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호

국가 명운은 관세에 달렸다!

불리할 땐 닫고, 유리할 땐 열고

  • 조인직 | 대우증권 홍콩법인 팀장

    입력2015-11-19 16: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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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과 일본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최종 타결하면서 구체적인 협정 내용이 잇따라 공개됐다. 2017년부터 협정이 발효되면 향후 30년간 역내(域內) 12개국은 96~100% 수준의 무역 자유화 조치 혜택을 볼 전망이다. 미국, 일본, 캐나다, 호주, 베트남, 멕시코 등 참가국 국내총생산(GDP)을 모두 합하면 30조 달러를 넘는다. 세계 총생산량의 40%에 달하는 수준이다.

    미국에 이어 중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면서 안도하던 한국도 지난해부터 뒤늦게 TPP 가입에 적극 뛰어들었다. ‘다자간 자유무역경제권’이라는, 한 차원 높은 국제무역 체제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TPP 2차 교섭국으로 참가하려고 미국과 일본을 상대로 치열한 외교전을 벌이고 있다.

    양자 간이든 다자간이든, 자유무역협정이란 쉽게 말해 관세장벽 철폐를 약속하는 것으로, 국가 간 자유경쟁을 부양하자는 데 그 취지가 있다. 한국처럼 수출 비중이 높은 나라들은 특히나 그간 지불한 세금만큼의 비용이 빠지고 수익성이 개선된다는 측면에서, 일부 ‘자국 농산물 보호’라는 명분을 빼면 참가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봉건영주들의 ‘돈줄’

    관세는 고대부터 ‘국가’ 개념이 확립되기 전인 중세까지 유럽 봉건영주들에게 일종의 돈줄 노릇을 했다. 일본에서도 막부시대 때 지방의 번주(藩主)인 다이묘가 관할 지역에서 상인들이 상행위를 하면 ‘자릿세’를 징수했다. 영국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1767년 출간한 ‘국부론’에서 과도한 지방별 관세가 국내 상업의 발달을 저해한다며 일찌감치 부작용으로 지적한 바 있다.



    상인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안정적 상행위가 가능하도록 지원해줄 ‘정치적 실세’를 찾고 의존하는 측면이 있다. 유력한 봉건영주가 다른 영지(領地)를 병합 또는 통합해 최대한 큰 단일 시장을 조성해야 상업도 발전하고 자신의 이윤도 크게 남을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거대 시장의 영주는 곧 지역을 관할하는 왕국의 왕이 되고, 이 통합경제권은 자연스럽게 근대적 의미의 국가로 발전했다. 왕국 내에서 관세가 폐지되면 물류의 원활한 네트워크 형성, 화폐 통일 및 수송 인프라 작업이 수반되며 시장이 커지고 부(富)가 축적된다. 왕국 간 부의 불균형이 생기면서 외교적으로는 침략전쟁, 경제적으로는 관세의 부활과 폐지가 반복되는 형태로 국가의 통합과 분단이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독일은 현재 유럽연합(EU)에서 경제우등생으로 압도적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지만, 19세기 초만 해도 유럽 내에서의 위상은 영국이나 프랑스에 훨씬 못 미쳤다. 당시는 프로이센, 바이에른, 작센, 하노버 등 6개의 개별 영주들이 따로 관리하는 연방의 느슨한 연합 형태였기에 단일 경제권도 확립되지 않았다.

    독일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1820년대에 “독일이 정치적으로 통일되는 것이 어렵다면 연방 간의 관세장벽만이라도 철폐해 물류 및 시장 통합화를 조기 실현해야 한다”고 제창했으나, 당시 연방의 영주들은 지배계급의 주 수입원인 관세를 포기할 처지가 아니었다. 다만 ‘이대로 가다가는 영국, 프랑스와의 국제경쟁에서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공감대가 커져가며 당시 연방 중 가장 영향력이 컸던 프로이센이 먼저 총대를 멨다. ‘전체 파이를 키워 같이 더 잘살자’는 대의명분은 오늘날 최강대국이랄 수 있는 미국, 일본이 TPP 협정을 위해 내세운 캐치프레이즈와도 같다.

    같이 더 잘살자

    프로이센은 베를린을 중심으로 18세기부터 번영을 구가했는데, 19세기 들어 독일 연방 전체 인구의 절반을 점했으며 GDP도 다른 연방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다른 연방들은 우수한 프로이센 수입 물자에 고액의 관세를 부과하면서 맞섰는데, 결과적으로는 독일 전체 경제의 성장 정체를 부추길 뿐이었다.

    결국 프로이센은 다른 연방과의 관세를 상호 폐지하는 조건으로 거액의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고, 수입 목표를 세워 각 연방으로부터 일정량 이상의 물자를 반드시 수입하는 등의 특혜적 대우를 약속했다. 이를 통해 1834년에 오늘날의 FTA와 비슷한 관세동맹이 연방 내에 체결됐다. 관세동맹을 통한 전체 경제권 성장 및 노동인구 증가의 혜택을 맛본 독일은 이런 뒷심을 촉매로 마침내 1871년 최초의 통일제국을 출범하게 된다.

    관세장벽 철폐를 통해 자유무역을 실현한다는 이상은 상품과 서비스의 경쟁력이 일정 수준의 ‘체급’에 도달했을 때 얘기다. 경쟁할 수 있는 인프라가 없는 상태에서의 개방은 종속의 다른 말에 불과할 수도 있다. TPP 단어 중간에 ‘파트너십(Partnership)’이 들어간 이유도 그만큼 상대국과의 호혜적 동반 발전을 의식했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심산이다.

    최근 일본이 TPP 협상을 진행할 때도 그렇고, 한국이 미국과 중국을 상대로 FTA를 타결할 때도 비슷했지만 무역 비중이 높은 선진 공업국들의 경우 상대적으로 자국 농업의 위축을 걱정할 수밖에 없다. 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고비용 구조일 수밖에 없는 자국 농산물 시장에 갑자기 값싸고 맛 좋은 수입 농산물이 들어오면 해당 산업 자체가 무너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다.

    그런 점에서 일찍이 관세 폐지를 실험하고 자유무역 체제로 진입했다가 일정 부분 성과를 맛본 뒤 다시 보호무역체제로 회귀한 영국의 사례는 비록 200년 전 일이지만 지금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영국은 1815년 나폴레옹 전쟁 후 프랑스를 견제할 심산으로, 수입 곡물에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곡물법을 제정했다. 풍족하고 값싼 프랑스 농산물 수입을 관세장벽으로 막지 않으면 가뜩이나 경쟁력이 약한 자국 농가를 보호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전쟁이 끝나면서 영국에 대한 경제제재 조치이던 프랑스의 대륙봉쇄령이 해제돼 프랑스로부터의 농산물 수입량도 증가세를 보이던 터였다.

    ‘뜨거운 감자’ 곡물법

    반면 산업혁명 덕분에 면직물, 철, 기계 생산 등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하게 된 상공업자들은 해외시장을 좀 더 활발하게 개척하기 위해서는 곡물법 폐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외국에 관세장벽을 걷어내라고 요구하려면 자국의 장벽부터 제거해야 협상이 진전될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상공업자들에게는 보호무역을 표방하고 자급자족에 만족하는 ‘우물 안 개구리’가 될 것이냐, 아니면 자유무역 정책으로 ‘세계무역의 중심국’이 될 것이냐는 게 선택의 이슈였던 것이다.

    고전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는 당시 곡물법 폐지를 이끌어낼 수 있도록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각각의 나라가 우위에 있는 산업에 자본을 중점 투입하고 성장시킨다면 서로에게 부족한 산업 분야를 보충하게 되고 나아가 호혜적인 국제분업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는, 이른바 ‘비교우위론’이다. 경쟁력이 높은 국가에서 낮은 국가에 많이 수출하고 적게 수입하는 방식으로 국부를 축적하자는 중상주의, 각국이 생산비가 절대적으로 적게 드는 재화 생산을 전문화해 서로 무역을 하면 상호 간에 이득이 발생한다는 ‘절대우위론’ 등 기존 이론보다 진보한 것이었다.

    1846년 곡물법을 폐지하자 영국은 리카도의 예상처럼 공업화가 더욱 가속화했고, 수출 물량도 급증했다. 자신감을 얻은 영국은 1860년 프랑스와 오늘날의 FTA와 같은 자유무역협정을 체결(영불통상협정)하기에 이른다. 당시 공업 분야의 경쟁력이 강화됐을 뿐 아니라 프랑스와 러시아에 비해 한참 수준이 낮던 농업 분야에서도 양과 질 모두 기술력이 높아져 자급 환경이 갖춰지는 새로운 전기가 마련됐다. 관세라는 보호막이 걷혀 위기의식을 느낀 농업 경영자들이 비료와 농기구 개선, 경작기술 개발 촉진 등을 통해 스스로 혁신에 나선 덕분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초기의 예상에서 조금씩 틀어진 분야는 오히려 공업이었다. 면제품이나 기계류를 포함한 내구재 등에서 일정 수준까지는 계속 수출량이 늘다가 어느 순간부터 매출 정체 현상이 나타났다. 가령 면 셔츠가 아무리 좋아도 한 사람이 100장 넘게 살 필요는 없고 옷이 낡아서 못 입게 될 때까지는 절대적 시간이 필요한데, 끊임없이 계속 팔리리라 기대한 것이 오산이었다.

    쉽지 않은 ‘호혜적 성장’

    이 시기 공급경제학의 선구이던 프랑스의 장 바티스트 세이는 “공급이 수요를 낳는다”는 취지의 이른바 ‘세이의 법칙’을 내놓고 낙관론을 지폈지만, 어느 시점 이상에서는 아무리 가격을 낮춘 제품이 공급돼도 초과 수요가 발생하기 어려웠다. 한편 농업 분야에서 영국이 경쟁력을 갖춘 것과는 별개로, 해외로부터의 수입 농작물은 영국에서 안정적인 점유율을 계속 기록했다. 공업 제품과 달리 농산물은 특별히 과잉 공급될 여지가 적었고, 이미 확보된 수요는 비교적 유지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결국 영국은 1870년대에 들어서며 자유무역 노선에서 탈피, 다시금 기존의 보호무역 체제로 회귀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점차 상승 곡선을 그리기 시작한 국가 간 관세율은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 이어졌다. 이 시기 선진국 대열에 시차를 두고 편입한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일본, 미국 등에서 각각 다른 분야의 산업과 시장이 발달한 까닭에 쌍방 호혜적 성장도 이론처럼 쉽지 않았다.

    현재 미국은 거의 모든 무역 분야에서 압도적 억지력을 지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유무역의 최대 신봉국이기도 하다. 하지만 불과 2세기 전만 해도 상황은 사뭇 달랐다.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이자 1787년 초대 재무장관을 지내면서 미국 금융세제 제도의 전반적인 기틀을 확립한 알렉산더 해밀턴. 미국 관세제도의 개념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것 역시 그의 업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재무장관 시절 의회에 제출한 ‘제조업에 관한 보고서(Report on Manufacturers)’에서 보호관세 정책의 필요성을 적극 주장했다. 영국 및 유럽 선진국에 비해 미국의 산업이 뒤져 있었기 때문이다.

    독립 직후의 미국은 지주계급에 의해 경영되는 농업이 경제의 중심이었고, 공업력은 낮은 수준이었다. 미국 상무성 통계에 따르면 1830년만 해도 수출에서는 제1차 산품(가공하지 않은 원재료)의 비중이 62.7%, 식품이 22%였으며 공업 부문은 반제품과 완제품을 합쳐 15.3%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 수입 비중에선 공업 제품이 65%나 됐다.

    요컨대 담배와 면 등 상품 작물과 원료를 낮은 마진으로 유럽으로 수출하면 유럽에서 부가가치 높은 완성품을 다시 비싸게 미국에 수출하는 식이다. 수출 비중이 높은 농업의 경우 대부분 미국 남부지역 중심의 대농장에서 아프리카로부터 사온 노예를 부려 농작물을 대량생산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해밀턴의 보호무역 관세

    해밀턴은 이런 상황에서 보호무역 관세야말로 미국의 장래 명운을 좌지우지할 키워드라고 인식했다. 영국 수입품에 관세를 대폭 부과해 시장을 위축시키는 동안 자국 산업을 서둘러 육성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이 취임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그의 정치 노선이 현상 유지를 바라는 남부 지주계급 이익을 대변하는 쪽이었기 때문이다. ‘원료 수출국=미국’ ‘가공 수출국=영국’ 형세는 더욱 진전됐고, 미국의 영국 경제 종속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점차 커져갔다.

    다행히 19세기 중반부터는 미국도 북부 공업자들의 노력으로 기술혁신을 이루며 산업혁명의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때마침 인구 증가와 호경기의 선순환 주기가 찾아오고, 철도와 도로 등 인프라가 정비되면서 북부 제조업 지대의 설비 투자도 급속히 진행됐다. 정치적으로도 남부 민주당 계열의 농업지주 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북부 중심의 공화당 세력이 세를 불려나갔다.

    남북전쟁은 ‘관세전쟁’

    1860년에는 공화당 후보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며 북부 산업자본가와 상공업자를 밀어주기 위한 보호무역 중심의 정책이 한층 강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남부 농업지주들과의 대립이 정점으로 치달았다. 갈등은 결국 남북전쟁(1861~65)의 도화선이 되고 만다. 국내 우호 세력 확대와 국제적 여론전을 위해 ‘노예해방 선언’이 명분으로 등장했지만, 실제적으로는 관세와 무역정책의 방향 및 그에 따른 이권을 둘러싼 투쟁이나 다름없었다.

    60만 명의 사망자를 낸 참혹한 내전을 겪으며 미국의 관세 정책도 비로소 확고한 방향성을 갖추게 됐다. 남북전쟁에서 승리한 북부 세력은 이후부터 해밀턴이 건국 초기에 내세운 보호무역 정책을 하나씩 집행해나갔다. 미국의 고관세 부과로 영국 공업은 점차 경쟁력을 잃었고, 정부 주도의 기민한 근대 공업화를 통해 그 빈자리를 미국 기업이 채워나갔다. 미국은 이를 통해 ‘경제적 독립’을 이루며 그때껏 남아 있던 영국 식민지의 그늘도 깨끗이 씻는 계기를 마련했다.

    제국주의 및 강대국 편의적인 폐쇄적 보호무역 정책 등에 대한 반성이 본격화하면서 2차대전 후부터는 전후 질서의 한 축으로 자유무역 체제에 대한 세계적 공감대가 확산됐다. 1948년에는 미국이 주축이 된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 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 체제가 발족, 자유무역에 대한 세계적 질서를 새로 정비했다.

    1990년대 소련 붕괴로 냉전체제가 종결되자 GATT는 발전적 해체를 하고, 1995년부터 세계무역기구(WTO, World Trade Organization) 체제가 탄생한다. 예전보다 한층 더 자유무역에 초점을 맞추고, 관세율 인하 및 규제 철폐에 노력을 기울였다. 다만 회원국이 160개국이 넘으면서 선진국과 신흥국 간의 이해 상충이 현저하게 드러났고, 개별 국가 간 상황을 하나의 기준으로 단일화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

    WTO가 전 회원국을 포괄적으로 엮는 교섭을 단념하며 WTO 체제도 서서히 영향력을 상실했다. 21세기부터는 2개 국가 이상의 국가가 개별적이고 부분적인 교섭을 통해 상품과 서비스의 무역장벽을 낮추는 FTA 체제가 도입됐다. 지역이 인접하거나 무역거래가 많은 국가 사이에서 관세율 추가 인하 여지가 있는 무역 품목을 선정해 실행하는 방식이다.

    TPP는 또 다른 EU?

    FTA 체제의 보조 혹은 확장적 기능 측면에서 경제제휴협정(EPA, Economic Partnership Agreement)도 등장했다. 일반적인 FTA에 비해 기업 간의 협동, 투자 및 인적 교류, 지적재산권과 특허 결정 및 상호인정 여부 등을 좀 더 세부적으로 정의하는 체제로 보면 된다. 다만 최근 맺어지는 국가 간 FTA에는 EPA와 비슷하게 무역 외 경제협정, 지적재산권 보호, 노동자 수입, 기술협력, 의료 서비스 시장 개방, 공동투자 확대 등의 항목이 추가되면서 FTA와 EPA의 구분이 희미해지는 추세다.

    FTA와 EPA가 12개국의 다국 간 협정으로 승화된 것이 바로 TPP라고 보면 된다. 워낙 국가 간 규제 장벽이 많이 허물어져, 심지어 일본 경제계에서는 역내(域內) 주력 통화인 미 달러에 엔화 가치가 1대 1로 연동되는 시기가 가까워진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내놓을 정도다.

    TPP와 비슷한 기존 체제로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을 들 수 있다. 경제협력뿐 아니라 군사동맹이라는 정치적 요소까지 가미돼 TPP보다 강력한 연대로 볼 수도 있지만, 현재 TPP 역시 대부분 미국의 우방국가(또는 중국의 견제국가)로 구성되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유럽연합(EU)이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처럼 견고한 역내 체제로서의 부상도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의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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