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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 교수의 비유로 설득하라

그럴듯한 세계와 있는 그대로의 세계

플라톤의 알레고리

  •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baech@snu.ac.kr

그럴듯한 세계와 있는 그대로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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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의 변명’

우리는 도덕적이며 양심적으로 행동해야 하는가. 그런 행동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가, 아니면 주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고대 그리스로 떠나보자.

고대 그리스 철학자이자 서양 철학의 근간을 마련한 플라톤(기원전 427~347)은 ‘국가’라는 책을 저술했다. 서양의 지식인들은 플라톤이 남긴 지적인 유산을 이해해 사고의 틀로 삼았다. 20세기 철학자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는 “서양 철학사는 플라톤에 대한 각주일 뿐”이라고 단호하게 주장했다.

플라톤은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몇몇 삼촌은 정치개혁을 주장하는 혁명에 가담하기도 했다. 그 무렵 플라톤과 같이 야심만만한 젊은이는 아테네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수련했다. 현대 미국의 케네디·부시·클린턴 정치 가문처럼, 그 구성원들은 어려서부터 자신이 속한 국가의 리더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것이다. 플라톤 가문도 마찬가지였다.

플라톤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자신보다 40세 이상 많은 소크라테스(기원전 469~399) 문하에 들어간다. 당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가 구태의연한 과거의 관습에 얽매여 도덕적인 타락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살아 있는 목소리였다. 소나 말이 잠들지 않도록 몸에 붙어 지속적으로 물어뜯는 벌레인 ‘등에’의 역할을 그가 맡았다. 그는 아테네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자신이 해야 할 최선이 무엇인지 스스로 질문하라고 촉구했다. 그는 아테네를 지탱하는 원칙들에 대해 귀찮을 정도로 집요하게 묻는다.

보이지 않는 원칙



예컨대 아테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과 같은 건물을 건축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 단단한 석재와 목재, 그것을 옮기는 운송기구와 노동자, 신전을 지을 땅의 선택 등 고려해야 할 많은 가시적인 것이 있다. 어느 하나 소홀하게 다루면 지금까지 당당하고 품격 있게 서 있는 파르테논 신전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가시적인 것들보다 더욱 중요한 것들이 있다. 그것은 신전 건축을 위한 모든 자재가 견고하고 안전하게, 그리고 조화롭게 엮여 아름다운 모습을 자아낼 수 있도록 하는 보이지 않는 원칙이다. 바로 균형과 조화를 구축하는 수학(數學)이다.

어리석은 사람이나 사회는 건축 자재의 겉모습에 목매지만 지혜로운 사람이나 사회는 한발 더 나아가 그 자재를 배치하고 연결하는 원칙을 소중하게 여긴다. 이 원칙이 없다면 파르테논 신전을 건축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설령 건축했다 해도 금방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철학의 아버지’라는 칭송을 받던 소크라테스는 이 원칙을 알지도 못하고 무시하는 무지한 아테네 시민들에게 다가가 당혹스러운 질문을 던지며 교육했다. 이 원칙이란 정의, 진리, 본질, 우정, 사랑, 정직과 같은 것들이다. 이런 것들은 견고하고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수학 공식들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신봉하고 있는 것들이 자신의 생각인지 혹은 자신도 모르게 수용해서 믿고 있는 남의 ‘의견’인지 묻는다. 아테네는 이런 질문을 지속적으로 하는 소크라테스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기원전 399년 아테네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뒤 독배를 마시고 죽는다.

이 장면을 곁에서 본 자가 바로 플라톤이다. 서른 살의 플라톤은 스승이 아테네의 젊은이를 타락시키고 아테네 신들을 믿지 않고 이전에 없던 새로운 신을 신봉한다는 이유로 재판받는 과정을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는 책에서 자세히 기술했다. 이 책은 예수의 죽음을 묘사한 신약성서 복음서와 같다. 자신의 신념과 원칙을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은 위대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는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맞는 순간을 예술적으로 포착해 오늘날까지 영감을 주는 작품이 있다. 자크 루이 다비드가 1787년 그린 ‘소크라테스의 죽음’이다. 서양 미술사에서 미켈란젤로의 시스틴 성당 벽화에 견줄 만한 명작이다.

다비드는 프랑스 시민혁명(1789)이 일어날 것을 감지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는 혁명적인 예술작품을 남기고 싶었다. 그는 삶의 원칙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소크라테스를 묘사했다. 그는 이 작품을 그리기 전에 철학자들과 시인들의 작품에서 영감의 단초를 감지했다. 다비드는 플라톤의 저작들 특히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파이돈’을 깊이 읽고 철학자 드니 디드로가 연구한 극적인 시작(詩作)과 시인 앙드레 셰니에의 시에 심취했다.



당시 프랑스에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처럼, 신고전주의 예술이 등장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을 다시 발견해 프랑스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지적인 운동이 신고전주의다. 다비드는 신고전주의 감성을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통해 가장 완벽하게 표현했다.

그림을 자세히 보자.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생명을 끝내는 독배(毒杯)를 받지만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는 왼손 검지를 위로 치켜올린다. 그렇다고 하늘에 대고 영생을 달라고 기원하지도 않는다. 하늘도 보지 않는다. 자신을 둘러싼 지인들도 보지 않는다. 이 그림을 쳐다보는 나를 응시하지도 않는다. 화면 오른쪽 아래 허공을 향한 그의 눈길은 자신이 정한 길을 초연하게 가겠다는 단호한 선언으로 읽힌다. 인간의 모든 것을 앗아가버리는 최후의 심판자이며 우승자인 죽음도 그의 의연함 앞에 초라해 보인다.

소크라테스의 왼쪽 허벅지를 그의 친구인 크리토가 부여잡으려 한다. 그는 “감옥의 간수를 매수했으니 지금이라도 도망치자”고 말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 다비드는 설득되지 않는 소크라테스의 결심을 움켜쥐지 않는 크리토의 오른손과 소크라테스를 응시하는 크리토의 눈으로 표현했다. 플라톤은 침대 왼편에 허리를 대고 의자에 앉아 깊은 시름에 잠겨 있다. 왼쪽 뒤로는 그의 가족들이 떠나는 모습이 보인다.

이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과 유사하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십자가에서 처형당하기 전에 제자들에 둘러싸여 식사하는 모습을 그린 ‘최후의 만찬’과 그림의 구성이나 주제가 깊이 연관된다. 소크라테스나 예수는 자신이 깨달은 삶의 소중한 원칙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위인들이다.



 ‘국가’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죽은 후 교육에 헌신한다. 기원전 385년 서양에서 첫 번째 대학이라고 할 수 있는 아카데미(Academy)가 건립됐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대 아테네 사상가들을 훈련시켰다. 플라톤의 ‘국가’는 그의 사상을 집대성한 저서로 국가와 공동체, 그 안에서 생존하며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인간의 인생 교과서다. 고대 그리스어로 기록된 ‘국가’의 파피루스가 이집트의 옥시륀쿠스(Oxyrhynchus)라는 지역에서 발굴됐다. 이 문헌은 기원후 3세기 것으로 추정된다.

‘국가’는 플라톤이 저술한 약 30편의 대화 글 중 하나다. 그의 글쓰기는 철학적 논증 형식이 아니라 대화 형식이다. 대화는 자신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전달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자신의 이성을 바탕으로 상대방의 심리 상태를 파악하고 전달하는, 언어의 형식을 빌린 사적인 의견이다. 그 의견을 받는 사람은 그 사람의 말에 동의하거나, 혹은 첨가할 말이나 반박할 말, 혹은 더 나은 제안을 건넬 수 있다.

대화는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주장에 근거나 설득력이 부족하면 그 즉시 수정하는 연습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로부터 ‘엔렌쿠스(enlenchus)’라는 대화 방법을 배워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남겼다. 대화 형식으로 상상 가능한 모든 철학적인 주제들, 예를 들어 지식의 본질, 진리의 근거, 사랑의 내용, 우정의 중요성을 다뤘다.

‘국가’는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이 자신이 가진 소질을 최대한 신장해 행복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 ‘국가’는 10권으로 구성돼 있다. ‘국가’ 2권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형제들인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투스가 등장한다. 처음에는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이, 나중에는 플라톤과 아데이만투스가 대화한다. 이 대화 내용은 지난 2500년 동안 서구 사회의 리더가 되려는 사람들의 묵상 거리였다.



정의의 본질

플라톤의 형제 글라우콘은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대답한다. 대화 내용은 정의(正義)의 본질과 기원에 대한 문제다. 글라우콘은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정의롭게 행동한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이 정의로운 행동을 하려는 이유는 명성을 얻기 위해서다. 그리고 사람들은 정의롭게 행동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하는 일엔 세 종류의 가치가 있다. 첫째는 그 일 자체가 목적이 되는 가치가 내재한 것들이다. 소크라테스는 기쁨,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쾌락과 같은 것들을 예로 든다. 이러한 것들은 다른 어떤 것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바로 목적이다.

둘째는 수단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다른 것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돈이 가장 적절한 예다. 돈은 가치가 있지만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 돈은 유용하고 선한 일에 사용하기 위해 존재한다. 또 다른 예는 군대다. 군대는 자신이 속한 국가를 다른 나라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주는 기능을 한다. 군대가 목적이 된다면, 전쟁을 일삼는 악을 행하게 된다.

셋째는 수단이자 동시에 목적으로서 가치 있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건강, 배움, 지식은 수단이자 목적이 된다. 글라우콘은 소크라테스에게 ‘정의’는 이 세 가지 가치 중에 어디에 속하는지 묻는다.

글라우콘은 상상력을 동원해 알레고리로 소크라테스에게 묻는다. 어떤 사람이 도덕적으로 행동한다면 그는 도덕적으로 행동한다고 사람들에게 칭송받을 것이다. 반대로 그가 비도덕적으로 행동하면 비도덕적인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비도덕적인 행위를 아무도 인식할 수 없고 그의 명성도 유지된다면 그는 어떻게 행동할까. 그의 비도덕적인 행위가 들키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에게 부와 권력, 명예를 가져다준다면 그는 어떻게 행동할까. 글라우콘은 알레고리(우화)로 이것을 설명한다.


‘기게스의 반지’

글라우콘은 ‘국가’ 2권 359b~360b에서 사람들이 정의가 가치 있어서 소중히 생각하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비유로 설명한다.



정의를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들은 불의한 행동이 가져올 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정의로운 사람이나 불의한 사람 모두 자신의 ‘욕망’(고대 그리스어로 ‘에피수미아’)이 이끄는 대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본성대로 정의롭게 행동하는 정의로운 사람이 있고 불의를 행하는 불의한 사람이 있습니다.

한 목동이 소아시아에 있는 리디아의 왕을 위해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가 양에게 풀을 먹이고 있을 때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더니 지진이 일어나 땅이 갈라져 구멍이 났습니다. 목동은 이것을 보고 의아하게 여겨 그 동굴 아래로 내려가 진귀한 것을 발견합니다. 가운데가 비어 있는 청동으로 만든 말이 있었습니다. 그 안을 살펴보니 시체가 하나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보다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무런 옷을 입지 않았지만 손가락엔 금반지를 끼고 있었습니다. 목동은 그 반지를 빼 자신의 손에 끼고 동굴을 나왔습니다.

목동은 가축의 상태를 왕에게 보고하는 월례모임에 참가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왕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앉아 있는 동안 우연히 금반지에 있는 고리를 안쪽으로 돌리니 자신의 몸이 사라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를 볼 수 없어 사라진 목동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 목동이 돌아다니다가 반지 고리를 이번엔 바깥쪽으로 돌리니 다시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그는 반지를 안으로 돌리면 자신의 모습이 사라지고 바깥으로 돌리면 다시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는 당장 자신이 왕의 사신이 되도록 변장해 왕비를 유혹하고 그녀의 도움으로 왕을 살해한 뒤 스스로 왕이 됩니다.



글라우콘이 말한 ‘기게스의 반지’라는 알레고리는 ‘국가’ 7권에 등장하는 ‘동굴의 비유’, 그리고 10권에 등장하는 ‘팜필리아인 어(Er, 죽은 지 열흘 만에 되살아난 용사)의 신화’와 연결된다. 기게스의 반지 이야기는 ‘동굴의 비유’에 등장하는 참된 빛을 찾아 동굴 밖으로 나오는 이야기와 정반대 이야기다. ‘기게스의 반지’에 등장한 목동은 대부분의 시간을 산골에서 보내는 이로, 도시에서 사회적인 의무가 부여된 인간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깨달음을 얻고 동굴 밖으로 나와 태양으로 나가는 도덕적 의무가 있는 깨어 있는 자가 아니라, 양떼를 치던 장소에서 우연히 지진이 일어나 지하 동굴로 내려간 범부다. 그는 호기심 때문에 갈라진 틈으로 생긴 동굴로 들어간다.



허장성세의 화신

목동은 동굴 안에서 ‘신기한 것들’(사우마산타, thaumasanta)을 발견한다. 말을 찾아낸 것이다. 그 말은 큰 사람을 배 안에 넣을 정도로 크다. 플라톤에게 말은 인간의 두 가지 영혼을 지칭하는 상징이다.

플라톤의 다른 저작 ‘파이두루스’에는 날개 달린 전차가 등장한다. 이 전차에 등장하는 두 필의 말은 인간의 영혼 가운데 낮은 영역을 상징한다. 목동이 발견한 한 마리 말은 움직일 수 없고 변화 가능성이 없는 물질적인 영혼의 상징으로 그 안에 있는 시체와 같다. 인간의 사체를 지닌 말은 트로이 목마에 등장하는 말처럼 거짓, 속임수, 전쟁을 의미한다. 그것은 사회의 명성만을 위해 행동하는, 체면과 외식(外飾)만을 강조하는 사회에 사는, 영혼의 아래 단계를 상징한다.

인간이 안주하려는 말은 오로지 경쟁과 전쟁에서의 승리에 도취한 나머지 자신들의 목표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의 민낯이다. 말 안에 있는 인간의 사체는 허장성세(虛張聲勢)의 화신인 인간의 가식이다. 보통 사람의 몸피보다 커 보이지만 생명이 없는 사체이며, 그 안엔 이성(로고스, logos)이나 원칙이 없다. 인간은 세상을 과학의 눈으로 조금씩 알아가면서 우주의 원칙을 알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스스로를 위대하게 생각하지만 착각일 뿐이다. 우주를 하나로 꿰뚫는 원칙이나 정신은 설명할 수 없다. 목동은 동굴 안, 특히 말 뱃속에서는 자신의 위치를 알려줄 빛의 존재를 알 수 없다.

목동이 시체에서 발견한 유일한 것은 손에 끼워진 금반지(다크툴리오, daktulion)뿐이다. 이 반지는 사람들이 자신의 권위를 인위적으로 뽐내기 위해 만든 외적인 부의 표시다. 그런 표시가 죽은 자에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 반지는 왕이 자신의 아들인 왕자에게 주는 문명의 연결고리다. 사람들은 이 반지가 신적인 기원을 지니고 후대인들에게 보편적인 지식과 과학적인 사고를 전달해준다고 믿었지만,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아름다움과 추함, 용기와 비겁과 같은 중요한 가치를 구별할 수 없었다. 결국은 리디아라는 왕의 조상 반지가 우연히 자격도 없는 목동의 손에 끼워졌다. 그는 그 반지로 자신의 동료뿐만 아니라 왕까지도 농락하고 스스로 왕이 됐다.



책임을 회피하는 인간

목동이 반지의 위력을 아는 과정도 우연이었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있는 속임수의 장치를 손에 넣었다. 그는 반지를 조작해 심지어는 그림자도 남기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평가나 명성에 영향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명성을 조작하고 권력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 그는 더 이상 인간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더 이상 책임지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가시적인 법 안에서 ‘책임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만 하면 된다.

리디아는 금과 사치의 상징이다. 헤로도투스의 ‘역사’에서 기게스는 목동이 아니라 왕의 근위대장이다. 왕은 자신의 아내인 왕비의 아름다움을 뽐내기 위해 기게스에게 왕비의 나신을 훔쳐보게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왕비는 자신을 훔쳐보는 기게스를 발견하고 아무렇지 않게 방을 나온다. 왕비는 그다음 날 기게스를 불러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자신을 훔쳐본 죄를 지고 죽임을 당하든지, 아니면 왕을 죽이고 왕이 되어 자신과 결혼하든지. 기게스는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이 제안을 받아들여 왕비의 도움으로 들키지 않게 왕실로 들어가 왕을 살해한다.

플라톤은 헤로도투스의 이야기를 개작해 철학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헤로도투스의 리디아왕은 플라톤의 알레고리에서는 세상의 왕이 되고, 그의 아름다운 여왕은 기게스가 흠모하는 세상의 권력이다. 플라톤은 이 이야기를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인간에 관한 철학적인 이야기로 전환한다. 그는 이 세상의 보통 사람들이 안주하고 탐닉하는 ‘그럴듯한 세계’와 자신이 처한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대비시킨다.

글라우콘은 ‘그럴듯한 세계’에 대해 소크라테스에게 묻는다. 소크라테스는 뭐라고 대답했을까. 정의는 남들의 평가와는 상관없이 지켜져야 하는 원칙인가. 정의는 한 국가의 근간이 되는 주춧돌인가.



배 철 현
고대 오리엔트 언어와 문명에 매료돼 미국 하버드대에서 고전문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미래혁신학교 건명원에서도 가르친다. 최근 저서로는 ‘신의 위대한 질문’ ‘인간의 위대한 질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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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baech@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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