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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로 풀어쓴 현대사

팍스 브리태니카는 금융시장에서 계속된다

건재 과시한 ‘대영제국’ 머니 파워

  • 조인직 | 대우증권 도쿄지점장

팍스 브리태니카는 금융시장에서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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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운드화, 아직 ‘빅3’

팍스 브리태니카는 금융시장에서 계속된다

국제 외환시장에서 ‘빅3’의 위상을 유지하는 영국 ‘파운드’화.

원래 현대적 의미의 은행, 그리고 국가의 중앙은행은 모두 영국에서 처음 시작된 모델이다. 이전 중세의 왕들은 전쟁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민간 대상인(大商人)으로부터 고금리로 융자를 받았다. 명예혁명으로 즉위한 윌리엄 3세는 프랑스와 벌인 식민지 전쟁 때문에 재정이 많이 악화했는데, 이를 타개하기 위해 런던 자본가 그룹의 ‘영란(英蘭)은행(Bank of England)’ 설립(1694)을 허가했다.

영란은행은 초기에 국채 인수를 통해 사실상 나라의 빚을 떠안는 기능을 했다. 이후 1844년부터는 지폐를 발권하는 독점적 기능을 갖게 됐는데, 이것이 현재 각국 중앙은행의 설립 모태가 됐다. 원래 민간 은행으로 설립됐지만 재정 규율을 감독하기 위해 2차대전 이후인 1946년부터 국유화했다.

GDP 순위는 프랑스에 밀려 6위까지 떨어졌지만, 영국 통화 파운드는 아직 ‘빅 3’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의 최근 통계에 따르면 미국달러는 국제 결제 시장에서 44.64%로 절반 가까운 비중을 차지했고, 유로가 28.3%, 파운드가 7.92%, 엔이 2.69%를 기록했다. 위안화가 2.17% 점유율로 급부상해 캐나다 달러를 제치고 5위에 합류한 것도 유의미한 변화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미국달러 시대 이전에는 영국 파운드화가 금 본위제에 근거한 1강(强)의 기축통화였다. 여러 대륙에 걸쳐 세계무역을 하는 동안 뿌려놓은 파운드의 씨앗이 워낙 강렬하게 발아(發芽)한 덕에, 비록 패권의 시대는 저물었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도 세계경제에 일정 수준 이상의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유사 이래 금과 은은 희소성 있는 귀금속이라는 인식에 따라 세계 어느 곳에서도 통화로 인정받았다. 금광과 은맥이 다른 지역에 비해 부족한 중국에서만 청동이나 동전화폐가 오래전부터 통용됐다. 15~16세기 대항해 시대를 거쳐 스페인이 아메리카 신대륙의 은산 개발에 나서면서 대량의 은화가 세계 각국에 유통됐다. 그러다 멕시코 등지에서 은화 발행이 지나치게 많아지자 자연히 국제통화로서 은의 가치는 떨어졌다. 그때 마침 등장한 것이 영국의 금본위제다.

金 이상의 신용

산업혁명에 성공한 영국은 무역대금으로 받은 막대한 금을 축적했으며, 시간이 흘러 축적된 금에 연동시킨 파운드화를 발행하기 시작한다. 유럽 각국 및 식민지 무역 상대국들도 처음에는 소극적이었지만, 19세기 후반 미국 라스베이거스와 캘리포니아 일대에서 대규모 금광이 발견되고 이에 따라 세계적인 금 유통량(유동성)이 늘어나자 금본위제 이행을 서두르게 된다.

영국 화폐인 파운드화가 금 이상의 신용을 얻으며 통용된 데에는 당시 최대 교역국이자 해외자본 수출국이라는 시대적 배경이 뒷받침하고 있다. 1869년 이집트 수에즈 운하, 1840년대부터 개발된 세계 최장(전장 10만km 이상)의 인도 철도망, 중국 상하이 고층빌딩가 등이 당시 파운드화로 투자된 대표적 인프라다.

인프라 투자 100년 노하우

AIIB 발족과 맞물려 관심을 끄는 대목은 AIIB가 앞으로 아시아-유럽-아프리카 대륙을 잇는 기간시설 투자에 많은 신경을 쓸 것이라는 부분이다. 원자재를 원활하게 조달하기 위해 중국 정부가 아프리카에 많은 호의를 베푸는 현실을 감안할 때 아프리카 개발이 조금 더 밀도 있게 진척될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영국이 오늘날 중국에 비해 아프리카 인프라 투자에서 100년 앞선 선배라는 점은 향후 영국의 역할에 주목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영국은 19세기 후반부터 ‘3C 정책’을 통해 남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잇는 식민지 건설에 공을 들였다. 콜카타(인도)-카이로(이집트)-케이프타운(남아프리카공화국)의 머리글자 ‘C’를 따 붙인 이름이다. 원자재와 천연자원의 원활한 공급을 노렸다는 측면에서 오늘의 중국과 비슷하다. 또한 당시 영국은 식민지가 값싼 노동력을 공급해주고, 필요할 때는 자국의 상품을 비싼 가격에 구매해주는 역할까지 해주기를 바랐다.

개발과 착취를 위해 전쟁을 감행하기도 했다. 1899~1902년의 보어(Boer) 전쟁이 대표적이다. 아프리카 최남단에 위치한 케이프타운은 본래 네덜란드인들이 이주해 식민지를 세운 곳인데, 1814년 무렵 영국이 재차 점령했다. 이미 아프리카인이 된 네덜란드인들(혹은 ‘보어인’으로 불림)은 어쩔 수 없이 케이프타운 동북쪽으로 이주해 그 지역에 오렌지 자유국과 트란스발 공화국을 세워 정착했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영국령 케이프 식민지와 보어인들의 오렌지 공화국 사이 지역에서 우연히 발견된 금광과 다이아몬드를 보고 보어인 침략 전쟁을 벌였다. 금 본위제 경제체제에 막대한 이득을 안겨줄 것이라는 계산에 따라 그야말로 ‘금에 눈이 멀었던’ 것이다. 그 무렵 남아프리카 지역에 주둔한 영국군은 50만 명이 넘었으나, 9만 명에 불과한 보어인의 게릴라전에 휘말려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그 규모와 전비(戰費)에서 영국에 가장 큰 타격을 입힌 전쟁이다.

신동아 2015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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