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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종주기⑫|삽당령에서 진고개까지

“산은 벗고 걸어야 제 맛, 한번 훌훌 벗고 걸어보시게”

  • 글: 육성철 국가인권위원회 공보담당 사무관 sixman@humanrights.go.kr

“산은 벗고 걸어야 제 맛, 한번 훌훌 벗고 걸어보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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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벗고 걸어야 제 맛, 한번 훌훌 벗고 걸어보시게”

동해전망대 앞쪽의 풍력발전기

백두대간은 956.6m봉을 오른편에 두고 빙글 돌아서 지나간다. 목장 밖으로 펼쳐진 광활한 초지 위에 듬성듬성 서 있는 소나무가 보인다. 바람의 영향으로 소나무는 하나같이 대간 마루금 쪽으로 기울어 있다. 비탈에 위태롭게 붙어 있는 소나무를 바라보자니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조금 더 걸어가니 소나무와 고사목이 구름 속에서 어우러지는 광경이 연출된다. 사진기를 꺼내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956.6m봉에서 고루포기산(1238.3m)까지는 2km마다 쉼터가 있다. 강릉시 왕산면에서 설치한 시설인데, 알루미늄으로 튼튼하게 만들어 길손들이 쉬어가기에 안성맞춤이다. 산에서부터 백두대간은 강릉시 왕산면과 평창군 도암면의 경계선을 달린다. 고루포기산을 넘으면 왼편으로 폭포소리가 들리는데 이곳이 바로 실폭이다. 폭포의 물줄기를 따라 곧장 내려가면 평창의 명소인 용평리조트로 연결되는 길이 나오고, 대간 마루금은 용평리조트 반대편인 횡계현으로 향한다.

횡계현에서 능경봉(1123.1m)까진 힘을 좀 쏟아야 한다. 군데군데 너덜지대가 있고 길이 사라진 잡목숲도 뚫어야 한다. 물기를 머금은 나무줄기를 걷어내고 간신히 길을 확보하면 어디선가 보이지 않던 나뭇가지가 얼굴을 때린다. 처음엔 따갑고 아프지만 물기가 얼굴을 타고 흐르다 보면 부드럽고 시원하게 느껴진다. 능경봉을 수백 미터 앞둔 지점에서 온종일 내리던 비가 그치고 오른편 동해바다 쪽으로 장엄한 운해가 펼쳐졌다. 운해는 능경봉 정상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바다와 구름이 맞닿은 곳에서부터 백두대간의 중턱까지 온 천지가 구름으로 뒤덮였다.

능경봉에서 대관령으로 내려서는 길에서는 새로 뚫린 영동고속도로를 바라볼 수 있다. 백두대간 남쪽의 마지막 고속도로를 땅 밑으로 떠나보내고 길손들이 목을 축이는 약수터를 지나치면 멀리 추억의 구 영동고속도로가 나타난다. 새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 많은 사람들이 쉬어가던 대관령 휴게소엔 몇 대의 관광버스만 서 있을 뿐, 과거의 명성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지난 수십 년간 강원도 사람들의 삶을 가장 크게 바꿔놓았던 그 길 위로 자동차가 아닌 롤러스키와 사이클의 기나긴 행렬이 지나가고 있었다.

붉은 기운이 구름을 태우고…



9월24일 밤 서울강남터미널에서 강릉행 고속버스를 탔다. 한가위 귀향인파 탓에 서울 도심에서 다소 밀리긴 했지만 3시간20분 만에 강릉에 도착했다. 산에 오르기는 이른 시각이라 택시를 타고 경포해수욕장으로 향했다. 명절을 앞둔 탓인지 해변은 한산했다. 모래사장 군데군데에서 몇몇 연인들이 뜨거운 포옹을 나누고 있었다. 혹시라도 방해가 될까 싶어 멀찌감치 떨어져서 해변을 바라보다가 모래사장에 누웠다. 소리로 바다를 느껴보기 위해서였다.

깜빡 잠이 든 모양이다. 시계를 보니 20여분쯤 지나 있었다. 모래사장을 걸어나와 밤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카페로 갔다. 손님은 단 두 사람.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인이 창가 옆 테이블에서 홀로 술잔을 따르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졸던 아르바이트 직원을 깨워 커피 한잔을 주문한 뒤, 테이블 위에 놓인 낙서 노트를 읽었다. 사랑에 빠진 사람, 사랑에 목마른 사람, 사랑에 지친 사람…. 낙서 노트에는 사랑 때문에 경포대에 찾아온 사람들의 갖가지 사연이 절절하게 담겨 있었다.

새벽 5시. 수평선 너머에 기나긴 불빛들이 늘어섰다. 밤새 오징어를 잡던 어선들이 귀항을 서두르는 모양이다. 이제 머지않아 동이 틀 것이다. 종업원을 깨워 커피 값을 지불하고 해변으로 걸어나갔다. 해수욕장 주변의 숙소에서 하나둘씩 기지개를 켜고 나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언제나 그렇듯 일출은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온다. 새끼손가락만한 불덩어리가 바다 위로 고개를 내미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붉은 기운이 검은 구름을 태워버렸다. 이 순간을 기다리며 새벽잠을 포기했던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해수욕장을 빠져나와 경포호수 주변을 걸었다. 경포호수 주변은 자전거를 타고 산책하기에도 좋은 코스다. 누가 뭐라 해도 경포호수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경포해수욕장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경포대에 올라야 한다. 송강 정철이 ‘관동별곡’에서 ‘관동의 으뜸’이라고 극찬했던 경포대는 바다와 호수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명승지로 유명하다. 경포대가 가장 아름다운 때는 봄철인데, 경포대에서 벚꽃으로 물든 경포호수를 바라보는 광경이 압권이다. 한때 둘레가 30리에 달했던 경포호수가 이젠 토사가 밀려들면서 10리 안팎으로 줄어들었다는 점이 다소 아쉽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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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육성철 국가인권위원회 공보담당 사무관 sixman@humanrights.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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