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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함께하는 우리 산하 기행

감잎처럼 은행잎처럼 느리게 떠나고 싶더라

경북 청도

  • 최학 │우송대 한국어학과 교수 hakbong5@hanmail.net

감잎처럼 은행잎처럼 느리게 떠나고 싶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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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는 야트막한 산을 두르고 앞으로 냇물을 흘리고 있는 서원마을은 먼 데서 바라봐도 고즈넉하고 아름답다. 이곳 냇물이 청도천인데 예전에는 운계(雲溪)로 불렸다고 한다. 조선 중기의 학자 김일손이 무오사화의 참화를 입었을 때 이 냇물이 사흘 동안이나 핏빛을 띠고 거꾸로 흘렀다 하여 ‘자계(紫溪)’란 이름을 얻었다고 전한다.

거의 바닥을 드러낸 내를 건너 마을로 들면 이내 이곳 제일 윗자리에 앉은 서원 앞에 이르게 된다. 출입문은 굳게 닫혀 있는데 담 너머의 풍경 또한 적막하기만 하다. 관리인을 만나 찾아온 연유를 밝힌 뒤에야 세월을 묻힌 안쪽 공기를 대면할 수 있다.

자계서원은 탁영 김일손 선생을 배향하기 위해 중종 13년에 세워졌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폐철됐다가 1924년 중건됐다. 기록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청도에서 태어난 선생은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을 경기도 용인에서 보내고 10대 중반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이후 밀양의 김종직 문하에서 수학한 것으로 돼 있다. 관직에 나선 후에는 주로 언관에 재직하면서 훈구파의 불의·부패를 공격하는 반면 사림파의 중앙정계 진출을 적극 도왔다. 그 결과 연산군 4년 유자광, 이극돈 등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에서 사초에 넣은 조의제문 등이 문제가 되어 능지처참의 형을 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 34세.

서원 안쪽, 2층 누각 형식으로 된 영귀루가 우뚝 서 있고 그 옆으로 아름드리 은행나무 고목 두 그루가 사람의 발길을 끈다. 두 그루 모두 선생이 직접 심어 오늘에 이른다는 안내문이 있다. 은행나무 사이에 있는 그의 문학비에는 성종 20년 4월 그의 나이 26세 때 섬진강에서 지리산을 보며 읊었다는 시 한 수가 적혀 있다.

푸른 물결 넘실넘실 노 소리 부드러워



소매에 찬 맑은 바람 가을인 양 서늘하다

머리 돌려 다시 보니 참으로 아름다워

흰 구름 자취 없이 두류산을 넘어가네

문학적 감수성이 넘치면서도 도학적 이데올로기로 무장돼 있던 한 젊은 지식인이 기득 세력과의 싸움에 몸을 던져 장렬히 산화하는 역사의 드라마를 새삼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이곳 자계사원을 찾아온 보람은 있다.

선암서원 배롱나무

자계서원과 함께 청도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서원이 있다. 청도에서 운문사 가는 길에 거치게 되는 금천면 동곡의 동창천 물가에 있는 선암서원이 그것이다. 운문산에서 흘러내린 운문천과 단석산에서 발원한 동곡천이 선암 앞에서 합류해 동창천을 이루는데 서원 건물은 이곳 강가 높은 언덕에 앉아 있다.

이 서원은 삼족당 김대유와 소요당 박하담 두 분을 배향하는데 김대유는 김일손의 조카다. 일찍이 조광조, 조식 등과 친교했으며 무오사화로 작은아버지 김일손이 화를 입었을 때 아버지와 함께 호남에 유배되기도 했다. 성균관전적, 칠원 현감 등을 지냈다.

박하담은 중종 때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그 뒤 여러 번 대과에 실패하자 운문산 아래의 눌연에 소요당이란 정자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 뒷날 조정에서 그의 학행을 듣고 감역, 사평 등의 직임을 주어 여러 번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격식보다는 주변과의 어우러짐을 중시한 건물과 공간 덕으로 여느 서원에서와 같은 긴장감 같은 것을 갖지 않아도 좋다. 특히 담 밖을 나와 마주하는 강변 풍경이 일품이다. 운치 있는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는 가운데 푸른 강줄기가 시원스럽게 발아래로 내려다보인다. 비탈을 내려가 마주하는 아래 위편의 강 풍경도 살갑다. 눈길을 돌리면 멀리 북암산, 수리봉, 운문산, 가지산으로 이어지는 영남 알프스의 스카이라인이 장쾌하다.

더러 피비린내 풍기는 세파에 휩쓸려 드는 때도 있지만, 더 많은 시간을 경치 좋고 바람 좋은 데 앉아서 술잔을 나누며 세월과 임금을 탓하고 음풍농월을 할 수 있었던 옛 선비들이 부럽게 여겨지는 것도 이런 대목에서다. 때마침 서원 뜰의 늙은 배롱나무들이 붉은 꽃들을 탐스럽게 터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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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학 │우송대 한국어학과 교수 hakbong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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