

장손성(長孫晟)은 이쉬바라 가한과 갈등하던 다로빈을 꾀어 수나라에 항복시켰다. 이쉬바라는 다로빈이 수나라에 항복하자 군대를 보내 다로빈의 근거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그의 어머니를 죽였다. 다로빈은 서돌궐로 도망해 타르두와 함께 이쉬바라를 공격했다. 타르두는 582년 이쉬바라의 가한 지위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다고 발표했으며, 이에 따라 돌궐은 동·서로 완전 분열했다. 내전 끝에 타르두에게 패한 이쉬바라는 584년 수나라에 항복하고, 칭신(稱臣·스스로 신하라고 자처함)했다.

수나라는 이로써 마음 놓고 진나라를 공격하게 됐다.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인 601년 서돌궐의 타르두가 대군을 이끌고 장안을 위협했으나, 장손성이 격퇴했다. 서돌궐은 603년 철륵부족의 반란을 계기로 분열했으며, 타르두는 근거지를 모두 잃고 칭하이(靑海) 지역으로 도주하다가 자결했다. 툴란(都藍)에 이어 동돌궐 가한이 된 계민(돌리)은 서돌궐의 공격이 계속되자 부족을 이끌고 수나라에 투항했다.



수-고구려-동돌궐 ‘힘의 균형’

당시 롼허-다링허-랴오허로 이어지는 랴오시-내몽골 동남부 일대는 수, 고구려, 거란·해(奚), 돌궐 등 여러 세력의 각축장이었다. 수나라는 거란족·해족을 영향권 내에 끌어들이는 등 랴오시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다. 이에 따라 돌궐뿐 아니라 고구려도 위축됐다.

돌궐이 동·서로 분열(582년)된 후 동돌궐의 이쉬바라 가한은 고구려에 동맹을 요청했다. 고구려와 동돌궐은 이해관계가 일치하자 수나라를 공동의 적으로 삼고 협조 체제를 유지했다. 그 결과 수-고구려-동돌궐 간 ‘힘의 균형’이 어느 정도 유지돼 고구려에 대한 수나라의 위협도 줄어들었다.

고구려는 평원왕(559~589) 시기에 국내성, 평양성 세력 간 벌인 내전의 상처를 치유하고 국력을 회복했다. 중국이 북제·북주로 분열해 있던 때다. 평원왕을 계승한 영양왕(589~617)은 수나라에 공세적으로 대응했다. 양광, 즉 양제(煬帝·605~616)가 즉위한 다음에도 고구려와 수는 한 동안 우호관계를 유지했으나 607년 8월 양제가 계민 가한의 장막에서 고구려 사신과 조우한 것을 계기로 고구려와 수나라 간 갈등이 고조됐다.

고구려 사신과 조우한 양제는 우홍(牛弘)으로 하여금 고구려 사신에게 영양왕의 입조를 요구하고, 이를 거부할 경우 정벌도 불사하겠다고 위협케 했다. 고구려는 수나라의 협박을 무시하고 백제와 신라를 공격했다. 이를 전후해 속말 말갈 추장 돌지계(훗날 신라에 쳐들어온 이근행의 아버지)가 무리를 이끌고 수나라에 투항했다. 거란 출복 부족도 수나라에 투항했다. 고구려는 더 이상 수나라의 팽창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598년 2월 영양왕은 1만여 말갈 기병을 지휘해 요충지 영주(랴오닝성 차오양)를 공격했다. 

이에 맞서 수나라가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수나라군 외에 돌궐, 거란·해, 물길, 고창(高昌) 등 외국군도 전쟁에 동원됐다. 양제가 군사적 모험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문제(양견) 이후 수나라의 경제력, 군사력이 급속히 팽창한 덕분이다. 인력을 효율적으로 활용, 투입할 행정 능력을 갖춘 게 국력 상승의 뒷배가 됐다. 호적에서 누락됐던 호구를 등재해 이전 통계로는 40만 명에 불과하던 장정 수가 200만 명까지 증가했다.

호구 수 증가에 따라 조세 수입도 급증세를 보였다. 호구 수는 문제 초기 400만 호에서 진나라의 64만 호를 흡수함으로써 464만 호에 이르렀다. 호구 수는 양제 즉위 초 다시 890만 호로 급증했다. 890만 호는 당 현종 시기 900만 호를 돌파하기까지 수-당대 최대 호구였다. 수나라는 진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강력한 강남 해군도 손에 넣었다. 양제는 610년 해군력 증강의 성과를 시험해보고자 류큐(오키나와)를 침공해 7000명을 사로잡았다.

백제 무왕은 이 같은 대륙의 정세 변화를 읽고 사신 국지모(國智牟)를 파견해 수나라의 고구려 정벌에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백제는 그간 고구려와 수나라를 놓고 끊임없이 저울질했다.



백제 무왕, 수나라에 협력하다

612년 1월 수나라의 제2차 고구려 침공 시 원정군 규모는 우문술(宇文述)이 지휘한 좌군 52만8000명, 우중문(于仲文)이 인솔한 우군 52만8000명, 양제가 지휘한 중군 26만4000명 등 총 132만 명에 달했다. 수나라 육군 집결지인 베이징 부근 탁군에 모여 출정을 하는 데만 40일이 걸렸으며, 랴오허 유역 고구려 국경까지의 행군 길이는 430㎞에 달했다. 수나라가 진나라를 칠 때 동원한 병력이 52만 명인데, 고구려 정벌 때는 그 두 배가 넘는 병력(132만 명)을 동원한 것이다.

수나라는 왜 고구려 정벌에 전력을 기울였을까. 다음 3가지가 원인인 것으로 분석된다. 첫째, 수나라 지도부의 팽창 욕망이다. 선비족 군벌국가인 수나라는 정복국가였다. 수나라는 선비족이 한족을 정복하고, 한족에 동화돼 만들어진 나라다. 311년 남흉노 유총에 의한 ‘영가의 난’ 이후 역대 중국 왕조는 589년 수가 진을 멸망시켜 중국을 통일할 때까지 250년 동안 계속된 내전과 고구려, 유연(柔然), 돌궐의 위협으로 인해 팽창해나갈 수 없었다. 이제 통일은 달성되고, 급증한 인구로 인해 힘은 넘쳐났다.

남은 것은 랴오허 이동 고구려밖에 없었다. 당시 고구려인은 미천왕, 광개토왕, 장수왕 등의 영토 확장으로 사기가 높았으며 사해(四海), 천손(天孫), 천문도(天文圖)로 상징되는 독자적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고구려는 또한 백제, 신라, 거란·해, 지두우, 물길, 두막루, 실위 등 행성(行星)을 거느린 항성(恒星)으로 자부했다. 수나라는 만주-한반도에 별도의 질서가 남아 있는 것을 허용할 수 없었다.

둘째, 수나라군은 북위군→서위군→북주군의 전통을 이은 강군으로 577년 북제를 멸망시키고, 584년 돌궐의 무릎을 꿇렸으며, 589년 진나라를 정복하고, 609년 칭하이에 자리한 모용선비의 나라 토욕혼을 굴복시켰다. 당시 수나라군은 선비족 육군과 강남 한족의 수군을 통합해 명실 공히 전략군으로 발전했다. 여러 전쟁을 치르면서 수나라군은 야전과 공성전, 해군을 동원한 합동작전 등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자신감이 넘쳤다. 돌궐과 토욕혼의 굴복으로 수나라의 배후는 비교적 안전하던 반면, 고구려는 평원왕 시대 이후의 적극적 남진 정책으로 적대관계에 들어간 백제와 신라에 배후를 찔릴 가능성이 있었다.



을지문덕은 울치(Ulchi)족?

셋째, 국내 정치적·지정학적·경제적 이유도 작용했다. 북주 찬탈, 진나라 정복, 돌궐 정벌 등에서 많은 공신이 탄생했다. 이들에게 땅을 배분하려면 고구려와 같은 나라를 반드시 점령해야 했다. 고구려를 정복하면, 한강 이남의 백제나 신라는 수나라 대군의 공세 앞에 단 3개월도 버티어낼 수 없을 것이기에 고구려 확보는 곧 랴오허 이동 만주와 한반도 모두를 장악하는 것을 의미했다. 고구려는 대동강과 랴오허, 쑹화강 유역의 농산물과 북만주 평원의 삼림 자원에서 나오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대군을 보유한 동아시아 제2의 강국이었다.

수나라 해군은 육군과 합동작전을 전개했다. 내호아가 지휘한 해군은 산둥반도 라이저우(萊州)를 떠나 미산열도(眉山列島)를 따라 동북진해 랴오둥 반도로 나아갔다. 수나라 해군은 고구려 해군으로부터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랴오둥 반도 동쪽 해안을 따라 계속 노를 저어 압록강 하구에서 남으로 진로를 바꿔 대동강 하구로 항진했다. 수나라 해군이 사용한 항로는 중국과 한반도 사이를 왕래하는 선박이 전통적으로 이용한 경로다. 이 항로는 중국과 한반도, 일본열도 간 교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피비린내 축록전…당(唐)을 세우다 

수나라 육군은 을지문덕(乙支文德·현대 중국어 발음 Yizhi Wende)에게, 해군은 영양왕의 동생 고건무에게 대패했다. 고구려 정벌 실패로 수나라는 멸망했다. 최소 50만~60만 명의 병사가 죽어나간 제2차 고구려 원정 실패로 수나라는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50만~60만 명을 현대 중국 14억 인구와 비교하면 1400만 명이라는 수가 나온다. 이 정도 수의 젊은이가 죽어나간 판에 무너지지 않을 나라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고구려를 구한 을지문덕과 비슷한 시대를 산 인물 중 당나라 장군 울지경덕(蔚遲敬德·Yuchi Jingde)이 있다. 조금 앞선 북위(北魏) 시대에는 물길(勿吉) 사신 을력지(乙力支·Yilizhi)가, 북주 시대에는 울지형(蔚遲逈·Yuchi Jiong)이라는 인물도 있다. 북방민족의 성은 한자로 음차(音借)해 표기한다. 울지 씨는 선비족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에 ‘가족 배경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적힌 을지문덕은 어느 종족 출신일까. 러시아의 우수리-아무르 강 유역에 ‘울치(Ulchi)’라는, 우리와 유전적으로 가깝고 곰을 토템으로 하는 퉁구스계 종족이 살고 있다. 을력지는 물길, 즉 울치족과 같은 퉁구스계로 보인다. 그런데 을지문덕은 선비계일까 퉁구스계일까.

양제는 재위 10년 동안 고구려 정벌, 대운하 공사, 양저우(揚州)의 미루(迷樓) 건설 등으로 국고를 탕진했다. 결국 양제는 618년 양저우에서 최측근 우문술(宇文述)의 아들 우문화급(宇文化及), 우문지급(宇文智及)이 주도한 쿠데타군에 교살(絞殺)당했다.
 
양제가 죽은 후 수나라는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동돌궐 시비 가한은 이 틈을 타 수나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동돌궐은 수나라가 고구려 침공에 몰두하던 615년부터 본격적으로 수나라 변경을 침공했다. 시비는 북벌을 단행 중이던 양제를 공격해 산시(山西) 안문(雁門)에서 양제를 포위하기도 했다. 양제는 시비에게 출가한 누이 의성공주의 도움을 받아 위기에서 벗어났다. 시비는 617년 수나라 황실에서 약탈한 재화를 갖고 도피해온 양사도(梁師道)를 중국가한(中國可汗)에 임명했다.

양제의 이종사촌이자 대야호(大野虎)의 아들인 타이위안(晋陽·진양) 유수(留守) 이연(李淵)이 봉기해 618년 당(唐)나라를 세웠다. 이연은 아들 건성, 세민, 원길과 딸 평양공주 등과 함께 이밀(李密), 두건덕(竇建德), 왕세충(王世充), 소선(蕭銑), 유무주(劉武周) 등 강력한 경쟁자를 모두 물리치고, 10여 년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축록전(逐鹿戰·사슴을 뒤쫓는 싸움이라는 뜻으로 제위나 정권 따위를 얻기 위한 다툼을 가리키는 말)에서 최종 승리했다.

내전 시 당나라 군대는 둘 이상의 적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둘 이상의 적과 마주쳤을 때 한쪽은 포위해두고, 다른 쪽을 공격해야 다소라도 승리할 공산이 있다. 훗날 당 태종이 되는 이세민은 수비를 위주로 하다가 적군의 보급로를 끊고 한꺼번에 몰아치는 전술을 주로 구사했다. 이세민은 설인고, 유무주·송금강, 왕세충·두건덕 격파 시에도 비슷한 전술을 사용했다.



소리(小利)와 대국(大局)

수비를 위주로 하다가 일순간에 적을 몰아쳐 승리한 사례는 이세민 외에도 많다. 칭기즈칸의 부하 수부타이가 지휘한 몽골군의 헝가리 침공, 금나라 태조 아쿠타의 요나라 공격, 서한(西漢) 오초(吳楚) 7국의 난 진압 시 대장군 주아부가 오왕 유비(劉濞)를 격파한 것, 유계(유방)가 항적(항우)을 격파한 것, 전국시대 진나라 장군 백기가 조나라 장군 조괄을 상대한 장평대전 등이 모두 수비를 위주로 하다가 보급 문제 등 적이 허점을 보인 순간을 노려 일거에 몰아치는 방법으로 승리한 전쟁이었다.

이세민은 산시(山西) 일대의 군웅 유무주, 송금강, 울지경덕 등을 보급로를 끊는 방법으로 격파했다. 주로 방어만 하면서 교전을 피하고, 길어진 보급로만 집요하게 공격했다. 산시를 확보한 이세민은 왕세충이 지배하던 뤄양성을 포함한 허난을 노렸다. 이세민은 치열한 전투 끝에 왕세충군을 격파하고 뤄양성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적의 항복만 기다리면 되는 순간, 허베이의 군웅 두건덕이 왕세충을 구하고자 뤄양으로 진군해 왔다. 두건덕의 병력은 무려 10만이나 됐다. 뤄양성의 왕세충을 포위한 3만여 이세민군은 앞뒤로 적을 맞아 포위될 우려가 있었다. 이세민은 병력을 둘로 나누는 모험을 감행했다. 일부 병력을 부하에게 맡겨 뤄양성을 계속 포위하게 하고, 자신은 나머지 병력으로 두건덕을 막기로 한 것이다. 이세민은 우선 뤄양 부근의 요충지 호뢰관(虎牢關)에 들어가 버텼다. 1개월을 인내한 이세민군은 두건덕의 10만 대군이 방심한 틈을 타 폭풍같이 밀고 나가 적의 절반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포로 중에는 두건덕도 포함돼 있었다.

이연이 축록전을 승리로 이끈 요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근거지이던 산시(山西)성 타이위안에서 산시(陝西)성 장안을 곧바로 공략했다는 점이다. 이는 전술·전략적으로 올바른 선택이었다. 장안 탈취는 ‘관중에 들어앉아 지형의 험준함을 이용해 세력을 키우고, 물고기를 낚듯이 정권을 공고히 하다가 기회를 엿보아 천하를 통일한다’는 전략의 첫번째 발자국이었다. 타이위안은 훗날 5대 10국 시대 사타돌궐(沙陀突厥) 출신 유숭이 세운 북한(北漢)의 수도가 되는 곳으로 할거하기는 쉬운 땅이지만, 천하의 패권을 장악할 거점은 될 수 없는 곳이다.

둘째, 지도자 이연은 포용력이 큰 인물이었다. 이연의 포용력은 당시 최대 세력을 가졌던 이밀(李密)의 경계를 피해 장안에 입성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됐다. 셋째, 이밀과 왕세충 등 경쟁자들이 뤄양 근처의 식량 창고에 지나치게 집착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소리(小利)에 어두워 대국(大局)을 보지 못했다. 이로 인해 이연은 우수한 인적자원이 몰려 있던 관중(陝西·산시)을 쉽게 장악할 수 있었다. 수많은 아이와 여자들이 비참하게 죽어나가고, 지독한 기근으로 인해 인육(人肉)까지 먹어야 했던 10년 내전이 지나갔다. 수-당 교체기는 잔인과 비극의 시대였다. 



이세민, 천가한(天可汗)에 오르다

시비 통치 기간 중 동돌궐은 일시적으로 타파르 가한 때의 국세를 회복했다. 그를 이은 실리(頡利)는 현실 안주 성향의 인물로 타르두스, 바이쿠, 위구르족의 반란과 거란의 이탈을 초래하는 등 동돌궐제국을 파멸로 몰아갔다.

626년 7월 피 냄새 가득한 현무문(玄武門) 쿠데타를 통해 형 이건성, 동생 이원길과의 계승 전쟁에서 승리한 태종 이세민은 동돌궐을 굴복시켰다. 630년 2월 이세민 휘하의 장군 이정은 내몽골에서 실리의 군대를 격파하고, 동돌궐에 망명해 있던 양제의 황후 소씨(蕭氏)와 손자 양호(楊浩)를 찾아내 장안으로 압송했다. 이정은 동돌궐군을 추격해 1만여 명의 목을 베고 10만여 명을 포로로 잡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이정은 시비 가한의 황후이던 의성공주를 잡아 죽이고, 실리마저 사로잡아 개선했다. 양견의 북제 황족 우문씨 학살이 양씨 일족에게 고스란히 되돌아 온 것이다.

태종은 새외민족(塞外民族)에 의해 천가한(天可汗)으로 추대됐으며 유목과 농경 2개 세계를 망라한 통합 수장 자리에 올랐다. 혈연적으로 선비족인 태종 이세민이 황제와 천가한을 겸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당나라는 태종을 이은 고종 시대에 신라와 연합해 백제-왜 연합세력을 격파하고, 고구려도 멸망시켰다.



백범흠
● 1962년 경북 예천 출생
●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정치학박사
● 駐중국대사관 총영사
● 現 駐프랑크푸르트총영사관 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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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흠|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 정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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