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3월호

음양오행 ‘철학’ 품은 성형 ‘의학’의 속살

  • 한동균 성형외과 전문의 www.bestps.co.kr

    입력2005-02-24 14: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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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양오행 ‘철학’ 품은 성형 ‘의학’의 속살

    성형외과에는 수술로 외모를 가꾸려는 여성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진다.

    최근토성에서 날아온 ‘우주 쇼’에 세인의 이목이 집중됐다. 과학계도 곧 지구 생명체 탄생의 단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처럼 흥분했다. 토성의 최대 위성 타이탄이 보여준 환상적인 우주 쇼는 그야말로 신비했다. 지난 역사가 밝혀왔듯, 꿈은 미래를 개척해 현실로 만들게 될 것이다. 그러나 타이탄은 아직 이상(理想)이다. 우리에게 실체로 다가오기까지는 몇 세기가 걸릴 수도 있다. 그 긴 시간 동안 사람들에겐 오렌지빛과 메탄이 범벅 되어 내리는 타이탄의 빗물보다 생활에 가까이 있는 오렌지 주스가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필자는 이 현상을 보면서 오늘날의 과학과 철학을 생각한다. 우주는 과학의 발견 이전에도 존재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진리와 과학적인 진리 중에서 어느 것이 절대적인 객관성을 가졌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두 가치는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다. 그런데도 오늘날 과학은 철학에 등을 돌렸고, 철학은 과학을 손에서 놓아버렸다. 서로 경원시하며 이분법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

    필자는 이 지면을 통해 그 경계를 조심스레 허물고자 한다. 특히 필자가 거론할 음양오행과 성형의학은 철학과 과학(의학) 분야에서 각기 독특한 빛깔을 지니고 있다. 일반인의 생활과 가까이 있으면서도 제대로 인식되지 못한 불운한 학문이다. 우주의 원리에 대한 체계적 논리를 갖춘 철학이면서도 역술과 무속이라는 틀에 갇혀버린 음양오행론과 치유의 의학이라는 본뜻과 달리 상업적 의술로 낙인찍힌 성형의학에 대해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음양오행과 성형의학

    누군가 “당신이 할 수 있는 성형의 한계가 어디까지냐?”고 묻는다면 필자는 대답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글쎄, 무한하겠죠. 물론 신의 영역은 빼고…”라고 답할 것이다. 대부분 인간의 정신(정신세계)을 분석하는 것은 우주에서 새로운 별을 찾는 것처럼 어려운 작업이라 여기지만, 인간의 육체는 특별한 변화 없이 오늘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육체도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모양으로 진화했다.



    어느 천문학자의 말처럼 비록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가 우주의 역사를 담은 400쪽 분량의 책 한 권 중에서 단 한 줄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인간은 스스로 역사의 주체로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발전해왔으며, 정신과 육체를 가진 생물로서 우주의 운명에 대한 예측과 검증을 끊임없이 시도해왔다. 하물며 작은 몸에 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동양에서는 작은 몸도 일종의 소우주이고, 마음은 그 우주의 중심으로 여겨왔다.

    인류는 운명과 인상에 대해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여왔다. 그것은 깊이와 접근법에서 차이가 있을 뿐 동양이나 서양이나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자기 몸의 일정 부분을 변화시키고 인위적으로 고치는 행위는 언제부터 시작됐고, 그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운명이나 인상의 고정적인 부분이 과연 변화할 수 있는 것일까.

    타고난 운명, 개선할 수 있는 운명

    운명은 사람마다 다르다. 비슷한 얼굴은 있지만 똑같은 얼굴은 없듯이 운명도 비슷한 것 같지만 동일한 운명은 없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어떤 환경에 놓이게 되는데 이를 두고 명(命)이라 한다. 성형과 관상 이야기를 하면서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하겠지만, 바로 이 명이 정해지는 순간, 이에 따르는 운(運)이 정해진다. 태어난 시점을 두고 명이라 규정한다면 명의 주인공이 앞으로 겪게 될 흥망성쇠의 스토리가 운에 따라 전개된다. 명과 운은 모두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므로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개선의 여지가 별로 없다. 명리학에서 풀이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인간은 본능적으로 상황을 개선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명과 운이 정해져 있더라도 본분이나 분수를 지키며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면 명과 운이 정해놓은 코드를 이탈해 새로운 운명으로 개선할 수 있다. 인간의 운은 개인의 의지나 노력, 이른바 선행을 하거나 배우고 익힘으로써 개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더더욱 ‘어이구 내 팔자야’라고 한탄하며 포기해서는 안 될 일이다.

    누구에게나 기회는 온다. 다만 그 기회를 잡느냐, 놓치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 서두른다고 될 일도 아니므로 묵묵히 때를 기다리는 여유와 지혜가 필요하다. 겉으로는 편안하되, 속으로는 고도로 집중해야만 적기를 포착할 수 있고, 한치 빈틈없는 행동을 할 수 있다. 이러한 힘의 근원이 무한경쟁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인간이 부딪히면서 가장 먼저 보게 되는 인간의 모습은 무엇일까. 말할 것도 없이 겉모양이다.

    고등학교 시절 몸무게가 무려 75kg에 육박했던 가수 옥주현은 데뷔 초에도 통통한 몸매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오랜 다이어트로 지금과 같은 날씬한 몸매를 갖게 됐고, 이로 인해 데뷔 이후 가장 예뻐진 연예인이라고 하면 자연스레 그녀를 꼽게 됐다. 한때 옥주현의 중학교 시절 사진은 각종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순위 1위를 달렸다. 감색 교복에 단발머리, 둥그런 얼굴에 쌍꺼풀 없는 눈두덩을 한 평범한 10대였기에 그녀는 네티즌의 비아냥거림을 참아내야 했다.

    그녀는 ‘철저한 자기관리와 인내력, 그리고 체계적인 시스템 덕분’에 건강미인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핑클 멤버로 활동하던 당시 눈과 코를 성형했다고 실토한 바 있고, 언론매체에서도 그러한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솔직하고 꾸밈없는 성격이 매력적으로 비쳐져 오히려 팬들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이다. 그녀가 성형수술로만 예뻐진 것은 아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잘 타고난 명과 운 덕일 수도 있고 체력관리 등 특유의 노력 덕일 수도 있다.

    성형은 ‘치유의 미학’

    성형을 전공한 의사 자격으로 연예인의 얼굴을 하나씩 살펴보면 한 가지 법칙을 발견하게 된다. 찡그리건 웃건 간에 그들의 얼굴은 사랑스럽다. 이토록 사랑스러우니 대중이 미워할 수 없는 건 당연하다. 그렇다면 이것이 과연 그들의 진짜 인상(人相)일까.

    ‘인상’ ‘관상’은 매우 낯익은 단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속에 담긴 참뜻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을까. 얼굴은 인상의 근본이 되는 것이므로 매우 중요하다. 성형수술이 유행하는 이유도 인상의 변화를 바라는 인간의 욕망 때문이다. 좋은 인상, 나쁜 인상을 빚어내는 신의 참뜻이 선천적인 명과 운이라면 후천적 노력과 배려를 할 수 있는 제한된 영역이 바로 성형수술이다.

    필자는 의대 재학 시절 전공과목을 선택할 때 정신과와 성형외과 사이에서 크게 고민했다. 얼른 보면 상반되는 진로다. 정신과는 전혀 피를 볼 일이 없는 과이고, 성형외과는 수시로 피를 봐야 하는 과이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인턴과정 중 진로를 굳혔다. 주변의 반대의견도 만만치 않았지만 성형외과를 고집했다. 시련과 절망이 목표를 흔들 때마다 기필코 하고 말리라고 스스로에게 배수진을 쳤다. 왜 미치도록 성형외과 의사가 되고 싶었는지 스스로도 모를 일이었다.

    레지던트 생활은 성형의학에 대한 필자의 어설픈 의지를 확고히 해준 과정이었다. 실제로 환자를 만나 수백 가지 에피소드를 겪으면서 성형의학이 갖는 치유의 힘에 매료되는 동시에 절망도 한 시기였다.

    언청이나 선천성 구개열(태어나면서부터 입천장이 벌어져서 반드시 수술해야 함) 환자를 밤새 치료하던 일, 중환자실에 있던 선천성 기형 환자가 숨쉬기 곤란할 정도로 얼굴뼈가 조각나서 애태우던 일, 환자 대부분이 너무나 가난해서 사회재단이나 독지가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수술을 받는데, 그나마 돈이 모자라 수술을 미루고 있을 때 그들에게 경제적 도움을 줄 수 없어 안타까웠던 일, 교통사고로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얼굴이 망가진 환자들, 중환자실 환자들의 절망과 가족의 한숨소리….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대개 성형외과라고 하면 정상인의 얼굴을 예쁘게 만드는 과목으로 인식하지만, 실제 대학병원 성형외과에서 이뤄지는 의술은 대부분 화상이나 기형 등으로 상상할 수 없이 힘겨워하는 환자에 대한 치료다. 미용수술은 성형외과 시술 중 아주 작은 부분이다. 기형이든 정상이든 모두 똑같이 환자이고 외형의 개선을 바란다. 얼굴에 난 상처에서 피가 조금이라도 나면 거의 모든 환자가 절망하며 나약한 모습을 보인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신에게 의지하고, 의사에게 흉터 없는 상처 치유를 부탁한다.

    가령 한 여성이 사고로 얼굴에 상처를 입었다고 하자. 원래 아주 명랑한 사람이었다 해도 사고 이후 그의 성격은 크게 변할 것이다. 상처를 입은 직후와 흉터를 안고 살아가는 5년, 10년 후의 인상은 아주 달라질 것이다. 처음엔 슬퍼하고 한탄하다가 차츰 초조와 분노가, 그리고 일종의 체념에 의한 관조적인 인상으로 바뀔 것이다. 굳이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지만, 인상이 얼굴 상처에 의해 지배받는 단적인 예다.

    이처럼 성형은 신체 어느 한 부분의 치료에 그치지 않고 환자의 상처받은 마음까지 치유하는 능력이 있기에 전문의로서 절대적인 책임감을 갖게 된다.

    인상, 그 사람의 모든 것

    인상이란 말은 얼굴뿐 아니라 그 사람의 용모와 성격, 운세나 걸음걸이, 목소리, 잠자는 버릇, 심지어는 섹스의 형태, 눈을 껌벅이는 횟수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필자는 관상가가 아니다. 그렇다고 관상을 전혀 모르는 문외한이라 할 수는 없다. 항상 관찰하고 보듬는 게 얼굴이고 사람의 체형과 골상이다 보니 저절로 익혀지는 생활철학으로서의 관상(인상)을 보는 안목이 생겼다. 인상을 볼 때 얼굴의 이목구비, 머리, 이마, 목, 골상을 보는 것은 수박 겉핥기이다. 이것만으로는 성격과 운세를 판단할 수 없다.

    총체적 판단을 하는 데 있어 인상은 요즘의 외모지상주의와는 사뭇 다르다. 인상학이란 과거로부터 내려온 철학적 기초가 담긴 학문이며 우주원리를 담고 있다. 이에 비해 외모지상주의는 외모가 개인과 개인의 우열과 성패를 가름한다고 믿어 외모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루키즘(Lookism)이다. 미국에서 건너온 것 같지만 일찍이 어느 나라 어느 인종에서건 있었다.

    과연 외모가 ‘승부사’일까. 성형의사인 필자는 자주 이렇게 스스로에게 묻곤한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 ‘얼짱 문화’가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최근 한 성형외과와 인터넷 리크루트 회사의 공동조사에 따르면 조사대상인 1264명의 예비취업자 가운데 98%가 “외모가 취업에 영향을 끼친다”고 답했으며, 이들을 뽑는 기업의 인사담당자 584명 중 94%가 “채용시 외모를 고려한다”고 밝혔다. 또 제일기획이 13∼43세 여성 2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파란통신 라이브 보고서’에 따르면 응답자 가운데 68%가 “외모가 인생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답했으며, 78%는 “외모 가꾸기는 멋이 아니라 생활의 필수요소”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조사결과는 남녀를 불문하고 현대인은 자신의 외모에 대한 타인의 평가에 상당한 중압감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외모를 인생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로 생각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렇듯 우리 사회에 만연한 외모지상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외모를 더욱 가꾸게 한다. 날씬함에 대한 강박관념은 다이어트 열풍을 일으키며 건강을 해칠 정도에 이르렀다. 비만도와 관계없는 다이어트 강박현상까지 만들어냈었다. 성형이나 다이어트를 한 뒤 심각한 부작용으로 건강을 잃거나 죽음에 이르는 경우도 종종 보도된다.

    이런 상황을 단지 한 개인의 책임으로만 몰 수는 없다. 외모지상주의를 끊임없이 확대재생산하는 매스미디어, 미용성형과 비만을 전문으로 하는 의사나 다이어트 산업계는 여성의 아름다움은 꾸미기 나름이며 노력만 하면 얼마든지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인위적인 성형과 살 빼기를 자기관리의 능동적 실천인 양 의미화하고 자기계발이라는 식의 허위의식을 유포한다.

    외모지상주의는 다양한 문화가 부채질한 게 사실이지만, 대중매체와 기성세대는 그러한 신드롬을 방치했다. 많은 사람이 정보의 홍수 속에서 신문, TV, 라디오, 잡지, 사이버 공간 등 여러 매체를 통해 성형 정보를 접한다. 또 기업의 광고는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기에 광고 내용과는 전혀 무관한 장면들로 사람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며 외모가 출중하고 인기 높은 연예인들을 출연시킨다. 이러한 사회현상으로 인해 모방심리가 작용, 성형수술 과소비 등의 폐해가 나타난다.

    외모의 기준은 있는가

    외모의 기준은 무엇인가. 탤런트 송혜교나 김희선이 기준인가. 아니면 서양 미인인 캐서린 제타 존스나 니콜 키드먼이 그 기준인가. 우선 미의 기준을 정하는 척도가 있다면 그것이 과연 어느 정도이고 그러한 외모를 살리기 위해 수술이 할 수 있는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사람의 경우 아름다운 여성의 기준으로 작고 흰 얼굴에 쌍꺼풀 진 눈과 높은 코를 가진, 마르고 키 큰 여성을 든다. 이는 서구문화가 우리 사회에 들어오면서 대중매체를 통해 널리 전파된 것으로, 특히 수많은 상품광고에서 무차별적으로 반복돼 보여져왔다.

    그러나 외모를 중시하는 이런 분위기는 늙어가는 몸에 온갖 성형을 하고 다이어트의 결과로 아름다움을 구현했다 해도 일시적일 뿐 영원히 지속되지 못하고 필연적으로 잃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모든 여성을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빠지게 만든다.

    외모보다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자는 진부한 말은 애당초 하지 않겠다. 그러나 외모의 다름을 다양함과 개성으로 인정할 수는 없을까. 획일화된 기준에 도달하기 위한 외모 강박증의 출구는 어디일까. 제한적이나마 수술을 통해 사랑스러운 얼굴이 된다거나 콤플렉스를 해결할 수 있다면 좋겠으나 실제상황은 그렇지 못하다. 성형에 대한 지나친 기대야말로 금물이다.

    개성시대라는 요즘도 여전히 성형외과를 찾아 어떤 연예인처럼 성형해달라는 이들이 있다. 얼굴뼈에서부터 그 분자구조와 세포크기가 다 다르고 수십 년을 그 얼굴로 살아왔는데 수술을 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을까. 그들이 내미는 사진을 보면 최근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끄는 연예인이거나 서양 모델, 영화배우로 얼굴선과 코의 모양이 비교적 잘 다듬어진 얼굴이다. 사진을 보여주는 사람들은 참고자료로 가져온 것 같지만, 실제로 자기 동일시와 모방심리에서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 같다.

    수술로써 도울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외형의 변화이고 뼈와 연골과 연부조직의 덧셈과 뺄셈일 뿐 미적분이 아니다. 때문에 덧셈과 뺄셈뿐인 초등학교 수준의 수술방법에는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된다. 물론 현대 성형수술의 수준이 낮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의미 있는 변화를 요구하는 환자의 외모 콤플렉스를 똑같이 찍어내거나 흉내내기로 해결하기가 어렵다는 것이고, 그와 유사하거나 자신의 매력 포인트에 맞게 맞춤설계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이이야말로 역기능과 순기능의 경계를 넘나드는 현대 성형 의술이 지향해야 할 목적이다.

    인간이 몸의 아름다움을 중시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동서고금을 통해 미인과 관련된 이야기는 전쟁과 사랑, 시대 조류, 문화 콘텐츠, 정치경제 심지어 범죄의 영역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미인의 개념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따라서 영원히 아름다운 것은 없다. 얼굴이 늙으면 뼈와 세포까지 늙게 되어 아름다움이 반감되고 쭈글쭈글해져 미적 매력이 감소한다. 하물며 개인 각자가 느끼는 감정이야 어떻겠는가. 인생은 이런 것이려니 하며 살아야 하는가 아니면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다면 성형이라도 해야 하는 것일까.

    성형 신봉하는 현대인

    현대인의 특성이 꼭 외모로만 즉물적으로 판단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귀족성형, 팔자성형 등이 어떻게 해서 그러한 이름이 붙여졌는지를 알려면 각 개인의 목소리와 몸동작, 걸음걸이, 성격, 운세 등도 관상(인상)의 범주에서 해석해야 한다. 이러한 해석은 생활과학(성형의학)과 깊이 접목되어 일반인에게 깊이 침투됐고, 관심사의 대상이다.

    대중은 그들에게 침투된 성형과학이 과연 약이 되는지 독이 되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얼굴에만 초점을 두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어린이들도 미디어의 영향을 받아 아무런 여과 없이 성형에 대한 편견과 미신을 신봉하며 자라난다. 많은 여성이 하루에도 20번 이상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으며, 남성 또한 그에 못지않다. 애써 외면하려 해도 좀처럼 외면할 수 없는 게 자신의 얼굴이다.



    서구적인 얼굴에 대한 동경과 멸시는 성형과학이 그 빌미를 제공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는 것처럼 인상학이 있는 한 성형과학은 족쇄처럼 따라다니며 인상학(관상학)에 굴레를 씌울 것이다. 앞서 말했듯, 성형과 관상은 각광을 받으면서도 연구되지 않았고 그 경계를 넘나들면서 이론과 실제를 겸비하는 것조차 어렵다. 과연 수술로 좋은 인상(복이 오는 인상)이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답변은 거의 전무한 형편이다. 이에 필자는 관상을 성형과 연계하여 새롭게 조명해보며 독자들과 소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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