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호

명사 에세이

한계령의 四季

  • 이상근 | 서강대 경영학부 교수

    입력2016-12-21 11:2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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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계령의 사계(四季)는 기승전결이 뚜렷한 한 편의 수필과도 같다. 강원도의 관동과 관서를 연결하는 고개로는 위쪽에서부터 진부령, 미시령, 한계령, 조침령, 진고개, 대관령, 백봉령 등을 들 수 있다. 한계령은 강원 인제군 북면 한계리 동쪽에서 양양군 서면 오색리로 가는 길에 자리한다. 해발 920m에 이르고, 동해와 내륙을 잇는 주요 교통로 중 하나다.



    이른 봄비에 개나리 흠뻑 젖은 어느 날, 두 남매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인제 내린천을 지나 원통에서 한계천을 따라 한계령을 오른다. 아직은 겨울 끝자락. 골바람이 차갑기만 하다. 설악로를 따라 걷다 보면 옥녀탕을 지난다. 선녀가 대승폭포에서 목욕을 하다 괴물이 나타나 괴롭히자 이곳으로 피신했는데, 또다시 해하려 하자 노한 옥황상제가 벼락을 쳐서 괴물을 죽이고 선녀를 구했다는 전설이 서려 있다.

    옥녀탕을 지나면 하늘벽과 마주한다. 원래는 학의 서식지라 하여 학서암(鶴棲岩)으로 불렸지만, 커다란 바위가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를 이루며 병풍처럼 펼쳐진 모습이 하늘을 지붕 삼아 벽을 세운 것처럼 보인다고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절벽의 길이는 약 300m, 높이는 약 250m로 단애(斷崖)를 이룬 단일 암석의 틈새를 비집고 자란 소나무에서 생명력의 강인함과 경외감을 느낄 수 있다.

    하늘벽을 뒤로하고 대승령(大勝嶺) 등산로 기점에 다다르면 장수대(將帥臺)를 만난다. ‘장수대’는 1959년 인제군에 주둔한 국군 제3군단장이 6·25전쟁 중 설악산 전투에서 산화한 장병들의 넋을 기리려 작은 산장을 세운 뒤 명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수대에서 한계사지를 끼고 북으로 900m 이동하면 한국 3대 폭포의 하나인 대승폭포를 만난다. 눈 녹아내리는 폭포의 물줄기는 산바람에 흩날리며 춤춘다.



    처마 밑 제비새끼처럼 재잘대는 아이들의 배고픔을 달래려 소승폭포의 절경은 생략하고 곧바로 한계령 정상 휴게소로 직행한다. 정상에서 저 멀리 보이는 동해는 엄마 품과 같은 포근한 해풍으로 객을 맞아주곤 한다.



    여름

    여름 한계령에서 으뜸으로 내세우고 싶은 건 두릅, 곰취, 참취, 방풍취, 씀바귀, 비비추, 아수리, 곤드레, 엄나무순, 고광나무순, 가죽나무순 같은 산나물이다. 어릴 적, 나는 떡보였다. 요즘도 녹음이 우거지는 초여름엔 늘 양양군 서면의 송천마을을 찾는다. 설악산과 감봉산 자락의 오지마을로, 3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산다. 15가구는 영농조합을 이루고 산나물로 옛날 그대로의 떡을 만든다. 방앗간 기계 대신 시루에 얹어 장작불로 찌고 떡메로 쳐서 손으로 떡을 빚는 아낙네. 꼭 그 옛날 할머니가 떡 만들어주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오지의 떡은 오색약수에서 흘러내린 물로 재배해 찰기가 남다른 쌀과 설악의 산나물로 만든다. 반죽할 때 기름이나 물 대신, 꿀을 내리고 남은 밀랍을 사용해 만든 이들 떡의 종류는 쑥떡, 계피떡, 바람떡, 찹쌀떡, 가래떡, 어수리떡, 송편, 경단, 백설기, 인절미, 호박고지 등 다양하다. 하지만 나는 가장 좋아하는 수리취떡을 맨 먼저 집어든다.

    떡마을에서 남쪽 기슭으로 조금 올라가면 양수발전소가 있는 영덕호를 만난다. 양수발전 원리를 설명하는 에너지월드에 잠시 들렀다 미천골로 향한다. ‘미천(米川)골’이란 이름은 신라 사찰인 선림원에서 승려들을 위해 쌀 씻는 물이 계곡을 하얗게 만들었다는 전설에 따라 붙인 것으로, 그 위세를 짐작할 만하다. 선림원지엔 삼층석탑, 석등, 부도, 비석 등 국가지정 보물이 있어 역사교육의 산실이다. 7km가 넘는 깊은 계곡은 기암괴석과 조화를 이룬다. 원시의 자연을 그대로 간직한 미천골 자연휴양림은 최고의 힐링 장소로 손꼽힌다. 초여름의 나른함을 미천골 밤바람에 실려 보낸다.



    가을

    가을 한계령의 매력은 단연 흘림골, 여심폭포, 등선대, 등선폭포, 주전폭포, 십이폭포, 주전골, 용소폭포로 이어지는 단풍 구경이다. 흘림골이란 지명은 계곡이 깊고 숲이 짙어 늘 날씨가 흐릿하다고 붙여졌다. 입구를 지나 계곡을 따라 오르면 울긋불긋한 단풍이 각양각색의 옷으로 갈아입는다.

    목욕을 하다 천의(天衣)를 잃어버린 선녀가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주전골 만불동을 넘어 폭포가 됐다는 여심폭포를 지나 신선이 하늘로 올라간다는 등선대에 오른다. 일곱 봉우리가 병풍처럼 나란히 펼쳐진 칠형제봉의 감흥은 잊을 수가 없다. 등선대의 파노라마 전망은 기암괴석이 사방으로 펼쳐져 만 가지 모습으로 보여 만물상이라 비유함에 부족함이 없다.

    등선(登仙)폭포엔 신선이 하늘로 오르기 전 이곳에서 몸을 정화하고 등선대에 올랐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이 폭포로 향하면서 가을 단풍이라 하면 왜 설악인지를 짐작게 된다. 주전폭포를 지나 점봉산에서 발원한 물이 주전골의 비경과 함께 열두 번 굽이굽이 흘러 폭포를 이뤘다는 십이폭포를 지나면 옛날 이 골짜기에서 도적들이 위조화폐를 만들다 붙잡힌 데서 지명이 유래된 주전(鑄錢)골을 만난다. 주전골 마을 어귀를 돌아서면 종착지인 용소폭포다.



    겨울

    겨울 한계령의 절경은 한계령휴게소다. 신라 마의태자 일행이 망국의 설움을 안고 경주를 떠나 방랑길에 오른 935년, 지금의 한계리에 도착한 때는 살을 에는 추위와 눈보라가 몰아치던 한겨울이었다. 그래서 ‘한계령(寒溪嶺)’이란 이름이 붙은 데서 짐작할 수 있듯, 소담스럽게 눈 덮인 한계령을 보는 일은 그리 흔치 않다.

    한계령휴게소는 1979년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김수근과 류춘수가 설계했다. 설악산의 장엄한 절경을 조망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건축 개념이 포함됐다. 건물 어디에서나 바깥을 감상할 수 있게 개방감을 충분히 확보했고, 내부 공간의 높이를 다르게 조절했으며, 테라스를 길게 설치했다. 1m 이상 쌓이는 눈과 상상을 초월한 강풍과 추위에 견딜 수 있는 견고한 구조도 갖췄다. 외부 마감재는 목재로 처리하되, 실제 구조는 철골조로 설계됐다. 이런 배려 덕분에 휴게소 내부에서 겨울 내내 설악의 설경과 나뭇가지들이 눈꽃을 입은 상고대를 바로 볼 수 있다.

    겨울 한계령휴게소의 백미는 일출이다. 동해와 설악산 사이에서 붉게 타오르는 일출은 운무(雲霧)에 가려 자주 그 자태를 보여주진 않지만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바다에서 치솟아 오른 태양은 구름에 반사돼 성난 파도처럼 검붉은 하늘에 수를 놓는다. 곧이어 설악의 그림자가 검게 드리우며 더욱 붉게 타오른다. 정유년 닭의 해엔 모두들 붉은 닭벼슬 같은 한계령의 일출처럼 눈부신 한 해를 보내길 기원한다.



    이 상 근
    ● 서강대 경영학과 졸업, 미국 네브래스카-링컨대 박사(경영학)
    ● 한국국토정보공사 비상임 이사, 대우조선 감사위원장 역임
    ● 現 서강대 경영학부 교수, 한국공정거래학회 창립이사, 한국언론진흥재단 기금관리위원, 국가미래연구원 연구위원
    ● 저서 및 역서 : ‘경영정보시스템론’ ‘경영정보시스템’ ‘전자상거래’ ‘조직의 변화를 리드하는 빅 아이디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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