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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 교수의 비유로 설득하라

그리스 비극이 ‘문학의 여왕’ 된 비밀

‘오이디푸스 렉스’와 카타르시스

  •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baech@snu.ac.kr

그리스 비극이 ‘문학의 여왕’ 된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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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의 구조를 다룬 책 ‘시학’에서 ‘오이디푸스 렉스’를 자세히 다룬다. 그는 ‘오이디푸스 렉스’에서 다른 비극과 불가항력적인 자연재해가 야기하는 끔찍한 사건들을 비교한다. 그는 우리를 일깨우는 역설로 설명한다. 만일 내가 방금 ‘오이디푸스 렉스’ 연극을 보고 나왔다고 가정해보자. 어떤 사람이 내게 “연극이 재미있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연극의 내용이 극단적이며 내 삶의 원칙인 도덕과 윤리를 파괴하기 때문에 불편했습니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사실은 불편함을 넘어 혐오스럽습니다. 당신이 재미를 느끼길 원한다면, 다음엔 투우 경기장에 가보십시오.”

비극은 사실 비극이 다루는 주제나 인물에 관한 내용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비극에서 중요한 점은 비극의 내용이 아니라 비극에 대한 관객의 반응이다.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심미적인 쾌감을 주는 것은 무엇이 표현됐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표현됐는가, 즉 ‘플롯(plot)’이다. 우리가 비극에서 즐기는 것은 폭력, 살인, 근친상간과 같은 관행적인 사건들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재현됐는지다. 비극의 내용이 오감을 통해 이것을 본 인간에게  전달돼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드러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미메시스(mimesis)’ 즉 ‘흉내’라고 정의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이디푸스 렉스’와 같은 연극을 비극으로 만드는 요소를 설명한다. 비극에는 ‘사고’ 즉 갑자기 일어나는 예상하지 못한 내용이 없다. 비극이 진행되면서, 신탁이나 점쟁이가 등장해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미리 암시한다. 비극에 나오는 인물과 사건들은 이미 예견된 내용이다. 연극이 진행되면서, 그 당시엔 볼 수 없지만, 나중에 그 사건의 연유를 깨닫는다. 우리가 비극에서 보는 사건들은 “필연적이고 가능한” 일들이다. 비극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반드시 일어나야 할 사건들이다. 그러나 실제로 일어나게 될 사건들은 너무 끔찍하다. 주인공인 신탁이나 점쟁이가 예언한 내용의 화신이다.

비극의 주인공은 숭고한 인격을 지닌 귀족이나 왕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나 여성이 비극 작품의 주인공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이오카스테 왕비가 목을 매는 장면이나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핀으로 찌르는 장면은 무대에서 재현하지 않는다. 비극에서 중요한 내용은 주인공의 결함으로 인한 사건의 결과다.



프랑스 극작가 장 아누이(Jean Anouilh·1910~1987)는 소포클레스의 다른 작품 ‘안티고네’를 각색해 무대에 올렸다. 그는 ‘안티고네’의 구성을 ‘기계’라고 표현했다. 이 비극 작품의 등장인물, 대화 내용, 사건의 전개와 결말은 모두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움직이는 스위스 시계와도 같다. 스위스 시계의 시침, 분침, 초침처럼 비극 작품을 한순간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무엇이 비극적인 인간을 만드는가.



6. 하마르티아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원동력을 주인공의 성격에서 찾았다. 주인공의 어떤 경향이 모든 사건을 촉발하고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단초라는 것이다. 그는 이 단초를 그리스어로 ‘하마르티아(hamartia)’라고 불렀다.

‘하마르티아’의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화살이 과녁을 맞히지 못하고 빗나가다’ ‘길을 잃고 헤매다’이다. 하마르티아는 주인공이 지닌 성격으로, 행운을 불운으로 악화시키는 주인공의 흠이다. 이 흠의 원인은 생각이 미치지 못한 지적 한계인 무식, 순간적 판단의 실수, 자신의 고유한 성격에서 나오는 실수이자 죄(罪)다. 하마르티아는 비극적인 결말을 필연적으로 야기하는 주인공의 내적인 에토스(ethos)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분노를 참지 못한 나머지 갈림길에서 ‘낯선 자’인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다. 이것이 오이디푸스의 하마르티아다. 그의 판단 실수는 비극이라는 커다란 기계를 작동시킨다. 마치 브레이크 페달이 고장 나 절벽 아래로 떨어지게 유도한 자동차의 결함과 같은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하마르티아 탓에 파국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는 관객들은 무대 위의 오이디푸스를 자신과 동일시하며 공포와 연민을 동시에 느낀다.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사건들과는 달리, 비극에서는 관객들이 비극의 개연성으로부터 충격을 받는다. 자신도 모르게 오이디푸스처럼 괴로워하고 울기도 한다.



7. 카타르시스

관객은 자신이 주인공과 같은 비극을 맞이할 수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그런 비극적인 오이디푸스를 보고 연민을 느끼기도 한다. 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관객의 감정을 ‘조산(早産)으로 낳은 아기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산모의 감정’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공포와 연민을 느낀 관객이 마침내 도달하는 감정적 평원을 ‘카타르시스’라고 일컫는다.

카타르시스를 번역할 만한 적당한 단어는 없다. 우리가 지금 막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나 ‘오이디푸스 렉스’ 비극을 관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상상해보자. 우리는 암울하고 침잠하다. 무대 위에서 일어난 사건이 너무 끔찍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상하리만큼 감정적으로 고양되고 평온해져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평온한 상태, 즉 그 끔찍한 사건이 적어도 이 시간에 내게 일어나진 않으리라는 안도감을 카타르시스라고 말한다.

그리스어 ‘카타르시스’는 보통 ‘정화’라고 번역된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의미는 ‘공포라는 감정에서 벗어나 마음속에서 그것이 제거된 상태’다. 그것은 마치 몸속에서 불순물을 빼내기 위해 약을 먹고 그 불순물을 제거한 후 갖는 안도감이다.

소포클레스가 ‘오이디푸스 렉스’를 무대에 올린 지 2500년이 지났지만, 오늘날 우리도 그 작품을 보고 나면 똑같은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이건 마술이다. ‘오이디푸스 렉스’에는, 아테네에 우뚝 서 있는 파르테논 신전이나 미켈란젤로의 시스틴 성당 성화처럼, 우리 안에 존재하지만 우리가 알지 못한 심연에서 샘솟는 순수한 눈물, 바로 그것을 선사하는 숭고한 아름다움이 있다. 인간의 지식이 기하급수적으로 방대하게 늘어나고 있지만, 자신을 찾아보거나 생각해본 적 없는 우리에게 이 작품은 ‘나는 누구인가’ ‘무엇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가’를 고민하게 만든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대로 비극은 인간의 가장 숭고한 예술인 것 같다.



그리스 비극이  ‘문학의 여왕’ 된 비밀
배 철 현

고대 오리엔트 언어와 문명에 매료돼 미국 하버드대에서 고전문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미래혁신학교 건명원에서도 가르친다. 최근 저서로는 ‘신의 위대한 질문’ ‘인간의 위대한 질문’이 있다.





신동아 2016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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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baech@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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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비극이 ‘문학의 여왕’ 된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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