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정윤수의 힐링 healing 필링 feeling

목포는 설움이다 이난영이다

노래를 낳는 항구

  • 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목포는 설움이다 이난영이다

3/4
1935년 발표한 곡이다. 문일석이 작사하고 손목인이 작곡했다. 노래는 이난영이다. 이난영 이후 수많은 사람이 불렀지만 이 노래는 이난영의 목소리로 완성된다. ‘왜색 곡조’라 해 석연치 않은 질타를 받은 적도 있지만, 오히려 이 곡은 일제강점기 목포 사람들의 정서적 일체감과 눈물의 저항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일경들이 치안 방해를 들어 금지했을 정도였고, 산업화 시절에는 서울로 인천으로 돈 벌러 떠나온 사람들의 애틋한 탈향(脫鄕) 의식이 사무쳐 흐르던 곡이었으며, 민주화 시절에는 ‘인동초 노래’로 널리 불린 바 있으니, 목포 하면 ‘목포의 눈물’이요 특히 이난영의 목소리가 아니면 ‘목포의 눈물’도 아닌 것이었다.

목포가 낳은 노래는 전래하는 민요 또는 그러한 가락에 새로운 생활양식을 얹은 신민요가 있고 일제강점기의 행진곡풍 가곡과 대중가요가 있다. 행진곡풍의 가곡은 대체로 생활의 개선과 활기찬 삶을 그렸는데 일제의 식민 정책에 따라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1930년대 ‘목포 행진곡’ 같은 노래가 그렇다. 광복 이후에는 조희관 작사 이동욱 작곡의 ‘유달산 아침’, 박정은 작사 이동욱 작곡의 ‘유달산 낮’, 박정은 작사 이동욱 작곡의 ‘유달산 저녁과 밤’ 같은 노래가 만들어졌다. 1960년대 초반에는 권일성의 시에 선율을 입힌 ‘목포시민의 노래’가 불려졌다.

이러한 노래들은, 곡조의 완성도와 무관하게 서민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지는 못했다. 어떤 곡은 관 주도의 행사용으로만 불렸다. 이를테면 1980년대 목포시는 너무나 구슬픈 ‘목포의 눈물’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활기찬 노래 ‘목포의 웃음’ 같은 곡을 만들었고 여러 단체에서도 이 같은 찬가를 다수 만들어 배포했으나 행사장에서는 제법 울려 퍼졌으되 세시의 풍속으로는 들어가지 못했다. 목포청년회의소에서 만들어 배포한 ‘목포의 찬가’, 목포시와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목포지부장 최덕원이 시인 김일로와 노산 이은상에게 의뢰해 가사를 얻고 서만종이 작곡한 ‘예향목포행진곡’, 강석화 작사 김수환 작곡의 ‘목포청소년의 노래’, 목포를 대표하는 작가 박화성이 가사를 짓고 ‘목포의 눈물’ 작곡가인 손목인이 만든 ‘목포의 찬가’ 등은 행사용으로 쓰이거나 한두 번 쓰이다가 사라졌다.

이난영, 옴무 쿨숨을 만나다

어떤 목적으로 노래를 지어서 그것으로 민간의 오랜 정서에 깃든 선율을 대체하려는 것만큼 비문화적인 것도 없거니와 그런 의도에 의해 대체될 만큼 ‘목포의 눈물’의 역사가 가벼운 게 아니기 때문이다. 1986년, 박화성이 지은 ‘목포의 찬가’는 “육지도 열리고 바다도 열려 세계의 사연이 오고 가는 곳/ 내 고향 목포는 문화의 고장 알차게 뻗어나갈 미래를 향해/ 나가자 더 나가자 힘차게 더 힘차게”라는 가사인데, 관가의 행사나 이벤트 말고는 이런 노랫말을 일상에서 부를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의 ‘목포의 눈물’, 박남포 작사 이봉룡 작곡의 ‘목포는 항구다’, 반야월 작사 고봉산 작곡의 ‘목포의 달밤’, 천지엽 작사 송운선 작곡의 ‘영산강 처녀’, 박춘석 작사 작곡의 ‘목포 블루스’ 같은 가요가 목포의 노래가 되거니와 여기에 ‘남행열차’도 포함돼야 한다. ‘남행열차’라는 제목으로는 두 곡이 있다. 노래방에서, 야구장에서, 회갑 잔치에서 “비 내리는 호남선~ 남행~ 열차에…”로 신나게 울려 퍼지는 김수희의 ‘남행열차’는 1987년 곡으로 정혜경이 작사하고 김진룡이 작곡한 것이다. 또 하나의 ’남행열차‘는 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으로 역시 이난영이 부른 “끝없이 흔들리는 남행열차에 홍침을 베고 누워 눈물집니다/ 사랑하는 까닭에 사랑하는 까닭에 떠나를 가며/ 가엾다 내 청춘을 누구를 주나”라는 가사로 1939년 발표된 곡이다.

그리고 ‘목포의 눈물’이 있다. 1934년 조선일보 후원 ‘자기 고장 노래 가사 공모전’에 문일석이 응모한 ‘목포의 눈물’이 당선돼 당대의 작곡가 손목인이 노래로 만들어 1935년 열아홉 살의 청초했던 이난영의 목소리로 발표됐다. 발표되자마자 당대 최고의 히트곡이던 고복수의 ‘타향살이’를 앞질러버렸다고 한다.

이후 ‘목포의 눈물’은 목포를 넘어 전국적인 노래가 되어 현대사 굽이굽이 서러운 삶을 어루만졌다. 이 노래가 서럽다 해, 한이 많다 해, 너무 구성지다 해 다른 씩씩한 노래로 대체해 목포의 노래로 삼아보자고 한 것은 앞서 말했듯 지극히 비문화적이다. 그렇게 되지도 않을 일을 문화계 내부에서 자생으로 제안한 게 맞을까 의심스럽지만, 설령 관가의 시도에 못 이긴 체했다고 하더라도 시늉만으로 그쳤어야 할 일이다.

오거리에서 시를 짓다

오히려 이 노래를 문화적 사건으로 삼은 예술가가 따로 있다. 2014년 6월,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상실과 사랑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중동미술 특별전을 기획한 독일 출신 큐레이터 샘 바더윌과 레바논 출신의 틸 팰라스다. 그들은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에 배어 있는 한과 상실의 정서에서 중동현대미술전의 착상을 얻었다”면서 식민과 전쟁을 공통적으로 경험한 한국의 이난영과 이집트의 옴무 쿨숨이라는 두 여가수의 가상 만남을 통해 ‘상실과 사랑’이라는 정서를 현대미술로 표현한 전시를 기획했다.

가상의 이야기는 이렇다. 1967년, 가수 이난영은 미국 CBS 방송사의 유명 프로그램 ‘에드 설리반 쇼’에도 출연한 바 있는 딸들(미국에서 주로 활동한 김시스터즈)을 만나러 뉴욕에 갔다가 귀국하는 길에 파리를 경유한다. 여기서 이난영은 이집트의 가수 옴무 쿨숨의 공연을 보는데, 둘은 한순간에 ‘솔 메이트’가 되고 공연 이후 오랫동안 대화를 나눈다.

전쟁과 가난과 핍박으로 서러웠던 이집트와 한국의 현대사, 그 현대사를 여성으로 가수로 살아내야 했던 두 스타는 비록 ‘가상 대화’지만 서로를 존중하고 미래를 언약한다. 오랜 세월이 지나 중동의 미술가 18명이 옴무 쿨숨의 다양한 메시지를 안고 광주시립미술관을 찾는다. 이란 출신의 쉬린 네샤트 같은 세계적 미술가들이 충격적인 작품으로 미술관을 채워 제국과 식민, 전통과 현대, 전쟁과 평화 등을 피의 연대기로 거쳐야 했던 한국과 중동의 삶을 다뤘다.

이렇게 질문을 던지고, 정답은 없이 수많은 답을 제출하는 것이 문화다. 이러한 문화의 화두로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제시됐다는 것 자체가 이 노래의 역사성, 불멸성을 말해준다. 관변의 찬가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3/4
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목록 닫기

목포는 설움이다 이난영이다

댓글 창 닫기

2019/12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